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전북의 산과 들에서 부역자로
몰려 희생된 지역 주민들

'전북의 지붕'으로 불리는 진안고원이 품은 구봉산의 가을풍경. @진안군

'전북의 지붕'으로 불리는 진안고원이 품은 구봉산의 가을풍경.
@진안군

동쪽의 산간지대와 서쪽의 평야지대로 이루어진 전북

전북은 흔히 농업의 중심지로 들이 넓은 지역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전주-정읍 축의 노령산맥을 경계로 서부지역은 평아지대인 반면 동부지역은 산세가 험한 산간지대로 해발 1,000m 이상의 산과 분지, 고원이 발달했다. 노령산맥에서 발원해 서쪽으로 만경강과 동진강이 흐르고, 진안고원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섬진강이 내려간다. 또 소백산맥 남서부 줄기에 자리 잡은 장수군에서부터 북쪽으로 흐르는 금강이 흐른다.

서부 평야지대에서는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겪으면서 지주와 소작인의 대립이 심했고 좌·우익의 갈등도 많았다. 전북지역도 다른 지역과 같이 인민군점령기에는 좌익이 우익을 살해했고, 이후 인민군이 후퇴한 뒤에는 군경이 부역자, 좌익관련자와 그 가족에게 보복을 가했다.

좌익에게 가족 잃은 유가족, 향토방위대원 돼 보복

1950년 10월 인민군 후퇴기에는 퇴로를 확보하지 못한 인민군과 지방좌익이 내장산을 중심으로 산간지역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군과 경찰력이 충분하지 못해 각 지역 청년들이 빨치산으로부터 마을과 지역을 지키기 위해 향토방위대를 편성했다. 향토방위대원으로 인민군 점령기 좌익에게 가족을 잃은 유가족이 들어가 활동하면서 수복 후 부역자 처벌이 보복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수복 당시 정읍경찰서장 신○종은 “요즘 혼란한 틈을 타서 사감(私感)으로 무고하는 자가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자는 발각 즉시 엄중 처단할 방침”이고, 자수자에 대해서는 “죄의 경중을 막론하고 관대히 포섭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열악한 경찰력은 이런 혼란을 효과적으로 진압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전북지역 민간인은 빨치산과 군경 양쪽에서 시달림을 받았다.
전북지역 민간인 희생장소 발생장소.

전북지역 민간인 희생장소 발생장소.

정읍시 옹동면 경찰 백○○의 보복 살해

정읍 수복 후 옹동면(당시 정읍군 옹동면) 주민들은 밤이면 음식물과 식량 등을 구하러 마을에 내려오는 빨치산에게 위협받았고, 낮에는 치안대에게 ‘빨치산에 협조했는지 여부’를 추궁당했다. 그런 상황에서 인민군 점령기에 부역을 했다고 알려진 주민들이 밤이면 마을에서 사라져 시신으로 발견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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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범 진술녹취(2008. 10. 30)

“산 너머에 빨치산 본부가 있어 빨치산들이 밤에는 자주 마을로 들어왔고 낮에는 우익치안대가 빨치산 협조 여부를 추궁하며 마을사람들을 두들겨 패곤 했다. 마을사람들은 빨치산의 위협에 식량을 주고, 도로를 끊거나 전봇대 베는 일에 동원되기도 했다. 인공시기 활약한 사람들은 수복 직후 모두 마을을 떠났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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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환 진술녹취(2009. 9. 8.)

“전쟁 당시 정동마을에서는 좌익과 우익의 다툼이 있었고, 인공 당시는 우익이 죽었고, 수복 후에는 야간에 죽는 일이 있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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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왕○춘 진술녹취(2009. 9. 8.)

“마을에서 지방좌익에게 여러 명이 죽었음. 잘 알지도 못하고 공산당에 가입했다가 이후 두려움에 입산했던 젊은이들이 자수를 하러 내려오곤 했는데, 십여 명 되는 그러한 사람들을 치안대에서 임의로 죽이곤 했다. 인공기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복수심으로 사람들을 임의로 죽이곤 했다.”



