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영암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1)-학산면을 중심으로 들이 넓을수록 원한이 깊고,
산이 깊을수록 빨치산이 무서웠다

한국전쟁 당시 참혹한 희생이 벌어진 상월마을 전경 @디지털영암문화대전

상월마을 전경.
@디지털영암문화대전

들에서 산으로 이어진 영암의 좌우대립

전남 영암군은 남쪽의 월출산이 화려한 기암괴석을 뽐내고, 산골짜기의 물이 영산강과 만나 흐르다가 목포와 해남을 비집고 나가 바다로 풀려난다. 좌우 대립의 역사는 거꾸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넓은 들에는 일제강점기부터 소작농과 지주의 갈등이 만연했고, 좌우 대립의 씨앗이 뿌려졌다.

해방이 되자 좌익들은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 후퇴 시기에는 무안과 목포의 인민군들과 지방좌익들이 하천의 수로를 따라 역시 산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월출산과 국사봉을 비롯한 영암군의 산악지대는 빨치산의 큰 터전이 되었다.

해방 직후 영암지역에서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농민과 일반 대중을 위한 강연과 연설이 이어지고 연극 공연이 열렸다. 독서회가 조직되고 유인물과 삐라가 뿌려졌다. 그러나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영암지역 좌익단체의 활동은 약해졌다. 1947년 3·1절 기념행사 시위행진 실패 이후 좌익단체와 활동가들은 지하로 숨어들거나 빨치산이 되었다.

영암에서는 이미 1949년부터 빨치산과 경찰의 충돌이 잦았다. 좌익에 맞서 우익세력은 대한청년단과 대한부인회 등의 단체를 조직했다. 이렇게 전쟁 전부터 영암지역에서 좌우대립이 깊어졌다.
월출산 천황봉에서 본 덕진면 들녘 풍경. @디지털영암문화대전

월출산 천황봉에서 본 덕진면 들녘 풍경.
@디지털영암문화대전

‘숙청’과 ‘토벌’ 사이에서 희생당한 영암 주민들

전쟁이 발발하자 좌우 대립은 곧 민간인 학살로 이어졌다. 먼저 경찰이 보도원맹원들을 살해했다. 1950년 6월 말부터 영암 경찰이 관내 지서별로 보도연맹원 등을 예비검속해 영암읍 공회당에 구금했다가 7월 15일과 22일 영암군 금정면 연소리 덤재, 연보리 차내마을 뒤 야산에서 집단 살해했다.

7월 23일 영암경찰서가 목포와 강진으로 후퇴하고 그와 동시에 인민군 일부가 영암에 들어왔다. 바로 이어서 24일에 인민군이 영암지역을 완전히 점령했다. 인민군은 곧바로 ‘반혁명 세력’ 숙청에 나섰다. 인민군 정치보위국 아래 치안 조직이 앞장서고 인민위원회, 민청, 여맹 같은 사회단체들이 가세했다.

주요 숙청 대상자는 지주, 경찰, 공무원들이었다. 이들은 분주소 등으로 끌려가 ‘인민재판’을 받거나 ‘즉결처분’되었다. 인민군이 후퇴할 때가 되자 숙청이 더욱 거세졌다. 1950년 9월 말부터 11월에 이르는 시기에 우익인사 개인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까지 ‘반동가족’으로 지목돼 몰살당하는 사건이 다수 발생했다. 인민군과 지방좌익은 퇴각하면서 영암내무서로 사용하던 경찰서 건물을 불태우고 영암내무서, 덕진분주소 등지에 감금돼 있던 주민들을 덕진면 금강리에서 총살했다.

1950년 10월 3일 전남경찰국 경찰이 광주에 진주했다. 곧이어 10월 6일에는 영암 경찰이 영암읍을 수복하고 의경을 모집해 토벌대를 꾸려 영암지역 수복 작전을 전개했다. 경찰뿐만 아니라 국군 11사단 20연대 3대대도 1950년 10월 30일부터 영암 일대에서 ‘공비 소탕 작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이 ‘빨치산’으로 몰려 현장에서 사살되거나 ‘부역자’로 지목돼 희생되었다.

