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금정굴 사건 황금 우물 속으로 떨어지다

1993년 9월 25일 오후 2시경 경기 고양시 탄현동 고봉산 기슭에서 금정굴양민희생자유족회와 진상규명위원회 회원, 고 백기완 선생, 제정구 국회의원 등 1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43주기(1회) 금정굴양민희생자위령제가 열렸다.

위령제에 참석한 유족들은 “1950년 9·28수복 후 조직된 치안대와 경찰, 그에 더해 인민군들에게 가족을 희생당한 일부 주민이 합세해 인민군 점령 기간의 좌익 활동자와 부역자 및 그들의 가족들을 떼죽음시켰다”며 “이들 희생자의 주검은 대부분 이곳 금정굴에 묻혔다”고 증언했다. 금정굴은 일제 말기에 금광 개발을 위해 50m 깊이로 뚫어놓고 방치한 굴인데 당시에는 흙으로 입구가 메워져 움푹 팬 구덩이만 남아 있었다.
1993년 첫 위령제 지낼 당시의 고양 금정굴 현장. >@금정굴평화인권재단

1993년 첫 위령제 지낼 당시의 고양 금정굴 현장.
@금정굴평화인권재단

1993년 금정굴 희생 현장에서 열린 첫 위령제 준비 모습 @금정굴평화인권재단

1993년 금정굴 희생 현장에서 열린 첫 위령제 준비 모습
@금정굴평화인권재단

1995년 9월 24일 유해발굴 모습. 금정굴 입구에 가로놓인 몇 개의 통나무에 의존해 흙을 자루에 담아 올렸다. @금정굴평화인권재단

1995년 9월 24일 유해발굴 모습. 금정굴 입구에 가로놓인 몇 개의 통나무에 의존해 흙을 자루에 담아 올렸다.
@금정굴평화인권재단

1995년 9월 30일 발굴된 유해. 발굴을 시작한 지 하루만에 다량의 유해가 나왔다. @금정굴평화인권재단

1995년 9월 30일 발굴된 유해. 발굴을 시작한 지 하루만에 다량의 유해가 나왔다.
@금정굴평화인권재단

첫 위령제가 열리고 2년 뒤인 1995년 9월 24일 45주기(3차) 합동위령제와 함께 유해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다. 발굴을 시작해 9월 28일까지 5m 정도 파 내려갔으나 아직 유골은 출토되지 않았다. 유족들 손에서 손으로 흙을 퍼 나르다가 굴이 깊어지면서 입구에 가로 걸친 통나무에 합판을 올리고 그 위에서 마대에 담긴 흙을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다. 자칫 안전사고가 날 위험도 있었다.

그런데 더 큰 난관은 따로 있었다. 발굴 이튿날 고양시청 녹지과 공익요원들에 의해 발굴 장비를 빼앗기고 작업을 중지당한 것이다. 유족들은 굴하지 않고 장비를 구해 다음 날부터 발굴을 재개했다. 9월 29일, 조금씩 유골이 나오기 시작하자 MBC 등 언론이 다투어 보도했다. 이튿날인 9월 30일에 희생자의 것으로 보이는 두개골 조각과 정강이뼈 등 유골과 머리카락, 신발 등 유품 70여 점이 발굴되었다. 이와 함께 몸을 묶은 것으로 보이는 전선줄과 총알 탄피 23점도 함께 발굴되었다. 비로소 금정굴 사건이 실제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 45년 만이었다.
1995년 9월 유골과 함께 총살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탄피와 탄두, 연행할 때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삐삐선이 출토되었다. 희생자의 수는 삐삐선의 수를 근거로 할 경우 최소 160명 이상, 탄피의 수를 근거로 할 경우 최소 171명 이상으로 판단된다. 유족의 주장에 따르면 희생자 서○욱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성상업중학교 교복 단추, 박○원의 도장, 이○희의 도장, 여성의 것으로 확인되는 댕기머리, 회중시계가 발굴되었다.

1995년 9월 유골과 함께 총살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탄피와 탄두, 연행할 때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삐삐선이 출토되었다.
희생자의 수는 삐삐선의 수를 근거로 할 경우 최소 160명 이상, 탄피의 수를 근거로 할 경우 최소 171명 이상으로 판단된다.
유족의 주장에 따르면 희생자 서○욱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성상업중학교 교복 단추, 박○원의 도장, 이○희의 도장, 여성의 것으로 확인되는 댕기머리, 회중시계가 발굴되었다.

