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예비검속 사건(섯알오름) 일제 탄약고에서 학살된 제주의 원혼들

만벵듸 영령 희생터. @제주다크투어

만벵듸 영령 희생터.
@제주다크투어

육지에서 내려온 명령

1950년 6·25 발발 직후 이승만 정부 내무부 치안국은 제주도경찰국을 비롯한 전국 경찰에 요시찰인을 구금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제주도경찰국은 모슬포경찰서를 비롯한 관할 경찰서에 ‘불순분자 또는 요시찰인을 예비검속하고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8월 하순까지 모슬포경찰서는 제주도경찰국의 지시에 따라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모슬포경찰서 사찰계가 예비검속을 실무적으로 주도했다. 예비검속 관련 지시는 대부분 제주도경찰국 사찰과에서 모슬포경찰서 사찰계로 직접 하달되었다. 각 경찰서의 지시를 받은 관할 지서는 예비검속을 실행에 옮겼다. 이 사건의 희생자는 모두 217명으로 조사되었다.

부모 보러 간 딸에게 “너도 죽고 싶으냐”

모슬포경찰서는 관내 예비검속자들을 모슬포 절간고구마창고, 한림 어업조합창고, 무릉지서 창고에 각각 구금했다. 모슬포 절간고구마창고는 이전부터 모슬포경찰서가 유치장으로 사용하던 장소로 예비검속자들이 가장 많이 구금돼 있었기 때문에 경찰서 소속 경찰이 직접 경비를 담당했다.

모슬포 관내 예비검속자들의 구금 상황은 장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난다. 예비검속자들이 구금된 창고에서 가족들의 면회는 일반적으로 금지되었다. 구금자들의 식사는 가족들이 직접 마련해 오거나 경찰서에서 구금자 가족으로부터 양식을 거두어 제공했다. 구금자 가족들이 직접 식사를 제공한 경우는 구금자의 상태를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 신청인 이○희는 부모가 모두 절간고구마창고에 구금된 후, 모슬포경찰서로부터 쌀을 가져오라는 연락을 받고 쌀을 가져갔다.

“부모님이 모두 모슬포경찰서에 연행되고 나서 모슬포경찰서로부터 절간고구마창고로 쌀을 가져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연락은 딱 한 번, 마을 이장을 통해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쌀을 구덕에 지어 창고까지 직접 갔습니다. 창고는 건물이 2개 동으로 돼 있었는데, 한쪽에서는 큰 가마솥을 걸어놓고 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쪽 건물엔 사람들이 갇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갇혀 있는 건물은 문이 열려 있어서 안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까 해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창고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너도 죽고 싶냐!”며 혼을 냈습니다. 밥을 짓고 있던 사람이나 창고를 관리하던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말투나 행동이 너무 고약해서 일반 주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림항 어업창고 옛터 현재 모습. @제주다크투어

한림항 어업창고 옛터 현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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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를 가른 ‘A, B, C, D’

각 경찰서는 구금한 예비검속자들의 과거 범죄 경력이나 그 경중을 조사해 개인별로 심사한 다음 등급을 나누었다. 경찰은 조사 내용을 토대로 구금된 예비검속자 명부를 작성했다. 예비검속자들은 병으로 보석·석방되기도 했으나 대부분 D, C, B, A등급으로 분류되었다. 경찰이 작성한 등급에 따라 군 송치와 석방이 결정되었다. 이들 가운데 D, C등급은 결국 1950년 7월 16일, 그리고 8월 20일경 두 차례에 걸쳐 해병대 당국에 넘겨졌다. 이에 비해 나머지 B, A등급 중 일부가 일찍 풀려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10월까지 한여름을 오롯이 보낸 뒤에야 석방되었다.
당시 무릉지서 창고 경비를 담당했던 참고인 변○○은 구금됐던 예비검속자들의 송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군인이 트럭(GMC)을 무릉지서 창고 앞에 딱 세워놓고, 이름을 부르면서 사람들을 실었습니다. 포승을 하지는 않았는데 분위기는 많이 험악했습니다. 트럭에 타고 있는 군인이 사람들이 트럭에 올라 올 때마다, 고개도 들지 못하게 했습니다. 트럭을 타고 온 사람들이 트럭에 실을 사람들의 명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무릉지서 경찰들은 트럭이 몇 시에 도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창고에 구금된 사람들은 집에서 사식을 제공받았는데, 지서에서 가족들에게 저녁식사를 조금 빨리 가져오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다른 날은 그런 적이 없었는데, 그날만 그랬습니다. 저도 마을에 와서, 해당 가족들에게 그런 지시를 했습니다. 지서에서 트럭이 와서 사람들을 실어 갈 것을 아니까, 가족들한테 식사를 빨리 가져오라고 한 겁니다.”

