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대전 골령골 1학살지 유해발굴에 참여한 성미산학교 학생들이 심은 ‘기억의 나무’ 팻말.

대전 골령골 1학살지 유해발굴에 참여한 성미산학교 학생들이 심은 ‘기억의 나무’ 팻말.

소년의 눈에 비친 학살 현장

1950년 7월 초 한여름이었다. 충북 옥천 군서면 사양마을에 사는 15세 소년이 곤룡재 고갯마루에서 아름드리 참나무 그늘에 앉아 바람을 쐬고 있었다. 올라온 길을 등지고 앉아 대전 쪽을 바라보니 저 아래 길 끝에서부터 트럭이 올라와 골짜기 한쪽 공터에 멈추었다. 곧이어 총을 든 사람들이 트럭에서 내리고 짐칸에서 손을 묶인 사람들이 바닥으로 줄줄이 떨어져 내렸다.

총 든 사람들은 묶인 사람들을 발로 차고 개머리판으로 때리며 몰아가 구덩이 앞에 한 줄로 늘어세웠다. 곧이어 여러 발의 총소리가 울렸다. 골짜기 가득히 메아리가 울렸다. 총에 맞은 사람들은 구덩이로 떨어졌다. 그 자리에 다시 묶인 사람들의 줄이 섰다. 또다시 총성이 울렸다. 소년은 납작 엎드려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세월이 흘러 소년은 80세 노인이 되었다. 65년 전에 일어난 사건을 묻는 한 언론사 기자에게 노인은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참혹했어. 만약 기자 양반이 그 광경을 보았다면 온정신으로 못 돌아다녔을 겨.”
소년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은 충격을 준 이날은 1950년 6월 28일부터 1950년 7월 17일에 걸쳐 일어난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가운데 하루였다. (오마이뉴스 2015. 3. 9.자 기사)
1965년 지도에 나타난 대덕군 산내면 낭월리 골령골 학살현장 위치. 대전시내와 멀지 않은 거리이다. @국토정보맵

1965년 지도에 나타난 대덕군 산내면 낭월리 골령골 학살현장 위치. 대전시내와 멀지 않은 거리이다.
@국토정보맵

1950년 6월 28일경부터 7월 17일 새벽 사이에 충남지구CIC, 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이 민간인들을 법적 절차 없이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집단 살해했다. 학살 장소는 골령골 골짜기 일대로 암매장한 구덩이의 길이가 각 100m, 200m에 달하는 것을 포함해 모두 8곳에서 학살이 자행되었다.
암매장 구덩이를 모두 이으면 전체의 길이가 무려 1km다. 희생자 수는 최소 1,800명에서 최대 7,000명까지로 추산된다.

일제도 차마 못 한 학살을 실행에 옮긴 이승만 정부

살해당한 이들은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이었다. 재소자들은 제주4·3 사건, 여순 사건 관련자, 정치·사상범, 징역 10년형 이상 일반사범 등이었다. 학살은 6월 27일 대전이 임시수도가 된 이튿날부터 시작돼 7월 16일 대구로 임시수도를 이전한 직후 17일 새벽까지 이어졌다.

대전이 임시수도 역할을 하는 동안 정부 각료와 고급 관리, 국회의원 등은 대부분 대전 시내에 있는 성남장에 머물고 있었다. 뜰에는 그 사람들이 타고 온 자동차가 80대 이상이나 주차돼 있었고 그중에는 가재도구부터 개까지 끌고 온 사람도 있었다. 식사용 쌀이 하루 다섯 가마나 필요했고 반찬만도 큰일이었다. 여관 주인이 느닷없이 들이닥친 불청객들을 먹이기 위해 고심하는 동안 멀지 않은 도시 외곽의 산골짜기에서는 수천 명이 살해당하고 있었다.

