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홍성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진 인민재판

충남 홍성군.

충남 홍성군.

홍성보도연맹원 학살

충남 홍성군은 일제강점기부터 충청남도 중서부 지역의 정치·사회 운동의 중심지였다. 중소 지주가 많고 자·소작층이 발달해 다른 지역보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편이었다. 항일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중소지주들의 중도우파와 사회주의 계열이 서로 대립하기보다는 좌우합작을 우선했다. 해방이 되자 친일파를 제외한 좌우 두 세력이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홍성지부를 결성했다. 그러나 미군이 남한이 진주함에 따라 극우세력이 힘을 얻었고,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면서 좌우가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1945년 12월 무렵부터 좌익은 홍성인민위원회로, 우익은 국민당 홍성군당으로 갈라져 대립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홍성경찰서 경찰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홍성지역 보도연맹원들을 잡아들여 홍성경찰서 상무관에 구금했다. 1950년 7월 11일 경찰은 후퇴하기 전, 군의 지휘에 따라 상무관에 구금된 보도연맹원들을 대전형무소로 이송하거나 용봉산과 갈산면 행산리 폐광(금광굴) 등에서 집단 사살했다. 홍성지역에서 보도연맹원 사건 희생자 수는 약 100명으로 추산된다[진실화해위원회 〈충남 서부지역 국민보도연맹 사건〉, 2009.].

당시 희생자들을 수송한 트럭 운전사 전○○은 어느 날 저녁에 경찰서에서 트럭을 가지고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경찰서에 도착하니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의 이름을 부르고, 불려 나온 사람을 묶고 있었다. 전○○은 경찰이 시키는 대로 사람들을 태우고 용봉산으로 갔다[최○○ 진술조서, 2022. 5. 26.]

인민군 점령하자 ‘반동분자’ 색출

경찰이 후퇴한 바로 다음 날인 1950년 7월 12일 새벽에 인민군이 홍성에 입성했다. 곧바로 지방좌익 중심으로 인민위원회가 수립돼 홍성지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인민위원회는 먼저 토지개혁을 시행하고, 이른바 ‘민족반역자·반동분자’ 색출작업에 돌입했다. 대상자는 주로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협력한 인물이거나 좌익 세력을 탄압하고 보도연맹원 사살에 협력했던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원과 지주·경찰·공무원 등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인민재판을 받았으나 즉결처분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홍성지역에서 인민군과 지방좌익 등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은 인민군 후퇴 시기인 1950년 9월 27일경부터 홍성경찰서 경찰들이 복귀한 10월 7일 전 사이에 발생했다.
충남 홍성지역 희생장소.

충남 홍성지역 희생장소.

홍성 내무서 희생 사건 인민군이 후퇴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일

1950년 9월 27일 새벽 3시~4시 반까지 1시간 반 동안이었다. 홍성읍 소향리에서 과수원을 했던 김○○은 집에서 500m 떨어진 뒷산의 골짜기에서 울리는 무수한 총소리를 들었다. 다음 날 아침 9시경에 산에 가 보니 총살당한 시신 90여 구가 있었다. 시신은 10월 3일까지 유가족들이 수습했지만, 그중 20여 구는 찾아가는 사람이 없어 그대로 현장에 묻혔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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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공술서(1951. 5. 11.),
진실화해위원회〈홍성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 2009

1950. 9. 27. 03:00~04:30, 자택에서 서북쪽으로 약 오백 미터 정도 떨어진 산골짜기에서 총살을 집행하는 무수한 총성을 들었다. 다음 날 아침 09:00경, 사건 현장에 가서 총살당한 90여 구의 시신을 목격하였다. 1950. 10. 3.경까지 유가족들이 와서 시신을 수습하였고, 20여 구의 시신은 현장에 그대로 있었다. 희생자들은 예산, 서산, 홍성 등에서 반동분자로 규정되어 끌려와 총살되었다고 판단된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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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공술서(1954. 1. 29.,),
진실화해위원회〈홍성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 2009

1950. 9. 26.경, 인민군이 후퇴할 시기에 많은 홍성군 주민들이 반동분자로 규정되어 월산리 뒷산 골짜기에서 총살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950. 9. 29. 홍성읍 치안대원들과 함께 사건 현장에 가서 칼, 도끼 등에 의해 희생되어 웅덩이에 방치된 20여 구의 시신을 목격했고, 희생자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였다. 가해자인 인민군의 인적사항을 모르며, 어떤 이유로 죽였는지도 전혀 모른다.


