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안도 이야포 미군폭격 사건 “그날 바다에 시신이 부표처럼 떠다녔다”

여수 남면 이야포(드론 촬영, 여수MBC 제공).

여수 남면 이야포(드론 촬영, 여수MBC 제공).

그 여름날의 소년

2022년 8월 3일, 구름 한 점 없는 무더위의 절정이었다. 72년 전 이춘혁 옹이 열여섯 소년이었던 그날도 찌듯이 더웠다. 피난선에 타고 있던 일곱 식구 중에서 아버지, 어머니와 7살, 3살 여동생 둘이 세상을 떠났다. 살아남은 3남매 가운데 누나와 남동생도 차차 세상을 뜨고 이제 혼자 남았다. 그는 1950년 8월 3일 발생한 ‘이야포 미군폭격 사건’의 생존자다.

태양 아래 이야포 바다가 끓어오를 듯 반짝이고 해변 몽돌밭의 둥그런 돌덩이들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마을로 이어지는 둔덕에 조성된 평화공원에서 올해로 다섯 번째 맞는 추모제가 열렸다. 참석자들은 모두 천막 한 장의 그늘 아래로 대피해 있었다.

이날의 추모제는 특별했다. 한국전쟁 당시 사건을 그림으로 담은 추모비가 세워졌기 때문이다. 추모비 제막식에 이어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참석자들이 헌화했다. 차례대로 추모비 아래에 꽃을 놓고 잠깐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이춘혁 옹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추모비에 다가갔다. 안내자가 건네준 하얀 국화 한 송이를 받아 소년 시절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은 추모비 아래에 놓고 묵념을 했다. 묵념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이야포 미군폭격 사건 생존자 이춘혁 옹이 2022년 8월 3일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 이야포평화공원에서 열린 ‘민간인 희생자 추모제’에서 헌화하고 있다.

이야포 미군폭격 사건 생존자 이춘혁 옹이 2022년 8월 3일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 이야포평화공원에서 열린 ‘민간인 희생자 추모제’에서 헌화하고 있다.

부산에서 출발한 피난선

생존자 이춘혁 옹과 사건을 목격한 안도리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1950년 8월 2일 오후, 부산항의 한 목제 화물선에 피난민 300~350여 명이 타고 있었다. 피난민들은 갑판과 아래 선실에 꽉 들어차 있었다. 배는 승객들의 무게 때문에 뱃전의 난간이 수면에 거의 닿을 듯했다. 이춘혁 소년의 가족이 수용돼 있던 부산 성남국민학교는 미군이 들어와 사용할 예정이었다.

이 무렵은 낙동강 전선의 전황이 긴박해져서 피난민이 대구와 부산으로 밀려들던 때였다. 정부는 혼잡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부산, 대구 시내의 피난민을 인근 섬 등으로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부산항에서 피난민을 실어 나를 배가 출발했다.

7월 21일 피난민들은 부산항을 출발해 충무에서 일주일 머물고 욕지도에서 5일을 머물렀다. 정부는 피난민들을 다시 배 세 척에 나눠 이동시켰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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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송(1938년생·사건 피해자), 2009. 3. 5.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이야포 해변에서 진술

“1950년 6월 25일 서울시 마포구 염리동에서 일곱 식구가 피난을 떠나 부산진구 성남초등학교에 수용돼 3주간 머물다, 1950년 7월 21일 피난민 350명과 함께 부산 연안부두에서 여객선을 타고 경남 충무에 내려 학교시설에 수용되었다. 충무학교 운동장에서 쌀 배급을 받고 그날 2시경 화물선을 타고 욕지도에 입항하여 약 5일간 학교시설에 수용돼 있다가 다시 출항해 8월 2일 저녁 무렵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이야포 포구에 정박했다.”


배들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헤어졌다. 그중 한 척이 안도 해상을 지날 때였다. 고요한 바다에 총소리가 울렸다. 안도에 있던 영암경찰서 경찰이었다.

