‘서울·인천지역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중 서울지역 희생 사례 1950년 6월의 서울에 국가는 없었다

1950년 파괴된 한강 인도교.

1950년 파괴된 한강 인도교.

도강파는 애국자, 비도강파는 역적

1950년 6월 26일, 인민군이 서울 미아리 일대를 공격하기 시작해 28일 서울 방어선이 무너졌다. 오전 2시 30분. 어둠 속에서 아무런 예고 없이 한강대교가 폭파되자 한강 이북의 국군 병력과 주민들의 발이 묶였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28일 서울이 수복되자, 국군과 경찰은 먼저 치안 확보에 나섰다. 그런데 부역자 처벌 문제에 있어 전쟁이 나자마자 서둘러 한강을 건너 피난한 사람들은 도강파(渡江派), 미처 피난을 못 했거나 피난길을 나섰더라도 한강 다리가 끊겨 피난을 못 한 사람은 비도강파(非渡江派)로 구분되었다.

도강파는 애국자, 비도강파는 무조건 역적 취급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잔류한 서울 시민들은 환도할 때 이승만 정권에게 실책에 대해 해명을 요구하는 등 정책 쇄신을 기대했다. 그러나 정부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인도교를 폭파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책임을 물어 사형을 집행했다. 정부는 사태 수습에 대한 확고한 방침을 마련하지 못한 채 일부 기관에서 공권력을 남용해 무리하게 부역혐의자를 처벌해 민심이 크게 나빠졌다.

9·28수복을 전후해 서울시 경찰국 경찰과 서울 탈환전에 참전했던 군이 부역혐의자 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희생 사건이 다수 발생했다. 당시 서울 수복에 참전했던 해병대·육군 17연대와 서울시 경찰국 경찰들은 그들이 관할하고 있던 주둔 지역에서 과거에 국민보도연맹원이거나 ‘요시찰인’, 부역혐의가 의심되는 서울 잔류 시민들을 색출해 군 주둔지나 해당 경찰서로 연행했다가 살해했다.

국민학교 1학년생이 부모를 잃고 큰집과 친구 집을 전전하며…

진실규명 대상자 최○두는 해방 전부터 종로경찰서 뒤편 이층집에서 흥아제약을 운영하면서 여운형 등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일이 있었는데, 전쟁이 나자 피난을 가지 못한 채 서울에 남아 제약업계 동료인 양○○ 등 7~8명과 함께 차출돼 제약 관련 업무를 보았다.

수복 직후인 어느 날 덕수국민학교 1학년이던 신청인 최〇환(8세)이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버지 최○두가 군인들에게 연행돼 갔다며 이웃 주민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연행된 다음 날 새벽 어머니도 안방으로 워커를 신고 들어온 군인들에게 연행된 사실을 당시 집안일을 도와주던 친척에게서 들었다.

부모를 잃고 충남 청양의 큰집에서 신세를 지던 최○한은 휴전 직후인 1953년경 서울로 올라와 자신의 친구 양○철의 집에서 1년간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양○철은 최○한에게 “수복 직후 우리 아버지도 군인들에게 연행되었는데 돈을 주고 풀려나왔다.”라며 안타깝다고 몇 번이나 말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양○철의 아버지도 최○두와 함께 제약업계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퇴근길에 연행된 경성전기 직원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성(32세)이 경성전기(경전, 현재 한국전력)에 다니고 있었는데 9·28수복 직후 동대문 사업장에서 일을 마치고 나오다가 연행돼 뚝섬 건너 상원창고에 구금됐다가 살해된 것으로 판단했다.

조○성 아내 박○임(25세)은 9·28수복 직후 1개 소대의 무장한 군인들이 성수동 소재 사택을 수색하러 와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나오게 한 후 집마다 뒤진 일이 있었다고 했다. 당일 남편 조○성은 집에 없어 연행되지 않았지만 며칠 후 소식이 없던 남편이 뚝섬 건너 상원창고에 구금돼 있다는 소식에 면회하러 갔는데 그곳에 있는 남편은 두려운 눈빛으로 “제발 살려달라”며 호소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경상도로 피신했다가 생존한 남편 회사 동료의 부친은 “○성이도 그때 잠시 피했으면 될 텐데 당시 피했던 사람들은 다 살았다”며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했다. 또 신청인 조○호(9세)는 외삼촌 박○재가 “너희 아버지는 보도연맹에 가입했기 때문에 조사를 받으러 간 것”이라며 죽기 얼마 전 유언처럼 말했다고 했다.