희생된 이들은 홍성내무서 유치장에서 끌려온 사람들 가운데 일부였다. 홍성내무서 유치장에는 주로 경찰,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원이거나 공무원, 교사,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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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1961년생) 진술조서, 2021. 9. 7

할아버지 지○○(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은 일제강점기에 갈산국민학교 교장을 했고 해방 후에 서부면 면장을 지내다가 한국전쟁을 맞이하였다. 할아버지는 1950년 9월 27일 연락을 받고 주재소를 갔다. 이후 주재소 직원들에게 호송줄로 묶여 갈산으로 연행되었고 3~4일 후에 월산 계곡에서 총으로 희생되었다. 할아버지는 9월 27일 주재소(서부지서) 직원들에게 점심을 대접하였다. 이후에 직원들이 저녁을 사겠다는 연락을 받고 주재소로 나갔다. 할머니는 약 30분 후에 할아버지가 갈산 방향으로 연행되는 것을 목격했다. 직원들은 할아버지를 호송줄로 묶고 뒤에서 총을 겨눈 상태로 연행해 갔다. 할머니가 할아버지 시신을 수습했다. 할머니는 연행 장면을 목격하고 3~4일이 지난 후에, 할아버지가 희생당한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동네 인부 몇 명과 가서 시신을 찾아왔고, 집 바로 뒤쪽에 모셨다. 제삿날은 음력 8월 16일(1950년 9월 27일)이다.

마을 이장 등이 수감돼 있었다.
수감자 가운데 결성면 읍내리에서 농사를 크게 지었던 송○○은 9월 15일경 결성면사무소로 연행되고 다시 홍성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증언에 따르면 송○○이 (결성)면사무소 마당에 포승줄로 묶인 채 앉아 있을 때 아내가 사탕을 사 와서 호주머니에 넣어주고는 잘 다녀오라며 울었다고 한다.

사건 당일 오후 5시, 홍성내무서원 60여 명이 후퇴 준비를 완료했다. 하지만 남은 일이 있었다. 홍성내무서에 수감된 ‘반동분자’ 80여 명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내무서원과 인민군은 수감자들을 24명씩 한 조로 묶어 홍성내무서에서 각각 2km, 1.5km가량 떨어진 홍성읍 월산리 백월산과 소향리 뒷산, 흥북면 용봉산으로 끌고 가 살해했다.
장곡면 산성리의 이○○(농민, 당시 27세)은 1950년 9월 25일 저녁, 홍성 정치보위부원의 명령을 받은 같은 마을의 좌익 청년들에게 체포되어 홍성내무서로 끌려갔다. 당시 유치장 내 인원은 82여 명이었다. 9월 28일 01:00경, 24명으로 구성된 첫 번째 조가 손이 묶인 채 내무서에서 서북방향으로 1리 정도 떨어진 월산 기슭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내무서 군관의 지휘하에 30여 명의 인민군 병사들에게 총살되었다. 이○○ 등에 총을 맞았으나 치명상이 아니어서 생환하였고, 다른 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인민군들이 시신을 묻는 작업을 하다가 중단했으며, 시신은 그 뒤 대부분 가족들에 의해 수습되었다(진실화해위원회, 〈홍성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 2009).

광천읍 가정리 박○○ 희생 사건 군인 가족이라는 이유로

광천읍 가정리의 10살 소년 박○○의 아버지 박○○는 대한청년단 광천읍 가정리 단장이었고 작은아버지 박〇〇은 군인이었다. 작은아버지는 인민군 점령 시기에 마을 근처 산으로 몸을 피해 있었다. 1950년 9월 29일 지방 좌익들이 작은아버지를 잡으러 왔다가 그가 없자 대신 아버지와 고모를 끌고 갔다. 고모는 곧바로 풀려났지만, 아버지는 연행된 그날 광천읍 소암리 소용마을 철길 옆 논둑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총으로 살해되었다. 박○○이 동네 사람들이 아버지 시신을 들것에 실어 오는 것을 보았다. 시신 앞에는 구멍이 작게, 뒤에는 크게 뚫려 있었다. 9·28 수복 후에 박○○의 작은아버지는 광천지서에 근무하면서 지방 좌익들을 아는 대로 연행해서 총으로 사살했다[박〇〇(1941년생) 진술조서, 2022. 4. 15].
1960년대 국토정보맵 지도. 충남 홍성군 광천읍 철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1960년대 국토정보맵 지도.
충남 홍성군 광천읍 철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홍성읍 옥암리 박○○ 희생 사건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홍성읍 옥암리 주민인 박○○은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 서기였다. 그는 인민군 점령 시기에 홍성군 홍성읍 옥암리 집 마당에서 아들과 새끼를 꼬던 중 연행되었다.
“아버지는 1950년 8월 28일경 집에서 둘째 형과 새끼를 꼬던 중에 도룡뇽(도롱이, 짚으로 만든 우비)을 쓴 사람에게 공회당으로 연행되었다. 국회의원을 지낸 김영환이 아버지가 퇴각하는 인민군의 총에 희생되었다고 했다. 아버지와 같이 연행되었다가 탈출한 이○○·이○○가, 아버지의 시신이 홍동 팔괘리 계곡에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아버지가 연행될 때 삼촌 박○○이 입고 있던 옷을 아버지에게 주어 시신 수습할 때 삼촌의 옷을 보고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9·28 서울수복 후 홍성법원 근무자 4명의 희생에 대해 합동장례식이 있었다. 아버지가 공무원이어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희생자의 아들 박○○ 진술 2021. 8. 25)

