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신안군 민간인 희생 사건(1) - 임자면 진리교회 적대세력 사건을 중심으로 좌익으로 돌변한 마을 사람들이
교회 신자들을 살해했다

전남 신안군 임자도와 임자대교. @신안군

전남 신안군 임자도와 임자대교.
@신안군

대한민국 섬의 25%는 전남 신안에 있다

전남 신안군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자치단체로, 대한민국 섬의 4분의 1 이상이 신안군에 집중돼 있다. 동서 간 79.3km, 남북 간 65.6km에 걸쳐 모두 1,025개의 섬(유인도 72개, 무인도 953개)이 바다에 흩뿌려져 있다. 한국전쟁 당시 신안은 무안군에 소속돼 있었다. 당시 무안경찰서는 목포에 있었고, 신안의 육지 부분을 관할했다. 나머지 섬 부분은 목포경찰서 관할이었다.

신안은 행정체계가 복잡하고 같은 행정구역 내에서도 생활·문화 권역이 서로 달랐다. 다만 조선시대 ‘농지탈환 운동’부터 일제강점기 ‘암태도 소작쟁의’까지 300년을 면면히 내려온 농민 운동의 역사는 신안지역 전체의 공통된 경험이었다. 조선 후기부터 이어져 온 지주와 소작인의 갈등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증폭됐고 한국전쟁 기간에 폭발해 극단적인 증오와 폭력으로 이어졌다. 전남은 한국전쟁 중 가장 많은 민간인 피해를 낳은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신안은 영광, 영암 다음으로 전남에서 민간인 피해가 컸던 곳이다.
신안군 14개 읍면의 위치.

신안군 14개 읍면의 위치.

학살의 시작, 국민보도연맹 사건

한국전쟁 발발 후 무안 경찰은 1950년 7월 중순까지 관내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예비 검속해 관할 지서를 거쳐 무안경찰서에 구금한 뒤 목포형무소로 이송했다. 목포형무소에 일시 구금된 보도연맹원들은 1950년 7월 13~23일 전남 경찰국 경비선인 금강호에 실려 목포항을 떠나 신안군 비금면 앞바다로 끌려나간 뒤 바다에 수장되었다. 이튿날인 7월 24일 인민군이 목포를 점령했다. 인민군은 소규모로 신안군에 며칠 동안 머물다가 목포로 돌아갔다. 이후 신안지역은 지방좌익들의 세상이 되었다. 그중에는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자의 유가족도 포함돼 있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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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주○○(1933년생, 당시 16세) 진술

“가해주체는 마을 좌익이었다. 한국전쟁 전 보도연맹원들이 목포로 잡혀가 죽고 그 유가족들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좌익이 되었다.”

지방좌익들의 세상이 된 임자면

신안군에서 발생한 국민보도연맹 사건, 적대세력 사건, 부역혐의 사건 등 한국전쟁 전후 신안지역 희생 사건의 희생자는 1,6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특히 신안군 임자면은 당시 주민이 1만여 명이었는데, 한국전쟁 전후 희생자가 1,300명에 달했다. 지방좌익에 의한 임자면 민간인 희생 사건은 1950년 7월 지방좌익들이 임자면을 점령한 이후부터 발생했다.

가장 먼저 공무원, 경찰, 부유층이 희생되었다. 지방좌익들은 이들을 진리 농협창고에 가두었다가 며칠 후 진리선착장에서 배에 태워 진리 앞바다에 수장시켰다. 이후 추석이 지난 무렵(양력 10월 4일)을 전후해 앞서 희생된 우익인사의 가족들까지 연달아 희생되었다. 이들은 진리 앞바다에 수장되거나 대기리 백산들에 매장되었다. 좌익들의 민간인 살해는 임자면이 수복되는 1950년 10월 19일까지 이어졌다. 10월 5일 임자면 진리교회 장로 이○일의 가족들이 희생됐고, 진리교회 신자들을 포함해 그들의 가족들도 좌익들에게 희생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신안 임자도와 임자대교.  @신안군청

