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부역혐의 희생 사건 구덩이에 던져진 채로 멈춘 시간

성재산 방공호에서 발굴된 유해.

성재산 방공호에서 발굴된 유해.

성재산 방공호에서의 첫 유해 발굴

2023년 3월 28일 오전 11시 진실화해위원회가 충남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 성재산 방공호에서 ‘아산 부역혐의 희생 사건’ 유해발굴 현장을 공개했다. 유해는 폭 3m, 길이 14m의 교통호를 따라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유해들은 대부분 무릎이 구부러지고 앉은 자세인 L자 형태로 보여 학살당한 후 방공호에 바로 매장된 것으로 추정됐다. 그중 한 유해는 비탈에 비스듬히 등을 대고 양 무릎을 위로 벌리고 몸을 구부린 채 두 손이 삐삐선(군용전화선)으로 결박당한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총살 후 구덩이에 던져진 그 순간이 마치 스냅사진처럼 동결된 것 같았다. 두개골 위에는 파랗게 녹슨 탄피가 얹혀 있고, 손목에는 삐삐선이 칭칭 얽혀 있었다. 한때는 손목을 파고들 정도로 강하게 옥죄었겠지만 살점이 사라진 지금도 유해들은 여전히 꼼짝없이 묶여 있었다.

성재산 방공호는 인민군 점령기에 구축됐는데 현재 들어선 신도리코 공장과 크라운제과 공장을 둘러 총 2km 정도 길이였다. 2km 중에서 고작 14m 구간에서 발견된 그들은 누구였고, 왜 여기서 죽임을 당해야 했을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이 모두 영혼이 깃든 사람이었고, 구덩이에 던져질 때조차 살아 있을 때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좁은 방공호에 무릎이 굽혀진 채로 매장된 유해.

좁은 방공호에 무릎이 굽혀진 채로 매장된 유해.

교통호를 따라 유해가 가득 쌓인 채 발굴되었다.

교통호를 따라 유해가 가득 쌓인 채 발굴되었다.

수복 후 아산지역 부역자 처벌이 시작되다

1950년 9월 26일, 미군 기갑사단이 대전, 조치원을 차례로 수복하고 북진 중이며 천안을 통과해 서울로 진격할 것이라는 소식이 아산지역에 퍼졌다. 그러자 인민위원회와 내무서가 사무를 중지했고 지하에 숨어 있던 반공단체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군경이 완전히 복귀하기 전이었다. 9월 29일 미군이 온양읍에 입성했다가 10월 1일 천안으로 돌아가고 이어서 온양경찰서가 10월 4일 완전히 복귀하기까지 아산군 전역에서 치안대가 조직돼 부역자 처리가 진행되었다.

아산지역 부역자 처벌은 1950년 9월 26~27일 미군이 천안을 지나던 무렵부터 각 읍·면 치안을 맡았던 치안대에 의해 시작돼 1950년 9월 29일 온양경찰 선발대가 미군과 함께 복귀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부역자의 체포·구금·조사·처벌을 주도한 것은 온양경찰서 사찰계였다. 처형이 집행될 때는 경찰 1명이 인솔하는 의용경찰,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등 치안대가 처형지로 끌고 가 총살했다. 이러한 체포와 살해는 1951년까지 계속되었다.

“총살당해 죽을래? 맞아 죽을래?”

탕정면소재지 용두리에서는 이미 1950년 9월 26일(음력 8월 15일)부터 치안대 활동이 시작되었다. 인민군 점령기에 희생되었던 원○○과 한○○의 아들들이 총을 메고 다니며 부역혐의자를 체포하는 데 앞장섰다. 동산1구에서는 태극기를 머리에 두른 태극동맹원들이 부역혐의자들을 체포했다. 또 인민군 점령 시기 인민재판에 동원됐던 이들이 용두리 치안대원들에게끌려가 지서에서 밤새 두들겨 맞고 새벽에 풀려났는데 그중 황〇근은 결국 사망했다. 그 후에도 밤마다 많은 주민들이 의용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부역 사실을 자백하라는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탕정면 각지에서 끌려온 200~300명의 주민들이 탕정지서와 탕정면 곡물창고에 나누어 감금되었다. 그리고 이름이 불리어 나간 사람들은 지서 뒷산 방공호에서 살해되었다. 1950년 10월 중순 동산1구의 류○○은 개인적 모함으로 온양경찰서에서 나온 의용경찰과 청년방위대 9명에 의해 탕정지서로 연행되었다. 류○○은 탕정면사무소 숙직실 앞 창고에서 첩자 활동을 자백하라는 고문을 당한 후 밤이 되자 지서 뒷산 방공호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총을 멘 청년 2명이 “총살당해 죽을래? 맞아 죽을래?”라고 하자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것으로 답을 했다. 그때 머리를 몽둥이에 맞고 방공호에 떨어져 묻어졌다가 극적으로 살아났고 이후 국군에 지원했다.
탕정면에서 끌려온 부역혐의자들은 탕정파출소(탕정지서)로 연행된 후 곡물창고에 구금되었다가 탕정지서 뒷산에서 희생되었다. @구글지도

