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영광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1)-불갑면 불갑산에 보름달이 뜨면
빨갱이 사냥이 시작된다

전남 영광군 우산공원에 세워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강변구

전남 영광군 우산공원에 세워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강변구

노령산맥이 서해바다 앞에서 멈춘 곳

전남 영광군은 노령산맥이 서쪽으로 뻗치는 마지막 자락으로 유독 큰 산이 많은 영광지역은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한국전쟁기에 인민군이 광주, 함평, 나주, 목포로 진출하는 경로가 됐다. 인민군 후퇴 이후에는 퇴로가 막힌 인민군과 주변지역 좌익세력이 몰려들어 구수산 갓봉, 불갑산 등 험준한 산악지역이 빨치산 활동의 주요 근거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영광지역의 민간인 인명피해가 커진 데에는 이러한 지형적 조건이 크게 작용했다고 알려졌다.

빨치산 활동의 거점이 된 불갑산

1945년 해방 직후 영광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을 주도한 이들이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에 참여했다. 그러나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인민위원회가 해체되고 좌익세력이 탄압받았다. 1946년 ‘대구 10월 사건’ 때 영광에서도 상당히 큰 규모의 시위가 일어났고, 시위군중 12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 이후 영광의 좌익세력은 더 이상 공개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상당수가 수배령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영광의 산간지역에서도 빨치산이 다시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영광에는 불갑산, 태청산, 구수산 등 빨치산이 거점으로 삼을 만한 산이 많았다. 특히 불갑산은 빨치산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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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강○○, 1943년생, 2022.4.30.

“불갑산에는 여순사건 이전부터 빨치산이 있었다. 여순사건 발생 이전에 좌익들이 이장, 군경가족, 공무원, 친일했던 사람을 죽인 적이 있었다.”

좌익은 벌써 떠났는데 주민 상대로 수복 작전 벌인 군경

한국전쟁 발발 후 28일 만인 1950년 7월 23일 영광지역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 영광에 들어온 인민군은 해방 이후 남로당과 빨치산 활동을 해온 이들을 중심으로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통치했다. 영광군에는 조선노동당과 인민위원회, 여맹, 민청 등의 조직이 설치되었다. 이들은 점령 직후 인민재판을 열고 군수, 읍장, 은행장 등 우익인사들에 대한 처형을 감행했다.
좌익에 의한 민간인 피해는 군경이 수복 작전을 시작한 후 더욱 극심했는데, 영광지역은 군경 수복이 늦어지면서 후퇴했던 좌익들이 다시 마을에 돌아와 군경가족이나 우익가족, 빨치산에 비협조적인 주민들을 살해했다.

한편 후퇴했던 전남 경찰은 10월 3일 광주를 수복한 후 지역별 수복 작전에 돌입했다. 영광 경찰은 다른 지역보다 늦은 10월 21일경 영광을 수복했다. 영광지역 수복이 이처럼 늦었던 이유는 9·28 서울수복 이후 지리산 방면으로 빠지지 못한 전라도지역 빨치산들이 여차하면 바다를 통해 탈출이 가능한 영광으로 몰리면서 좌익세가 강해진 데다, 영광을 둘러싼 고창과 불갑산지역 빨치산 토벌이 늦어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영광 경찰은 경찰서를 수복한 이후 관내 주민들을 대상으로 의용 경찰을 모집해 관내 수복 작전에 나섰다. 국군 11사단도 호남지역 토벌 임무를 띠고 10월 15일 광주에 들어왔다. 이 중 20연대는 1951년 3월 31일까지 장성·영광·함평 등지에서 전남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해 전남지역 ‘공비 토벌 작전’을 벌였다. 이때 군경은 영광지역 수복 작전을 벌이면서 지역 주민을 ‘빨치산’ 또는 ‘부역자’로 몰아 어떠한 조사과정이나 적법절차 없이 살해했다.
전남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 쌁고개에 있는 ‘의문인 희생자의 묘’. 옴팍골에서 수습되지 않은 시신을 모아 합동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전남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 쌀고개에 있는 ‘의문인 희생자의 묘’.
옴팍골에서 수습되지 않은 시신을 모아 합동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불갑산 대보름 작전

불갑면은 예부터 불갑사가 자리해 불갑면으로 불렸고, 불갑산을 비롯해 산이 67%를 차지하는 산간지방이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 탓에 불갑면은 한국전쟁 전부터 여순사건 관련자들이 불갑산을 부근으로 모여들면서 좌익 활동이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영광읍 지역만 군경에 수복된 상황에서 불갑면은 낮에는 경찰이, 밤에는 빨치산이 지배하는 곳이 되었다.

