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지역 적대세력 사건 38선을 마주놓고 벌였던
전쟁 속의 전쟁

2023년 10월 한국자유총연맹 인제군지회가 주최한 '자유수호 희생자 합동위령제'가 끝난 후 참석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인제군

2023년 10월 한국자유총연맹 인제군지회가 주최한 '자유수호 희생자 합동위령제'가 끝난 후 참석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인제군

하루아침에 북한, 남한으로 갈린 강원도 인제군

강원도 인제군은 해방 후 38선이 그어지면서 남북으로 분할되었다. 한 지역 안에서 살아가던 인제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북한 사람과 남한 사람이 되었다. 북한에 속하게 된 인제의 4개 면(인제면, 서화면, 북면, 일부 남면)에서는 1946년~1947년 토지개혁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땅을 빼앗긴 사람들이 크게 반발했고, 우익조직원들이나 그 가족들이 집중적인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노동당을 중심으로 새로운 통치체제가 형성됐고, 인제군 내무서와 각 면에 분주소가 설치됐으며 이른바 ‘반동 사건’을 전담하는 정치보위부가 설치되었다.
반면에 38선 이남 지역에 속하게 된 인제의 3개 면(기린면, 상남면, 일부 남면)은 행정적으로 홍천군 관할 아래 있었지만 홍천경찰서와 별도로 1946년 10월 인제경찰서가 설치되었다. 인제경찰서는 38선을 따라 지서를 설치하고 경찰 인력을 배치해 38선 경비에 주력했다.

전쟁 전부터 38선 접경지역에서 무력 충돌

38선 접경지역에서 경비를 주도한 것은 경찰과 군 병력이었다. 1949년까지는 경찰 병력이 경비를 전담했으나 남북 간의 무력 충돌이 빈발하면서 1950년 4월부터 군이 투입되기 시작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고작 두 달 전이었다. 한청 등 반공 청년 단체도 38선 경비에 동원되었다.
이미 1949년부터 38선 인근에서는 남북 간의 무력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1949년 7~8월 동안 이북 지역에서 발생한 이른바 ‘호림 부대’의 무력 침공 사태와 연이어 대규모 인민군부대가 남면 방면으로 침투해 무력 충돌이 발생한 이른바 ‘8·6사변’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 사건은 8월 24일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진정됐는데 한청원 피살 32명, 일반인 피살 28명, 경찰 가족 피살 3명 등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홍천군지 편찬위원회, 1989)

한국전쟁 속 또 하나의 전장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강원도와 인제, 홍천지역도 군경에 의해 수복되었다. 그러나 인민군 잔류병과 유격대의 저항도 만만찮았다. 그런데 유엔군과 국군부대는 인제지역을 수복했지만 실제로는 38선 이북으로 인제를 거쳐 올라갔을 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인제지역의 치안 상황은 매우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강원도 전체, 특히 인제와 홍천지역은 북상 도중 퇴로가 막혀 인제군 서화면에 집결한 인민군 패잔병과 유격대의 협력으로 조직적인 이른바 ‘제2전선’ 활동이 전개되면서 전 지역이 전장으로 변했다.
당시 인민군 패잔병 약 7,000명이 3군단을 재편성해 후방을 교란하고 있었다. 일부 패잔병은 지방좌익이나 빨치산 부대에 합류해 양구·화천·김화·철원·곡산·춘천 일대에서 활동하던 유격대 병력이 모두 약 10,000명에 달했다.

한편 38선 이남지역에서는 1950년 10월 초 국군과 유엔군이 진주한 뒤로 대한청년단 중심으로 결사대, 청방이 조직돼 인민군 패잔병을 공격했다. 이렇게 인제는 인민군·빨치산과 반공청년단이 서로 대치하는 형국이 이어졌다.

증명사진 찍었던 인제의 사진사 두 명

인제면 가리산리에 거주하던 김○래(34세)와 박○식(39세)은 둘 다 사진사였다. 이들은 1950년 7월경 반동이라는 이유로 연행돼 원산으로 끌려가 재판을 받고 1950년 10월 6~8일경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산형무소 수감자 학살 사건을 조사한 미군 측 보고서에서 두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 이들은 죄명이 ‘반동’이며 1950년 10월 3일 수감된 것으로 기재돼 있었다. 기록에는 형량이 기재되지 않아 미결수였다고 판단된다.

이들이 원산형무소까지 끌려가 수감된 이유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피해자들이 증명사진을 찍는 일을 했다는 증언으로 미루어 보면 이들은 ‘공민증’ 제작을 위한 사진 촬영을 담당했고 그 과정에서 조직사건에 얽혀 피해를 당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북한군 징집을 피해 산으로 간 반공 청년들

한청 등 반공 청년단체 조직원들은 인민군과 빨치산의 주요 표적이었다. 인제면 덕산리 원○희(17세)는 국군이 진주한 후 한청 활동을 했다. 1950년 10월경 마을 공회당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데 인민군 패잔병이 나타났다. 쌀을 구하러 온 것이었다. 원○희가 총을 쏘아 인민군이 쓰러졌다. 며칠 후 인민군과 빨치산이 인제면을 습격했다. 그날 원○희는 같은 마을의 친척 집 다락에 숨었다가 누군가의 밀고로 붙들려 나갔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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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성열(11세), 2009. 9. 25. 진술조서

“친척인 원영희 집 다락에 숨어 있다 누군가 밀고해 잡혀갔다.”

그 후 마을 주민들은 원○희가 죽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장소를 몰라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기린면 진동리 정○형은 청방 활동을 하던 중 집에 다니러 왔다가 국군의 북진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국군을 환영하기 위해 태극기를 그렸는데, 그때 빨치산이 집에 들이닥쳤다. 순간 몸을 피해 달아났지만 총에 맞아 희생되었다.