이들은 왜 살해되었을까? 도대체 사형 선고도 받지 않은 재소자와 예비검속돼 형무소로 끌려온 일반인을 국가가 일거에 몰살시킨다는 발상 자체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학살은 전시의 위급한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정부의 ‘최고위층’으로부터 명령 체계를 따라 전국 단위에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학살의 뿌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조선인 사상범·정치범에 대한 대규모 학살계획을 수립했다. 한반도에 전선이 형성되면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 요시찰인들을 예비검속하고, 전선이 경찰서에 가까워지면 예비검속자를 후방으로 옮기고, 만약 여유가 없으면 ‘적당한 방법’으로 처리, 즉 학살한다는 것이다. 이때 소련군이 상륙하면 공산주의자들을, 미군이 상륙하면 민족주의자들을 잡아들이기로 했다. 이들이 각각 소련과 미국 편에 서서 일본과 싸울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는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패전이 거의 확실해진 상황에서 학살을 감행했을 경우 조선인들에 의한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일제는 조선에 있는 자국민의 안전을 우선에 두고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달랐다. 일제가 식민지인에게도 차마 실행하지 못했던 학살 계획을 자국민에게 감행했다.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집단희생지 안내판.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집단희생지 안내판.

골령골 발굴 현장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유해(2022. 6. 16 강변구 촬영)

골령골 발굴 현장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유해(2022. 6. 16 강변구 촬영)

죽음의 모스 부호

학살에 이르는 첫 명령은 전쟁 발발 당일 떨어졌다. 6월 25일 오후 내무부 치안국이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이라는 제목의 비상통첩을 경찰 무선전보로 보냈다. 학살을 예비하는 죽음의 모스 부호가 전국의 경찰국에 전파되었다. 충남경찰국은 전보의 내용을 대전경찰서와 유성경찰서 등 각 경찰서로, 각 경찰서는 지서로 하달했다.

당시 충남경찰국 사찰과에서 근무하던 서○○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1950년 6월 하순에 내무부 치안국에서 충남경찰국 사찰과로 보도연맹원을 전부 잡아들이고 처단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진술했다. 서○○의 진술은 내무부 치안국 통첩이 사실임을 뒷받침한다. 충남경찰국과 대전의 경찰은 내무부 치안국 지시에 따라 보도연맹원 등을 예비검속해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했다.

얼마 안 가 대전경찰서 유치장은 끌려온 보도연맹원들로 발디딜 틈이 없어졌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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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조○○ 진술(2009.4.30.)

“체포된 보도연맹원은 많고, 대전경찰서 유치장은 적어, 이들은 형무소로 데려갔다.”

이들은 대전형무소로 옮겨졌다. 이어 7월 1일 새벽 ‘대전형무소 재소자 처리에 대한 명령’이 떨어졌다. 내용은 “미명을 기해 대규모 공습이 있으니 공산당 우두머리를, 좌익의 극렬분자들을 처단하라”(참고인 이○○, 사건 조사보고서 214쪽)는 것이었다. 전국의 형무소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 결과 3·8선 이남의 형무소 20곳 중에서 16곳에서 학살이 일어났다.

대전형무소에 들이닥친 헌병 장교

죽음의 명령을 이행한 자들은 육군 방첩대(CIC)와 헌병대, 경찰이었다. 방첩대가 생사여탈권을 쥐고서 총지휘하고 헌병과 경찰이 학살을 실행하는 구조였다. 1950년 7월 2일경 2사단 헌병대 4과장 심○○ 중위는 당시 대전형무소 이○○ 소장 대리에게 재소자 인도를 요구했다. 헌병대가 인도 요구한 재소자들은 좌익수들이었다. 대전형무소 특별경비대 분대장이었던 참고인 이○○은 심○○ 중위가 “좌익수들, 즉 포고령, 국방경비법위반 등 주로 여순반란사건, 그리고 간첩죄, 보도연맹원, 그리고 10년 이상 강력범을 인도하라”고 요구했다고 증언했다.

심○○ 중위의 요구에 따라 형무관들이 재소자 신분장을 전부 소장실로 가져와 국가보안법이나 포고령 위반, 국방경비법 등 정치·사상범과 10년 이상의 일반사범을 전부 빼냈다. 같은 10년 형이라도 5년 이상을 살았거나 감형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구분할 시간이 없었다. 희생자 중에는 10년 형을 받고 8년을 산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분류된 재소자와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은 형무관들에게 묶여서 헌병들이 징발한 트럭에 실렸다.
트럭은 산내 골령골로 출발했다. 그곳은 충남 대덕군 산내면으로 지금의 대전 동구 낭월동 11번지, 13번지, 산4번지 일대다. 이곳은 1950년 당시 시유림으로 대전형무소에서 위탁사업으로 재소자들을 벌채하는 데 동원했던 곳이었다.

