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남부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 인민군이 후퇴하자 지방좌익의
세상이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이 벌어진 광교산 설경.  @수원시

한국전쟁 당시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이 벌어진 광교산 설경.
@수원시

두 번의 점령과 두 번의 수복을 겪은 경기도

한국전쟁 당시 경기도는 인민군과 국군·유엔군이 서로 점령과 수복을 반복했던 지역이다. 전쟁 발발 직후 북한 인민군은 전선 중서부에 해당하는 경기지역으로 남하해 동두천, 개성, 옹진반도 등 경기도 북쪽 지역의 주요 거점을 점령하고, 6월 28일에 김포를 점령했다. 6월 30일에는 한강 도하작전을 펼쳐 7월 3일 한강 방어선을 돌파했다. 곧바로 7월 4일 새벽부터 한강남안에서 남쪽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서울 함락 후 7월 초순부터 안성, 용인, 여주, 수원, 평택이 연이어 점령당했다. 북한은 8월 17일 이전에 이미 ‘경기도 방어지역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서울, 인천, 수원, 이천, 가평, 개성을 중심으로 모두 6개의 방어지역을 구분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 쪽으로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9월 18일 김포가 수복되고, 9월 19일 한강 도하 작전을 전개해 서울 탈환 작전을 개시했다.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을 받은 인민군이 김포 재탈환을 시도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9월 말까지 경기지역 대부분이 수복되었다.

그러나 수복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12월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유엔군과 우리 군경은 다시 후퇴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이 중공군과 인민군에 의해 두 번째로 점령됐고 경기도 일부 지역도 일시적으로 북한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1951년 중반 이후부터 유엔군이 38선 근처까지 북진했지만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경기지역은 전쟁 동안 인민군과 유엔군·국군에 의해 각각 두 차례의 점령과 수복을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광주군 등 경기 남부지역에서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 지방좌익 등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신청을 받고 조사를 개시했다. 그 결과 인민군 진주 후 퇴각기인 1950년 7월부터 1950년 9월 말경에 이르기까지 경기도 광주군, 김포군, 안성군, 여주군, 이천군, 인천시, 화성군 등 7개 시군에서 적대세력에 의해 희생당한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 남부지역 적대세력 사건의 가해주체는 지방좌익, 분주소원, 내무서원, 인민군 등이었다. 희생 사건은 주로 인민군 점령기와 퇴각기에 발생했다. 특히 1950년 9월 말경 퇴각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경기 남부지역에 인민군이 진주한 이후부터 지방좌익들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대한청년단, 경찰, 면사무소와 군청 직원 등 소위 우익인사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처형 대상이 돼 분주소 등으로 끌려가서 희생당했다.
1950년 9월 유엔군들이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한강 도하 작전을 펼치고 있다. ⓒ NARA

1950년 9월 유엔군들이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한강 도하 작전을 펼치고 있다.
ⓒ NARA

2016년 한강 노들나루공원에 세워진 한강방어선전투기념비. @서울시

2016년 한강 노들나루공원에 세워진 한강방어선전투기념비.
@서울시

면사무소 마당에서 열린 인민재판 - 안성군 삼죽면사무소 앞 박○용 희생 사건

박○용(44)은 안양에서 경찰로 근무하다가 1949년 11월경 그만두었다. 그 뒤로 삼죽면 배태리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중에 전쟁이 일어났다. 1950년 7월 16일(음력 6월 2일)이었다. 인민군 복장을 한 사람을 비롯한 몇몇 지방좌익들이 찾아와 박○용을 면사무소로 끌고 갔다. 박○용은 면사무소에 3일 감금돼 있다가 면사무소 앞마당으로 이끌려 나와 인민재판을 받았다.

그 전에 인민재판을 한다고 동네 사람들더러 다 모이라는 통보가 왔다. 박○용의 아들(신청인 박○택의 작은형)은 무서워서 혼자 갈 수가 없어 같은 마을에 사는 주민 ○○○이 함께 가 주었다. 인민재판에서 박○용은 ‘악질경찰’로 지목되었다. 박○은 현장에서 그의 아들과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당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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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인 박○택 진술조서(2008. 3. 20):
참고인 ○○○/○○○ 진술조서(2008.10.16)

1950. 7. 19.(음력 6. 5.) 전직 경찰이었던 신청인의 부친 박○용이 좌익들에 의해 끌려가 면사무소 앞에서 인민재판으로 희생당함.