탕정면에서 끌려온 부역혐의자들은 탕정파출소(탕정지서)로 연행된 후 곡물창고에 구금되었다가 탕정지서 뒷산에서 희생되었다.
@구글지도

인민위원장 지냈다는 이유로 일가족 몰살

1950년 9월 27일 대동리(황골) 인민위원장을 지냈던 홍〇학과 그 일가족(13명)은 치안대에 의해 마을 어느 가옥에 감금됐다가 2~3일에 걸쳐 새지기 공동묘지에서 살해되었다.
희생자들은 젖먹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줄 세워져 마을 공동묘지 새지기로 끌려갔다. 죽이러 가는 사람보다 죽으러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는데도 아무도 반항하지 못했다. 끌려가던 중 젖먹이를 업은 여자아이가 무성했던 콩밭으로 몸을 굴려 숨어 있다가 살아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끔찍한 상황에서 살려고 하니까 젖먹이조차도 울지 않아 들키지 않고 용케 살았다. 끌려간 사람들은 애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죽을 만큼 몽둥이에 맞은 다음 구덩이에 던져져 흙으로 덮어졌다. 미처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꿈틀거리며 산채로 매장되었다.

가해자는 홍○○, 홍○○ 형제가 주동이 된 마을 치안대였는데 홍○○은 대한청년단이었고 홍○○은 인민군 점령기 좌익 측의 일을 보다가 수복이 되자 재빠르게 자리를 옮겨 부역자들을 처형하는 데 앞장선 자였다. 이들은 누군가 좌익 쪽에 관련이 돼 있다면 그 가족들까지 모조리 잡아 죽였다. 홍○○, 홍○○ 형제는 같은 집안인 홍〇학 가족조차 철저히 살해했는데 당시 분위기는 주민들 중 누군가가 나서서 “누구 잡아라” 하면 삽시간에 지목당한 사람을 잡아 죽이는 분위기로 몰아졌기 때문에 보복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 가족들은 줄줄이 엮어져 살해될 수밖에 없었다.

성재산 방공호에서 들려온 총소리

1950년 10월 말쯤이었다. 아산군 배방면 남리(성재산 앞마을 돌장원 옆)에 살던 최〇숙이 밭일을 하러 나갔다가 온양경찰서에서 오는 트럭을 보았다. 그녀의 오빠 최〇신은 전쟁 전부터 좌익활동을 했는데 아산지역 수복 후에 이모집으로 피신했다가 치안대에게 붙들려 온양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러니 경찰서에서 나오는 트럭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트럭이 돌장원 입구(성재산 앞마을)로 왔다. 최〇숙의 집이 바로 길옆이어서 트럭에 탄 사람들이 다 보였다.

차는 하루에 한 번 또는 두 번 왔다. 최〇숙이 본 것만 대여섯 번이었다. 차가 오면 얼마 후 돌장원 입구 교통호에서 총소리가 났다. 최〇숙은 총소리를 들은 날에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느 날은 어두운 시각에 총소리가 났고 누군가 와서 삽을 달라고 해서 주었다. 아마도 삽은 시신을 묻을 때 쓰였을 것이다.
“밭에 나가 김장배추 벌레를 잡으려고 하는데 온양경찰서로부터 사람들을 실은 트럭이 돌장원 입구(성재산 앞마을)로 왔습니다. 우리 집이 바로 길옆이니까 보았습니다. 차에 탄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호송하는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모자들을 쓰고 있었습니다. …(트럭으로 사람들을 나르기를) 하루에 한 번도 하고 두 번도 하고 그랬는데 두 번 할 때는 아침과 저녁에 날랐습니다. 안 보려고 피해도 너무 가까워서 다 보였습니다. …(트럭을 목격한 횟수는) 못 갔어도 5~6번을 갔습니다. …차로 사람들을 나른 다음에는 돌장원 입구 교통호에서 총소리가 들렸고 ‘만세’ 소리도 들었습니다. …우리 집에서 거리가 200미터 정도도 안 되었기 때문에 총소리는 굉장히 크게 들렸고 그 소리를 들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어두울 때인데 그날도 차에 사람을 싣고 지나가더니 총소리가 났었는데, 누군가 와서 삽을 달라고 해서 삽을 준 적이 있습니다.” (신청인 최〇숙 진술 2007.12.18.)
그 후로 최〇숙은 집에 피난 온 머슴아이를 몇 년 두었는데 나무를 해 오라고 시키면 성재산 방공호에는 “땅 위로 비어져 나온 해골바가지가 많다”며 무섭다고 가지 않았다고 한다.
1960년대 지도의 성재산 방공호(노란 원)와 남리.

1960년대 지도의 성재산 방공호(노란 원)와 남리.

도민증 준다고 모아놓고 주민 학살

1951년 1·4후퇴로 인해 다시 전선이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피난을 가기 위해서는 도민증이 필요했다. 당시 생존자 맹〇재의 증언에 따르면 1951년 1월 7~8일에 배방면 향토방위대가 면내 10개 마을에 “도민증이 없는 사람은 도민증을 발급하고 지국이 시국인 만큼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켜 주겠다”며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주민 300여 명을 면 곡물창고에 집합시킨 후 저녁에 성재산으로 ‘장날 소떼 엮듯’ 새끼줄로 묶어 끌고 가 총살했다.

