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중 공음면 선산마을의 사례 “적의 손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

고창지역희생자위령탑 부분. 어린이와 여성, 노인 등 주민들이 총에 맞아 희생되는 장면을 형상화했다.

고창지역희생자위령탑 부분. 어린이와 여성, 노인 등 주민들이 총에 맞아 희생되는 장면을 형상화했다.

수복 늦었던 고창지역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역전되자 군경은 지역별로 수복 작전에 돌입했다. 유엔군은 9월 20일 전북 군산 앞바다 오식도에 상륙했고, 전북경찰국 선발대(대장 송영주 경감)는 9월 28일 전주를 수복하였다.
《한국전쟁사료》와 참고인들의 진술로 보아 고창지역은 제11사단 국군에 의해 1950년 11월 19~21일경 수복됐고, 12월 중순 이후 제20연대 1개 부대가 고창지역에 주둔하면서 고창 경찰과 함께 수복 작전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고창지역 관내 수복 작전은 6중대가 고창중학교(현 고창고)에 주둔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6중대는 G-2 요원들을 활용해 적정을 파악하고, 이들이 작성한 ‘적정보고서’에 따라 작전 병력을 출동시켜 빨치산 토벌 작전을 실시했다. 작전은 새벽에 출동해 일몰 전에 귀대하는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6중대는 1951년 1월 말경 8중대와 교체되었다.
전북경찰국은 고창 수복 작전에 제18전투대대를 투입하고, 경북에서 300여 명을 차출해 고창 경찰에 배속시켰다. 참고인 조○○(당시 26세, 고창 경찰)은 “고창 진주 후 관내 수복 작전에는 제11사단 20연대 2대대 군인, 고창경찰부대 200여 명, 경북증원부대 300여 명, 제18전투대대 200~300명 등이 같이 작전을 했다”고 진술했다.

당시 고창지역은 빨치산들의 심한 저항으로 수복이 더디고 어려웠다. 참고인 백○○는 “11월 21일 고창읍이 수복됐지만 면 단위 이하의 마을은 1951년 봄까지도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 상황이 계속됐다”고 증언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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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경찰 출신 이○○(당시 24세)가 제출한 사실확인서
(6.25남침피해유족회 이의신청서 33쪽)

“11월 21일 고창면 소재지를 수복하였지만, 경찰서와 군청을 중심으로 사방에 3,300V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을 설치하였고, 그 지역 내만 대한민국 통치권이 미치는 곳이었고, 그 밖은 주야로 인민군 패잔병 및 무장 공비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고창 수복이 늦어지면서 1951년 2~3월까지도 인민공화국 화폐인 ‘붉은폐’가 통화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진술도 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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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이○○ 진술조서(2008. 8. 7.)

“매형이 당시 소 장사를 하였는데, 1950년 10월 먼저 수복된 정읍에선 사용하지 않는 인민폐를 모아 고창에서 소를 사다가 이익을 본 일이 있다.”

아무 죄없이 피난 나온 사람들 죄다 죽였지

모내기를 끝낸 논마다 푸르고 어린 모가 가지런했다. 농촌에서 한해 농사를 잘 시작하고서 한숨 돌리는 때, 고창 공음면 해정마을에서 양완수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전북유족회장을 만났다. 양 회장의 집안은 제주 양씨로 8대조 할아버지가 해정마을에 들어와 200년 동안 살아왔다. 오랜 역사를 보여주듯 마을 모정 앞에는 ‘해정마을 양채용 효자비’가 단청 빛이 바랜 비각 안에 서 있었다.

“1950년도 음력으로 11월 스물여드렛날(양력 1951년 1월 5일). 난 열두 살 먹었는디 아버지가 돌아가셨응게. 그때는 공산주의가 여그 들어와가지고 국군이 오면 피난을 댕겼어. 낮에는 피난을 가라 그래. 공산주의 세력들이. 피난을 가. 피난을 안 나가면 반동으로 몰아. 그날에 우리 아버지랑 숙부님들도 다 피난 나가시고. 그런데 선산이라는 마을에다가 전부 다 포위를 해가지고 군경들이. ‘선산포위’라고 그러는데. 거기서 한 오백 명이 죽었다고. 누가 시어봤다 그래. (피난민들이) 전라남도에서 많이 왔지. 쩌그 영광이나 백수(영광군 백수읍) 근방에서도 많이 왔고. 사방에서 포위를 해가지고 죽 몰려온 것이 선산이여. 그 이튿날 아침에, 무지하게 추왔구만 그때. 겁나게 추왔어. 나는 열두 살 먹었는디, 그 이튿날 아버님 시신을 찾으러 갔다고. 우리 숙부님이 와서 ‘형님이 돌아가신 모양이다. 그렁게 가보자’ 해서 아침에 갔어. 방죽 뚝방에 기관총 두 대를 걸어놓고 쏴 버렸어. 시체를 떠들고 아버님의 시신을 찾았지. 집으로도 못 오고 산 있는 데로 가서 매장을 했지.”

