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북부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 반대세력을 모두 죽이고 나면
새 세상이 오는 걸까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동동산. @디지털가평문화대전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동동산.
@디지털가평문화대전

38선 아래 경기도, 개전 초기부터 치열한 전쟁터

경기도는 한국전쟁 발발 초기부터 격렬한 전쟁터가 되었다. 38선과 가까운 데다 서울을 목표로 하는 인민군의 주요 공격선상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야지대가 많았던 경기도 일대는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에 의해 쉽사리 점령되었다. 인민군은 1950년 6월 25일 개전 당일 동두천, 개성 옹진반도, 연안을 점령했다. 같은 날 포천, 가평군을 점령했고 이어 6월 26일에는 의정부와 양주를, 6월 28일에는 강화와 김포, 파주, 고양을 점령하면서 경기 북부지역은 북한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경기도에 인민군이 진주한 뒤 치안조직이 수립되었다. 정치보위부를 중심으로 군 단위에서는 내무서가, 면리 단위에는 면 분주소와 리 자위대가 설치되었다.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청년동맹, 농민동맹, 여성동맹 등 정치·사회단체 역시 함께 조직됐다. 치안조직과 정치단체들은 북한의 남한점령 정책의 주요사업 중 하나인 ‘반혁명세력’의 숙청을 진행했다. 숙청은 곧 인민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민간인 살해를 의미했다.

주요 숙청 대상자는 지주, 경찰, 공무원 등이었다. 이들에 대한 숙청은 북한 법령을 기준으로 면 단위 ‘인민재판’에 의해 주로 이루어졌으나 ‘즉결처분’된 경우도 많았다. 숙청 행위는 1950년 9월 15일 시행된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인민군 전세가 불리해진 후 국군과 유엔군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10월 초 경기도 지역 대부분을 수복하기까지 이어졌다.

지방좌익에게 끌려간 전직 경찰

가평은 수도 서울과 강원도를 잇는 관문 역할을 해 왔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 지역이 군사적 통로로 이용돼 인민군과 국군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 틈바구니에서 민간인들은 끊임없이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가평군 설악면 위곡리에서 농사를 지었던 정○원(28)은 한국전쟁 이전인 1948년에 경찰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같은 마을 주민과 청평지서 동료 등은 가평경찰서나 청평지서에 근무했다고 증언했지만 실제로 경찰 근무를 했는지 기록으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1950년 7월 22일(음력 6월 8일) 정○원은 집 건너편 일명 서울터에 숨어 있다가 누군가의 밀고로 지방좌익에 의해 끌려갔고, 이후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증언
닫기
신청인 정○애 진술조서(2010. 2. 2.)

신청인의 아버지 정○원은 1950. 7. 22.(음력 6. 8.), 자택 건너편에 숨어 있다가 지방좌익에게 발각돼 끌려갔고, 이후 행방불명되었음. 정○원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음.

다만 그의 이모가 설악분주소에 갇힌 사람들이 손이 묶인 채 트럭에 태워지는 모습을 봤고, 그들 가운데 정○원을 봤다고 했다.
한국자유총연맹이 1991년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신천리, 일명 울업고개에 자유수호순국지사위령탑을 세웠다. 이 탑에는 진실규명 대상자 정재원을 포함해 63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디지털가평문화대전

한국자유총연맹이 1991년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신천리, 일명 울업고개에 자유수호순국지사위령탑을 세웠다.
이 탑에는 진실규명 대상자 정재원을 포함해 63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디지털가평문화대전

공무원 아버지의 마지막 뒷모습

포천군 일동면 수입리에 거주한 박○필(49)은 일동면사무소 공무원이었다. 그는 1950년 7월 15일경 자택에서 내무서원에게 끌려가 일동분주소에 3일간 감금돼 있다가 이후 분주소에 갇혀 있던 사람들과 함께 트럭에 태워져 포천내무서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다시 약 일주일간 갇혀 있은 후 집으로 돌아왔다.
박○필 딸의 증언에 따르면 어머니가 포천내무서로 아버지 면회를 갔으나 “하늘에 비행기가 뜨고 총알이 쏟아져” 못 만나고 돌아온 적이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분주소와 내무서에 갇히는 동안 구타를 당해 자택에 돌아온 후 후유증으로 누워만 있었다고 한다.