당시 희생자들은 가족 단위로 살해되었기 때문에 유족이 없는 경우가 있었으며 유족이 있더라도 생존을 위해 곧 고향을 떠나버렸다. 그러므로 시신 수습은 거의 이루어질 수 없었다. 임○○은 1951년 봄 성재산 아래 자신의 논으로 농사지으러 갔을 때, 방공호에 시신이 가득한 것을 목격했다. 설 묻어서 손, 옷가지 등이 나와 있었다. 임○○은 당시 시체 썩는 냄새가 지독하여 일을 하지 못했고 결국 그 땅을 팔아버렸다.

지서 순경과 향도방위대장이 지역 주민 183명 학살

1951년 1월 6일 저녁 8시 배방지서 순경 한〇우는 향토방위대장 한〇익과 공모해 ‘좌익분자 및 동가족’ 183명을 창고에 예비검속해 두고 전원 총살 후 부근 ‘금광굴혈’에 사체를 유기하였다. ‘금광굴혈’은 배방면 세일 폐금광을 가리키는 것으로 금을 채굴하던 시기 ‘금방앗간’이 있었던 중리3구에서는 뒷산에 있다 해서 ‘뒷터골’이라고 불렀다.

폐금광의 희생자들은 주로 온양, 배방, 신창 등 주민들이었고 사체를 매장할 때는 중리3구 청년들이 동원되었다. 당시 배방면사무소에 근무했던 맹○○에 의하면 1·4후퇴 시기 온양경찰서로부터 배방지서와 면사무소 및 각 이장에게 부역자와 그 가족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고 한다.
1960년대 지도의 성재산 방공호(노란 원)와 남리.

1960년대 지도의 성재산 방공호(노란 원)와 남리.

“죄지은 놈만 죽이지 왜 다 죽이냐!”

산양1구 사람들은 산양2구보다 잘살았다. 그래서 인민군 점령기에 산양2구 주민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수복이 되자 산양1구 정〇〇 등이 부역혐의자를 밀고해 산양리 일대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들이 살해되었다. 희생자들은 회의에 나오라는 말을 듣고 산양1구(남산말) 곡식창고로 모였다가 그날 밤 뒷산 방공호에서 총살당했다. 다음날 희생자의 조부 되는 노인이 삼서초등학교(염치읍 치안분소)로 찾아와 “죄지은 놈만 죽이지 왜 다 죽이냐”라고 항의했다고 한다. 희생자들은 총살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몽둥이에 맞은 후 가마로 만든 들것에 실려 방공호에 던져졌다.

중학교 교사와 학생이 조직한 ‘태극동맹’

아산지역 민간인 희생의 주요 가해자인 치안대는 대한청년단과 청년방위대로 구성되었다. 치안대는 부역혐의를 밀고하고, 체포해 구금하고, 고문하고 살해했다. 한편 수복 후에 활동한 민간단체로 ‘태극동맹’이 있었다. 이들은 인민군 점령기에 온양읍 온양중학교 교사와 남녀학생들이 조직한 단체로 태극 문양이 그려진 완장을 두르거나 수건을 쓰고 다니면서 부역자 체포에 적극 가담했다.

이들은 지하에서 반공 투쟁을 벌이면서 좌익측의 정보를 우익에게 전달하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황을 파악했다. 수복 후에는 지하 활동을 끝내고 적극적으로 부역혐의자를 체포하는 데 역할을 했다. 선장면 군덕리에서 조직된 태극동맹의 경우 단원들은 주로 인민군 점령기에 핍박받았던 우익인사의 아들이거나 마을에서 힘깨나 쓰고 다닌다는 사람들이었다.

살해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살해에 가담한 사람들 역시 한때 영혼이 깃든 육신에 따듯한 감정이 흘렀을 것이다. ‘부역혐의자’를 비인간으로 간주하고 고문하고 살해할 때 이들 가운데 자신들의 평범했던 시절을 떠올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을까? 그렇다면 그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2021년 아산유족회 추모제 모습.

2021년 아산유족회 추모제 모습.

사건명 아산 부역혐의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아산 부역혐의 희생 사건〉(1기)
지역 충남 아산시
사건 발생일 1950년 9월 말부터 1951년 1월 초까지
진실규명 신청인 김〇성 외 10건
진실규명 결정일 2009년 5월 11일
진실규명 인원 김〇남 등 61명(희생자: 김〇남 등 77명)
결정사안 충남 아산지역 주민들이 인민군 점령 시기에 부역했다는 혐의와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1950년 9월 말부터 1951년 1월 초까지 적법한 절차 없이 온양경찰 소속 경찰과 치안대(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및 향토방위대, 태극동맹)에 의해 배방면 남리 배방산(성재산), 배방면 수철리 폐금광 등 여러 곳에서 집단 살해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온양경찰서와 치안대(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및 향토방위대, 태극동맹)
참고자료 영상: KTV 국민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