이러한 진술을 볼 때 비록 예비검속자의 송치나 그 시기는 제주지구 계엄사령부가 결정했겠지만, 석방과 계속 구금 여부, 송치대상자 분류 등은 경찰이 작성한 명단이 토대가 됐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경찰이 예비검속자들을 구금한 뒤 등급을 분류한 사실 그리고 참고인 변○○이 진술한 대로 군인들이 명단을 가지고 창고에 구금 중인 예비검속자들을 호명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있는 섯알오름. @제주다크투어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있는 섯알오름.
@제주다크투어

1차 학살: 1950년 7월 16~20일경, 해병대 모슬포부대

총살은 두 차례에 걸쳐 집행되었다. 먼저 1차 총살은 7월 16일에서 20일 사이, 2차 총살은 8월 20일로 추정된다. 사건 신청인 대부분은 피해자들이 8월 20일(음력 7월 7일)에 희생됐다고 진술했다. 특히 해병대 ○대대장으로 당시 총살집행 명령을 내렸던 김○○은 총살집행 시점을 8월 하순경으로 진술했다.

결국 1차 총살은 해병대 모슬포부대(부대장 소령 김○○)에 의해 1950년 7월 16~20일경에, 2차 총살은 모슬포 주둔 해병대 ○대대(대대장 소령 김○○)에 의해 1950년 8월 20일에 집행된 것으로 판단된다.
1950년 7월 16~20일경의 1차 예비검속자 총살에 참여했던 모슬포부대 제○중대 제○소대 제○분대원 이○○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이○○을 비롯한 20명의 분대원이 함께 트럭에 태워져 총살 집행 장소로 이동했다. 현장에 도착한 후 분대원들은 중대장으로부터 “이곳으로 폭도들을 데리고 올 것이며, 그들을 총살해야 한다”는 연설을 들었다.

“사건 당일 저녁, ○소대 분대원 전원이 연병장에 집합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당시는 인민군에게 서울을 뺏겼다는 정보가 내려온 뒤여서, 매일같이 야간에도 전투태세로 대기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연병장에는 소대장과 중대장도 나와 있었습니다. 분대원들이 모두 집합하자, 분대장이 아무 설명도 없이 분대원들을 트럭에 태웠습니다. 그전에는 어디 공비가 출몰했으니까 어디로 간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사건 당일엔 분대장이나 소대장이 아무 설명도 없이 트럭에 태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1개 분대원이 약 20명 정도로 구성됐는데, ○~○분대원 중에서 약 20명 정도가 분대장과 같이 트럭에 탔던 것 같습니다.

분대장과 같이 탄 트럭이 도착한 곳은 일본 해군 방공호가 있고, 격납고가 여러 군데 있는 비행장 같은 곳이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중대장과 소대장이 현장에 있었습니다. 분명 제가 탄 트럭에 타지는 않았는데, 다른 트럭을 타고 왔던 것 같습니다. 현장에서는 분대별로 줄을 지워 앉히더니, 소대장, 분대장이 총알을 하나씩 나눠줬습니다. 우리는 전투태세로 차에 올라탔기 때문에 모두 총을 가지고 있었지만, 평소 총에는 실탄을 넣고 있지 않았습니다. 총알을 다 나눠주자, 김○○ 중대장이 지금 이곳으로 폭도를 데리고 오는데, 이 폭도들은 빨갱이 앞잡이들이며, 우리 남한이 인민군에 의해 점령돼 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 빨갱이들은 당연 우리들의 적이니까, 한 사람이 한 명씩 사살하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습니다.