1995년 10월 2일 발굴현황. 1995년 발굴된 유골 감정 결과로 본 희생자는 최소 153명으로 추정되었다. @금정굴인권평화재단

1995년 10월 2일 발굴현황. 1995년 발굴된 유골 감정 결과로 본 희생자는 최소 153명으로 추정되었다.
@금정굴인권평화재단

1995년 10월 13일 금정굴양민희생자유족회 회원 10여 명이 국회 앞에서 금정굴 사건 국회 진상조사단 구성을 요구하며, 유골 20여 구를 모시고 시위를 했다.  @금정굴인권평화재단

1995년 10월 13일 금정굴양민희생자유족회 회원 10여 명이 국회 앞에서 금정굴 사건 국회 진상조사단 구성을 요구하며, 유골 20여 구를 모시고 시위를 했다.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수복과 함께 활동 재개한 치안대와 태극단

인민군이 고양·파주지역을 점령했을 때는 전쟁 발발 3일 후인 1950년 6월 28일이었다. 인민군 치하에서 인민위원회 선거가 치러지고 토지개혁, 의용군 징집 등 점령정책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유엔군이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에 이어 20일 행주지역을, 28일경에는 일산지역을 수복했다.

유엔군 진주 소식이 들리자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잔류 국군, 경찰, 대한청년단 등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면·리 치안대 간부들은 대한청년단, 대동청년단 등 우익청년단체 소속원들이었다. 이들은 경찰을 보조해 부역혐의자들을 연행했다.

치안대는 경찰이 복귀하는 때에 맞추어 각 지서, 지서 인근의 이발소, 공회당, 마을의 큰 가옥 등에 사무실과 유치 시설을 차렸다. 1950년 10월 2일경부터 치안대가 희생자들을 본격적으로 연행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각 마을의 부역혐의자들을 1차로 연행해 감금하고, 고문과 취조를 했다.

치안대원 중에는 인공 치하에서 가족이 희생당한 유가족이 복수심으로, 일부 부역행위자들은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치안대 활동을 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치안대는 평소 알고 지내는 같은 마을 주민보다는 이웃 동네의 주민들을 연행했다.

고양지역 태극단은 수복 후 치안 활동에 참여했다. 이 조직에는 대한청년단원, 호국군, 전국학생연맹뿐 아니라 경찰과 잔류 국군까지 포함돼 있었다. 태극단 별동대장 이○○은 태극단보다 먼저 활동했던 치안대가 부역혐의자들을 잡아들였고, 태극단은 잡아 온 사람들을 지키는 보초를 선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증언
닫기
태극단원 김○○ 진술,
학살 현장에서 보초를 섰음, 2006. 12. 15.

“그 자체가 거기까지 인도해 준 것을 우리가 죽였다고 저놈들이 그러는데. 우리는 죽이지 않았어요. 경찰들이 죽였지. 우리가 뭐라고 죽여. 아무리 원수 같은 놈이라도. 우리는 끌고 가서 인도만 해주었다고.”

그러나 진실화해위원회는 자료와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일부 태극단원들이 부역혐의자를 연행하는 등 치안 활동을 한 것이 사실이라고 판단했다. 증언
닫기
김○○ 진술, 2006. 5. 30.

“9월 중순, 수색으로 돌아온 증언자는 태극단원들이 치안대 완장을 두르고 있는 것을 보고 태극단 수색지단의 간판을 정식으로 달자고 제의하여….”(이○○ 증언, 《고양시사(2005) 7권》, 410쪽.);“내 친구 아버지 신○○이라고 공부도 많이 하고 쟁쟁한 사람이 있었어. 태극단원들이 완장을 차고 신꼬봉들이 되어서 치안대에 있었지.”(이○○ 진술, 2006. 12. 12. 녹취록 7쪽.);“아버님 친구분들의 말씀입니다. 그 치안대원들이 (수색에서) 태극단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치안대와 태극단이 연행한 주민들은 각 지서나 파출소에서 고문을 동반한 선별 과정을 거쳐 고양경찰서로 이송돼 유치장이나 임시창고에 감금되었다. 그곳에서 주민들은 3~7일 동안 갇혀 있으면서 수차례 부역혐의를 받는 가족의 행방을 추궁당하며 증언
닫기
고양경찰서 유치장 담당 순경 정○○ 증언,
2006. 3. 12. 녹취.