이북과 경계선을 맞대고 있던 기린면에서는 38선 경계를 위해 군경들과 함께 대한청년단원들이 동원돼 보초를 서거나 지원 활동을 했다. 한국전쟁 이후 인민군에 의해 기린면 지역이 점령당하자 젊은 대한청년단원들은 북한 정권의 징집 요구를 피해 산으로 숨어들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이 퇴각하는 길이 바로 기린면이었다. 산에 피신해 있던 대한청년단원들을 중심으로 결사대 또는 청방이 조직돼 자체 무장을 하는 한편 인민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민군과 빨치산이 보복으로 청방 대원 가족들을 학살했다. 1950년 10월부터 12월 3개월 동안 기린면 각지에서 이와 같은 보복 학살이 연이어 일어났다.

세간살이 빼앗기고 목숨도 잃은 손 씨 형제

반공 청년과 함께 부유층이 표적이 되었다. 1950년 11월 19~20일 기린면 방동리 오류동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손○주와 손○중 형제는 각각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지을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 1950년 10월 초 후퇴하던 인민군 부대를 청방이 습격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인민군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는데 빨치산이 청방에 신고한 자들을 색출하였고 이후 손○주·손○중 형제와 같은 마을의 한청 부단장 박인룡 등이 희생당했다.

손○중은 11월 19일(음력 10월 10일) 오류동 다리 앞에서 빨치산에 의해 희생당하였고 하루 뒤인 11월 20일 그의 형 손○주가 집 근처 야산에서 구타 후 척살당했다. 이웃 마을인 절골에서 피난하러 와 있던 박○룡은 ‘높은봉’라는 곳에 피난해 있다가 손○중과 같이 희생당했다.
손○주 등은 희생되기 2~3일 전부터 빨치산에 의해 끌려다니며 자신의 세간을 이웃 마을인 도채동으로 옮겨주고 나서 죽임을 당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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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간(17세), 조카며느리, 2009. 9. 23. 진술조서

“손○주는 죽기 2~3일 동안 짐을 져다 도채동으로 옮기는 등의 일을 했다. 당시 구타를 당해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발견 당시 시신은 전신이 칼로 난자된 상태였다고 한다. 희생자들의 시신은 동네 노인들에 의해 수습됐고 각각 자손들이 피난에서 돌아온 이후 정식으로 매장되었다.

월남자 가족이라고 땅 빼앗기고 강제이주 당해

전쟁 전 북한에 속했던 북면 한계리 박○억은 그의 형 박○권이 월남한 뒤로 형 소유의 토지를 놓고 당의 핵심 인물들과 마찰을 빚었다고 한다. 형이 월남한 데다 그의 동생들이 당에 가입하지도 않으니 반동으로 몰려버렸다. 박○권의 가족은 ‘반동 가족’으로 지목되어 강제 이주를 강요당했다. 가족들은 한계리를 벗어나라는 강압에 고성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전쟁을 맞았다. 당시 한계리에서 하루 만에 세 가구가 함께 쫓겨난다고 한다. 그의 토지 역시 땅 없는 노인들에게 분배되었다고 하는데, 이 문제로 박○억은 한계리 리당위원장(어○심) 및 부락위원장(권○철)과 다툼을 벌였다.

전쟁 발발 이후 인민군 후퇴 시기에 박○억은 동생 박○표와 함께 한계리 인근 파막령 혹은 한계리 세그런이의 다리 밑에서 총살에 처해졌고 동생 박○표는 살아났다. 시신은 인근 주민이 그 자리에 가매장했다가 수복 이후에 가족들이 정식으로 수습했다.

38선에는 철조망이 없다

인제는 해방과 동시에 38선이 그어지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윗마을은 북한으로, 아랫마을은 남한으로 서로 다른 세상이 되었다. 어떤 집은 마당 복판으로 38선이 지나갔다. 그렇다고 38선에 철조망이 쳐진 것도 아니고 풍경은 살던 그대로였다. 언제나처럼 산이 있고, 물이 흐르고, 마을마다 초가집이 모여 있고, 농토에서 사람들이 일을 했다. 얼마 후 늘상 오가던 길이 막히더니 초소가 설치되었다. 곧이어 경찰과 군인이 투입되어 무력 충돌이 발생하고 38선은 아무도 넘을 수 없는 무서운 장벽이 되어갔다. 그리고 전쟁이 터졌다. 꽉 막혀있던 38선을 넘어 이제는 완전한 적이 된 인제의 북한지역과 남한지역이 내리치고 올려치는 세상이 되었다. 그렇게 뒤집어진 세상에서 인제 사람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1954년 항공사진으로 본 강원 인제군 중심지 전경. @국토정보맵

1954년 항공사진으로 본 강원 인제군 중심지 전경.
@국토정보맵

사건명 인제지역 적대세력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인제지역 적대세력 사건〉(1기)
지역 강원도 인제군
사건 발생일 1950년 9월 말 ~ 1951년 3월
진실규명 신청인 김○운 외 21명
진실규명 결정일 2010년 1월 12일
진실규명 인원 김○래 등 26명(전체 피해 규모: 46명)
결정사안 1950년 9월 말~1951년 3월 강원도 인제군에서 진실규명대상자 26명과 조사과정에서 인지된 피해자 20명이 좌익세력에 의해 희생당했거나 강제연행된 사실을 확인 또는 추정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대한청년단과 국민방위군
참고자료 홍천군지 편찬위원회, 《홍천군지》, 1989년
사진: 인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