경성전기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도 ‘직맹’의 주축이었던 까닭에 1949년 국민보도연맹 조직 당시 서울을 비롯한 대부분의 지부 구성원들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됐을 것으로 판단된다. 경성전기(경전)의 부역자 처리와 관련해 미군이 노획한 북한 측 문서에는 “1950년 9월 30일, 경전 종업원들이 부역자라 해 체포 구금됐다가 직맹위원장 최○복 등 30여 명이 고문 치사했으며, 10월 1일 동대문 경전에서도 부역자라 해서 48명의 노동자가 사설 테러단에 의해 불법 구금된 후 무수한 린치를 당해 빈사 상태에 이르렀는데 어디론가 실려가 처분되었다”라고 기술돼 9·28수복 직후 진실규명 대상자가 근무하던 경성전기에서 민간인 희생 사건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은행에 취직하니 경찰이 찾아왔다

진실규명 대상자 문○흡(36세)은 인민군에게 밥을 해주었다는 혐의로 서울 탈환전에 참전했던 군경에게 추석 당일인 9월 26일경 연행돼 군경에 의해 살해되었다.
진실규명 대상자의 아들 문○재(10세)의 진술에 따르면, 1950년 9월 26일경 아버지 문○흡이 양손을 머리 뒤로한 채 군인 또는 경찰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2명과 함께 당시 마포구 현석리 소재 집에 잠시 들렀다가 그 길로 연행돼 갔다고 했다. 당시 주위에서는 아버지에게 도망가라고 했지만 “내가 무슨 잘못이 있냐”며 그대로 있다가 연행됐다고 했다. 당시 이웃에 살던 노○수(10세)와 김○옥(25세)은 문○흡이 씩씩하고 힘도 세고 주장이 강했던 사람이라며, 부역혐의로 연행된 후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훗날 문○재가 1968년경 기업은행에 입사할 당시 경찰이 찾아와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냐?”며 의아해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진실규명 대상자가 거주했던 마포구 현석동 관할 경찰서인 마포경찰서의 부역자 처리와 관련해 미군이 노획한 북한 측 문서에는 “서울 마포경찰서 경찰들은 추석 다음 날인 9월 27일부터 10월 15일경까지 매일 시체를 트럭으로 실어다 한강에 던졌는데 이런 시체는 10월 6일까지 사범학교 운동장에도 산적해 있었다”고 기술돼 9·28수복 직후 마포에서 민간인 희생 사건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탄흔이 남아 있는 한강대교.

탄흔이 남아 있는 한강대교.

의용군으로 차출됐다가 같은 대학 우익 학생의 고발로 희생

진실규명 대상자 이○진(26세)은 동국대학교 재학생으로 전쟁이 나자 의용군으로 차출됐는데 9·28수복 직후 서울로 돌아왔다가 같은 대학 내 우익 학생의 고발로 서울시가지 탈환전에 참전했던 군경에 의해 연행됐다가 고문으로 살해된 채 서울시 중구 소재 장충단 인근 야산에 암매장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참고인 김○호(19세)가 사건 당시 철도경찰대 인사계장이었던 외삼촌 이○기로부터 들어서 알게 되었다. 이○기는 경찰망을 통해 수소문한 결과, 이○진의 시신이 장충단 인근 남산 기슭에 매장돼 있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육군 대위 최○○은 “1950년 9·28수복을 전후하여 육군 17연대 1대대 3중대가 장충단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부역자들을 색출하여 중대장 임의로 ‘직결처분’했다.”는 증언(보고서 510쪽)을 했는데 이는 이○진을 비롯한 다수의 비무장민간인들이 제17연대 주둔지(현 서울시 중구 소재 신라호텔) 인근 야산인 장충단으로 연행된 후 불법적으로 살해된 사실을 보여준다.

국민을 버리고 갔던 군대의 ‘직결처분권’

9·28수복 이후 서울지역에서 일어난 민간인 희생사건은 국민을 버리고 갔던 국가가 다시 돌아와서 국민을 부역자로 몰아 살해한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군이 행사한 ‘직결처분권’은 1950년 7월 25일 총참모장 정일권의 이름으로 공포된 작전훈령 제12호로 전장에서 상관의 명령 없이 이탈하는 군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를 민간인을 살해하는 근거로 활용한 것이다. 1951년 7월 10일 ‘직결처분권’은 그 위법성이 문제되어 폐지되었다.
사건명 서울·인천지역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서울·인천지역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1기)
지역 서울과 인천지역 일대
사건 발생일 1949년부터 1951년 2월까지
진실규명 신청인 김〇완 등 16명
진실규명 결정일 2010년 6월 8일
진실규명 인원 37명(조사과정에서 인지된 62명 포함한 희생자: 최소 99명)
결정사안 한국전쟁 발발을 전후한 1949년부터 1951년 2월까지 서울과 인천지역 일대에서 국민보도연맹원, ‘요시찰인’, 부역혐의자라는 이유로 최소 99명의 비무장 민간인이 군경에 의해 희생된 사실을 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덕적도·영흥도에서 작전을 수행했던 해군 육전대와 해군 첩보대, 인천과 서울지역 탈환에 참전했던 해병대와 육군 17연대 군인과 경인 군검경합동수사본부와 그 지휘하에 있던 경기도 경찰국, 서울시 경찰국 경찰들.
참고자료 사진: 서울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