당시 주민들이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증언하기를 실제 인민군 점령기에 적극 좌익 활동을 하였던 사람들은 입산하고 마을에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다. 따라서 마을에 남아 있던 주민들은 좌익과 빨치산의 강압으로 어쩔 수 없이 협조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마을에 남아 있거나, 입산을 했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수하러 마을로 내려왔다. 이들은 옹동지서 경찰 백○○과 치안대의 자의적인 판단으로 총살됐는데, 살해된 이유는 백○○ 가족이 좌익들에게 살해된 데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 사건을 겪은 이들은 옹동면에서 가장 악명을 떨쳤던 가해자로 옹동지서 경찰 백○○을 꼽는다. 백○○은 당시 옹동지서 주임으로 낙동강까지 후퇴했다가 수복 후 돌아왔는데 인민군 점령기에 자신의 가족을 빨치산에게 잃었다고 했다. 백○○은 대낮에 동네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권○일, 최○대 등을 총살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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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인 채○건(1944년생) 진술.

“최○○가 북한 노래를 부른다고 백 ○○이 뒤에서 쏴 죽이는 것을 목격함.”



옹동면 매정리 정동마을 부근 임시 치안대 건물에 잡혀가 조사를 받는 민간인들도 밤중에 술을 먹고 온 백○○이 난데없이 총을 난사해 살해하기도 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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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왕○춘(당시 19세),
학도의용대원, 2009. 9. 8 진술

“백○○은 타지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잡혀갔다 풀려나오기로 돼 있는 젊은이들을 어느 날 저녁 정동 교회 밑 치안대 건물에서 총으로 쏴 죽였다. 그날 저녁, 마을 청년 8~9명이 한꺼번에 죽었다. 백○○은 보복이 두려워 마을에서 나갔다.”

백○○의 복수극은 부역자 처벌 기간 내내 이어졌다. 그러나 아무도 백○○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옹동지서 방원대원으로 백○○과 함께 치안 활동을 한 이○주(28세)는 진실화해위원회 진술에서 “백○○은 순경으로 근무하면서 빨치산과 관련 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죽였다. 당시 지서주임이 따로 있었지만 백○○의 임의적인 행동을 막지 않았다. 다른 경찰은 백○○과 같이 임의로 사살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백○○이 이후 전주로 전근을 가서 그곳에서 경찰을 그만뒀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다”고 했다.

빨치산의 총구 앞에서 밥해 준 죄로 처형되었다

남로당원 김○봉은 남로당이 불법화되자 인천으로 피신했다가 전쟁이 발발한 뒤 고향인 장수군 계북면 농소리에 돌아왔다. 인민군 점령기에 부역을 했고 수복 후 경찰에 자수했다. 자수 후인 1951년 1월 8일 김갑봉은 국민방위군 소집에 응하려고 장수경찰서에 나갔다가 장수경찰서 성○○에게 연행돼 구금되었다. 가족들의 면회도 허락되지 않았고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같은 마을 이웃 박○홍(당시 29세)은 “김○봉은 인민군 점령기에 분주소장을 하였고 수복이 되자 자수하고 집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수경찰서에서 국민방위군 소집이 있어 장수경찰서에 함께 갔는데 경찰이 김○봉을 연행했고 얼마 뒤 ‘싸리재’에서 살해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김○봉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김○봉이 인민군 점령기에 부역했다는 것 때문에 경찰에 연행돼 싸리재에서 살해된 것으로 보이며 제적부의 사망일자 ‘단기 4284년 1월 8일’이 연행된 날짜와 일치함을 확인했다.

1951년부터 장수경찰서 대성출장소에서 의경으로 근무했던 조○제(당시 16세)는 “이곳이 산간오지라서 빨치산들이 장수에서 지리산으로 가는 통로이다 보니 장수경찰서에서 경찰을 파견해 근무시켰는데 경찰이 인민군 점령기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을 연행해 장수읍 싸리재에서 총살했다”고 증언했다.

1950년 음력 11월 말경, 장수군 산서면 하월리 김○철은 자수를 하면 부역 사실에 대해 관용을 베푼다는 말을 듣고 10여 명의 주민들을 설득해 산서지서에 자수했다. 그러나 산서지서에 구금돼 장수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아들 김○훈(10세)은 “아버지가 부역했다는 것도 인민군들이 밥을 해달라고 하면 밥을 해 주고 쌀을 달라고 하면 쌀을 주는 정도였다. 아버지가 경찰서에 구금된 뒤 어머니께서 10차례 정도 면회를 다녔는데, 어느 날부터 경찰서에서 면회를 불허하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돌아가신 것 같다.”고 말했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정○현(13세)은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김○철은 똑똑한 분이었는데 경찰에 끌려갔다가 싸리재에서 사망했다. 그 무렵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이 경찰에게 끌려갔는데 그 사람들도 모두 싸리재에서 죽었다.”
전북지역 민간인 희생장소 발생장소.