잠시 후, 제무시(GMC) 트럭이 한 대 들어오더니, 트럭에서 사람들을 내려, 우리 옆으로 한 명씩 세워놓았습니다. 우리가 일렬종대로 섰으니까, 그 옆으로 한 명씩 세우는 겁니다. 트럭에서 민간인을 내리고, 우리 옆에 세우는 일은 군인들이 했는데, 우리 부대에 근무하는 군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헌병대, 정보대 소속 군인들이 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렇게 민간인들을 다 세우고 나서, 머리 위로 손을 얹으라고 하더니, 우리에게 한 명씩 잡고 걸어가라고 했습니다. 총살 장소로 데리고 간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약 10~20여m를 걸어가니, 직경이 큰 함포가 떨어져서 푹 패인 것처럼, 큰 호가 나타났습니다. 인력으로 파면 그렇게 팔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크고 넓은 호였습니다. 만약 인력으로 팠다면, 파낸 흙더미가 쌓여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한 명씩 민간인에 대해 총살을 집행했습니다. 제가 열대여섯 번째 정도로 했던 것 같습니다.
총살 후 자연적으로 시신이 호 안으로 떨어지게 민간인을 호 근처로 세워놓았는데, 호 안에서 사람 신음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안을 들여다보니, 시체가 쌓여 있는데, 이미 몇 번의 총살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저한테 배당된 민간인은 30~40대 여자였습니다. 총살 준비를 마치고 총을 겨눴는데, 순간 제 뒤에 서 있던 김○○ 중대장이 저를 불러 세웠습니다. 지금 생각에는, 제 총부리가 정확히 겨눠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김○○ 중대장이 “어이! 너 이쪽으로 나와!”라는 명령에 저는 뒤로 물러섰습니다. 당시 김○○ 중대장은 일본 니뽄도를 차고 다녔는데, 갑자기 니뽄도(日本刀)를 꺼내 그 여자를 뒤에서 탁! 찔렀는데, 여자가 한참을 서 있더니 쓰러졌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저쪽에서 또 내 뒤의 군인이 또 사람을 데리고 와서 쏘고 꽥꽥 소리가 나고, 아직 덜 죽은 상태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민간인에 대한 양민 학살이 있었습니다. 내가 산 증인입니다.

총살집행이 끝난 후, 부대로 복귀할 때는 처음 타고 간 트럭을 타지 않았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다른 트럭으로 복귀했는데, 지금 생각에는, 계속 사람들을 실어 오느라 그랬던 것 같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트럭 한 대가 다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민간인을 계속 실어 오는 것 같았습니다.

부대로 복귀 후, 총살당한 민간인들이, 빨치산을 도운 사람들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당시 모슬포에는 농협 창고 비슷한 창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6·25가 터지자, 그 창고로 사람들을 자꾸 싣고 들어간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사람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창고에 수감된 사람들이 빨치산을 돕고 있는 적색분자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총살을 집행한 민간인들이, 그 창고에 가둬둔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으로 빨치산을 도왔던 사람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참고인 이○○, 녹취록 36~58쪽에서 인용)
섯알오름 학살터. 일본군이 1944년 말부터 대정읍 ‘알뜨르’ 지역을 군사 요새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폭탄 창고 터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제주도에 진주한 미군에 의해 폭파됐다. 이때 오름의 절반이 함몰되면서 큰 구덩이가 만들어졌는데 이 구덩이에서 학살이 이루어졌다. @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섯알오름 학살터.
일본군이 1944년 말부터 대정읍 ‘알뜨르’ 지역을 군사 요새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폭탄 창고 터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제주도에 진주한 미군에 의해 폭파됐다. 이때 오름의 절반이 함몰되면서 큰 구덩이가 만들어졌는데 이 구덩이에서 학살이 이루어졌다. @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섯알오름 희생자 추모비. @제주다크투어

섯알오름 희생자 추모비.
@제주다크투어

2차 학살: 1950년 8월 20일, 모슬포 주둔 해병대 ○대대

모슬포 관내 예비검속자 총살은 8월 하순에도 또다시 집행되었다. 이 시기는 북한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유엔군과 대치해 부산․경남지역에 위기 상황이 초래되는 상황과 맞물려 있다. 1950년 8월 20일의 모슬포 관내 예비검속자 2차 총살집행에 대해, 당시 해병대 제○대대장 출신 김○○은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김○○은 총살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어도 집행 후 현장을 직접 확인했다, 그의 진술은 모슬포 관내 예비검속자 2차 총살집행의 지휘·명령계통을 언급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증언이다.