신안 임자도와 임자대교.
@신안군청

기독교 신앙이 터를 잡은 신안군

신안군은 기독교 신앙의 근거지가 됐는데, 그 중심에 문준경이 있었다.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에서 태어난 문준경은 임자면 정근택과 결혼했고, 암태도 소작쟁의가 일어나던 시기에 신안을 떠나 목포로 가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후 성결교회의 전도사가 돼 신안지역의 섬을 돌아다니며 곳곳에 교회를 개척해 섬마을 교회의 어머니로 불렸다.

좌익세력은 군경과 그 가족, 공무원, 지역 유지 등과 함께 기독교 신자들을 주요 살해 대상으로 보았다. 한국 기독교는 한반도에 공산주의가 등장하는 1920년대부터 반공의 입장을 분명하게 유지했다. 기독교 지도자들뿐만이 아니라 전국 모든 기독교인에게 반공주의가 퍼져 있었다. 이로 인해 기독교는 공산주의와 마찰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암태도소작쟁의 기록화. @신안군

홍성담, 전정호, 박성우 화백이 그린 암태도 소작쟁의 기록화.
@신안군

피땀으로 세운 예배당을 빼앗기고…

진리교회는 한국 개신교 최초의 여성 순교자이며 ‘섬 선교의 어머니’로 불리는 문준경 전도사가 1932년에 전남 신안군 임자면 진리에 설립했다. 문준경 전도사의 노력으로 임자면에서 신도들이 늘어났다. 같은 마을주민이었던 참고인 서○○(당시 13살)은 “진리교회는 한국전쟁 전후 뛰어놀 곳이 없었던 아이들의 놀이터 같은 장소로, 임자면 어린아이들이 진리교회를 다녔다”라고 할 정도로 진리교회는 마을에서 친숙한 공간이었다.

인민군 점령기에 신안군 임자면 좌익들은 진리교회 예배당을 빼앗았다. 당시 좌익세력은 기독교를 적대시해 예배당을 폐쇄하고 사무실로 활용해 신자들이 예배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신자들이 예배를 이어가자 좌익들은 진리교회의 장로 이○일과 집사 이○성을 목포 정치보위부로 압송했다. 이때 증도 증동리교회에 있던 문준경 전도사도 1950년 9월 27일 목포 정치보위부로 압송되었다. 9·28 서울 수복으로 좌익들이 모두 목포에서 철수했고, 압송된 이들도 풀려났다. 이후 문준경 전도사는 증도로, 이○일 형제는 임자면으로 돌아갔다.
문준경 전도사.

문준경 전도사.

문준경 전도사 순교시비.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문준경 전도사 순교시비.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증도 문준경기념관. @신안군

증도 문준경기념관.
@신안군

백산들에 세워진 순교기념비.

백산들에 세워진 순교기념비.

진리교회(오른쪽)와 순교기념탑.

진리교회(오른쪽)와 순교기념탑.

예배 중에 끌려나가 희생된 신자들 - 신안군 임자면 진리교회 희생 사건

1950년 10월 4일 저녁 이○일의 집에서 예배가 열렸다. 그날 모인 사람은 모두 20명으로 이○일 가족 12명과 일반 신자 8명이었다. 기도와 찬송이 조용히 이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좌익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예배를 보던 이○일의 가족들은 포승줄에 묶여 대기리 백산들로 끌려갔다. 이○성의 딸 이○순은 그때 친구 집에 가 있어 백산들로 끌려가지 않았다. 좌익들은 이〇일 가족을 죽창 등으로 살해한 후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매장하고 다음 날 새벽 현장을 떠났다. 돌아가던 좌익들이 길에서 울고 있는 이○순을 발견하고 몽둥이로 구타해 살해한 후 갯벌에 시신을 유기했다.