또 월출산, 국사봉 등지의 빨치산이 군경의 토벌 작전에 위험을 느끼고 미수복 지역에 남아 있는 군경이나 우익가족을 살해하기도 했다. 이런 사건들은 토벌 작전에 나선 군경을 자극했고 이후의 민간인 희생을 확대시키는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영암지역에서는 빨치산 등 좌익세력과 군경에 의한 민간인이 희생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1970년 영암경찰서 앞 전경. @디지털영암문화대전

1970년 영암경찰서 앞 전경.
@디지털영암문화대전

학산면 학계리 희생 사건

영암군 학산면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안에 넓은 농경지가 있다. 학산면에서 발생한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의 전체 희생자 수는 133명이다. 이들 가운데 10살 이하가 24%나 되고 여성 피해자의 비율이 41%에 이른다. 어린이와 유아, 노인, 여성 희생자가 많은 것은 학산면에서 발생한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 89건 중 가족 희생 사건이 84건으로 전체의 94%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학산면의 학계리와 상월리의 희생 사건은 경찰 가족과 부유층, 종교인 등이 인민군이나 지방좌익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희생된 사례를 보여준다.
전남 영암군 학산면. @네이버지도

전남 영암군 학산면. @네이버지도

경찰 가족이라는 이유로 일가 몰살시켜

학계리의 배○임(1921년생)은 남편 현○○이 영암 경찰이라는 이유로 1950년 10월 2일 지방좌익들에 의해 학산면 학계리 광암마을 제정골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총살 후 배○임의 집도 불에 탔다. 신청인 이○근(1945년생, 배○임의 사위)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배○임이 총에 맞고 꿈틀거리자 다시 총을 쏘았다고 한다. 당시 배○임은 만삭이었다.

이○근은 장모(부인 현○○의 어머니) 희생 사건에 대해 모르고 있다가 1990년에 장인의 장례식에 모인 친척, 마을주민으로부터 장모가 돌아가신 사연을 알게 됐다고 한다. 배○임뿐 아니라 학계리의 다른 우익가족들도 제정골에서 희생되었다. 십리바위 골짜기로도 불렸던 제정골은 현재 저수지다.

학계리 주민이었던 현○○(당시 12세)은 학계리 광암마을에서 현 씨 성을 가진 경찰이 6명이었고 김 씨 성을 가진 경찰이 2명이었는데, 현 씨 경찰 가족들이 많이 희생당했다고 진술했다. 당시 경찰 가족은 모두 광암마을 제정골(십리바위 골짜기)에 끌려가서 희생됐다고 한다.

학계리의 김○태는 한약방을 운영했고, 진술에 따르면 아들 김○○은 광양경찰서 경찰이었다고 한다. 좌익들은 김○○의 가족들을 잡아두고 “언제까지 김○○이 안 나타나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그 소문을 듣고 김○○이 몰래 마을로 들어왔지만 이웃 주민이 집으로 가지 못하게 말리고 숨겨준 덕분에 살 수 있었다.
김○○은 본인 때문에 가족이 죽었다고 생각해 희생 사건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도 마을주민들로부터 사건에 대해 들었을 뿐이다. 이웃 마을주민 장○석(1942년생)에 따르면 사건 후에 김○○이 경찰들과 함께 들어와 ‘빨치산을 몰아내고 마을을 정리’했다고 한다.

광암마을은 현씨 일가 집성촌으로 부유하게 살았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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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진술(같은 마을 거주, 1940년생),
2022. 6. 29.

“학계리 광암마을 사람들은 현씨 일가라고 해서 웬만하면 ‘반동분자 취급’을 받았다. 본인의 아버지(현OO)도 내무서에 잡혀 있다가 죽을 뻔했다. 아버지가 인심을 얻었는지 좌익 중에 누가 살짝 내보내 주었고, 아버지가 나올 때 몇 명 더 풀려나왔는데 나와서 뒤를 돌아봤을 때 지서가 불타고 있었다고 아버지로부터 들었다.”

좌익들은 현○호와 그의 가족 등 5명을 광암마을 제정골에서 죽창으로 찔러 살해했다. 그 후 현○호의 집을 불태우고 마을을 빠져나갔다.

당시 마을의 5살짜리 꼬마 박○○은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현○순(신청인) 씨 집뿐 아니라 여러 집이 다 타버렸다. 그때 밤에 추울 때였는데 불을 쬐러 갔다가 아버지에게 ‘여기 있다가 죽으려고 그러냐.’라고 야단맞은 기억이 난다.” 현○호의 아들 역시 경찰이었다. 게다가 부유층이니 좌익들에 의해 반동 세력으로 지목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른 찬송가

교인들이 희생된 사건 현장.

교인들이 희생된 사건 현장.

