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강화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1) 반공청년들에게 무기를 쥐어주다

인천 강화군 교동면 선어리 해안가 희생현장.

인천 강화군 교동면 선어리 해안가 희생현장.

보이지 않는 NLL이 교동도 바다 위로 지나간다

인천 강화군 교동면(교동도)은 위도 38도선 바로 밑(37도 45분~48분 사이)에 위치하며, 민간인 출입통제선(민통선) 안쪽에 있는 섬이다. 2014년 완공돼 강화도와 교동도를 연결하는 유일한 도로인 교동대교를 건너갈 때는 다리 입구에 있는 해병대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 다리를 건너 교동도 안으로 들어가면 이곳이 섬인가 싶을 정도로 넓은 들이 펼쳐진다. 교동도는 강화군의 15개 섬 중에서 두 번째 큰 섬으로 강화군에서 가장 넓은 평야를 지니고 있다.

현재 이 섬의 북쪽 바다 가운데로 북방한계선(NLL)이 지나간다. 철조망이 길게 설치된 교동도 북쪽 해안가에 서면 바다 너머로 황해남도 연안군·백천군(한국전쟁 당시 경기도 연백군)이 마주 보인다. 이곳은 간조 때면 갯벌이 돼 육지처럼 걸어서 왕래할 수 있어서 한국전쟁 전까지는 같은 생활권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북한 연백군의 주민들이 대거 교동도로 건너왔다. 그들은 장터에 가듯 쉽게 건너왔고 처음에는 잠시만 머물 것으로 여겼다.
교동도 북서쪽 해안 율두산(밤머리산)에 있는 망향대 한국전쟁 때 황해도 연백에서 피난 와 정착한 실향민들이 고향 땅을 바라보며 제를 올리고 망향의 한을 달래는 곳이다.

교동도 북서쪽 해안 율두산(밤머리산)에 있는 망향대 한국전쟁 때 황해도 연백에서 피난 와 정착한 실향민들이 고향 땅을 바라보며 제를 올리고 망향의 한을 달래는 곳이다.

대룡시장은 한국전쟁 당시 연백군에서 교동도로 잠시 피난 온 주민들이 한강 하구가 분단선이 돼 고향에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향에 있는 연백시장을 본떠 만든 골목 시장이다.

대룡시장은 한국전쟁 당시 연백군에서 교동도로 잠시 피난 온 주민들이 한강 하구가 분단선이 돼 고향에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향에 있는 연백시장을 본떠 만든 골목 시장이다.

인민군 점령기에 총살된 강화 주민들

전쟁 초기 인민군은 강화군이 전략적 요충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강화군 길상면에 본부를 두고 짧은 기간 주둔했다. 인민군 일부 병력과 내무서원들은 좌익세력과 함께 군, 면, 리 단위에서 인민위원회, 자위대, 전평, 민청, 농민조합 등을 구성했다. 이들은 1950년 6월 27일 일시에 활동을 시작해 강화군수 홍재룡, 초대 경찰서장 김추성 등을 연행하고 내무서 유치장에 감금했고, 점령기간 동안 반동분자로 분류된 다수의 주민들을 강화읍 산업조합창고에 감금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자 내무서원, 지방좌익들이 1950년 9월 18일 철수했다가 이후 9월 22일 재진입했다. 이때 재진입한 내무서원, 지방좌익들은 산업조합창고에 감금된 다수의 주민들을 9월 29~30일 양사면 인화리 중외산 중턱, 10월 초 개성 송악산에서 집단총살했다.(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강화지역 적대세력 사건)

9‧28 수복 후 조직된 치안대

9‧28수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자 경기도 강화군과 연백군 등 38선 일대의 대한청년단원과 청년방위대원 등을 중심으로 치안대·자치대·결사구국대라는 이름의 무장대가 조직되었다. 1950년 10월 3일 강화군 교동면을 비롯한 13개 면에서 강화치안대가 조직되었다. 강화치안대는 수사대를 별도로 설치해 부역혐의자 수백 명을 임의로 연행해 구금하고 그들을 신문했다. 당시 부역혐의자 수사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고향으로 피난 왔던 낙오된 경찰 10여 명이 담당했다.

강화치안대에게 끌려왔던 700~800명의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들은 강화산업조합창고 뿐만 아니라 강화경찰서 무도장과 유치장, 동문(현재는 강화읍 관청리) 안의 가마니창고 등에 구금되었다. 구금자들은 복귀한 강화경찰에게 인계될 당시 심한 고문으로 “초주검 상태”여서 의사의 치료를 받아야만 할 정도였다.

