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민간인 희생 사건 산골 마을에 살면 빨치산,
평지 동네에 살면 부역자

한국전쟁 때 산이 많은 광산군 본량면과 삼도면 주민은 ‘빨치산’으로 몰렸고 평지인 평동면, 효지면, 대촌면 주민은 ‘좌익혐의자’ 또는 ‘부역자’로 몰려 경찰에게 살해당했다. 사진은 본량면 전경. @광주광역시

한국전쟁 때 산이 많은 광산군 본량면과 삼도면 주민은 ‘빨치산’으로 몰렸고
평지인 평동면, 효지면, 대촌면 주민은 ‘좌익혐의자’ 또는 ‘부역자’로 몰려 경찰에게 살해당했다.
사진은 본량면 전경. @광주광역시

산에는 토벌대, 마을에는 경찰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광주지역에는 1950년 7월 23일 경찰부대가 후퇴하고 같은 날 인민군이 진입했다. 광주에 주둔한 인민군은 치안을 장악하고 당시 광주형무소에 복역 중인 좌익계열 및 일반죄수 300여 명을 풀어주었으며, 광주에서 점령 정책을 펴나갔다.
1950년 10월 3일 경찰부대가 광주 시내에 들어와 수복하자 미처 광주를 빠져나가지 못한 인민군과 지방좌익은 무등산, 함평 불갑산, 지리산, 화순 백아산, 광양 백운산 등으로 입산해 저항을 이어갔다. 치안이 잡히기 시작한 것은 그해 10월 10일 국군 11사단 20연대가 광주에 주둔한 다음부터였다. 국군 제11사단 20연대가 산에서 공비 토벌을 할 때 경찰은 광산군(현 광주 광산구)지역에서 빨치산에게 협조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부역자 색출과 좌익계 주민 검거에 나서기 시작했다.
사건 조사 당시 신청된 사건발생장소(조사보고서 510쪽 수록)

사건 조사 당시 신청된 사건발생장소(조사보고서 510쪽 수록)

1970년대 지도에 나타난 광주시와 광산군(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구는 광주의 서북부에 위치하며 높이 100m 이내의 구릉지와 평야가 전체 지형의 90%를 차지한다. 광산구의 동쪽은 영산강을 경계로 광주와 인접하고, 남쪽으로는 황룡강과 영산강 유역의 광활한 평야가 나주평야와 연결되며 나주와 경계를 이룬다. @국토정보맵

1970년대 지도에 나타난 광주시와 광산군(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구는 광주의 서북부에 위치하며 높이 100m 이내의 구릉지와 평야가 전체 지형의 90%를 차지한다.
광산구의 동쪽은 영산강을 경계로 광주와 인접하고, 남쪽으로는 황룡강과 영산강 유역의 광활한 평야가 나주평야와 연결되며 나주와 경계를 이룬다. @국토정보맵

1988년 광산군이 광주직할시에 편입돼 광산구가 되었다. 광주광역시의 5개 구 중에서 면적이 가장 넓다.  @광주광역시

1988년 광산군이 광주직할시에 편입돼 광산구가 되었다.
광주광역시의 5개 구 중에서 면적이 가장 넓다.
@광주광역시

빨치산에게 살해된 김 씨 형제

1949년 7월 6일, 광산군(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산리 대야마을에서 면장과 이장을 하던 김 형제가 빨치산에게 살해되었다. 형은 이장이었고, 동생이 면장이었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이○수(20세)는 “이장은 모가지를 잘라 죽이고 면장은 총으로 쏴서 죽였다”고 증언했다. 이튿날 삼도지서 대산출장소 경찰이 이 사건을 조사한다며 마을주민들을 집합시켜 놓고 모두 눈을 감으라고 한 다음 주민 중에서 장○숙(35세, 농업), 김○호 등 4명을 대산출장소로 끌고 갔다. 증언
닫기
참고인 김○선 진술녹취(2008. 7. 9.)

“1949년 7월 6일(음력 6월 10일) 저녁, 빨치산이 우리 마을에 내려와 면장과 이장을 하던 김 씨 형제를 죽였다. 다음날 이를 조사한다고 삼도지서 대산출장소에서 경찰이 나와 장○숙 등을 끌고 갔다.”



한 달이 지난 8월 21일, 장○숙의 가족이 함평과 나주로 갈라지는 길목인 삼도면 삼거리에서 시신을 수습했다. 시신 수습을 도왔던 김○은(16세, 마을주민)은 “8월 21일(음력 7월 27일) 12시쯤에 갔는데 시신 4구가 있었다”고 했다.