경찰은 깃발로 배에 정박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피난선은 꼼짝없이 안도 이야포 안으로 들어와 정박해야 했다. 욕지도에서 출발하면서 배급을 못 받은 터라 피난민들은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팠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경찰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날 밤을 배 위에서 보냈다.
이춘혁의 동생 고 이춘송이 당시 피난선과 미군 폭격기를 그림으로 증언했다. 피난선에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폭격기 기종은 F-80으로 추정된다. 사건 조사보고서 수록

이춘혁의 동생 고 이춘송이 당시 피난선과 미군 폭격기를 그림으로 증언했다.
피난선에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폭격기 기종은 F-80으로 추정된다. 사건 조사보고서 수록

피난선에 기총소사한 미군 제트기

8월 3일, 날이 밝았다. 피난민들은 어떻게든 허기를 채워야 했다. 이춘혁 소년은 아버지가 마을에서 구해 온 밥을 먹었다. 9시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이야포 남쪽 소리도 쪽에서 제트기가 날아왔다. 모두 4대였다. 굉음을 내며 지나간 제트기는 소리도 쪽으로 되돌아가는가 싶더니 바다 위에서 원을 그리며 다시 이야포로 다가왔다.

비행기 4대가 나란히 호수같이 잔잔한 이야포 바다 위를 한 바퀴 빙 돌고 나서 피난선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대형으로 일자로 바꾸더니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곤두박질치며 피난선에 기관총을 발사했다. 비행기 앞코에 기관총 6정이 달려 있었는데 어른 손가락보다 큰 총알을 숫제 쏟아붓듯이 내리쏘았다. 기관총이 피난선을 훑고 지나가자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픽픽 쓰러졌다. 뱃전에 있던 사람은 바다로 떨어졌고, 쪼그리고 숨은 사람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비행기까지 총알을 쏟아부으며 지나갔다. 사람들의 피가 튀고 몸에서 살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갔다. 사람들이 갑판 아래 선원실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내려가는 계단에도 이미 시체가 쌓여 있었다. 비행기는 다시 돌아와 아까처럼 총알을 쏟아부었다. 총알이 갑판을 뚫고 들어와 선실로 숨어든 사람들까지 쓰러트렸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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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학재, 《(춘암 수상집) 아리랑그림자》, 마가,
출판연도 미상. 사건 조사보고서 439쪽에서 재인용