“창고에 있던 사람들은 한 번 취조해, 두 번 취조해, 세 번 취조해. 꽝한 사람들(처형당한 사람들을 말함)은 다 취조당한 사람들이예요. … 교무과장하고 서장이 아니면 아무나 출입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수사과장, 교무과장, 서장이 죽인 거지요. 서장이나 수사과장, 교무과장이 ‘조사하겠습니다’하는데 도장을 찍어주어야 내 주지 아무나 내 주지 못해요. (그 명단을) 진명부라고 했어요.”

또다시 폭행과 고문을 받았다.

금정굴 학살

1950년 10월 9일 태극단 단원들에게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태극단원들 앞에서 태극단장 이○○이 훈시를 했다. “서장이 나한테 요구하기를 부역자들이 너무 많아서 여기에 가두어 둘 수 없어서 문산경찰서로 이동을 시켜야 하는데 경찰 병력이 약하니까 태극단이 호송을 맡아 달라고 한다.” 그날 태극단원들이 거의 다 부역혐의 주민을 호송하는 데 동원되었다.

같은 날, 고양경찰서에서 출발한 호송 행렬이 얼마쯤 가다가 문산이 아닌 봉일천 방향(금정굴 쪽)으로 향했다. 고양경찰서는 출발할 때부터 처형 의도를 숨기고 이송을 시작했다. 사건의 초기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은 재판을 받으러 가는 줄로만 알았고, 호송하는 태극단원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에 수 명 또는 수십 명씩 호송돼 가고는 소식이 끊어지는 일이 반복되었고, 유치장에 밥을 가져가도 “다른 곳으로 갔으니 더 이상 밥을 가져오지 마라”고 하는 걸 봐서 끌려 나간 사람들이 모두 희생됐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첫 희생이 발생한 10월 9일, 서○규는 아버지에게 도시락을 가져다 주려고 고양경찰서로 갔다가 아버지(45세), 큰형(24세), 셋째형(18세)이 간격을 두고 묶여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증언
닫기
서○규 진술. 2006. 5. 9. 진술조서 14~15쪽.

“10. 9. 오전 9시경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가지고 고양서로 가보니 그때 저와 같이 도시락을 가져온 가족들이 40~50여 명 있었는데, 고양서에서는 도시락을 받아 주지 않고 “창고 뒤편으로 가 있으라”하여 다른 가족들과 함께 있으며 재판은 받겠지만 설사 죽이기야 하겠느냐는 등의 말을 듣던 중 창고에서 군에서 사용하는 비비선(전화선)을 이용해 수용자들의 손목을 뒤로 묶은 후 연결하여 경찰, 치안대, 태극단 호위 하에 일산시장을 가로질러 봉일천 방향으로(금정굴 쪽) 가는 것을 보고는 저를 비롯하여 조사를 받으러 가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 일렬로 끌려가는 일행들 중 아버지, 큰형, 셋째 형이 간격을 두고 묶여 끌려가는 것을 보았는데 저는 무서워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행렬을 이끌고 가는 이들은 태극단원, 치안대원, 경찰들로 M1총을 메고 총 끝에 태극기를 묶었고 경찰들은 유엔 군복을 많이 입고 있었고, 치안대원들은 완장을 차고 있었다.

김○권(24세)이 끌려가는 모습을 본 부친 김○용은 행렬을 뒤따라가 금정굴 건너편 산인 고봉산 중턱(현재 고양시 중산마을 1단지 위치)에서 학살 현장을 목격했다. 그때 태극단원 이○○은 현장에서 보초를 서고, 증언
닫기
태극단원 이○○ 진술, 2006. 12. 12.