“모슬포 관내 예비검속자 처형은 해병대사령관의 명령을 집행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모슬포 관내 예비검속자 처형은 국방부 → 계엄사령부 → 해군본부 → 해병대사령부를 통해 명령이 내려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병대사령부는 해군본부의 지시를 받았고, 해군본부는 국방부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당시 국방부 장관은 신성모 씨였습니다. 따라서 지휘 책임은 신성모(국방부 장관) → 손원일(해군 총참모장) → 신현준(해병대사령관)으로 이어집니다. 당시 해병대는 1개 연대 규모였으며, 제가 제○대대장으로 모슬포에 근무할 때는 모슬포에 대대가 1개 대대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대장이 직접 사령부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예비검속자 처리 지시는 사령부 정보참모실을 통해 공문으로 받았습니다.

당시 제가 듣기로는 예비검속자들은 한라산 공비 또는 그러한 사람들이 포함된 보도연맹원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찰로부터 보도연맹에 관계돼 검속된 사람들을 인수받아 총살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예비검속자 총살 명령을 받고 이를 실행하도록 제○대대 소속 각 중대에 지시했습니다. 제가 ○대대장 근무 당시 부대대장은 김○○ 대위였습니다. 당시 저희는 모슬포경찰서가 연행해 수감 중이던 예비검속자를 인계받았습니다. 숫자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만, 150~200여 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모슬포경찰서에서는 경찰계통의 지시를 받고 우리 해병대에 예비검속자들을 인계해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찰로부터 인계받은 예비검속자들을 군 트럭을 이용, 모슬포 비행장 동쪽 구덩이로 끌고 가서 총살을 집행했습니다. 총살집행은 제○대대 소속 분대장급 이상의 하사관들이 참여했습니다. 저는 총살집행 시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총살 결과를 사령부에 보고해야 했기 때문에, 총살이 끝난 후, 현장을 확인했습니다. 제가 ○대대장으로 근무하던 시기에 총살집행은 딱 한 번 있었는데, 8월 20일에서 30일 사이로 생각됩니다.”
(김○○, 해병대 제○대대장. 조사시기: 2007. 8. 23. 등)

참고인 김○○은 총살을 집행한 것은 주로 대대에서 분대장급 이상의 하사관들이었다고 진술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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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해병대 제○대대장. 조사 시기: 2007. 8. 23. 등

“○대대 김○○ 부대대장 지휘하에, ○대대 각 중대 분대장 이상 하사관급들이 집행하였음. 시기는 8월 20일에서 30일 사이였고, 총살 인원은 약 150~200여 명 정도였음. 총살집행은 ○대대장으로 근무 당시 단 한 번 있었음.”

총살 명령을 부대 내 하사관들이 집행했다는 진술은 신빙성이 있다. 이는 당시 해병대 3·4기 훈련생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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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병대 3기생, 2006. 8. 19.

모슬포 훈련 당시, 분대장급 이상이 하루 저녁에 없어졌다가 새벽에 돌아왔던 기억이 있음. 평상시 분대장은 훈련병들과 같은 막사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밤에 나갔다 돌아온 것을 알 수 있었음. 어디를 갔다 왔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침에 뒤숭숭했던 기억이 있음. 밤새 총소리를 듣지는 못함.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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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해병대 3기생, 2006. 6. 1.

예비검속자 희생일(추정) 상황 :해병대 훈련 중 8월 20일경, 분대장급들이 차출돼 밤중에 없어졌다가 새벽에 들어온 날이 있었음. 우리 소대에서 분대장 2명(박○○, 이○○)이 차출돼 나갔다 들어옴. 분대장들의 바지는 젖어있었고, 들어오면서 M1총을 던지더니 그대로 쓰러짐. 그날은 기상신호가 없었고, 훈련생들도 늦잠을 잘 수 있었음. 훈련 중 기상신호가 없었던 날은 그날 하루 뿐이었음.
분대장의 고백 : 강원도 홍천 가리산에서 전투 중 전사자들을 화장시키는 과정에서, 박○○ 분대장이 제주에서 훈련 당시, 딱한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함. 죄수들을 총살했다는 얘기였음.