이 이야기는 1951년 1월 5일 일어난 “공음면 선동리 선산마을 사건”이다. 군경은 중대장의 명령에 따라 저수지 둑 위에 수냉식 기관총 2정을 설치한 후 무차별 총격을 퍼부어 피란민들을 집단 살해했다. 이 사건 현장에서 도망쳐 살아난 김○오(당시 18세)는 당시 상황을 또렷이 기억했다.

“당시는 매일 아침밥만 먹으면 깃발을 보면서 도망갈 준비를 하였다. 그날은 여느 날과 다르게 여기저기에서 총소리가 들려서 선산마을 방향으로 피란길을 재촉하였다. 나도 아버지·숙부와 선산마을 뒷산 선인봉으로 올라갔다. 선인봉에 가니 검은 옷 입은 사람들이 총구를 앞으로 내밀고 앉은 채 피란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붙잡혀 새끼줄로 손목을 결박당하는데, 묶는 사람을 보니 무장중학교 동창인 김○○(당시 학도대원)였다. 그가 손목을 묶는 시늉만 하였다. 그 상태로 저수지 앞밭에 끌려가서 몇 시간 동안 무릎 꿇린 채 몽둥이로 온몸을 구타당하며 앉아 있었다.
오후 3~4시경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서 ‘너희들은 오늘 다 죽는다. 빨치산 은신처, 무기나 문서 은닉처를 아는 사람은 손들라’고 했다. 20여 명이 손을 들자 그들을 불러 따로 세우고 난 후, 저수지 둑 위에 있던 기관총에서 총격이 시작되었다. 중간에 ‘산 사람은 일어나라, 천운을 타고났으니 살려주겠다’고 하자 일어난 사람들이 있었는지 또다시 총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나의 뒷덜미를 잡으며 일으켜 세우는데 순간적으로 그를 확 밀치고는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내뺐다. 토벌대들이 총을 쏘며 쫓아 왔으나 죽지 않고 살았다.” (신청인 김대오 진술조서 2009. 11. 19, 영상녹음 2010. 2. 27)

피난민을 몰아놓고 집단 살해한 군경

전북 고창에는 선산마을 사건 외에도 군경에 의한 큰 규모의 민간인 희생 사건이 여러 번 벌어졌다. 《고창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를 보면 “해리면·심원면 사건”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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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 등 47명의 진실규명 신청 내용

“1950년 12월 22일 동짓날에 빨치산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진주한 군 부대원, 경찰, 학도병이 합세하여 잔당들의 유언비어로 피란에 나섰던 선량한 지역민들에게 무차별적인 총격을 가해 사체가 산과 바다에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억울하게 희생된 고인들의 명예를 회복해 달라.”

, “공음면 선동리 선산마을 사건”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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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수 등 31명의 진실규명 신청 내용

“1951년 1월 5일 국군 제11사단 20연대 2대대 6중대(이하 ‘6중대’) 병력이 공음면 선동리 선인봉 인근으로 공음면, 무장면, 대산면 주민과 타 지역에서 피란10)온 주민 500여 명 이상을 옥산저수지 앞밭에 집결시키고, 저수지 둑 위에 기관총 2정을 설치, 사격을 가해 무차별 학살하였다.”

, “상하면 하장리 오룡마을 사건”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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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 등 24명의 진실규명 신청 내용

“상하면은 한국전쟁 당시 수복이 늦어지는 과정에서 어린이부터 부녀자, 노인에 이르기까지 공산당으로 몰려 군경에 의해 무차별 학살당했다. 1951년 1월 6일 ‘오룡마을 사건’에서 20여 명, 3월 4일 ‘고리포사건’ 때 60여 명, 3월 13일 ‘택동사건’ 때 100여 명 이상이 군경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 “상하면 자룡리 고리포사건”, “상하면 용대리 택동마을 사건”이 진실규명 돼 있다. 이 사건들은 국군 11사단 군인들이 고창지역에 빨치산 토벌 작전을 하러 와서는 몇 개 읍을 포위하고 피란민들을 들판으로, 바닷가로 몰아서 집단 총살한 것이다. 여기에 고창경찰서 경찰과 지역의 우익단체, 인민군 점령기 희생자 유가족 등이 합세했다.
해정마을 입구.

