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영월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누가 청년방위대에게 총을 주었나

경북 봉화군 물야면 압동리(사골) 피난지. 신청인(임○○)은 5~6세쯤 영월군 하동면 내리 79번지에 살다가 1951년 1·4후퇴에 따라 추운 겨울 눈이 무릎까지 내릴 때(1월 15일쯤) 가족들과 함께 박달골을 넘어 물야면 압동리 사골로 피난했다고 한다.

경북 봉화군 물야면 압동리(사골) 피난지.
신청인(임○○)은 5~6세쯤 영월군 하동면 내리 79번지에 살다가 1951년 1·4후퇴에 따라 추운 겨울 눈이 무릎까지 내릴 때(1월 15일쯤) 가족들과 함께 박달골을 넘어 물야면 압동리 사골로 피난했다고 한다.

38선으로 해방과 동시에 분단된 강원도

강원도는 해방과 함께 38선이 그어지면서 강원도의 절반 이상이 북한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강원도에서도 좌우 대립이 있었지만 좌익세력이 더욱 강했던 곳이다. 영월군 역시 해방 후 좌우의 대립이 심했던 지역이다. 이들은 각각의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다가 1947년 3‧1절 기념 축하 행사에서는 좌·우익 단체들이 별도로 기념식을 치르다가 다툼이 발생하기도 했다. 영월 경찰이 1948년 사찰계를 만들어 좌익 인사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자 좌익계 인사들은 월북하거나 입산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화천 방면에 집결했던 인민군 2사단과 양구 방면에 집결했던 인민군 12사단이 화천과 양구의 양 국도를 기본간선으로 해 침공했다.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은 함락되었다.

오르락내리락 ‘톱질전쟁’ 희생자 늘어나

1950년 9월 15일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강원 북부지역도 9월 30일부터 10월 초순까지 국군에 의해 수복되었다. 수복 이후 가장 큰 문제는 부역자 처리였다. 특히 정부는 부역혐의자 적발을 위해 동, 반 단위로 심사위원회를 조직하도록 했다. 이같이 각 동의 반 내에서 지역 유지들을 중심으로 위원회를 조직해 부역혐의자들을 적발하고 예심한 결과를 수사당국에 보고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는 마을주민들이 부역혐의 여부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시작된 것이지만, 당시 마을주민들 사이의 사적 감정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준 것이었다. 1950년 10월 4일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공식으로 출범한 이후 대대적으로 부역혐의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양상을 띠었다. 강원 북부지역 주민들은 다시 피난을 떠나게 되는데, 유치장에 감금돼 있던 부역혐의자들을 처리하지 못하고 후퇴했던 경찰들은 재수복 이후 다시 부역혐의자들을 잡아들여 처리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경기·강원지역을 오르내리며 점령과 탈환이 반복되는 피스톤전쟁(톱질전쟁)이 이어지면서 강원도민들은 인민군과 군경 양쪽으로부터 피해를 입게 되었다.

강원 남부의 영월군 역시 부역혐의자로 지목돼 희생된 주민이 많았다. 이 과정에서 보복을 막기 위해 일가족이 함께 희생되기도 했다. 특히 영월지역에서는 대한청년단장 ○○○이 아무도 통제하지 않는 가운데 주민들을 구타하고 살해하는 등 악명을 떨친 사례가 있었다.

두 살 먹은 여동생까지 빨갱이라며 끌고 갔다

1949년 8월경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현 김삿갓면) 내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임△△(당시 7살)는 그해 여름, 가을 동안 할머니, 누나, 삼촌과 함께 화장실 바닥에 옥수수 대공을 깔고 생활했다.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었지만 좋았던 집이 다 타버리고 그나마 남은 곳이 화장실뿐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날이 춥지는 않았지만 가족이 ‘빨갱이’로 몰린 탓에 동네를 나다닐 수가 없었고, 동네 사람들도 와서 들여다보지 않으니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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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1937년생) 2022. 5. 16. 전화 진술

“사상으로 끌고 갔으니까 우리가 가보지도 못하고 우리 집에 건너오지도 못했어요. 사상이면 그래요.”