당시 5연대 헌병이었던 김○○은 학살의 주체와 장소에 관해 증언했다.
“5연대, 그때는 연대 헌병대가 다 해요. 사단헌병대는 큰집이지만 병력이 없어요. 연대 헌병대에 병력이 다 있지. 6‧25가 나가지고 다 의정부 쪽으로 출동했는데, 부대의 잔류 병력도 있어서 후방을 정리해야 되지 않겠어요. (중략)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일반 범죄자가 없었어요. 맨 사상범만 있었어요. (중략) 헌병사령관 송○○ 대령이 와서 “이거 다 죽여야 한다”고 했어요. (중략) 송○○ 헌병사령관이 직접 진두해가지고. 내 장소도 잊어먹지 않아. 충청도 옥천 근방에 산내면이라고 있어요. 거기 데려가서 싹 드드륵 해버렸어요. (중략) 그때 많이 희생됐어요.”(참고인 김○○ 진술 2009.5.8.)

대전형무소 특별경비대원이었던 김○□의 증언은 당시 재소자 호송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려준다.
“뒤로다가 두 사람을, 한 사람 왼손하고 옆 사람 오른손하고 어긋매끼로 묶었어요. 묶어서 감방에서부터 현관까지 끌고 왔어요. (중략) 끌고 와서 재소자들을 헌병이 징발한 트럭에 가득 실었어요. 헌병들이 총부리를 겨누면서 재소자를 트럭에 꽉꽉 채웠어요. 재소자들은 그때까지 트럭에 서 있는 채로 있었어요. 그리고 헌병들은 재소자들을 총 개머리판으로 때리면서 앉으라고 했어요. 못 앉을 것 같죠. 재소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앉아서 아주 납작해져요. (중략) 형무관들은 신분장을 가지고 운전석 옆에 앉고, 헌병들이 트럭 네 귀퉁이에 보초를 섰어요. 나중에는 형무관들이 트럭 네 귀퉁이에 서서 호송임무를 맡았어요.”(참고인 김○□ 진술2009.2.11.)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현장.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현장.

대전 산내 골령골 1학살지 A구역에서 발굴된 유해.

대전 산내 골령골 1학살지 A구역에서 발굴된 유해.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현장에서 발굴된 유해.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현장에서 발굴된 유해.

실탄은 한 발씩, 총구는 뒤통수에

골령골에는 이미 대한청년단원들이 이른 아침부터 파 놓은 구덩이가 준비돼 있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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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2015. 3. 16.
“사람 죽이곤 발로 꽉꽉… 그날 이후 한동안 밥 못 먹어”

“산밑 아래에 밭에 고구마 줄기(양손을 30∼40cm 사이로 벌려 보이며)가 이만큼 커 있었어. 한 경찰 경위가 인원을 조별로 나누고 각 조별로 고구마밭을 폭과 깊이를 각각 6자씩(1m80cm, 약 2m) 파라고 지시했어. 3개 조씩 땅 파는 데 투여됐어. 나머지 3개 조는 교대조로 편성해서 교대했어"


학살은 치밀하게 진행되었다. 사수에게는 실탄이 딱 1발씩 지급되었다. 10명씩 1개 조로 편성된 사수의 뒤에서 헌병 장교가 권총을 들고 지휘했다. 청년단원들이 희생자들을 10명씩 구덩이 앞에 엎어 눕혀 놓고 물러나면, 사수는 왼발로 등을 밟고 뒤통수를 대각선으로 겨냥했다.

사격 준비가 끝나면 헌병 장교의 ‘사격 개시!’ 구령이 떨어진다. 사수들은 그대로 방아쇠를 당긴다. 피와 뇌수가 사수의 바짓단에 튄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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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이○○
사건 조사보고서 221쪽

“살해하는 방법은, 동원된 청년방위대들이 재소자를 하나씩 끌어다가 구덩이 둑에 머리를 드러눕게 하고. 경찰 등 사수들이 10명씩 열을 지었다가, 헌병대와 경찰관 지휘관이 ‘준비’하면, 사수들이 하나씩 등을 발로 밟고서, 머리 뒤통수에다가 사격을 했다”



