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순창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1) 빨치산 거점이 된 회문산과 순창 사람들의 희생

인민군 점령기와 후퇴기에 적대세략에 의한 희생 사건이 벌어진 추령천 전경. @디지털순창문화대전

인민군 점령기와 후퇴기에 적대세략에 의한 희생 사건이 벌어진 추령천 전경.
@디지털순창문화대전

하늘이 내린 요새 회문산

전북 순창군은 전북 남부의 중앙에 위치한다. 순창군 북쪽 머리에 회문산이 가장 높게 자리하고 그로부터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노령산맥을 따라 장군봉, 여분산 등 높은 산봉우리가 겹겹이 둘러싼다. 회문산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많아 첩첩산중의 요새지였다. 그중에서도 회문산과 장군봉 사이에 들어앉은 쌍치면의 금성리 피노마을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이 붙잡힌 현장이며, 역시 회문산의 정읍시 산내면에서 동학농민군 지도자 김개남이 붙잡혔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전쟁 전부터 회문산이 빨치산의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 1946년 조선공산당의 9월 총파업, 1948년 10월 여순사건으로 순창의 산악지대에서 빨치산의 활동이 활발해졌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회문산에 빨치산 전북도당 유격대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그에 따라 군경의 빨치산 토벌 작전 역시 강도 높게 이루어졌다.
회문산 전경. 계곡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돌곳봉, 회문산 정상(837m)이 보인다. 전라북도 공식 블로그 ‘전북의 재발견’, 노희환

회문산 전경. 계곡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돌곳봉, 회문산 정상(837m)이 보인다.
전라북도 공식 블로그 ‘전북의 재발견’, 노희환

순창 미수복지에서 일어난 희생 사건

한국전쟁 발발 후 1950년 7월 23일 오전 10시경 인민군이 광주에 진입하면서 그 과정에서 순창지역이 점령되었다. 인민군은 점령 이후 인민위원회를 조직해 군청에 본부를 두고 남로당 순창군당 아래 면당과 리당까지 말단 조직을 구성했다. 이때부터 내무서원과 분주소원이 우익인사들을 검거, 살해하기 시작했다.
1950년 10월 1일 순창경찰서가 수복되고, 이 과정에서 퇴로가 차단돼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은 지방 좌익세력과 합류해 빨치산 활동을 시작했다. 순창지역 지서들은 1950년 11월 당시 11곳 중 9곳이 미수복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순창지역 주민들은 우익인사라는 이유로 처형되거나 식량과 부역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불응하다 사살되는 등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국군 11사단 20연대는 1951년 2월 9일, 회문산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빨치산 1,500명에 대한 소탕에 돌입해 3월 3일에 대청산에서 빨치산을 격퇴해 회문산 작전을 마무리했다. 이 기간에 순창에서는 주로 북쪽 산악지대인 쌍치면, 적성면, 동계면, 구림면 지역에서 빨치산 등 적대세력에 의한 주민들의 희생 사건이 발생했다. 그중 특별히 험한 산지인 쌍치면에서는 주민들이 빨치산에게 입은 피해가 컸다.

인민군 패잔병과 피난민이 함께 숨어든 쌍치면

순창군 쌍치면은 노령산맥의 남쪽에 분지를 이루며 병풍을 두른 듯 겹겹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밖에서 안을 볼 수 없을 만큼 험하고 교통이 불편한 곳이었다. 이런 이유로 한국전쟁 당시 쌍치면에는 순창과 인근의 임실, 정읍, 담양 등지에서 피난민들이 몰려들었을 뿐만 아니라 인민군 패잔병 등 빨치산도 몰려와 몸을 숨겼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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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인 박○○ 진술 2021. 12. 3

장성군, 담양군, 복흥면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우리 집 작은 방에 있었다. 피난민들이 낮에 돌아다니다 군인이나 경찰한테 죽으면 집에 안 돌아오고, 또 새로운 피난민들이 오고 그랬다. 그렇게 왔다 갔다 한 피난민들이 100명은 되는 것 같다.