식량이 문제였다.

그러니 꼼짝없이 화장실에 들어앉아 며칠 동안 밥을 굶었다. 당시 이웃 조제마을에 주둔하던 군인을 통해 굶고 있다는 것이 알려져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뒤로 군인이 어떤 집을 소개해줘서 한동안 그곳에서 지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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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청인 임△△의 누나, 1942년생),
2022. 4. 19. 전화 진술

“당시 많은 군인이 조제에 와 있었다. 집이 불타서 화장실에서 자고 했는데 군인들이 오라고 해서 무섭지만 따라갔는데 밥을 주었고, 친척 누가 없냐고 하며 어느 집인지 모르지만 가서 살라고 했다. 가보니 방을 주어서 할머니(민○○), 삼촌(임◇◇), 2남매(임☆☆, 임△△) 네 명이 한동안 살던 것이 기억난다.”



사건이 일어난 때는 8월 17일 앞뒤 무렵이었다. 임△△의 집에는 모두 여덟 식구가 살고 있었는데 대한청년단 대여섯 명이 총을 들고 와서 할아버지(임□□)와 어머니(고○○)를 끌고 갔다. 여동생(2살)은 너무 어려서 엄마에게 업혀서 갔다. 그들은 떠날 때 집에 불을 놓았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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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1937년생) 2022. 5. 16. 전화 진술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라는 데서 부대를 만들어서 ○○○이 두목, 대장이었어요. 내가 많이 되어야 열다섯 살이 채 안 되었을 거예요. ○○○ 부대 사병들 졸병들 대여섯 명이 와서 임△△씨 할아버지하고, 어머니하고, 동생은 쪼그매서 업혀서 데려가는 걸 직접 봤어요. 부대원들이 임△△ 집에 불을 해 놓으니 집이 타 버렸잖아요. 바로 도랑 건너니까 다 보여요. … 삽시간에 끌고 나가는 걸 봤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어요.”


할머니는 그때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제정신이었으면 같이 끌려갔을 터였다. 대한청년단은 끌고 간 사람들을 큰 구덩이에 들어가게 한 후 총을 난사해 살해했다.

사건 당시 임△△는 누나(1942년생, 9살)와 함께 조제마을에 가 있어서 집에 없었다. 집에 왔을 때 할머니가 집 앞에 쓰러져 있고, 집이 불타고 있었다. 남매가 부축하자 할머니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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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청인 임△△의 누나, 1942년생),
2022. 4. 19. 전화 진술

“6·25전쟁 바로 전 해 본인(임☆☆)이 8~9세쯤 됐을 때, 살던 집이 외떨어져 있었는데 동생(임△△)과 조제마을에 갔다 오니 할머니(민○○) 혼자 일어나지도 못하고 계셨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강제로 데려가고 집은 불을 지르고 살림은 다 뺏어갔다. 할머니가 신경을 너무 쓰셔서 쓰러져 계시다가 우리가 오니 일어나심. 어머니(고○○)에게 ‘시집을 가라, 그러면 살려준다’고 했다는데 어머니가 그 말을 듣지 않아서 죽였다고 할머니께 들었다.”


당시에는 어린 남매들이 충격을 받을까봐 할머니가 얘기해주지 않아 가족들이 어떻게 됐는지 집은 왜 불탔는지 알지 못했다. 임△△가 10살쯤 되었을 때 누나가 대한청년단이 할아버지, 어머니, 동생을 빨갱이로 몰아 끌고 갔다고 했고, 집안 아저씨도 비로소 사건에 대해 말해 주었다.

당시에는 끌려간 장소가 어디인지도 몰랐다. 사건이 일어난 지 몇 해가 지나서야 할머니가 동네를 수소문해서 찾아간 장소에서 백골이 다 된 시신을 입은 옷을 보고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어머니의 시신은 동강을 냈는지 팔 한 짝을 끝내 찾지 못했다. 남매가 어려서 큰집 할아버지가 시신을 수습해 묻었다가 나중에 제대로 이장해 모셨다. 그 후로 끌려간 날을 제삿날로 알고 매년 음력 7월 22일에 제사를 지냈다.
신청인 임△△의 집터, 1949년 8월 대한청년단이 진실규명대상자 3명을 끌고 가며 집에 불을 질러 타버렸다고 한다.