또 강화 건너 연백군 연안읍에서도 연안치안대가 조직되었다. 북한군이 버리고 간 무기, 경찰서에 보관됐던 무기, 청년방위대가 가지고 있던 무기로 무장한 연안치안대는 패잔병과 좌익인사들을 각 동리에서 색출 검거했으며 경찰이 귀환하자 그들의 치안 활동에 협조했다.
치안대 사무실로 사용된 외딴 건물 @진실화해위원회

치안대 사무실로 사용된 외딴 건물
@진실화해위원회

1·4후퇴 직후 치안·행정 공백 상태가 된 강화도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11월 26일 유엔군은 다시 평양까지 밀려내려왔다. 다급해진 정부는 12월부터 도민증을 발급해 20~35세까지 싸울 수 있는 청년들을 군 자원으로 확보하기 위해 집결지를 정해 남하시켰다. 1950년 12월 23일 저녁 강화군 교동면에서도 도민증 발급 사무가 시작되었다. 12월 24일 제2국민병으로 차출된 청년들에게 강화군청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왔고, 이튿날 교동을 떠나 강화군청에 소집된 청년들이 남쪽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1951년 1월 1일 오후 5시를 기해 강화에 주둔하고 있던 UN군 소속 터키군 부대가 김포 방면으로 철수했고, 1951년 1월 2일에는 강화, 연백, 개풍의 경찰들이 강화경찰서로 집결해 충남 서산으로 철수했다. 청년들은 물론 군·경과 행정관서가 모두 떠난 교동도는 행정공백과 치안 부재 상황에 직면했다.

한편 연백군 연안읍에서도 1950년 12월 하순경 각 관공서 관리들이 모두 철수하자, 패잔병과 부역혐의자 색출에 앞장섰던 연안치안대 500여명이 연백군 해성면 해안으로 후퇴했다. 1951년 1월 6일부터 인민군의 공격을 받자, 연안치안대는 해안지대로 몰려든 황해도 일대의 피난민들과 함께 서해에서 활동 중인 해군함정에 구출을 요청해 남쪽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1951년 8월 15일 당시 강화군의 원주민 복귀자 수가 10만 2,225명이었는데 피난민 수가 6만 7,518명이나 되었다. 피난민들은 주로 개풍, 개성, 연백, 옹진군의 원주민들이었다. 교동면의 경우는 원주민 수가 1만 300명인데 피난민 수가 1만 3,990명으로 원주민 수보다 더 많았는데 주로 연백군 피난민들이었다.

1·4후퇴 당시 젊은 사람들이 제2국민병으로 떠나 여자, 아이, 노인들만 남아 있는 교동에서 황해도에서 피난 나온 청년들이 나라를 지킨다는 명목하에 특공대를 조직했다. 특공대는 출신지에 따라 연백·백천·평산치안대로 조직돼 있었는데 연백치안대 규모가 가장 컸다.

인민군 재점령 위기에 학살에 앞장선 ‘황해도특공대’

피난민들이 교동으로 속속 몰려 들어오면서 국군도 아니면서 군복을 입은 피난민 3~4명이 권총을 차고 조를 이뤄 사랑방을 달라거나 주민들에게 위압적인 수단으로 식량을 빼앗아가곤 했다. 이 같은 상황은 현역 정보기관이 들어오면서 한층 심해졌다. 이들은 특공대를 조직해 북한군 점령지역인 바다 건너 연백군 등지로 들어가 식량을 가져오기도 하고 도내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하에 피난민을 조사하거나 남편 또는 아들이 피신, 월북했다고 해서 그 가족들을 특공대 사무실로 연행 구금, 고문을 했다.

1951년 1월 18일 인민군 1개 중대가 강화본도를 침공하자 강화경찰서에 본부를 둔 ‘강화향토방위특공대’와 피난민 500여 명이 석모도로 피난했다. 이때부터 교동도에서는 부역혐의자 가족들이 ‘황해도특공대’에 의해 고구리 낙두포구, 난정리 돌부리해안, 대룡리 방골, 무학리 선어리 해안, 상룡리 뒷산, 서한리 막개 바닷가, 인사리 갯골 등지로 끌려가 무차별 살해되기 시작했다.
인천 강화군 교동면 인사리 해안(갯골).