당시 빨치산 불갑산 지구에는 함평, 무안군당과 목포, 영광, 나주, 장성군당의 일부가 들어와 있었고 각 군당은 생산유격대라고 불리는 보급 조직을 운용하고 있었다. 이 생산유격대는 관내 경찰관서를 습격하고 민가에서 식량, 음식 등을 약탈했다. 물자 운반을 위해 지역 청·장년을 끌고 가기도 했다. 불갑산지구 빨치산은 1950년 11월 중순부터 군경의 토벌 작전이 본격화한 후 불갑산 주변으로 밀리면서 지역 관공서를 습격하는 등 공세를 취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군경이 불갑산 일대 토벌 작전을 벌였다. 실제로 이 사건 진실규명 대상자들의 희생 시기도 대체로 군경이 1951년 1~2월 불갑산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벌였던 시기와 관련된다. 특히 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 1951년 2월 20일(음력 1월 15일) 진행된 속칭 ‘불갑산 대보름 작전’ 이후 연행되거나 자수했던 불갑산 인근 마을주민과 피난민들의 희생이 많았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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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강○○(남, 1943년생) 2022.4.30.

당시 불갑산으로 피난 갔던 사람들은 평범한 주민이었다. 빨치산이 밤에 마을로 내려와서 쌀을 가져가고 밥을 해 달라고 하면 안 해 줄 수가 없었다. 다음날 낮이 되면 경찰이 “밥을 해 주는 동안 신고를 하지 않았다”라는 등의 이유로 사람을 죽이고 잡아가기도 하였음.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빨치산도 마을에 있으면 다 죽는다고 하였고, 그 말을 들은 주민들은 솥과 이불 등을 들고 불갑산과 친척 집으로 피난하였다.



영광 경찰은 다음 날인 1951년 2월 21일 아침부터 불갑면과 묘량면의 미수복 지역이거나 좌익 성향의 마을주민들을 불갑지서와 묘량지서로 연행했다. 이들은 전날 용천사 주변에서 군경에게 붙잡힌 주민과 같이 조사를 받았다. 경찰은 15세 이상의 주민들을 ‘사살’과 ‘훈방’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2월 25일 불갑지서 경찰은 연행된 민간인을 불갑지서에서 약 1km 떨어진 쌍운리 소재 일명 옴팍골(쌀곡재, 옴팍구댕이)로 데려가 살해했다.

묘량면의 경우 주민들은 토벌 작전 2~3일 전에 피난을 가라는 빨치산을 따라 용천사 인근으로 피난을 갔다가 작전이 종료된 후 마을로 돌아와 삼학출장소에 자수를 했다. 그런데 자수자들은 1951년 2월 25일 삼학리 시산재와 흘루개재에서 경찰에게 집단 희생되었다.
1951년 2월 20일 토벌 작전 작전도.

1951년 2월 20일 토벌 작전 작전도.

불갑산 인근 지역도.

불갑산 인근 지역도.

불갑산 용천사 @강변구

불갑산 용천사. @강변구

용천사 총알바위

용천사 총알바위.

총탄 흔적 @강변구

총탄 흔적. @강변구

토벌작전으로 용천사가 전소되었을 때 보존된 석등이다. @ 강변구

토벌작전으로 용천사가 전소되었을 때 보존된 석등이다. @ 강변구

죽으러 가는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운 개똥이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에 살았던 정○○(1944년생)는 어머니와 고모, 출생 신고도 하지 않은 남동생 개똥이(3~4세), 할아버지를 한꺼번에 잃었다. 그때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광주에 피난을 가고 없었다.
언니와 고모에게서 들은 바로는 경찰이 토벌 작전을 한다고 민간인을 계속 죽이니까 모악리 주민 대부분이 산으로 피신했는데 가족들도 뒤늦게 따라 산에 올라갔다. 그렇게 닷새 정도 산에서 지내다가 불갑산 토벌 작전을 하던 날 저녁에 산에서 내려와 모량면 심학리 증조할머니 댁으로 피난을 갔다. 모악리가 불갑산 밑이라 빨치산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피난 온 지 하루 만에 증조할머니가 “이러다가 다 죽겠다”며 자수하라고 해서 어머니, 고모, 할아버지가 묘량지서에 가서 자수했다.