“그래서 금정굴에 갔는데, 나는 지리를 모르잖아. 산속으로. (진술인이 지도를 그리다) 문산 가려면 금촌 지나서 가야 하는데 얼마 가다가 이쪽으로 들어가더라고. 그래서 나는 문산 길이 이쪽으로 있는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렇게 산이 있고 이렇게 산이 있었어. 계곡으로 들어간 거야. 전부 앉혀놨어. 우리는 총 메고 있고. 겨냥할 것도 없지. 가지고 다니는 거니까. 경찰이 먼저 올라갔었던 가봐. 누가 내려오더니 경찰이 다섯 명 데리고 올라오라고. 태극단원들도 몇 올라오라고. 나도 쫓아 올라갔어. 태극단원도 몇 사람 올라갔어. (올라갔더니 경찰이 희생자들에게) 하나 둘 셋 넷 다섯. 꿇어 앉어. 그러더니 경찰관들이 등 뒤에서 쐈거든. 우리는 깜짝 놀랐거든. 문산으로 보낸다더니 여기서 사람을 죽이는구나. 그때 당시 빨갱이는 당연히 죽는 걸로 알았어. 그래서 여기서 살상을 다 해버렸다고. 현장까지 갔으니까. 내 눈깔로 봤으니까. 전화선. 밧줄로 엮어. 확실히는 모르겠어. 밧줄은 썩어 없겠지. 삐삐선만 남았겠지.”

김○○은 산 중턱에서 보초를 섰다.

이날 고양경찰서 임시유치창고에서 끌려 나온 40여 명의 주민들은 경찰과 태극단의 감시 아래 오전 11시경 황룡산 중턱의 금정굴에 이르렀다. 이미 경찰 몇 명이 먼저 와서 총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경찰은 주민들을 5명씩 끌고 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연행자들을 수직굴인 금정굴 벼랑에 입구를 바라보며 꿇어 앉힌 후 경찰 5명이 등 뒤에서 조준사격을 했다. 양손이 묶인 희생자들은 총격과 함께 17m 깊이의 굴 안으로 떨어졌다. 이때 5명 중 누구 하나가 총에 맞지 않았더라도 옆 사람과 함께 묶여 있었기에 굴속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들의 희생을 목격한 김○용은 시신이라도 수습하기 위해 오후 1시경에 마을 주민을 금정굴로 데리고 왔다. 이날 아버지가 희생된 이○순은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저는 그 소식을 듣고 억울하지만 아버님의 시신이나마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 즉시 작은아버님과 함께 반장을 보셨던 동네 어른들 7명과 금정굴로 달려갔습니다. 밧줄과 사다리, 마차 바를 가지고 갔습니다. 이때가 점심때 즈음이었습니다. 밧줄을 이용해서 작은아버지와 동네반장 어른, 두 분이 내려가셨습니다. 두 분이 내려가시자 ‘사람 살려’라는 소리를 듣고 보니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이○선 씨입니다. 우리가 꺼내주자마자 바로 고봉산 쪽으로 도망갔습니다.
나중에 이○선 씨 사위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이○선 씨는 뺨에 총알이 스치는 상처만 입었다고 하더군요. 작은아버지가 내려갔다 오시더니 그냥 피비린내 나고, 생명이 덜 끊어져 살려달라고 악을 쓰는 사람, 팔이 떨어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올라왔다고 합니다. 흙이 조금씩 덮여 있었고요. 비록 시간은 점심때였지만 굴 안은 캄캄했고 비좁아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어디 시신을 옮길 수도 없었어요.”(이○순 진술, 2006. 5. 25.)