참고인 윤○재는 부산진국민학교에서부터 안도리까지 사건 선박을 타고 왔던 사람으로, 사건 당시 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중 한 명이다. 그는 당시 사건에 대해 자세하게 증언했다. “배는 부산진을 출발해 거제도 피난민수용소로 가는 것이다. 하루종일 항해하고 저녁에 어느 작은 섬 앞바다에 정박했다. 같은 크기의 화물선 3척이 그 섬에서 밤을 지내고 다음 날 아침 9시쯤 배 두 척은 이미 출발했고, 우리 배만 남아 있었다. 주먹밥 하나씩을 배급받아 먹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갑판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비행기다. 쌕쎄기 비행기다. 이승만 처갓집 비행기다” 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하늘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비행기 4대가 배 위로 지나갔다. 비행기가 다시 하늘에서 갈매기같이 한 줄로 늘어서더니 한 대씩 배를 향해 쏜살같이 소리도 없이 내려오면서 기관총을 난사하는 것이다. 환호하던 피난민은 모두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연속해서 비행기 4대가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아버지와 동생은 갑판 앞쪽에 있었고 나는 배 뒤편에 있었다. 식구들은 하층 화물칸에 있었다. 갑판은 피바다가 되었고 시체는 즐비하게 끌렸다. 하층 화물칸으로 내려가는 좁은 사다리 입구에는 피난민들이 몰려서 아우성들이었다. 또다시 4대의 비행기가 계속해서 기관총을 난사하고 하늘로 치솟았다. 이렇게 세 번 반복된 기관총 폭격을 당한 피난민 배에는 시체가 싸이고 피바다가 되어 시체를 밟고 다녔다. 이층의 선장실도 부서지고 선장과 선원 3명도 현장에서 죽었다. 어떤 아저씨가 “태극기, 태극기”하고 소리쳤다. 어떤 사람이 조그마한 태극기 수기 하나를 갖다 주었다. 이 아저씨는 태극기를 미친 듯이 흔들었지만 비행기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이 어인 날벼락인가? 아군 비행기가 피난민을 폭격하다니. 피난민을 죽이다니. 부상당한 사람들은 사람 살리라고 아우성이고 사람마다 식구들 이름을 부르며 피투성이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1950년 8월 3일 아침 아버지가 육지로 나가서 손수 지어온 밥을 먹고 난 뒤 오전 9시경 미군 제트기 1개 편대(4대)가 날아와 처음에는 기관총 두 발을 신호처럼 먼저 쏘고 난 뒤 연속적으로 섬을 돌면서 배를 향해 무차별 기총사격을 가했다. 탈출하는 사람들에게도 기총사격을 가했다. 당시 배 위 선장실 뒤쪽 물통 뒤에 기대어 현장을 직접 목격했는데, 사격을 할 때마다 7~8명씩 배 안팎으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제트기가 돌아와서 탈출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사격을 가하여 바다가 온통 붉은 피로 물들었다. 주위에는 머리 터진 냄새,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아우성 소리, 엄마ㆍ아버지 부르는 소리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죽은 사람들의 피가 머리 위에서 흘러내려 온몸이 피로 물들었다.” [이춘송(1938년생‧사건 생존자), 2009. 3. 5.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이야포 해변에서 진술]

피난민들은 미군 비행기가 바다에 뜬 다른 작은 배들과 뭍은 놔두고 피난선에만 총을 쏜다는 걸 깨달았다. 살려면 무조건 바다를 헤엄쳐 몽돌밭 해변으로 올라가야 했다. 제트기가 세 번째로 날아왔다. 이번에는 4대가 옆으로 나란히 하고 다가왔다.

사격 반경이 넓게 펼쳐져 있었기에 기관총이 다시 불을 뿜는다면 피난선과 물에 뜬 사람들은 피할 길이 없었다. 피난민들은 수영을 할 줄 몰라도 무조건 물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춘혁 소년도 배에서 뛰어내렸다. 소년은 섬 주민들의 멸치잡이 뗏목을 배에 붙여 막냇동생을 업은 엄마를 태웠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타는 바람에 뗏목이 뒤집혀 엄마가 물에 빠졌다.

간신히 엄마를 뗏목에 다시 붙들어 놓았지만 업은 아기와 물을 먹은 미군 모포 포대기의 무게 때문에 뗏목에 올라탈 수가 없었다. 이춘혁 소년은 몸을 돌려 해변까지 헤엄쳐 올라왔다. 비행기가 총을 쏘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그리고 한 번 더 이야포 상공을 선회하더니 처음 나타났던 소리도 방향으로 멀어져갔다.

이야포 바다가 다시 고요해졌다. 이춘혁 소년과 남동생 이춘송, 누나가 해변에 남았다. 다른 식구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와 7살 여동생은 배에서 총을 맞아 바다에 빠졌고 막내를 업은 엄마는 끝내 물속에서 나오지 못했다. 이 폭격으로 피난선에 타고 있던 피난민 약 150명이 죽고, 50여 명이 다쳤다.