박○필은 1950년 9월 13일경 논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무서원에 의해 끌려가 포천내무서에 감금되었다. 그때 딸이 내무서원에게 끌려가던 아버지의 모습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박○필은 1950년 9월 27일(음력 8월 16일) 포천내무서에 갇혀 있던 사람들과 함께 트럭을 타고 포천군 구읍 뒷산(현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청성문화체육공원)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두 손이 줄로 묶인 채 총살당했다.

박○필이 희생당하고 약 한 달 후 부인과 친척들은 구읍 뒷산에 시신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으로 가 박○필이 입었던 옷과 금니를 보고 시신을 수습했다. 시신 수습에 참여한 아들과 딸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필의 시신 외에도 약 20~30구의 시신이 있었다고 한다.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청성문화체육공원 내 충혼탑. @디지털포천문화대전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청성문화체육공원 내 충혼탑.
@디지털포천문화대전

열린 문틈으로 보니 70~80명이 갇혀 있더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양주군을 비롯한 서부와 중부전선에서는 인민군의 진격을 막지 못하고 국군이 일방적으로 후퇴했다. 이 지역은 큰 전투가 벌어지지 않고 인민군에게 점령돼 바로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인민군은 의용군을 모집했고, 노동당 등을 조직했다.
전쟁 발발 이후 인민군 점령 시기가 되자 양주군 진건면 송능리에 살던 공○복(41) 가족들은 공○복의 동생이 군인이라는 이유로 자주 지방좌익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다가 1950년 9월 2일경 지방좌익에 의해 집에서 쫓겨났다. 바로 그날 공○복이 지방좌익에게 끌려가 진건면 인민위원회 사무실 뒤 창고에 감금되었다. 증언
닫기
신청인 공○성 진술조서 (2006. 6. 20.)

신청인의 아버지 공○복은 1950. 9. 2.경 지방좌익에 의해 인민위원회 사무실 뒤 창고로 끌려가 그곳에 감금됐고, 1950. 9. 25.(음 8. 14.) 밤, 양주군 화도읍 부근 마치고개에서 총살당함. 공○복의 시신은 수습됐음.



공○복이 끌려간 지 20여 일 후, 공○복의 딸은 지방좌익에게 연락을 받고 매일 아침 아버지가 먹을 음식을 가지고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갔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음식을 먹고 다시 들어갔다고 한다. 그때 딸은 아버지가 음식을 먹으러 나올 때 열린 문틈 사이로 창고 안에 약 70~80명이 갇혀 있는 것을 봤다고 했다. 1950년 9월 26일(음력 8월 15일) 아침 공○복의 딸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음식을 가지고 갔다가 진건분주소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듣고 분주소로 갔지만 전날 저녁에 마차를 타고 갔다는 말만 전해 들었다.

이후 가족들은 공○복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마차에 태워져 호평동과 화도읍 경계에 있는 마치고개로 끌려가 총살당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당시 공○복과 함께 끌려간 사람 중에서 총에 맞지 않고 살아 돌아온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1950년 10월 중순경 부인과 마을주민들은 마치고개로 공○복의 시신을 찾으러 갔다. 부패된 시신들 속에서 공○복이 입었던 까만 조끼, 반팔 윗옷, 반바지를 보고 시신을 수습했다. 시신 수습 당시 마치고개 계곡에는 10여 구의 시신이 있었다고 한다.

방공호 안에서 두 손이 묶인 채 희생된 양조장 주인

파주군은 1950년 6월 28일 인민군에게 점령됐고, 10월 1일 해병대가 파주를 점령하기까지 약 90일간 인민군 점령하에 있었다. 노동당이 조직되고 군면리 단위까지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인민위원회는 토지개혁, 선전활동, 의용군 모집, 전선원호사업 등 전반적인 점령 정책을 집행했다. 아동면 금촌리에 내무서가, 각 면에는 분주소가 각각 설치됐고 리에는 자위대나 치안대가 구성되었다.