쌍치면에서 일어난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을 살펴보면 인민군 점령기와 후퇴기에는 주로 면 소재지인 쌍계리 쌍치국민학교와 추령천(쌍계리 천변) 등에서, 군경 토벌 작전 시기에는 빨치산 근거지인 회문산 부근, 국사봉, 마을 인근의 산 등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백사장에 방치된 ‘반동’의 시신

설△△(1935년생)은 형 설○○(1921년생)의 죽음에 대해 진실규명 신청을 했다. 호국군 중대장을 지낸 설○○은 인민군이 순창을 점령한 뒤 피신했다. 그러고 1950년 8월경 분주소원에게 체포되어 쌍치분주소에 보름간 구금되었다가 ‘반동’이라는 이유로 8월 27일 쌍계리 천변(현 쌍치중학교 자리) 백사장에서 희생되었다. 그날 쌍치면장, 쌍치지서장도 함께 목숨을 잃었고, 분주소원들은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도록 막아 설○○의 시신은 9일 만에 심하게 훼손된 상태로 수습되었다고 한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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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인 설△△ 진술조서(2022. 4. 14.)

시신도 가져가지 못하게 하여 9일 만에 시신을 수습하는데 짐승이 시신을 훼손해서 형(설○○)은 발목이 없어졌다. 지서장 정○○는 머리가 없었고, 면장 민○○은 산짐승이 배를 할퀴고 뜯어 먹었다.

쌍치면장의 희생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돌과 죽창으로 살해하고 시신을 묻지 못하게 하고 오고 가는 사람이 보도록 방치했다고 한다.

대창과 몽둥이에 희생된 동네 이발사

양○○(1911년생, 이발관 운영)은 쌍치면 쌍계리에서 거주하던 중 1950년 10월 4일(음력 8월 23일)경 적대세력에게 끌려가 쌍치국민학교 운동장에서 희생되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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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김○○ 진술조서(2022. 7. 5.)

양○○은 양○□의 큰아버지인데 일제강점기에 만주에 갔다가 해방 이후 마을로 돌아와 구장을 했음. 인민군 점령기에 양○○을 쌍치국민학교에 데려다 놓고 인민재판을 한 뒤 대창으로 찔러 죽였음.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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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양□□(1955년생, 희생자의 조카), 2022. 7. 5. 진술

큰아버지 양○○은 쌍치면에 유일한 이발관을 직원도 두고 하셨다고 한다. 마을 유지라고 들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빨치산이 집에 있던 큰아버지를 포승줄에 묶어 쌍치초등학교로 끌고 가서 인민재판을 했다고 한다. 당시 아버지(양△△)는 정읍(처가댁)으로 피신한 상태였고 큰어머니가 용머리 쪽에 시신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보았지만, 희생자가 8명인데 시신은 세 구밖에 없었고 그중에 큰아버지 시신은 없었다 한다. 지금 묘는 가묘이다.

양○○은 만주에서 지내다 해방 이후 쌍치면 쌍계리로 돌아와서 직원을 두고 쌍치면에서는 유일한 이발관을 운영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1950년 10월 4일 양○○은 밤중에 집에서 빨치산들에게 붙잡혀 쌍치국민학교로 끌려나갔고 인민재판을 통해 군인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반동분자’로 규정되었다. 대창과 몽둥이로 죽임을 당하고 구덩이에 묻혔다는 것만 알 뿐 형제들이 오랫동안 시신을 찾으러 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대한청년단인 아들들 대신 잡혀간 아버지

쌍치면 쌍계리에서 농사를 짓던 이○○(1898년생)은 1950년 10월 10일(음력 8월 29일) 아들과 한방에서 자던 중 복면을 하고 죽창을 든 10명이 들이닥쳐 이○○을 새끼줄로 묶어서 끌고 나갔다. 이○○의 장남이 쌍치면 대한청년단장, 둘째 아들은 대한청년단원, 셋째 아들은 경비대 출신이었다. 아들 셋은 이미 모두 도망가고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아내와 며느리, 아들이 이○○을 찾으러 다니다가 ‘여시골’에서 총소리가 났다는 주막집 주인의 말을 들었다. 그곳에 가보니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죽창과 돌무덤이 있었다. 그 속에서 아버지 이○○과 삼촌 양○○(1930년생)의 시신이 돌무덤 안에 나란히 누워있었다. 아들은 두 사람의 시신을 보고 “죽창으로 쑤시고 총을 쏘아 죽였”음을 알아보았다.