신청인 임△△의 집터,
1949년 8월 대한청년단이 진실규명대상자 3명을 끌고 가며 집에 불을 질러 타버렸다고 한다.

사건을 목격한 참고인 심○○의 집은 신청인 임△△의 집 바로 개울 건너에 위치하여 서로 건너다보였다고 한다.

사건을 목격한 참고인 심○○의 집은 신청인 임△△의 집
바로 개울 건너에 위치하여 서로 건너다보였다고 한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 매장지 현장에 있는 진실규명대상자 임□□·고○○ 묘비.

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 매장지 현장에 있는 진실규명대상자 임□□·고○○ 묘비.

사건 목격자 심○○(당시 13세)은 임△△네 집 앞 개울 바로 건너편에 살았다. 그래서 임☆☆의 집이 훤히 보였다. 그는 사건의 경과와 가해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내가 많아야 열다섯 살이 채 안 되었을 거예요. ○○○ 부대 사병들 졸병들 대여섯 명이 와서 임△△씨 할아버지하고, 어머니하고, 동생은 쪼그매서 업혀서 데려가는 걸 직접 봤어요. 부대원들이 임△△ 집에 불을 해 놓으니 집이 타 버렸잖아요. 바로 도랑 건너니까 다 보여요. … 삽시간에 끌고 나가는 걸 봤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어요. 사상으로 끌고 갔으니까 우리가 가보지도 못하고 우리 집에 건너오지도 못했어요. 사상이면 그래요. ○○○의 규수(부인)하고 동생이 빨갱이에 의해 죽었대요. 그래서 보복하느라고 그랬다 소리는 들었어요. ○○○ 부대가 경찰 지휘받은 것도 아니래요. ○○○ 그 양반이 공비가 나타났다 하면 다른 동네도 가리지 않고 찾아갔어요.”

대한청년단장 ○○○이 기승 부릴 수 있었던 이유는?

기록과 증언에 따르면 ○○○은 해방 이후 봉화군 춘양면 대한청년단장(또는 국민방위군 전투중대장)으로 활동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신청인과 참고인들이 ○○○을 ‘강원 영월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1)’의 주요 가해자로 지목했다. ○○○은 아내와 동생이 빨치산에 살해되었으며, 경찰의 지휘도 받지 않고 자의적으로 행동했다고 한다. 참고인 심○○은 ○○○이 “공비가 나타났다 하면 다른 동네도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고 했다.

경찰은 청년단장이면 총을 지급했고, 단원들에게도 총을 주었다. ○○○과 그 부하들은 경찰이 준 총을 들고 영월의 산골 마을의 집들을 마음대로 헤집고 다니면서 주민들을 구타하고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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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임☆☆ 전화진술(2022. 6. 10.)

“그때 뭐 ○○○이가 청년단장 할 때 나는 직접 보지는 못했지마는 소문에 대원들 데리고 산에는 안가고 집으로 댕기면서 붙잡어 가지고 뚜드려 패고 뭐 이랬다고 그러더라고. ○○○ 부대가 그때 나이 한 서른 댓이나 한 사십 됐을 거예요. 뭐 그때는 세월이 그리된 걸 뭐. 세월이 그런 걸 본인은 죽고 없는데 지금 와서 하면 어케. 본인이 있으면 뭐 말이라도 따끔하게 한마디 한다고 하지만. 벌써 죽고 없는걸.”

금품을 빼앗거나, 금품을 빼앗지 못하면 빨갱이로 몰아서 살해했던 것이다.

피난민을 폭행하고 금품을 탈취한 방위대

임●●, 임■■, 임▲▲ 등 내리 주민 다수가 국군 수복 이후 마을에서 ‘빨치산 토벌 작전’이 진행되어 전투로 마을이 소란해지자 눈이 무릎까지 많이 오는 날 산을 넘어 봉화군 물야면 법전리와 오전리로 피난을 갔다. 그곳에서 1951년 2월 말 ~ 4월경 ○○○이 대장인 봉화군 춘양면의 국민방위군 대원들에게 끌려가 살해되었다.