미군은 정말 배에 피난민이 타고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 진실화해위원회의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폭격 당시 매우 낮은 고도로 비행했으므로 미군 조종사들은 이들이 민간인임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 나아가 미군은 동일한 목표물에 대해 연이어 총 4차례의 폭격을 가해 피해를 더욱 가중시켰다. 결국 미군은 진실규명 대상자들이 민간인인지 여부를 충분히 판단할 수 있었는데도 민간인과 군사적 목표물을 구별하지 않고,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사전보호조치도 없이 민간시설인 피난민 배를 직접적으로 연이어 네 차례 폭격했다.”(사건 조사보고서 440쪽)
안도 이야포 지도. 생존자들은 이야포 몽돌해변에서 서고지산으로 옮겨가 피신했다. 이후 경찰에 의해 피난선과 시신이 불태워지고 피난민들은 소리도를 거쳐 거제도로 이송되었다. 구글맵에 표시

안도 이야포 지도. 생존자들은 이야포 몽돌해변에서 서고지산으로 옮겨가 피신했다.
이후 경찰에 의해 피난선과 시신이 불태워지고 피난민들은 소리도를 거쳐 거제도로 이송되었다. 구글맵에 표시

이야포 해변

이야포 해변

여수 시민들에 의해 다시 살아나는 기억

이야포 사건은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유족인 이춘혁과 이춘송 형제는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안도 이야포 마을 사람들을 만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2010년 진실규명 결정을 받고서도 이야포 사건은 조명받지 못했다. 2017년에 이르러서야 지역 언론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변변한 위령제 한 번 지낼 수 없었는데 2018년 처음으로 조촐하게 위령제가 열렸다.

여수 출신의 소설가 양영제가 그날의 사건을 다룬 르포소설 ≪두 소년≫의 한 구절을 보면 이야포에서 희생된 분들의 넋이 여전히 바다에 갇혀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송장들이 입은 흰옷이 부풀어 올라 부표처럼 보였다. 부표 같은 송장들은 들물 때는 서고지로 밀려와서 날물 때는 동고지 쪽으로 두둥실 떠갔다가 다시 서고지 쪽으로 돌아와 이야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2022년 8월 3일 처음으로 민관 합동 위령제가 열렸고, 이어서 8월 18일 피해자 유족과 이야포 미군폭격사건위령사업추진위원회(위원장 심명남)가 여수시와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서를 접수했다. 현재 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희생자를 한 명이라도 더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여수 시민이 세운 이야포 평화탑.

여수 시민이 세운 이야포 평화탑.

희생자들의 영혼이 하늘로 올려보내는 뜻을 담은 새 조형물.

희생자들의 영혼이 하늘로 올려보내는 뜻을 담은 새 조형물.

2023년 8월 3일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 이야포 평화공원에서 열린 ‘이야포 미군폭격 사건 73주년 민간인 희생자 추모제'에서 씻김굿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2023년 8월 3일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 이야포 평화공원에서 열린
‘이야포 미군폭격 사건 73주년 민간인 희생자 추모제'에서 씻김굿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2023년 8월 3일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 이야포 평화공원에서 열린 ‘이야포 미군폭격 사건 73주년 민간인 희생자 추모제’에서 참석자들이 묵념하고 있다.

2023년 8월 3일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 이야포 평화공원에서 열린
‘이야포 미군폭격 사건 73주년 민간인 희생자 추모제’에서 참석자들이 묵념하고 있다.

사건명 여수 안도 이야포 미군폭격 사건
조사보고서 《호남지역 미군관련 희생 사건》(1기)
지역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인근 해상
사건 발생일 1950년 8월 3일
진실규명 신청인 이춘송
진실규명 결정일 2010년 6월 30일
진실규명 인원 이○만 등 5명
결정사안 1950년 8월 3일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인근 해상에서 피난민 배에 타고 있던 민간인들과 1950년 8월 9일 여수시 남면 두룩여해상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이 미군의 불법적인 폭격으로 희생된 사실이 밝혀져 진실규명으로 결정된 사례.
가해주체 가해 폭격기는 미군 소속 전폭기로 추정
참고자료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호남지역 미군관련 희생 사건》, 2010
양영제 《두 소년》, ㈜북이십일 아르테, 2022
여수판 노근리학살, 이야포 미군폭격을 아시나요(오마이뉴스 2018. 8.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