장수 싸리재 위치도와 1980년대 지도에 표시된 싸리재.
장수읍에서 큰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큰싸리재(아래 붉은 원)가 나오고 작은싸리재로 이어진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총살지1, 총살지2로 확인한 곳은 큰싸리재다.
@국토정보맵

금융조합에 근무한 것이 부역행위?

군산시 회현면에 살았던 고○곤은 금융조합에 다녔는데 인민군점령 이후에도 계속 근무했다. 그런데 이것이 인민군에게 부역한 것이라며 1950년 10월 12일 회현지서로 연행돼 금강리 해변에서 살해되었다.
23살 청년 김○구는 수복 당시 군산시 회현면 대한청년단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인민군 점령기에 가족이 좌익에게 살해당했다. “수복 후 5일 정도 지나 치안대가 부역자 수백 명을 잡아들였고 군 법무관이었던 두○○의 명령으로 10명을 골라내어 신기촌 강가에서 총살했다. 아버지와 처가 인민군점령기 좌익들에게 살해된 후라 시신을 찾으러 다니드라 고○곤, 고□곤이 죽는 것은 보지 못하였으며, 김○길은 특별한 활동을 하였던 사람도 아니었는데 죽었다.” 증언에 따르면 군법무관 두○○의 숙부도 인민군점령기에 좌익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희생자 고○곤의 아들 고○우는 “군산은 철도노조가 강성했던 이리와 가까운 지역이라 좌익세력이 강했다. 당시 지리산 빨치산과 연계되어 보급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면서 피해가 컸다”고 했다.

산골 사람들이 경찰에 쫒겨 산으로 숨었다

1950년 1월경 무주군 무주읍 가옥리 산간마을 주민들은 경찰력이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빨치산의 협박을 이기지 못해 식량을 제공하는 등의 협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편 이 때문에 다시 경찰에게 쫓겨 다니는 처지가 되었다.

당시 가옥리 구장이었던 박○모는 빨치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주민 10여 명과 함께 경찰에게 쫓겨 다녔다. 당시 13세였던 이○문은 경찰이 주민들을 체포해 몽둥이로 구타하는 모습을 보았다. 박○모가 경찰의 체포를 피해 도망 다닐 때, 그의 동생 박○열이 대신 경찰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박○모와 그의 친구들 15명 정도가 경찰에게 쫓겼으며 경찰에게 잡혀 몽둥이로 맞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겨울 어느 날 박○모 외 3명이 앞산에서 총살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의 부친이 아들 시신을 지게로 짊어지고 와서 매장했음. 양 미간에 총을 맞아 얼굴로 신원을 확인할 수 없어 금니를 보고 알았다고 했다. 그의 동생 박○열도 형이 죽은 후 경찰에게 끌려가 매를 맞았으며 그 뒤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참고인 이○문 진술, 2008. 8. 19)

경찰을 피해 도망 다니던 박○모는 1950년 1월 29일 무주경찰서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같은 마을주민 3명과 함께 평촌마을 앞산에서 총살당했다. 시신은 그의 부친에 의해 수습됐다. 수습 당시 시신은 나무를 등지고 손을 뒤로 묶인 채 머리 앞부분에서 뒷부분으로 관통상을 당한 상태였다.
동생 박○열은 형 박○모가 희생된 지 20여 일 뒤인 1950년 2월 20일경 경찰을 피해 도망 다니다가 용포리골짜기에서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이웃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열은 산에서 숨어 지내던 주민들 수십 명과 함께 경찰의 매복에 걸려 체포돼 사살당했다고 한다.

정미소에 불 켜놓은 게 빨치산과 내통

희생자 김○옥은 부안군 행안면 삼간리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다. 1951년 10월 28일이었다. 그날 정미기계가 고장나 밤새 불을 켜놓고 고쳤다. 그런데 다음 날 치안대가 몰려와서는 밤새 불을 켜놓고 발전기를 고친 것이 빨치산과 내통한 증거라며 김○옥을 비롯한 몇 사람을 주산면 주산양조장 뒷산으로 끌고 가서 총살했다.