신청인 박○택과 동네 사람들은 피투성이가 된 박○용의 시신을 들것에 싣고 와서 동네 뒷산에 매장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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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 진술조서 (2008. 10. 16)

박○용의 시신을 마을 사람들이 들 것에 들고 동네로 와서 뒷산에 매장함.


그 후 1950년 9월 26일(음력 8월 15일) 삼죽면 면사무소 옆 산에서 인민재판이 또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날 저녁에 진촌리 마을 이장이던 엄○섭(57)과 양○상(23)이 희생당했고 이들의 시신 역시 마을 사람들이 수습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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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 진술(당시 21세, 2010. 2. 10)

1950. 8. 15.(음력) 삼죽면 진천리 이장이던 엄귀섭이 분주소에 갇혀 있다가 면사무소 옆 산에서 총살당함. 사건 발생 다음 날 마을 사람들이 시신 수습.

내무서에 수감됐다가 산으로 끌려가 희생 - 안성내무서 진○희 희생 사건

1950년 9월 말경 진실규명 대상자 진○희(36)는 지방좌익들에 의해 안성내무서로 끌려간 후 광악산(현재 광교산)에서 희생당했다. 같은 마을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진○희는 당시 안성군 보개면 양복리 대한독립청년단 단장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한 달 남짓 잠시 몸을 피했다가 7월 말쯤 집으로 돌아와 있었는데 어느 날 지방좌익들이 와서 진○희를 보개면 분주소로 끌려갔다고 한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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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인 진○범 진술조서 (2008. 2. 11)

1950년 7월 말경 신청인의 부친 진○희가 지방좌익들에 의해 안성군 보개면 분주소로 끌려갔다가 5일 정도 후에 안성내무서로 끌려갔는데 그 후 생사를 알지 못함. 당시 끌려갔다가 풀려나온 사람이 안부를 전해준 바에 의하면 “광악산에 가서 죽이니 살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고 함.



진○희는 대한독립청년단으로 활동한 경력과 한국전쟁 발발 후 미처 피신하지 못한 경찰 3명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또 한국전쟁 발발 전 집 앞에서 남로당에 가입하라고 선전하던 지방좌익들을 지서에 신고했다는 이유 등으로 지방좌익들에게 끌려갔다.
그때 13살 된 아들 진○범(신청인)이 아버지 진○희가 끌려가던 모습을 보았다. 분주소에 수감돼 있을 당시 아버지에게 면회를 하러 갔지만 만나지 못하고 저녁밥만 보초에게 전해주었다. 분주소에서 5일 정도 감금돼 있다가 진○희는 다시 안성내무서로 이송되었다. 당시 보개면 상삼리 이장이 진○희와 같이 끌려갔다가 풀려나왔는데 진○범(신청인)은 이장으로부터 “광악산에 가서 죽이니 아마 풀려나기 힘들 것”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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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인 진○범 진술조서(2008. 2. 11)

1950. 7.말경 신청인의 부친 진○희가 지방좌익들에 의해 안성군 보개면 분주소로 끌려갔다가 5일 정도 후에 안성내무서로 끌려갔는데 그 후 생사를 알지 못함. 당시 끌려갔다가 풀려나온 사람이 안부를 전해준 바에 의하면 “광악산에 가서 죽이니 살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고 함.