금정굴 처형은 10월 9일 이후에도 몇 명, 수십 명 단위로 10월 31일까지 계속되다가 11월 2일에 중단되었다. 고양경찰서의 학살 행위를 알게 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개입했기 때문이다. 고양경찰서 유치장 담당 순경 정○○은 근무 중 합동수사본부에서 나온 수사관들이 경찰서에서 근무하던 경무주임 등 경찰관과 이○○ 등 치안대원들을 체포하는 장면을 목격했고, 바로 그 시점부터 금정굴에서의 총살이 중단됐다고 했다.
“(경찰서) 길 건너가 유치장이었는데 출입엄금이라고 되어 있는데도 CIC인가 어떤 자들이 와서 나를 보더니 들어간다는 거야. ‘새끼야, 비켜’ 하면서 들어가는 거야. 군경합동수사본부라고. 서장은 나가고 없었어. 이○○라고 치안대장 잡혀갔어. 빨갱이 한 사람이 빨갱이지, 자식이 빨갱이냐고 하면서 잡아갔어. 차로 하나 실고 갔어. 합동수사본부에서 잡아가지 않았으면 많이 죽었을 거야. 야간에 금정굴에서 빵하던 일도 더 이상 없었고 빼앗아 온 물건도 다 돌려주고….”(정○○ 진술, 2006. 3. 12.)
1954년 항공 지도로 본 사건 장소. 황룡산에서 고봉산으로 넘어가는 지점에 금정굴이 있다. 경의선 일산역 인근의 고양경찰서(고양시 일산동 620-3, 건물을 사진에서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사각형 위치 안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에서 금정굴 방향으로 도로가 나 있다. @국토정보맵

1954년 항공 지도로 본 사건 장소. 황룡산에서 고봉산으로 넘어가는 지점에 금정굴이 있다.
경의선 일산역 인근의 고양경찰서(고양시 일산동 620-3, 건물을 사진에서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사각형 위치 안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에서 금정굴 방향으로 도로가 나 있다. @국토정보맵

유족회의 진실규명 활동과 생명·평화를 향한 노력

당시 희생자들은 인민군 점령기의 소극적인 부역행위로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희생자들이 자신들의 부역행위가 처벌받을 만한 잘못이라고 판단했다면, 국군 수복 무렵에 진작에 도피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희생자들이 한 ‘부역행위’는 어떤 것이었을까? 진실화해위원회는 희생자 가운데 신평리 이○희는 인민위원회 자위대장 혐의(이 주장에 대해 유족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 일산리 이○린은 전쟁 전부터 맡아 하던 구장을 인민군 점령 아래에서도 계속한 혐의로, 장항동 박○식은 배급소 일을 한 혐의로, 덕이리 김○성은 인민위원회 일에 참여한 혐의로, 강매리 이○우는 자수했으나 인민위원장이었다는 이유로, 파주 야당리 채○동은 쌀을 걷어 준 일로, 백마 설○현은 마두리 인민위원장을 했다는 이유로, 내유리 김호연·김상국은 인민위원회 일을 한 혐의로 금정굴에서 희생당했음을 확인했다. 또 부역혐의를 하지 않았어도 그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희생당한 경우가 많았다.
2002년 금정굴 위령사업 시행 및 특별법 제정을 위한 활동 @금정굴평화인권재단

2002년 금정굴 위령사업 시행 및 특별법 제정을 위한 활동
@금정굴평화인권재단

금정굴 희생자의 유족들은 1993년 9월 8일 유족회를 구성한 뒤로 진상을 밝히기 위해 전국의 다른 유족회와 연대했다. 그 결실로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리고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진실규명 결정을 받아 마침내 금정굴 사건의 진상이 국가로부터 확인되었다. 유족회는 2013년 금정굴평화인권재단을 설립하고 금정굴 현장을 보존해 평화교육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사건명 고양 금정굴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고양 금정굴 사건〉(1기)
지역 경기도 고양지역과 파주 일부 지역
사건 발생일 1950년 10월 9일부터 31일까지
진실규명 신청인 김○성 외 46명
진실규명 결정일 2007년 6월 26일
진실규명 인원 김○동 등 68명(희생자: 고산돌 외 75명을 포함한 최소 153명 이상의 고양지역 주민들)
결정사안 고양경찰서장의 지휘 아래 1950년 10월 9일부터 31일까지 고양지역과 파주 일부지역에서 거주하던 고산돌 외 75명을 포함한 153명 이상 주민들이 부역혐의자 및 부역혐의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고양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에 의해 금정굴에서 불법적으로 집단총살당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고양경찰서(서장 이무영) 경찰관, 치안대, 태극단
참고자료 금정굴평화인권재단
신기철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 - 죽은 자들을 위한 산 자들의 이야기》, 인권평화연구소, 2018
신기철 《잊지 말자는 것뿐이야》, (재)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인권평화연구소, 2020
“지난 50년 부역자 낙인 5백 명 희생…어제 합동위령제”, 《한겨레》 1993. 9. 26자 기사
영상: KTV 국민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