이웃 마을에 살았던 김○철(20세)은 사건 전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김○옥은 방앗간을 운영하려고 이사 왔는데 밤마다 마을에 빨치산이 출몰하자 피난을 다녔다. 그때 소주리 치안대장 박○만의 동생 박○철이 빨치산에게 죽임을 당했고 다음 날 아침 경찰이 돈계리에 들어와 주민들을 집결시키고 전날 밤 불을 밝혔다는 이유와 인민군 점령기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김○옥, 최○춘, 김○식의 형과 함께 주산지서로 끌고 갔다. 이 중 최○춘이 인민군 점령기 가족을 보호해줘 최○춘의 시신을 찾으러 주산지서로 갔는데 그때 김○옥 시신도 보았다. 경찰이 연행해 치안대가 살해했다고 들었다. 돈계리는 빨치산 근거지였던 변산이 바로 보이는 곳으로 빨치산이 교신을 위해 봉홧불을 올리던 곳이었다. 그래서 김○옥이 일하면서 불을 밝혔던 것을 빨치산과 교신한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자기 나라 군대와 경찰을 피해 피난을 갔다

고창군 무장면 송현리 김○철, 김○주는 송현리가 수복될 무렵 좌익들이 피난을 나가지 않으면 죽인다고 해서 피난을 나가 굴속에서 밤을 새고 다음 날 아침 집에 오기 위해 굴 앞을 나서던 중 방위병의 눈에 띄어 인근 한재산으로 끌려가 경찰에게 살해되었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김숙환(22세)은 경찰과 빨치산 양쪽을 다 피해 다녔던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좌익이나 경찰 양쪽에서 주민들을 괴롭히니 아침에는 집을 나가 낮에는 숨어 지내는 생활을 한 달 넘게 하며 빨치산을 피해 다녔다. 그렇지 않으면 경찰은 경찰대로 인공은 인공대로 우리들을 죽이려고 했다.” 군경은 빨치산 토벌 작전을 하면서 군경을 피해 집을 나온 주민들을 포위해 살해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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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21세) 진술, 2008. 10. 31

“피난을 떠나는 가운데 군인들이 사람들을 향해 포위하면서 총을 쏘았는데 엄○섭(21세), 유○종(25세), 임○택(30세), 김○현(30세), 엄종○(31세))이 군인들에게 잡혀 총살당했다.”

방위대가 연행하고, 경찰이 생사를 결정했다

희생자들은 전북 각 지역에서 1949년 3월부터 한국전쟁기인 1952년 9월까지 국군과 지역 경찰, 제18전투경찰대대, 방위대에게 법적 절차 없이 살해되었다. 전북지역에서 방위대원이나 치안대 활동을 했던 이들은 당시 경찰과 토벌대에 의해 민간인들의 희생이 발생했음을 인정했다.

“순경과 방위대가 부역자들을 연행한 후 죽일 사람은 죽이고 풀어줄 사람은 풀어주었는데 살해 여부는 경찰이 결정했다. 총살대상자는 지서 부근에서 총살했다. 경찰은 특히 감시대상자는 명단을 만들어 감시했으며 전향 교육을 정기적으로 시켰고 전향되지 않았다고 판단되면 경찰이 직접 동네에서 총살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사건 조사보고서에서 전북지역에서 일어난 이들 사건을 수복 후 “부역자 처벌과 빨치산 토벌을 하는 과정에서 경찰과 군인이 비무장 민간인을 살해해 일어난 것”으로 규정했다. [참고인 민○식 진술녹취(2009. 5. 28.)]
사건명 전북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전북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기)
지역 전북 정읍, 장수, 군산 등 9개 시군
사건 발생일 1949년 3월 ~ 1952년 9월
진실규명 신청인 최○옥 외 40명
진실규명 결정일 2010년 6월 30일
진실규명 인원 최○범 등 44명(희생자: 최○범 등 62명 이상)
결정사안 전북 정읍, 장수, 군산 등 9개 시군에서 1949년 3월부터 1952년 9월까지 한국전쟁 전후 시기에 좌익 활동 및 부역했다는 이유로 전북도경찰국 및 각 경찰서와 지서의 경찰, 방위대, 토벌 작전 중이던 군인에게 연행돼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살해된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정읍경찰서, 장수경찰서, 군산경찰서, 무주경찰서, 진안경찰서, 고창경찰서, 김제경찰서, 부안경찰서, 남원경찰서와 관할 지서 경찰. 제18전투경찰대대 및 해당지역 주둔 군인 및 방위대. ‘고창군 고창읍 백양마을 사건’(다-4439호)의 경우 국군 제11사단 13연대 3대대 소속 군인
참고자료 영상: KTV 국민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