장○숙과 김 씨 형제의 죽음이 무슨 관련이 있었을까? 장○숙의 부인 홍○순(20세)은 마을 사람 가운데 남편과 감정이 좋지 않은 누가 밀고한 거라고 했다. “빨치산이 마을로 내려왔을 때 남편이 빨치산에게 닭을 잡아 준 일이 있었다. 마을 사람 중 누군가 이 사실을 경찰에 밀고해 남편을 끌고 갔다.” 한편으로 사건 당시 20세였던 마을주민 이○수는 “여긴 김 씨 집성촌이다 장○숙은 타성(他姓)이라는 이유로 김 씨 마을 사람들과 감정이 좋지 못했다”고 했다.

30대 농부이자 가장인 장○숙은 빨치산이 마을로 내려와 밥을 해내라, 닭을 잡아라, 요구하면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을 것이다. 식량 제공을 거부했다가는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아 죽는 상황이었다. 빨치산이나 경찰이나 누구든 총을 들이대는 쪽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는데도 주민들은 빨치산의 총 앞에서 부역자가 되고, 경찰의 총 앞에서 반동이 되었다. 누구로부터든 살해될 위협에 놓여 있었다.
대야마을.

대야마을.

주막에서 술 먹는 주민들을 수상하다며 연행

1950년 12월 8일 나주군 노안면 양천리 주막에서 주민 7명이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삼도지서(광산군 삼도면) 경찰이 순찰하다가 신고 없이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 바로 연행해갔다. 7명 중 한 명인 이○식의 가족이 사식(아침밥)을 준비해 삼도지서로 면회하러 갔는데, 경찰이 하는 말이 “끌고 오다가 삼도리 동촌마을에서 죽였다”는 것이었다. 현장에 가보니 끌려간 7명이 고스란히 시신이 돼 있었다. 증언에 따르면 경찰이 술 마시던 사람을 연행해 4km 정도 끌고 가다가 사건 발생 현장에서 총살할 때, 이 중 한 사람이 “삼도지서에 누구 순경이 내 매제다”라고 소리쳐서 살았다고 한다. 증언
닫기
참고인 양○요 진술조서(2008. 2. 29.)

“이 얘기는 이○재 씨가 직접 해준 얘기다. 지금은 돌아가셨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당시 계엄령하에서 3명 이상이 한자리에 모이려면 사전에 군경에 신고해야 하는 상황을 미루어 볼 때 경찰이 주민들이 주막에서 술 마시는 것을 보고 신고 없이 모였으니 수상하다며 끌고 가 살해한 것으로 추정했다.
양천리.

양천리.

빨치산 있는 곳을 대라며 물고문

삼도면 양동리 복만마을은 함평군 월야면과 경계해 ‘빨치산의 이동 경로 증언
닫기
참고인 양○진 진술녹취(2008. 7. 10.)

“함평 나산면과 나주 문평이 경계인 곳에 구절봉이라는 산이 있었는데, 이곳에 빨치산 부대가 있었다. 구절봉에서 장성 태청산으로 갈 때 우리 마을 앞으로 지나갔다.”

로 이용되던 곳이며 부역혐의자가 많다고 알려져 경찰의 주목을 받던 지역이었다. 1951년 5월 31일 광산경찰서 소속 경찰이 빨치산을 색출한다며 양동리 복만마을에 진입해 마을 사람들을 집결시켰다.

“삼도지서 경찰이 우리 마을에 잠복하고 있었는데 야간이어서 그런지 신호가 맞지 않아 (경찰끼리) 서로에게 사격을 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경찰 1명이 죽었다고 한다. 경찰은 (이를 은폐하고자) 빨치산의 공격에 의한 피해라고 상부에 보고해 1951년 5월 31일 광산경찰서에서 빨치산을 색출한다며 대규모 경찰을 마을로 보냈다고 한다. 삼도지서 경찰이 여길 자주 나오니까 나중에 (이 사건에 대해) 물어봤는데 신호가 안 맞아서 오인 사격이 있었다고 말해주었다.”(참고인 박○구, 당시 22세, 마을주민, 2008. 8. 7)

당시 집합 현장에 있었던 양○진(16세, 마을주민)은 “마을을 포위한 경찰은 총을 쏘아대고 겁을 주면서 우리를 시정에 모아놓았다. ‘굴을 봤느냐, 젊은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봤느냐’며 계속 (주민들에게) 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박○병을 포함한 몇 명을 뽑아내서 몽둥이로 구타하고 코에 물을 부으면서 ‘빨치산이 어디 있느냐’며 자백을 강요했다. 박○병은 고문을 견디기 힘들어 이를 면하려고 빨치산 위치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 것 같았다. 그러나 경찰이 (박○병을) 끌고 가 이를 확인해보니 말한 것과 달리 빨치산이 없자 그를 죽여버렸다”고 증언했다.(참고인 양○진 진술, 2008. 7. 10)

현장에 있었던 박○구(15세, 마을주민)도 “나도 시정 앞에 집결했었다. 동네 앞에 도랑이 흐르는데 경찰이 이곳에서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물고문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경찰이 박○병을 산으로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경찰이 마을에서 철수하자 박○병 가족은 마을에서 2km 정도 떨어진 인근 야산 각시바위에서 시신을 수습했다.