이 증언을 한 해병대원 진○○는 사건의 날짜와 내용을 비교적 잘 기억했다. 그 이유는 자신이 훈련을 마치기 이틀 전인 8월 27일에 집에서 식구들이 모두 면회를 왔는데, 누나와 부인이 울고 있어 이유를 물으니 일주일 전쯤에 둘째 매형과 처남이 모슬포에서 죽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라고 진술했다. 진○○는 이러한 사실을 듣고 나니 1주일 전에 분대장들이 말도 없이 없어졌다가 다음 날 아침에 돌아온 일이 생각났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이 왜 희생되었나?

지금까지 제주지역 예비검속 희생자들은 정부가 1949년 6월 과거 좌익활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자수·전향시켜 결성한 국민보도연맹의 가입자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조사결과 제주 모슬포 관내 예비검속자들이 보도연맹원이었다는 근거는 찾을 수 없었다.

경찰이 작성한 예비검속자명부의 ‘범죄개요’ 항목에는 해방 직후의 인민위원회나 제주4·3사건 관련 활동 내용이 대부분이며, 보도연맹(원)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물론 육지의 기준에 따르면, 과거 제주4․3사건 관련 경력이 성격상 보도연맹원 가입 대상으로 포함될 수 있지만, 적어도 모슬포경찰서에서는 이들을 보도연맹원으로 분류해 예비검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제주지역 경찰은 전쟁 발발 이전부터 주로 제주4․3사건 관련자를 대상으로 요시찰인 명부, 자수자·귀순자 명부, 도피자 명부 등을 작성, 관리해 왔으며, 이는 전쟁 후 예비검속자 명부의 주요한 기초자료가 되었다. 당시 모슬포 경찰서 사찰계에 근무했던 참고인 김○○은 6·25 전쟁 직후 상부의 지시에 따라 “요시찰인들을 잡아들여서 극렬분자는 구속하고 나머지는 석방했다”고 진술했다.

전체적으로 모슬포경찰서가 작성한 예비검속자들의 ‘범죄 개요’는 해방 후 인민위원회 활동부터 1947년 3·1사건, 1948년 2·7사건, 같은 해 5·10 선거반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제주4·3사건 관련 내용이 중심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모슬포경찰서가 예비검속을 실시한 이유, 곧 가해 이유는 주로 피해자들의 제주4·3사건 관련 경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예비검속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전국적으로 ‘요시찰인’, ‘불순분자’를 구속해 전시 치안 질서를 안정시키는 목적에서 실시되었지만, 제주에서는 주로 4·3사건 관련자 중 살아남은 사람을 포함한 일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제거로 구체화됐음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신청인이 주장하는 희생 이유를 보면 제주4·3사건과 직접 관련 없는 내용이 더 많다. 여기에는 경찰, 서북청년단, 경찰 협조자의 무고나 모략 등 개인적인 이유(18건), 전쟁 발발 후 마을 유지급 검거 차원(1건), 기타 다른 사람과 이름이 비슷한 이유(1건) 등이 해당한다. 나아가 어떠한 이유도 없이 무고하게 희생되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44건이나 된다.

따라서 예비검속 희생자 가운데는 실제로 제주4·3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음에도 다른 개인적인 이유로 억울하게 희생된 경우도 상당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경찰 참고인들도 예비검속 당시 경찰에 미움을 받거나 개인감정 때문에 죽은 사람이 있다고 진술했다. 모슬포경찰서 두모지서에 근무했던 참고인 고○○은 사건 당시 “도망갈 사람은 이미 다 도망가고 한라산 공비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지방에서 얌전히 있던 사람들이 끌려가서 다 죽었다”고 진술했다. 이러한 사실은 모슬포경찰서의 예비검속자 등급 사정과 분류가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자의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만벵듸 공동장지. @제주다크투어
만벵듸 공동장지. @제주다크투어