이후 묘량지서에서 불갑지서로 이송된 3명은 불갑지서에서 하룻밤을 잤다. 이튿날 경찰이 개똥이를 떼놓고 어른들만 “좋은 곳으로 데리고 간다”며 데리고 나가는데 개똥이가 하도 우니까 경찰이 “이놈 아깝다” 하면서 어머니의 등에 업혀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경찰에 의해 민간인 19명과 함께 쌍운리 쌀고개(일명 옴팍골)로 끌려가 한 구덩이에 들어가서 집단 살해되었다. 희생 사실은 언니 정□□와 넷째고모 정△△이 사망 현장을 보고 울면서 증조할머니에게 말해서 알려주었다고 한다. 희생 날짜는 1951년 2월 25일(음력 1951년 1월 20일)이었다. 시신은 봄에 날씨가 따뜻해졌을 때 옷으로 구별해서 수습했다.

정▽▽(일가, 1935년생)의 진술은 이랬다. “딸만 낳다가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귀한 자식이라서 일부러 개똥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희생된 세 사람은 모악리 주민이 불갑산으로 들어갈 때 함께 입산해 약 한 달 동안 산속에 있다가 대보름 작전이 있던 날 마을로 내려와 자수를 했으나 옴팍골에서 총살되었다. 쌍운리 옴팍골에서 시신을 수습할 때 가보니 약 50명이 한 구덩이에 굴비처럼 묶여 죽어 있었고 개똥이는 죽은 고모 정▷▷의 등에 업힌 채 함께 죽어 있었다. 당시 어른 6명 정도가 들것을 가져가서 세 사람을 모악리 선산으로 옮기는 것을 보았다.”(참고인 정▽▽ 진술조서 2022. 4. 23)

이웃 주민의 말에 따르면 당시에는 빨치산이 마을로 내려온 다음 낮이면 경찰이 와서 빨치산을 도왔다고 구타하면서 괴롭혔다. 그러는 중에 빨치산이 “마을에 있으면 (군인과 경찰에게) 모두 죽는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이 겁을 먹고 불갑산으로 올라갔고, 군경에 체포돼 살해된 것이다. 약 50일 후에 시신을 찾아가도 된다는 허락이 나서 쌀곡재에 가보았더니 구덩이가 3개 있었다. 그 후로 쌀곡재에서 죽은 사람들은 음력 1월 19일 제사를 지내왔다.
전남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 쌁고개 옴팍골은 당시 불갑지서(현 불갑원광지역 아동센터)에서 방마리 방향 직선거리 1.2km에 있다. 강항로 지방도로에서 약 40미터 지점에 첫 번째 구덩이가 있었다고 한다.

전남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 쌀고개 옴팍골은 당시 불갑지서(현 불갑원광지역 아동센터)에서 방마리 방향 직선거리 1.2km에 있다.
강항로 지방도로에서 약 40미터 지점에 첫 번째 구덩이가 있었다고 한다.

‘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러 죽임을 당했나

진실규명 대상자 강□□(姜□□, 1923년생)은 좌익 가족이라는 이유로 1951년 3월 23일(음력 1951년 2월 15일) 불갑지서에서 경찰에게 희생되었다.
신청인 강△△(강□□의 딸, 1947년생)는 아버지에 이어 몇 년 후 어머니까지 잃고 고아가 돼 외가와 큰집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불갑면 방마리에서 농사를 지었다. 1951년 3월 23일(음력 2월 16일) 불갑지서 경찰이 집으로 찾아와 조사할 것이 있다며 아버지를 연행했다. 다음날 데리고 가라는 연락을 받고 어머니가 옷을 가지고 불갑지서에 갔는데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그 충격으로 어머니도 쓰러졌고 눈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치료받았지만 몸은 회복되지 않았다. 머리가 아프다면서 헝겊으로 머리를 싸매면서 먹지도 못하다가 화병으로 3~4년 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희생된 것은 아버지쪽 친척들이 좌익 활동을 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아버지 시신은 수습했고 지금까지 음력 2월 15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웃에 살던 8살 소년 강○○은 “인민군 점령기에 국민학교에서 인공기를 들고 단합대회를 했다. 아마도 누가 시켜서 했던 것 같은데 행사가 끝나고 희생자 강□□이 단상에서 ‘인민공화국 만세’를 선창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돌도 되지 않은 아기가 총살 현장에서 살아 있었다

진실규명 대상자 김○○(1930년생)은 입산자였다는 이유로 1951년 2월 25일(음력 1951년 1월 20일) 옴팍골에서 불갑지서 경찰에 희생됐고, 김○○의 딸 장○○(1949년생)은 옴팍골 희생 현장에 있다가 살아남았으나 약 1주일 후에 사망했다.