인천 강화군 교동면 인사리 해안(갯골).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많아 밀물 시에는 갯골이 형성되는데, 그 시간에 주민들을 갯골로 몰아넣어 살해하였다. 갯골에서 썰물이 밀려 나가면 시신들은 바다로 흘러들어가 대부분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하였다. 해안을 끼고 있는 교동지역 희생지는 인사리의 갯골과 유사하게 생겨 마치 동일장소처럼 보인다.
인천 강화군 교동면 선어리 해안가 희생현장 입구.

인천 강화군 교동면 선어리 해안가 희생현장 입구.

신청인이 희생현장인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 사태골 방공호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신청인이 희생현장인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 사태골 방공호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희생자 비석에 새겨진 아내의 이름

동면 무학리 임〇〇는 부역혐의를 받고 있었다. 1951년 1월 17일 특공대원들이 임〇〇의 집으로 와 그의 가족 4명을 한 줄로 묶어 일렬로 선어리 해안가로 끌고 갔다. 그런데 임〇〇의 아내(한○○)만 빼고 나머지 3명이 모두 살아서 돌아왔다. 그러나 이튿날 다시 집에 찾아온 특공대에게 집 마당에서 희생되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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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인 임○○ 진술조서(2022. 5. 10.)

“특공대원이 동짓달 저녁 7시에 당시 거주지(교동면 무학리314)에서 임○○의 부역 혐의로 가족 임○○(1899년생, 임○○의 부), 임○○(1942년생, 임○○의 딸), 임○○(1937년생, 임○○의 아들), 한○○(1915년생, 임○○의 아내)을 한 줄로 묶어 일렬로 끌고 나가 선어리 해안가로 갔으며 한○○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은 살아 나왔으나, 다음날 집 마당에서 특공대에게 희생되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한○○의 시신은 바닷가로 쓸려나가 수습을 못 하였고, 임○○, 임○○, 임○○는 임○○(1940년생, 친척) 가족이 수습하여 뒷산에 매장하였고, 이후1971년도에 화장하였다.”

한○○은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집단희생자 비석에 ‘임〇〇의 처’라고 새겨져 있다.

엄마 등에 업힌 채 죽은 아기들

진실규명 대상자 ‘최○○의 자’는 아직 호적에 올리지 않았고 이름도 없는 아기였다. 아버지 최○○(1922년생)이 인민군으로 차출됐다는 이유로 1951년 1월 12일경 어머니 전○○(1923년생)과 함께 상룡리 안개산 사태골로 끌려가 특공대에게 희생되었다.

최○○(1949년생, 형)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1951년 1월 12일 오후 4시쯤 민간인 치안대가 우리 옆집 마당에 어머니와 동네 사람들을 모았다. 어머니는 동생(최○○의 자)을 업고 나갔는데, 치안대가 조사할 것이 있다며 사무실로 끌고 갔다. 그날 저녁 끌려간 모두가 돌아가셨다는 말이 들려왔고, 시신은 해가 어두워지고 나서야 작은할아버지(최○○)와 동네 할아버지들이 수습해 어머니는 기슭 위, 동생은 그 아래에 매장하셨다고 하셨다.” 그날 마을 주민 한 명이 아기를 업고 군인을 따라가는 전○○을 보았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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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전○○ 진술조서(2022. 9. 22.)

“강화는 아이를 낳으면 황토를 피우는데 아들은 두 개, 딸은 세 개다. 그때 황토 두 개를 피워 아들로 기억한다. 1951년 정월 보름(음력) 전씨(전○○)가 아이를 업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군인 앞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윤○○, 1912년생)도 함께 나갔으나, 당시 민병 대원이었던 아버지(전○○, 1915년생)의 영향으로 돌아온 것으로 안다. 나머지 사람들은 3~4명의 군인을 따라 마을 근처 산기슭 방공호에서 총살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1979년 3월 7일자 강화경찰서가 경기도지사에게 보고한 대공인적위해분자 자료수정통계의 6‧25 당시 처형자 수 명단에 ‘45-강화-여-전○○’이 기재된 것을 확인했다. 의용군에 끌려간 아버지 최〇○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거제도포로수용소자DB’에서 확인되었다.
강화군 대공인적위해분자 명부 중 ‘처형자명부’.

강화군 대공인적위해분자 명부 중 ‘처형자명부’.