희생된 이○일의 장남 이○○는 이미 결혼해 목포에 살고 있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이 있은 뒤 1950년 10월 19일 해군 백남표 소령의 부대가 임자면을 수복할 때 이○○도 안내 역할로 함께 들어왔다. 당시 이○○는 부역자 색출위원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왔다. 이○○은 자신의 가족을 몰살시킨 자들이 낯익은 마을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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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인 이○균(1963년생), 2022. 6. 8. 진술

“아버지 이○○의 말에 의하면 좌익사상에 물든 마을 부역자들이 가족들을 몰살했다. 좌익들은 얼굴을 알 수 있는 마을 사람들이고 전쟁 후 돌변했다. 평소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을 밤에 데려가 죽이는 아비규환의 상황이었다.”

가해자들은 소작농 출신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지역에서 온 좌익들에게 의식 교육을 받은 터였다.

그러나 이○○은 평소 존경하던 문준경 전도사가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해야 한다는 말을 생각하고, 책임자에게 이들을 살려 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가족들이 희생자들 가운데 갯벌에 버려져 시신을 찾지 못한 이○순을 제외한 12명의 시신을 수습해 교회장을 치렀다. 교회의 다른 신자들도 이○일 가족이 살해된 1950년 10월 5일 전후로 희생되었다. 진리교회 사건의 희생자는 진리교회 신자 48명과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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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인 이○균(1963년생), 2022. 7. 5. 진술

“진리교회에서 예배 중 48명이 한꺼번에 끌려갔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이○일 가족 12명은 1950년 10월 4일 밤늦게 끌려가 10월 5일 새벽에 희생되었고 이○순은 10월 5일 길에서 희생되었다. 나머지 35명은 이○일 가족 희생 전후로 희생되었다고 생각한다.”

함께 신자의 가족들까지 총 64명이다.
임자진리교회 48인 순교기념탑. @신안군

임자진리교회 48인 순교기념탑.
@신안군

“용서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하다

그 사건 이후 이○○은 마을의 이장이 돼 부역자들을 보호하는 일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나중에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됐는데, 마지막에는 고향에 부임했다. 이때 이곳 주민들은 성자가 돌아왔다고 환영했다고 한다. 가해자들은 이○○에게 이○일 가족과 진리교회에 다니던 마을 사람들을 죽인 사실을 이실직고한 후 참회했고, 이○○은 그들을 용서했다고 한다. 이〇〇의 아들인 이〇균도 목사가 돼 2016년부터 진리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다.
신안 진리교회 희생 사건 발생 장소.

신안 진리교회 희생 사건 발생 장소.

신안 진리교회 희생사건 발생 위치.

신안 진리교회 희생사건 발생 위치.

신안군 지도.

신안군 지도.

신안 임자도 백산 솔밭 현장. 2017년 성결교인들이 “용서하라” 기념비를 세웠다.

신안 임자도 백산 솔밭 현장. 2017년 성결교인들이 “용서하라” 기념비를 세웠다.

사건명 전남 신안군 민간인 희생 사건(1) - 임자면 진리교회 적대세력 사건을 중심으로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전남 신안군 민간인 희생 사건(1) - 임자면 진리교회 적대세력 사건을 중심으로〉(2기)
지역 전남 신안군 임자면 진리
사건 발생일 1950년 8 ~ 10월
진실규명 신청인 이○균 외 4명
진실규명 결정일 2022년 11월 29일
진실규명 인원 김○례 등 64명
결정사안 한국전쟁 발발 이후 1950년 8월부터 1950년 10월 사이 전남 신안군 임자면 진리 주민 64명이 기독교인, 청년, 우익인사와 그 가족, 경제적으로 부유하다는 이유 등으로 지방좌익에 의해 희생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지방좌익
참고자료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진실화해위원회 연구용역보고서 《한국전쟁 전후 기독교 탄압과 학살 연구》,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