사격이 끝나면 ‘검사 총’ 구령에 따라 사수들이 약실에 남은 실탄이 있는지 확인하고 물러난다. 이어서 헌병 장교와 경찰이 일일이 권총으로 확인 사살을 한다. 그다음엔 대기하고 있던 청년단원들이 시신을 구덩이에 밀어 넣는다. 그리고 구덩이 속에서 2차 확인 사실이 이루어진다. 특경대원 김〇□은 당시 학살 현장을 목격했다.
“재소자들을 앉혀서 구덩이 쪽을 바라보게 하고, 재소자 뒤통수에 대고 쏘는 거야. 한 10m 뒤에서 쏘면, 피와 골 허연 것이 튀어서 바지가 엉망진창이 돼. 나중에는 군복을 새로 갈아입히고, 바짝 들이대라고 해. 총구를 머리에 바짝 들이대면 안 튀어. 그렇게 한 번 쏘고 나서, 꾸무럭거리고 있으면 권총으로 또 쐈어. (중략) 얼마 안 돼서 구덩이에 시신들이 거꾸로 쑤셔 박혀서 다리가 위로 서고, 별거 다 있었어요. 헌병 지휘관이 국민방위군(청년방위대))에게 산 위에서 돌을 굴려와서 시신들을 눌러 버리게 했어요.” (참고인 김○○ 진술 2009. 2. 11.)

학살은 하루종일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구덩이가 가득 찰 때까지 이어졌다. 구덩이가 차면 청년단원들이 퍼냈던 흙으로 시신을 덮었다. 주변 흙은 피에 젖어 곤죽이 되어 있었다. 마치 장마철 진흙탕 같았다. 아무리 흙을 덮어도 시신의 팔, 다리가 비어져 나왔다. 산에서 돌을 굴려와 누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때까지 끝내 죽지 않은 사람이 있어서 ‘살려 달라’는 비명이 들렸다. 그러면 다시 흙을 헤치고 사수들이 총을 쏘았다. 사격은 어둠 속에서 소리가 그칠 때까지 퍼부어졌다.
  • ① 호송 트럭에 ‘논산읍’이라고 적혀 있다.

    ① 호송 트럭에 ‘논산읍’이라고 적혀 있다.

  • ② 대한청년단원이 구덩이 앞에 10명씩 뉘였다.

    ② 대한청년단원이 구덩이 앞에 10명씩 뉘였다.

  • ③ 사수들이 등을 밟고 사격 준비 자세를 취한다. 뒤에서 헌병 장교가 권총을 들고 지휘하고 있다.

    ③ 사수들이 등을 밟고 사격 준비 자세를 취한다. 뒤에서 헌병 장교가 권총을 들고 지휘하고 있다.

  • ④ 뒷머리를 향해 총구를 대고 사격이 이루어진다.

    ④ 뒷머리를 향해 총구를 대고 사격이 이루어진다.

  • ⑤ 1차 확인 사살.

    ⑤ 1차 확인 사살.

  • ⑥ 구덩이에 던져지는 희생자들.

    ⑥ 구덩이에 던져지는 희생자들.

  • ⑦ 구덩이에서 2차 확인 사살.

    ⑦ 구덩이에서 2차 확인 사살.

  • ⑧ 구덩이에 쌓인 시신.

    ⑧ 구덩이에 쌓인 시신.

미국 육군 정보부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 보고문에 첨부된 사진. 출처: 미국국립문서관리청(NARA), 1999 기밀해제

1950년 영국 언론인 앨런 위닝턴이 촬영한 골령골 집단희생지 모습.

1950년 영국 언론인 앨런 위닝턴이 촬영한 골령골 집단희생지 모습.

이들이 학살당하는 사진들은 재미사학자 고 이도영 박사를 통해 국내에 알려졌다. 미국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KLO) 총책임자 애버트(Leonard J. Abbott) 소령이 미군의 라이카 사진기로 당시 장면을 찍었다. 이 사진을 첨부해 주한미국대사관 소속 육군무관 에드워드(Bob E. Edward) 중령이 1950년 9월 23일 워싱턴의 미 육군 정보부로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 보고문을 보냈다. 보고문에는 “이러한 명령은 의심할 여지 없이 최고위층에서 내려온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누군가의 가족이었다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장 전미경 씨는 충남 서천이 고향이다. 아버지는 좌우익의 대립 와중에 산으로 올라가 숨어 있었다. 경찰은 툭하면 구둣발로 방안으로 처들어와 어머니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대며 남편이 어디 있는지 대라고 다그쳤다. 전 씨가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였다.