해정마을 입구.

11사단장 최덕신의 명령

이들은 왜 이런 만행을 저질렀을까?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2010)에 따르면 고창군은 장성, 영광, 정읍, 흥덕·줄포 등 주변 4개 지역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으면 타 지역과의 통로를 차단할 수 있는 천혜의 방어 요새가 되는 곳이었다. 이 때문에 한국전쟁 발발 이전부터 빨치산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조사보고서(2010)에 기재된 증언에 따르면 사건이 일어나기 이틀 전에 장성에서 넘어온 빨치산 1개 중대 200여 명이 선산마을에 이틀 동안 주둔하면서 주민들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받고는 국군이 들어오기 전에 변산반도 방향으로 도주했다고 한다.

보고서에 수록된 사건 당일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렇다. “당시 공음면 군유리 뒷산(150미터)에는 마을의 좌익들이 인공기를 걸어놓았는데, 주민들은 인공기가 넘어지면 국군이 마을에 들어온다는 신호로 이해하였다. 사건 발생 당일, 주민들은 이 신호에 따라 전부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에 따라 6중대 군인들이 피난 가는 주민들을 ‘토끼몰이식’으로 몰고 다니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토끼몰이식’ 표현이 나온 이유는 6중대원, 고창경찰, 고창학련원, 군경유가족회원, 향방대원 등을 총동원하여 무장면·대산면·공음면 등 3개 지역을 포위하고 피난민들을 몰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모인 곳이 선산마을이었다. 군인들은 체포한 피난민들을 새끼줄로 묶어 마을 옆 옥산저수지 앞밭에 4열 횡대로 세워놓고는 저수지 뚝방에 순환식 경기관총 2정을 설치했다. 6중대장 이○○의 명령이 떨어지자 사격이 시작되었다. 이날 6중대 소대장 연락병이었던 한 증언자는 6중대가 수냉식 기관총 2정으로 총탄 1,000발을 발사했다고 증언했다.
“선산작전 때 중대장을 따라갔는데 저수지 앞에 400~500명이 붙잡혀 있었다. 그들을 6중대가 수냉식 기관총 2정으로 1000발을 발사하여 학살한 것은 사실이나 목숨이 붙어 있던 사람들을 선임하사가 살려줄 테니 일어나라고 한 후 재차 사살하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선임하사가 사살된 사람들의 목에 총구를 들이대고 숨 쉬는 사람에게는 그대로 총기를 발사하여 사살하였다. 이○○는 이 사건 며칠 후인 1월 13일 고창중학교 강당에서 고창읍내 살던 정○○과 결혼식을 올렸다. 내가 6중대 근무할 때 군인들은 날이 밝기 전에 출동하였다가 날이 저물기 전에 귀대하는 토벌 작전을 반복적으로 벌였다.” (참고인 이○○ 진술 2009. 6. 2, 2010. 1. 10)

또 총격을 당해 쓰러진 주민들을 목을 선임하사 1명이 소지하고 있던 소총으로 눌러 생존 여부를 확인하고 추가사살을 했다. 증언에 따르면 한 번 총격을 가하고 나서 쓰러진 사람들에게 산 사람들은 살려주겠노라며 일어서라고 한 후 다시 총격을 가했다고 한다. 조사보고서를 보면 그러고도 끝내 살아남은 사람은 떡메로 내리쳤다는 증언도 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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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김○무 진술조서(2009. 9. 21)

“나와 부친(김○길)은 빨치산 은신처를 안다고 손을 들어 총살대상에서 분리되었다. 바로 눈 앞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기관총 학살이 있기 전 토벌대로 온 민간인이 여자 한 명을 끌어내 옷을 발가벗겨 고랑에 처박고 칼로 내리쳐 죽이는 것을 보았다. 또 군인들이 기관총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살아 있는 사람은 일어나라’고 한 후 재차 총을 쏘아 죽였다. 그 다음에는 김○○이가 떡메를 들고 다니며 팔딱거리는 사람을 내리쳐 죽이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까지 집요하고 철저하게 민간인들을 살해한 것은 11사단장 최덕신의 명령에서 비롯하였다. 고창지역에서 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1951년 2월에 발생한 거창 사건 당시 최덕신은 이런 명령을 내렸다. “적의 손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 적은 주둔지 급 각지 촌락에서 귀환하지 않고 암암리에 행동을 감행하고 있으니 차를 용허치 못할 것임. 적발 즉시 총살하라.” 이는 적 점령지에 거주하거나 이동해 들어와 있는 민간인들을 모두 ‘적의 손에 있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총살 대상으로 지목한 것이다.