집합에 안 나왔다고 빨치산으로 몰려

1951년 2월경 본량지서 경찰은 덕림리 일대에서 빨치산을 색출하기 위해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호별 수색을 했다. “복만마을에 사는 류○렬씨로부터 복만마을에서 호별 수색 후 너희 마을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는 빨치산 찾는다고 동네동네 다 다녔다. 목적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니라 빨치산 색출하려고 동네마다 다니는 것 같았다.” [신청인 류○열 진술조서(2008. 3. 12.)]
1951년 2월 19일 본량지서 경찰은 덕림리 수성마을에 들어와 총을 쏘면서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들을 집결시켰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류○광(당시 16세, 마을주민)의 진술이다.

“경찰은 (마을주민들을 향해) ‘마을 앞마당에 다 나와라, 안 나오면 죽여버리겠다’며 총을 쏘면서 주민들을 위협했다. 주민들이 당산나무 아래에 모이자, 경찰은 ‘여기 없는 사람은 빨치산일 것’이라며 호별 수색을 시작했다. 잠시 뒤 경찰은 류○현과 류○현을 밧줄로 묶어 집에서 끌고 나왔다. 두 사람은 경찰에게 끌려가면서 우리에게 ‘자네들이나 잘 살라’고 말했다.”

마을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다리 통증으로 지팡이를 짚고 다닐 정도로 거동이 매우 불편해 집합에 나오지 못했고, 또 한 사람은 경찰이 집결 명령을 할 때 산에서 땔감을 해가지고 내려온 상태여서 그 명령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게다가 지팡이를 짚은 사람은 수염이 덥수룩했고, 증언
닫기
신청인 류○숙 진술조서, 2008. 6. 11.

“우리아버지는 수염이 더부룩하게 나 있었고 다리가 아파서 지팡이를 들고 다닐 정도로 거동이 매우 불편했다.”

나무하고 내려온 사람은 바지에 흙이 묻어 있었다. 증언
닫기
신청인 류○열 진술조서, 2008. 3. 12.

“당시 무명바지를 입었는데 무명바지는 흙물이 배면 잘 빠지지 않는다.”

광산·광주경찰서 경찰과 의용경찰이 주민 살해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들 사건의 가해자가 광산경찰서와 광주경찰서 소속 경찰과 희생자의 거주지 관할지서 경찰이라고 밝혔다. 의용 경찰도 경찰의 보조 인력으로 경찰의 지휘·감독 아래 가해에 가담한 것으로 판단했다. 당시 광산경찰서 사찰계에 근무한 경찰관의 증언에 따르면 보통 지서 근무인원은 경찰 5, 6명과 의경 30~40명 정도로 구성돼 있었고 의경은 지서장, 이장, 구장 등의 추천으로 서장이 임명했으며, 관할 지서의 지시를 받고 활동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보면 산이 많은 광산군 삼도면과 본량면 주민은 ‘빨치산’으로 몰렸고, 평지인 평동면, 효지면, 대촌면 주민은 ‘좌익혐의자’ 또는 ‘부역자’로 몰려 경찰에게 살해당했다. 조사결과 신원이 확인됐거나 추정된 피해자는 장○숙 등 26명이었다.
사건명 광주 민간인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광주 민간인 희생 사건(1)〉(1기)
지역 광주광역시 일부 지역(옛 전남 광산군)
사건 발생일 1949년 2월부터 1951년 10월
진실규명 신청인 박○열 외 15명
진실규명 결정일 2008년 11월 25일
진실규명 인원 장○숙 등 23명(확인·추정 피해자: 23명)
결정사안 1949년 2월부터 1951년 10월 사이, 광산경찰서·광주경찰서 소속 경찰이 광주광역시 일부 지역(옛 전남 광산군)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빨치산, 좌익혐의자 또는 부역자로 몰아 법적 절차 없이 현장에서 살해하거나 지서 등에 연행한 후 사살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광산경찰서·광주경찰서 소속 경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