한국전쟁 발발 후 1950년 말부터 11월까지 전국 각지에서 기독교인들이 적대세력에 의해 희생되었다. 기독교인들이 각종 우익단체에서 활동했고, 예배당 사용 문제를 놓고 기독교와 인민위원회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데다 기독교인들이 미국 선교사와 친했기 때문에 친미 세력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학산면 상월리 상월마을에 있는 그리스도의교회에서 1950년 11월 초 교인 35명(태아 1명 포함)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지방좌익이나 빨치산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판단했다. 상월교회 교인 임○삼 가족은 1950년 11월 초 집에 있던 중에 지방좌익과 빨치산이 들이닥쳐 상월리에 있던 큰 집으로 끌려갔다.

그곳에는 임○삼 가족 외에도 교회를 세운 나옥매 전도사의 사위인 광주 양림교회 목사 박석현과 그 가족들도 끌려와 있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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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진술(1950년생), 희생자의 후손,
2022. 4. 7.

“나옥매 할머니가 교회를 개척하고 사위인 박석현 목사를 평양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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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진술(희생자 임O삼의 손자, 1930년생),
2022. 3. 8.

“끌려간 곳에는 광주에서 온 목사님, 목사님 부인, 아들(이름은 모름), 목사님의 장모, 목사님 장모의 언니(?),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동생 등이 끌려와 방에 갇혀 있었다.”


이후 빨치산은 임○삼 가족을 그곳에 감금시키고, 임○삼의 집을 불태웠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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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진술(희생자 임O삼의 손자, 1930년생),
2022. 3. 8.

“숙부 임○규의 집 뒤쪽에 큰 집이 있었음. 희생 당일 빨치산이 그곳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할아버지 집에 불을 질렀다.”



날이 캄캄해지자 빨치산들은 삼을 꼬아 만든 하얀 줄로 갇힌 사람들을 모두 묶어서 구석에 앉아 있는 사람부터 일렬로 세워 상월리 앞 솔밭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끌려가면서도 찬송가를 불렀다.

“믿는 자 위하여 있을 곳 우리 주 예비해 두셨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솔밭에 도착하자 빨치산들이 교인들을 죽창 등으로 찔러 살해했다.

임○삼의 손자 임○○(1930년생)은 학살이 있던 그날 집에서 10km 떨어진 곳에서 혼자 자고 있었다. 한참 자는데 누가 문을 두드렸다. 깨어보니 같은 동네 살던 친구였다. 친구는 다른 낯선 사람과 함께 왔다. 낯선 이는 임○삼을 묶어서 가족들이 모여 있는 솔밭으로 끌고 갔다.

임○삼은 제일 뒤에 따라가면서 도망가기 위해 우여곡절 끝에 묶인 줄을 풀었다. 다른 사람들은 집 위로 끌려가는데 자신은 남쪽으로 뛰었다. 빨치산이 쫓아오지는 못하고 뒤에서 칼을 던졌는데 길에 돌이 많아서 칼이 땅에 떨어지며 번쩍번쩍 불이 튀었다. 가족들이 희생당한 후 동네에 들어가자 마을 사람들이 “시신을 보면 못 살 것”이라고 해 끝내 못 보았다.
6·25전쟁 당시 지방좌익 등에 의해 교인들이 희생된 상월 그리스도의 교회.

6·25전쟁 당시 지방좌익 등에 의해 교인들이 희생된 상월 그리스도의 교회.

6‧25 순교 기념비.

6‧25 순교 기념비.

용서와 화해의 위령탑.

용서와 화해의 위령탑.

사건명 전남 영암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1)-학산면을 중심으로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전남 영암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1)-학산면을 중심으로〉(2기)
지역 영암군 학산면 용소리·용산리·은곡리·독천리·묵동리·학계리·상월리 일대
사건 발생일 1950년 10월~11월
진실규명 신청인 배○성 등 22명
진실규명 결정일 2022년 8월 23월
진실규명 인원 곽○원 등 133명 (희생자: 133명)
결정사안 인민군 점령 시기인 1950년 8월과 인민군 퇴각 이후 치안이 회복되지 않은 1950년 10~11월에 영암군 학산면 용소리·용산리·은곡리·독천리·묵동리·학계리·상월리 일대에서 진실규명대상자 133명이 지방 좌익 등 적대세력에 의해 희생당한 사실을 확인하여 진실을 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빨치산, 지방좌익
참고자료 디지털영암문화대전
CBS 노컷뉴스 2022년 6월 22일자 〈‘비극’을 ‘용서’로② 영암 상월그리스도의교회 35인의 순교자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