신청인 장□□(장○○의 이복동생, 1955년생)에 따르면 1951년 2월 20일(음력 1월 15일) 불갑산 토벌 작전이 시작되자 가족은 흩어져서 불갑산 용천사 인근으로 피난을 갔다. 할아버지는 당일 국군(혹은 경찰)에게 총살됐고, 김○○, 장○○은 불갑산 용천사 아래 광암리에서 경찰에 연행돼 불갑지서에 약 3일간 구금되었다. 그 후 불갑사 가는 고개에서 많은 사람이 총살될 때 두 사람도 함께 있었고 어머니 김○○은 현장에서 희생되었다. 그런데 채 돌도 되지 않은 장○○이 현장에서 살아 있었다. 총살 현장에 있던 묘지기 할머니가 장○○을 발견해 아버지 장△△의 집으로 데려왔으나 약 1주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여성과 아기 뼈, 비녀, 구슬, 신발, 거울, 숟가락… 군경이 빨치산을 총살했다는 곳에서 나온 유해들이었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2009년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 ‘전남 함평군 불갑산 지구 발굴 유물 특별전시전’을 열었다. 전남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일대 유해발굴 결과 여성과 유아(3~6세 추정), 어린이(약 13세 추정) 등으로 추정되는 유해 160여 구가 발굴됐고, 이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비녀와 구슬, 반지, 거울, 수저, 신발 등 500여 점의 생활 유품이 다량으로 나왔다. 그동안 불갑산에서 희생된 사람들과 그 유족들에게 ‘빨갱이’ 누명을 씌워 온 세월이 무려 60년이었다. 유해는 불갑산에서 학살된 사람들이 빨치산이 아니라 피난 온, 그것도 군경의 포위 작전에 토끼처럼 몰려 불갑산 정상으로 내몰린 지역 주민이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발굴 지점은 1950년 가정마을 뒷산(산 3번지 일대) 정상 부근에 구축된 방공호(길이 180m)였다. 이중 약 60m 구간에서 켜켜이 쌓인 유해와 유품들이 발견되었다. 1951년 2월 20일 새벽, 보름달의 환한 빛을 도움받아 국군 11사단 20연대 2대대가 불갑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 작전 중 용천사 주변 피난민들과 인근마을의 주민들을 연행해 빨치산 또는 빨치산 협력자라는 이유로 몰아넣고 총살한 바로 그 장소였다.
현장에서 발견된 어른과 어린아이의 고무신.

현장에서 발견된 어른과 어린아이의 고무신.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2009년 전남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가정마을 뒷산(산 3번지 일대)을 발굴한 결과 여성과 유아, 어린이 등으로 추정되는 유해 160여 구가 발굴됐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2009년 전남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가정마을 뒷산(산 3번지 일대)을 발굴한 결과
여성과 유아, 어린이 등으로 추정되는 유해 160여 구가 발굴됐다.

전남 함평 불갑산에서 수습한 희생자 유골.

전남 함평 불갑산에서 출토된 희생자 유골.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2009년 순천대에서 연 불갑산지구 발굴 유물 특별전시회 모습.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2009년 순천대에서 연 불갑산지구 발굴 유물 특별전시회 모습.

사건명 전남 영광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1)-불갑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전남 영광 불갑면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1) 불갑면〉(2기)
관련사건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불갑산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기)
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장성·화순·영광) 11사단 사건〉(1기)
진실화해위원회 〈영광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기)
지역 전남 영광군 불갑면
사건 발생일 1951년 2월부터 3월 사이
진실규명 신청인 강▽▽ 등 7명
진실규명 결정일 2022년 11월 1일
진실규명 인원 진실규명 대상자 강▷▷ 등 14명
결정사안 전남 영광군 불갑면에 거주하던 주민 14명이 한국전쟁 발발 후인 1951년 2월부터 3월 사이 불갑산 입산자, 입산자의 가족이라는 이유 등으로 영광경찰서 불갑지서 경찰에 의해 희생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영광경찰서 불갑지서 경찰
참고자료 함평·로컬타임즈 2009년 7월 20일자 “보름달 작전은 피의 학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