가족들은 안성내무서로 옮겨진 뒤 광악산(현 광교산)에서 희생당했을 것이라는 소문만 들었을 뿐 진○희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수원 광교산. @수원시

수원 광교산.
@수원시

동네 유지라는 이유로 - 김포 하성면 테메산 유○산 희생 사건

1950년 9월 24일(음력 8월 13일) 진실규명 대상자 유○산(54)이 지방좌익들에 의해 마을에 있는 가마니 창고에 감금돼 있다가 김포군 하성면 태산리 테메산 골짜기에서 희생당했다. 이때 마을에서 11~13명가량 함께 희생당했다고 한다.
유○산은 당시 김포군 하성면 태산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상당히 부유한 편으로 동네 유지였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이 물러났다가 잠시 마을에 다시 들어온 적이 있는데, 그때 지방좌익들에 의해 유○산을 비롯해 마을사람 11~13명 정도가 끌려가서 면사무소 창고에 감금돼 있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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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인 유○근 진술조서(2008.3.3.),
참고인 ○○○ 진술녹취(2009. 4. 8)

1950. 9. 24.(음력 8. 13.) 동네 유지였던 신청인의 부친 유○산은 좌익들에 의해 같은 마을 사람 13명 정도와 함께 끌려가 동네 창고에 갇혀 있다가 희생당함. 시신은 테메산 골짜기에서 수습함.

유○산의 딸은 그때 상황을 “인민군이 집에 왜 태극기가 걸려있냐”고 하며 아버지를 끌고 갔다고 기억했다.

신청인 유○근은 당시 아버지 유○산이 창고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고 3일 정도 도시락을 갖다 주었는데 어느 날 창고에서 아버지가 보이지 않아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테메산 골짜기에서 다른 시신 위에서 솔잎에 덮여 있는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했다. 시신을 살펴보니 몽둥이에 맞아 희생된 듯했다. 유○산의 시신은 유○산의 어머니, 시신을 목격한 유○산의 딸과 아들(신청인)들이 수습했다.

‘반동’ 집안이라며 일가족이 희생 - 흥천면 외사리 최○한 일가 희생 사건

여주군 흥천면 외사리의 최○한(48)은 과수원을 하며 부유했고, 그의 아버지 최○옥(68 정도)은 서당 훈장이었다. 최○한의 동생 최○한은 이청군청, 전매청에 근무했으며 그 처가가 경찰 집안이었다.
1950년 9월 28일 수복 무렵이었다. 9살이던 최○호(신청인)가 밖에서 놀다가 집에 가보니 양부(큰아버지) 최○한, 양모 이 씨, 누나 최○림 등 3명이 칼에 찔려 죽어 있었다. 다음 날 오전 집 뒤의 야산에서 할아버지가 총살당했는데, 그 장면 역시 직접 목격했다.

최○호의 생부 최○한도 희생되었다. 1950년 8월 초순경 전매청 관할 음성·장호원 담배수매장소 인근에서 지방좌익들에게 연행돼 이천군청 창고에서 20여 일 동안 감금돼 있다가 이북으로 끌려가던 길에 홍천 산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는 말을 당시 이천군청 직원이었던 최○현 등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최○호는 어린 나이에 생부와 양부모를 모두 잃고, 할아버지, 누나까지 희생되었다. 그 이유는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공무원 또는 경찰이 있는 ‘반동’ 집안이라는 것이었다.

인민군 후퇴하자 지방좌익들이 지배자로 등장

희생 사건에 직접 관여한 지방좌익들은 자위대원, 분주소원, 내무서원 등의 신분으로 활동하며 실질적으로 그 지역을 지배했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는 각 지역에서 활동하던 지방좌익들이 정확히 누구인지, 그들이 어떤 신분으로 활동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당시 지방좌익들이 분주소원, 자위대원 등 어느 한 신분으로만 활동하지 않았고, 신청인과 참고인들이 지방좌익의 당시 신원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사건명 경기 남부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경기 남부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
지역 경기도 광주군, 김포군, 안성군, 여주군, 이천군, 인천시, 화성군 등 7개 시군
사건 발생일 1950년 7월 ~ 9월 말경
진실규명 신청인 한○석 등 11명
진실규명 결정일 2010년 6월 22일
진실규명 인원 15명
결정사안 한국전쟁 발발 후 경기도 광주군 등 경기 남부지역 일대에서 적대세력에 의해 지역 주민 37명이 희생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내무서원, 분주소원 등 지방좌익과 인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