1948년 12월 아버지는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산에서 내려왔다가 잠복해 있던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딸이 태어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그 길로 서천경찰서를 거쳐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어린 시절의 그는 친구들하고 잘 놀다가도 툭하면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놀림을 받았다. 그럴 때면 아버지가 보고 싶고, 한편으로 미웠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마음을 일기장에 시로 담아 썼다.

저 구름을 헤치면

저 하늘에 뭉게구름을 헤치면
아버지가 있을까
친구들은 학교에 가고 나는 나무하러
천방산에 올라

솔갈피 한 보따리 긁어 앞에 놓고
머리에 올릴 힘이 없어
산기슭 언덕에 나 홀로 앉아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바라보며

저 구름을 헤치면 아버지가 있으려나
아버지 보고 싶고 그리고 미워
그래도 어떻게 생겼나

- 전미경의 시집 『진실을 노래하라』 중에서
(12세 때인 1960년 10월 21일 일기장에 썼다)


전 씨의 아버지와 같이 1950년 7월, 찌듯이 더운 여름날에 산내 골령골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의 아버지, 아들, 형, 삼촌이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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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인 박○민 진술 요지
사건 조사보고서 327쪽

(부친) 박○조는 여순사건 당시 화양면 나진 리에서 열렸던 인민대회에 참석하였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연행되었다. 박○조는 여수종산국민학교에 감금되었다가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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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인 고○란 진술요지
사건 조사보고서 337쪽

4·3사건 이후 젊은 남자들은 모두 잡혀가서, (오빠) 고○수는 피신 다니다가 체포돼 주정공장에 감금되었다. 고○수의 모친이 매일 주정공장에 면회를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고○수는 모친에게 내일 석방되니 면회 오지 마시라 했다는데, 육지로 실려가버렸다. 고○수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고 편지를 보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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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인 정○애 증언 요지
사건 조사보고서 383쪽

1950년 7월 12일 (부친) 정○채는 자신의 논에서 모심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부여 시내 쪽에서 사람들을 가득 태운 트럭 1대가 논산방면으로 가던 중 정차하더니, 트럭에서 무장경찰 3명이 내려 정○채를 강제로 태웠다. 정○채의 형은 약 300m 떨어진 밭에서 일하다가, 논산 방면으로 가는 트럭에서 한 사람이 차에서 상의를 벗어 흔들고 나서 도로에 상의를 던지는 것을 보았다. 정○채의 형은 그 상의를 줍고 나서, 그 상의가 동생 정○채의 것이고, 정○채가 연행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정○채는 마을 친구들의 모임에 몇 번 갔는데, 이 모임이 좌익활동을 하는 모임이었던 것 같았다. 정○채 등 당시 연행되어 트럭에 실렸던 사람들이 대전 산내에서 집단학살당했다고 들었다.


이들이 모두 죽지 않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면 70여년 동안 수천 수만을 헤아리는 가족들의 아픔 또한 없었을 것이다.
전미경 씨는 현재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회장을 맡아 진실규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전미경 씨는 현재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회장을 맡아 진실규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사건명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조사보고서 《대전ㆍ충청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 사건》(1기)
지역 충남 대덕군 산내면(현 대전 동구 낭월동 11번지, 13번지, 산4번지 일대)
사건 발생일 1950년 6월 28일경 ~ 1950년 7월 17일 새벽
진실규명 신청인 고○금 외 283명
진실규명 결정일 2010년 6월 28일
진실규명 인원 268명(희생자는 267명이며 경정결정을 통해 1명 추가)
결정사안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285명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이 1950년 6월 28일경부터 1950년 7월 17일 새벽 사이 충남지구CIC, 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집단 살해당한 진실과 9‧28 수복 이후 등 고문 등으로 희생당한 진실을 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충남지구CIC, 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참고자료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대전ㆍ충청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 사건》, 2010
영상: KTV 국민방송
정병준, 〈한국전쟁 초기 국민보도연맹원 예비검속학살의 배경과 구조〉, 역사와현실 54(2004).
오마이뉴스 2015. 3. 9.자 심규상 기자, 〈"기자 양반이 봤다면 온정신으로 못 돌아다녔을겨"〉
오마이뉴스 2015. 3. 16.자 심규상 기자, 〈"사람 죽이곤 발로 꽉꽉...그날 이후 한동안 밥 못먹어"〉
임재근, 〈한국전쟁 시기 대전지역 민간인 학살 연구〉, 북한대학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6
전미경, 《진실을 노래하라》, 인권평화연구소,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