희생자 임●●와 임■■은 피난지에서 지내던 중에 방위대 2명에게 끌려갔다. 임●●는 봉화군 내성면 유곡리 안동권씨 종택에서 구타 끝에 희생돼 유곡리 뒷산에 매장되었다. 임■■과 임▲▲(임▲◇)은 봉화군 내성면 유곡리 마을로부터 1,300m 지점인 뒷산 계곡에서 살해돼 시신이 유기되었다. 희생자들에 따르면 “방위대가 계곡에 시신을 유기해 정확한 장소를 알지 못해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고 한다.

내리 주민 권○섭(당시 14세) 가족도 희생자들과 같은 이유로 물야면 가평리에 피난을 와 있었다. “원래 그분들하고 이웃에 살았죠. 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이 방위대장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방위대장질을 하면서 사변 나고 군인들이 복귀해 가지고는 동네를 다니면서 동네 사람들은 다 패고 했다더군요. 사변 때 관련이 있다고 그랬는지, 사람들 고초도 많이 시키고, 사형도 시키고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임●●, 임■■, 임▲▲, 임☆☆ 씨 등 네 분도 사실 애매하게 그랬는데, 데려가서 돈도 요구하고 했는데, 돈을 안 주니까 살해했다고 얘기하더군요. 풀려난 두 분은 돈 주고 빠져나왔고. 당시 제 모친도 데려가서 인민군 심부름해주고 뭐 했지 하면서 매도 많이 맞고 그랬습니다.”[1기 참고인 권○○ 전화면담보고(2010.3.29.)]
○○○은 이 사건으로 인해 1951년 6월 27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원에서 ‘불법체포ㆍ감금, 상해치사, 사체유기죄’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희생자들이 ○○○ 부대에 의해 끌려간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판결문에는 ○○○이 청량산에서 빨치산과 교전 중에 희생된 주민들의 도장이 찍혀 있는 문서를 보고, 그것을 근거로 그들이 좌익행위를 했다고 생각했다고 나온다. 참고인 임☆☆은 “○○○이 청량산에서 좌익 명단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청량산은 내리 조제마을과는 아주 멀어 아무 관련이 없다. 그것은 거짓말이고 ○○○은 우리 동네(조제)와 10리 거리 동네(춘양면)에 살았었는데 주로 강원도 사람들만 해코지했던 나쁜 사람이다. 당시 강원도는 좀 잘 살고 저희들(춘양)은 못 살았다”고 진술했다.
사건 당시 피난지 현황도. 사건 당시 피난지에서 어머니와 고모는 맷돌질을 하고 있었는데 방위대원 2명이 와서 할아버지(임●●)와 별채에 있던 삼촌(임■■)을 끌고 갔다고 한다.

사건 당시 피난지 현황도.
사건 당시 피난지에서 어머니와 고모는 맷돌질을 하고 있었는데 방위대원 2명이 와서
할아버지(임●●)와 별채에 있던 삼촌(임■■)을 끌고 갔다고 한다.

경북 봉화군 내성면(현 봉화읍) 유곡리 희생지 현장. 임●●, 임■■, 임▲▲이 국민방위군에 의해 끌려와 갇혀 있었고, 임●●가 구타에 의해 사망했던 장소.

경북 봉화군 내성면(현 봉화읍) 유곡리 희생지 현장.
임●●, 임■■, 임▲▲이 국민방위군에 의해 끌려와 갇혀 있었고, 임●●가 구타에 의해 사망했던 장소.

사건명 강원 영월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1)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강원 영월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1)〉(2기)
지역 강원도 영월군
사건 발생일 1949년 8월, 1951년 3월
진실규명 신청인 임○○ 등 3명
진실규명 결정일 2022년 7월 19년
진실규명 인원 임□□ 등 6명
결정사안 한국전쟁 전후 강원도 영월군과 피난지인 경북 봉화군에 거주하던 임□□ 등 6명이 좌익(사상) 혐의로 대한청년단과 국민방위군에 의해 희생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대한청년단과 국민방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