교동면 소년단원들이 증언하는 ‘황해도특공대’

황해도 황주 출신으로 학생이었던 이〇〇은 해주를 경유해 연안으로 피난을 내려오던 중 연안경찰서 내의 연안치안대의 검문을 받고 그들의 요구에 따라 치안대 조사과에서 일하게 되었다. 인민군이 들어오자 이○○도 백천, 연백, 평산지역의 치안대원 수십 명과 함께 연백군 호동면 봉화리 포구에서 민간 배로 강화군 교동면 인사리로 피난을 나왔다고 한다. 인사리 포구에서는 배에서 내리는 피난민을 검색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특공대원들로 대원 모집을 하고 있었고 숙식 문제가 막연하던 이○○은 다른 치안대원들과 함께 특공대로 편입되었다. 이후 고구리에 파견됐는데 부역혐의자들이 끌려와 고문을 당하거나 해안으로 끌려가 살해당한 사실이 있다고 진술했다.(1기 진실화해위원회, 참고인 이○○ 진술, 2007. 11. 27)

한편 당시 교동에는 14~18세의 소년들로 구성된 소년단원들이 있었다. 이들은 특공대의 지시로 경비를 서거나 부역혐의자 가족들을 희생장소로 소집하고 살해된 시신을 암매장하는 역할을 했다.

소년단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교동에서 살인을 저지른 가해자들은 1950년 12월 말 북한 연백군과 벽성군, 평산군 등에서 피난 나온 서북청년단, 대한청년단, 치안대원들로 조직된 ‘황해도특공대’였다. 황해도특공대는 을지병단→을지타이거여단→미 육군 8240부대로 순차적으로 편입됐다고 한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한국군과 미군의 통제 하에 있던 해병특공대(대장 김○○)와 강화해병특공대(대장 김○○)를 주력으로 하는 교동 주둔 유엔군 유격대(UN Partisan Forces)를 사건의 가해자로 판단했다.

서해안 각 섬에는 30여 개의 유엔군 유격대(UN Partisan Forces)가 조직돼 1951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북한지역 연안 일대와 내륙을 오가며 후방 교란과 첩보수집 활동을 전개했다. 이들 유격대는 그들이 실시한 작전의 결과보고를 기준으로 미군으로부터 무기와 식량 등을 받았다. 보급품이 부족했던 유격대들은 비협조적인 주민들로부터 곡식이나 소를 노획하고 적으로 간주되는 민간인들을 한국군 또는 미군 첩보대로 넘겨 보급품을 더 받기도 하고 정보가치가 없는 민간인의 경우에는 유격대 자체에서 즉결처형하기도 했다. 결국 신익희 국회의장은 1952년 11월 15일 정부에 강화도에 국군을 파견할 건을 건의했다.

“… UN직할 유격대 및 첩보기관 수는 증가일로에 있어 근황에는 무려 50여 개 기관이 협소한 강화도에 난립되어 있어 재해에 신음하는 원주민은 부식물, 연료, 침구의 일부 등을 자진 제공하는데도 불구하고 불법감금 체포의 남발을 위시하여 강간, 살인 등 비인도적인 만행을 자행하여 양민의 생명 재산을 위협 탈취하는 사건이 계속 일어나니 …(중략)… 조속히 UN군 사령부와 긴급 연락을 취하여 여하한 만행을 엄단케 하는 동시에 훈련된 정규 국군을 배치하여 강화 주민들로 하여금 생업에 전념케 요청하나이다.”
사건명 인천 강화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1)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인천 강화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1)〉 진실규명(확인) 결정서(2기)
관련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강화(교동도)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1기)
지역 인천 강화군 교동면
사건 발생일 1951년 1‧4후퇴 전후
진실규명 신청인 임○○ 등 3명
진실규명 결정일 2022년 11월 29일
진실규명 인원 임○호 외 2명
결정사안 1951년 1·4후퇴를 전후해 남편 또는 아들이 인민군 점령 시기 인민위원회의 조직책이었거나 월북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해안가 또는 방공호에서 교동지역 민간인들이 특공대에 의해 희생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교동도 주둔 유엔군 유격대(UN Partisan Forces), 경찰, 경찰의 지휘·명령·감독 아래에 있는 특공대
참고자료 인천투데이 2023년 10월 28일자 〈기획 - 강화 교동 민간인 학살 역사 현장에서, 평화를 바라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