짐 나르는 부역에 불평했다고 죽임당해

쌍치면 용전리는 회문산에 가까이 붙은 마을이었기 때문에 빨치산들이 툭하면 주민에게 노역을 시키거나, 식량을 요구했다. 주민들은 자칫 ‘반동’으로 몰려 죽을까 봐 두려워 이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쌍치면 용전리 양○○(1925년생)은 농사를 지으며 틈이 나면 동네 사람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군경 토벌 작전이 진행되던 무렵 양○○이 빨치산의 짐을 실어 나르는 노역에 동원되었는데 1951년 3월경 빨치산의 요구가 잦아지면서 양○○이 불평을 한 것이 빨치산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빨치산들이 집에 있던 양○○을 가족이 보는 앞에서 끌고 나가 국사봉에서 살해했다. 양○○의 시신은 동생이 수습해 용전리 뒷산에 묻었다.
회문산 전적비. @순창군

회문산 전적비.
@순창군

금니를 보고 아버지의 시신을 알아보았다

신청인 김○○(1942년생)은 시아버지 이○○이 쌍치면 종암리 북재마을 이장이었다고 했다. 시어머니(오○○)에게 듣기로는 1951년 3월 16일(음력 2월 9일) 밤, 이○○은 이웃 순창 할머니 집 짚더미에서 잤다. 빨치산이 못사는 집은 공격하지 않을 거로 생각하고 그 집에 숨은 것이었다. 그날 밤, 순창 할머니가 시어머니에게 이○○이 빨치산에게 끌려갔다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무서워서 이○○을 찾으러 다니지 못했다. 며칠 후, 시어머니는 남편이 적곡리 북실 앞 장자울 어느 집으로 끌려가 반동이라고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농이고 이장이며, 아들이 세무서 공무원이라는 이유였다. 이○○의 시신을 장자울 주민들이 수습해 주었는데 얼마나 구타를 심하게 당했는지 시신이 피범벅이라 옷을 농기구로 긁어 떼어내 가며 수습했다고 한다. 가족들이 찾아갔을 때는 이미 매장된 후였다. 이○○의 아들이 1950년대 후반에 이장하려고 파묘했을 때 금니로 아버지임을 확인했다. 그 후 2016년에 북재마을 이씨 땅에 다시 이장했다.

피난지에서 빨치산에게 끌려가신 어머니

이○○(1918년생)은 세 남매를 데리고 쌍치면 운암리 주민들과 함께 운암리 뒷산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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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조○○(당질, 1938년생)

군인이 들어온다고 연락이 오거나 총을 쏘며 들어올 때 총소리를 듣고 주민들은 동네 성적골로 피난을 나갔다. 한번은 군인들이 집마다 불을 지르기도 했다.

1951년 추석 무렵 이○○은 11살 된 아들 노○○(신청인, 1940년생)을 데리고 식량을 가지러 집으로 내려갔다가 빨치산에게 붙잡혀 경찰 주둔지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친척을 만나 아들을 맡기고 이○○은 두고 온 두 자녀를 데리러 다시 피난지로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피난지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말하기로 이○○이 경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구림면 금창리 뒷산에서 인민재판을 받고 빨치산에게 죽창과 돌로 맞아 희생되었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 금창리 뒷산으로 시신을 찾으러 갔지만 찾지 못했다.
몇 달이 지나고서, 노○○은 순창국민학교에서 군인에게 붙잡혀 온 누나와 남동생을 만났다. 그 후 누나는 식모살이하러 갔고 노○○과 남동생은 고아원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다.
2010년 6·25양민희생자위령탑 앞에서 열린  제10회 회문산 해원제 모습. 위령탑을 세운 자리가 바로 조선노동당 전북도당이 있던 곳이다.  @순창군

2010년 6·25양민희생자위령탑 앞에서 열린 제10회 회문산 해원제 모습. 위령탑을 세운 자리가 바로 조선노동당 전북도당이 있던 곳이다. @순창군

사건명 전북 순창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1)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전북 순창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1)〉(1기)
관련사건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순창지역 적대세력 사건〉(1기)
지역 전북 순창군
사건 발생일 1950년 8월 ∼ 1951년 9월
진실규명 신청인 허○남 등 12명
진실규명 결정일 2022년 11년 1일
진실규명 인원 조○탁 등 13명(희생자: 설○용 등 13명)
결정사안 1950년 8월부터 1951년 9월 사이에 전북 순창지역에 거주하던 진실규명대상자 13명이 적대세력에 의해 희생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쌍치분주소원, 지방 좌익, 빨치산
참고자료 디지털순창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