구○모(51)는 파주군 아동면 금촌리에서 주류업을 했다. 그는 고향인 개성에서 양조장을 운영했고, 그곳에서 주조한 술을 파주군에서 팔았다. 전쟁이 나기 전 금촌리 이장을 맡기도 했다.
1950년 9월 26일경 구○모는 인민군과 지방좌익에 의해 내무서로 끌려가 감금됐고, 1950년 9월 30일(음력 8월 19일) 적성면 두포리 전진교 앞 방공호(현 파주시 파평면 두포리 산 39번지)에서 두 손이 줄로 묶인 채 총살당했다.

당시 구○모와 함께 희생 장소에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온 임○관이 구○모의 가족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알려 주었다. 가족들은 1950년 10월 중순경 희생 장소로 가서 시신을 수습하고자 했으나 이미 희생 장소 부근이 불에 타 있고 여러 시신이 뒤엉켜 부패돼 있어 시신 식별이 불가능해 수습하지 못했다고 한다.
두포리 방공호 추모비. '호국영령되시어 조국품에 영원하소서'라는 글귀가 새겨 있다. @파주시

두포리 방공호 추모비. ‘호국영령되시어 조국품에 영원하소서’라는 글귀가 새겨 있다.
@파주시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두포리에 위치한 6·25반공피학살영령추모비. @파주시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두포리에 위치한 6·25반공피학살영령추모비.
@파주시

한 집안 사람 8명이 총살당해

진실규명 대상자는 김○배, 김□배, 김○수, 김○주, 김△배, 김▽배, 김○각, 김◁배 등 총 8명이다. 이들은 모두 고양군 벽제면 성석리에 거주하는 한 일가였다.

김○배(21)와 그의 동생 김□배(16)는 고양군 벽제면 성석리에 거주했다. 김○배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해 고향으로 와 있었고, 김□배는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진실규명 대상자 김○수(다른 이름 김○산)와 그의 동생 김○주(다른 이름 김은○)는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고, 김○수는 대한청년단원으로 활동했다. 김△배(23), 김▽배(20대), 김○각(20대, 다른 이름 김○희), 김◁배(19)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희생자들은 고양군 중면 풍리 이갑진의 집에 숨어 있다가 지방좌익에게 발각돼 1950년 9월 30일(음력 8월 19일) 일산내무서 뒷산(현 일산 서구 복지관)으로 끌려가 두 손이 철사로 묶인 채 총살당했다. 희생자 가족들은 인근 지역 사람들이 일산내무서 뒷산으로 시신을 찾으러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희생 장소로 가 일산내무서 뒷산 구덩이에 있는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경기 북부지역에 인민군이 진주한 이후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지방좌익은 지역 실정을 자세히 알고 있었고 분주소원, 자위대원, 내무서원 등의 신분으로 활동하며 실질적으로 그 지역을 지배했다.
대개 희생자들은 자기 집에 있거나 다른 곳에 숨어 있다가 내무서원이나 지방좌익에게 연행돼 일정 기간 감금돼 있다가 살해되었다. 이들이 가족을 남기고 죽어야 할 이유가 과연 있었을까? 그런 것은 없었다. 단지 희생자들이 주로 부유층이거나 공무원, 대한청년단원 등 우익 활동을 했거나 그 가족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반대 세력을 모두 없애고 나면 어지러운 세상이 바로잡힐 거라고 믿고 실행에 옮긴 가해자들은 이것이 얼마나 길고 고통스러운 결과를 낳을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사건명 경기 북부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경기 북부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
지역 경기도 가평군, 포천군, 양주군, 파주군, 고양군
사건 발생일 1950년 7월 22일 ~ 10월 5일
진실규명 신청인 정○애 등 9명
진실규명 결정일 2010년 6월 15일
진실규명 인원 19명(희생자: 22명)
결정사안 1950년 7월 22일부터 1950년 10월 5일까지 경기도 가평군, 포천군, 양주군, 파주군, 고양군에서 진실규명 대상자 19명과 조사과정에서 인지된 희생자 3명 등 22명이 적대세력에 의해 희생당하거나 강제연행됐음을 참고인 진술과 문헌자료를 통해 확인 또는 추정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인민군, 지방좌익
참고자료 디지털가평문화대전
디지털포천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