만벵듸 공동장지.
@제주다크투어

유족회의 진실규명 활동

유족들은 1950년 8월 20일 사건 발생 당일부터 총살 현장에 들어가 유해를 수습하려고 했으나 군경 당국의 출입 통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56년 3월 말 희생 장소인 남제주군 대정면 상모리 섯알오름 탄약고터가 군부대 확장공사로 붕괴돼 유해가 드러나자 군 당국은 유족들의 요구를 수용, 유해 수습을 허가했다.
한림 어업조합창고 수감 희생자 유족들은, 군 당국과의 협의를 거치지 않고 유해를 수습, 1956년 3월 30일 유해 63구를 한림면 금악리 2754번지 부지에 안장했다. 이곳이 현재 ‘만벵디공동장지’로 조성된 묘역이다. 이후 유족들은 유족회를 결성하고, 2001년 제51주기 위령제를 시작으로 매년 음력 7월 7일 만벵디공동장지에서 위령제를 개최하고 있다.

1956년 4월 모슬포 절간고구마창고 수감 희생자 유족들은 군 당국에 시신 인도를 요구, 당시 육군 제1훈련소장(백인엽)으로부터 허가를 받고 유해를 수습 5월 18일 수습 유해 132구를 대정읍 상모리 586번지 부지에 안장하고 ‘백조일손지지’라 명명했다. 이후 2000년 9월 총살 현장에 대한 발굴 작업이 한 차례 더 실시됐지만 추가로 유해가 수습되지 않았다. 유족들은 1993년 유족회를 창립하고, 제43주기 위령제를 시작으로 매년 음력 7월 7일 백조일손지지 묘역에서 위령제를 거행하고 있다.

1956년 희생 장소에서 유해를 수습․안장한 유족들은 1960년 제35회 임시국회에서 ‘양민학살 진상조사에 관한 결의(안)’이 가결되자 민·참의원 의장에게 희생자의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또 국회양민학살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 진상규명 신고서를 접수,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요구했다. 유족들이 오랫동안 노력했지만 1961년 5·16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유족회의 묘비가 파괴되고, ‘공동 묘역 해체 명령’이 통보되는 등 진상규명 활동은 탄압을 받았다.
유족들은 1990년대 들어 과거사 청산운동이 활발해지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유족회를 창립하고, 본격적인 진상규명 작업을 벌였다. 특히 백조일손유족회는 1994년 2월 28일 백조일손 증언 채록 및 자료 정리 사업에 착수했고, 2000년 2월 12일 ‘예비검속 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9인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2월 17일 국방부를 방문해 ‘예비검속 사건’의 조사를 요청했다.

이어 6월 28일 김대중 대통령에게 국방부와 법무부의 사건 조사를 촉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2001년 4월 27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으로부터 ‘모슬포 관련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계엄사 지시 관련 자료, 경찰계통 예비검속자 지시 관련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행자부·법무부·국방부·검찰청·국정홍보처 등에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활동해야 하므로, 사건 조사에 장기간 소요됨을 양지 바람’이라는 내용의 회신을 받았다. 유족회는 그 뒤에도 꾸준한 진상규명 활동을 해 오다가 2005년 12월 1기 진실과화해위원회가 출범하자 진실규명 신청서를 접수했다.
사건명 제주 예비검속 사건(섯알오름)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제주 예비검속 사건(섯알오름)〉(1기)
지역 제주도 남제주군 상모리 섯알오름
사건 발생일 1950년 7월 16~20일경, 8월 20일
진실규명 신청인 김○열 외 105명
진실규명 결정일 2007년 11월 13일
진실규명 인원 강○도 외 217명(희생자: 217명)
결정사안 강○도 외 217명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제주지역 경찰에 예비검속돼 1950년 7월 16~20일경, 8월 20일에 제주도 남제주군 상모리 섯알오름에 위치한 일제시대 탄약고로 쓰이던 굴에서 해병대 사령부 산하 모슬포부대 ○중대 ○소대 소속 부대원 및 동 사령부 산하 ○대대 소속 분대장급 이상의 하사관들에 의해 각각 집단 총살당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제주도경찰국, 모슬포경찰서 및 관할 지서 경찰, 의용소방대원.
해병대사령부 산하 모슬포부대 제 ○중대 ○소대 소속 부대원 및 동 사령부 산하 제 ○대대 소속 분대장 급 이상의 하사관들.
참고자료 영상: KTV 국민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