양완수 유족회장은 선산마을 사건에 대한 국가 공권력의 책임을 말했다. “11사단이 고창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어. 고창지역에서 국가 공권력에 의해 제일로 많이 죽은 사람들이 여기 ‘선산포위’에서 죽었어. 상하 ‘택동포위’도 있고 ‘심원포위’도 있었지마는. (…) 대한민국은 법치국가 아녀잉. 잡았으면 죄를 물어가지고 해야지, 무조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한 것이제. 국가공권력이 아무 쓰잘떼 없이. 잘못된 것이제.”

선산마을 사건이 있고 나서 며칠 후인 1월 13일, 6중대가 주둔하고 있는 고창중학교 강당에서 결혼식이 열렸다. 놀랍게도 바로 직전에 선산마을에서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6중대장 이○○의 결혼식이었다. 신부는 고창여중 출신 여성이었다. 조사보고서에 수록된 고창학련 조직부장 백○○의 증언에 따르면 이날 결혼식이 “초호화 결혼식”이었다고 한다. 정상적인 사회에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의 심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단 한 점의 공감도 불가능해질 때 학살과 생명 탄생을 예비하는 결혼을 동시에 행할 수 있을까. 73년 전에 일어났던 고창 선산마을에서의 사건은 오늘의 우리에게 아득하게 깊은 질문을 건넨다.
해정마을 입구

현장을 설명하는 양완수 전북유족회장
그가 선 곳이 바로 기관총을 설치한 뚝방 자리이고, 손으로 가리키는 아래쪽 비닐하우스 있는 곳이 학살 현장이다.

1963년 촬영된 선산마을 인근 항공 사진. 저수지와 당시 지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 붉은 화살표는 사격 방향을 가리친다. @국토정보맵

1963년 촬영된 선산마을 인근 항공 사진. 저수지와 당시 지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 붉은 화살표는 사격 방향을 가리친다.
@국토정보맵

진실은 언제나 떠오르려고 한다

진실은 물놀이 공과 같이 언제나 떠오르려고 하는 힘을 갖고 있다. 고창지역의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은 오랫동안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군사정권 때는 군경에게 희생되었다는 말 자체를 꺼낼 수 없는 시절이었다.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1987년에 이르러 ‘6·25양민희생자고창군제전위원회(위원장 황긍선)를 구성하면서 본격적인 진실규명 작업이 시작되었다.

유족들의 노력은 고창지역 정치권으로 이어져 결실을 맺었다. 1994년 6·25양민희생자실태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돼 1950년 12월부터 1951년 3월까지 국군11사단 등 군경에 의해 공음면 590명, 심원면 200명, 상하면 200명, 무장면 150명, 해리면 100명 등 총 1,240명의 민간인이 학살됐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고 십여 년이 흐른 2005년 12월,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을 했다. 2007년에 조사개시 결정을 내리고 2008년에 〈고창 11사단 사건〉 보고서가 나오면서 진실규명 판정을 받았다. 2007년에는 선산마을의 학살장소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령탑을 세웠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년 고창지역 전체 희생자를 위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고창지역 희생자 위령탑. 두 손에 당시 처절했던 모습을 고이 모시고 있는 형상이다.

고창지역 희생자 위령탑. 두 손에 당시 처절했던 모습을 고이 모시고 있는 형상이다.

사건명 고창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고창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1기)
관련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고창 11사단 사건〉(2008년 4월 8일 진실규명)
지역 전북 고창
사건 발생일 1950년 11월 ~ 1951년 5월
진실규명 신청인 설○표 등 129명
진실규명 결정일 2010년 6월 30일
진실규명 인원 최○우 등 346명(희생자 328명, 부상자 5명)
결정사안 ‘고창 11사단 사건’ 진실규명 결정(2008년 4월 8일) 사항을 취소하고, 사건명을 ‘고창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으로 변경하며, 진실규명(34건) 및 진실규명 불능(2건)으로 결정해 대체한 사례
결정사안 1950년 12월부터 1951년 3월까지 전라북도 고창군 일대에서 민간인 273명이 한국전쟁 당시 공비 토벌 작전을 이유로 국군 제11사단에 의해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 총살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국군 제11사단 20연대 2대대 6중대와 8중대 군인, 전북경찰, 고창경찰 등
참고자료 사진: 강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