1950년 9월 29일경 인민군은 후퇴하면서, 박○○과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 서기 김○○ 등 이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우익인사 10명을 트럭에 싣고 갔다. 우익인사를 실은 트럭이 예산군 오가면 공동묘지를 지날 때쯤 미군 B-29의 기총사격이 있었고 실려 가던 사람들은 모두 트럭에서 뛰어내려 숨었다. 인민군은 우익인사들이 도망갈 것으로 생각하고 총을 난사해 박○○ 등 여러 명이 희생되었고, 김○○만 살아남았다[사건조사보고서 167~168쪽].

결성면 결성국민학교 희생 사건

인민군이 후퇴하기 시작하자 우익들은 결사대를 조직해 10월 1~2일 홍성군 내 4개 면을 회복했다. 결성면에서도 봉기대(태극단)가 면을 회복했고, 지방좌익들을 잡아들여 결성국민학교 아래 창고에 가두었다. 이 무렵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과 지방좌익들은 산으로 들어가 인민유격대(빨치산)가 되었다.

10월 3일 오후 주재소를 통해 인민군들이 결성면으로 온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김〇〇 방위군 소위와 마을청년단원과 몇몇 마을 사람들이 결성면 읍내리 입구에 진을 쳤다. 오후가 되자 인민군과 지방좌익이 합세해 50~60명이 마을로 접근해 왔다. 교전이 벌어졌지만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인민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마을청년단은 곧 결성국민학교 안에 포위되었다.

인민군은 마을 사람들을 전부 결성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이게 했다. 당시 마을에 청년들은 거의 다 피신했고, 40~50대 장년층 남자와 여성, 아이들만 남아 있었다. 인민군은 오후 2~3시부터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인민재판을 열어 우익단체 회원, 공무원, 군경 가족 등 약 48명을 죽창 등으로 살해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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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1941년생, 희생자 유○○의 아들) 진술, 2021. 8. 23.

마을에서 인민재판이 있었다. 인민군은 점령 시기에 사람들을 학교 운동장으로 모이라고 하여 인민재판을 하였다. 당시 외삼촌, 동네 유지 등 많은 사람이 죽었다. 좌익과 그 자식들은 수복 이후에 청년단에게 희생당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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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1934년생) 진술조서, 2021. 9. 9.

아버지 최○○은 읍내리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는 한의사였다. 아버지는 9·28 서울 수복 이후 1950년 10월 3일 진료를 보던 도중에 환자들과 함께 지방 좌익에게 연행되었고, 결성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인민재판을 받아 죽창에 찔려 희생되었다.

이들은 시신을 동네 방공호에 끌어다 놓고 저녁에 마을을 빠져나갔다. 당시 13살이었던 김○○는 청년단 단장이었던 아버지가 연행되기 전에 집 아래 수수깡 나무 밑에서 어머니, 동생 2명과 숨어 있었다. 그때 고함과 비명소리, 쫓고 쫓기는 발소리가 너무 무서웠다. 이튿날 아버지 시신을 확인해 보니 죽창에 눈 옆 머리를 찔린 상처가 있었다. 김○○는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쫓기는 꿈을 꾼다.
전쟁 직후 결성면 읍내리와 결성국민학교(1954년 항공 사진). @국토정보맵

전쟁 직후 결성면 읍내리와 결성국민학교(1954년 항공 사진).
@국토정보맵

그래도 같은 마을 사람인데 살려야지

1950년 10월 7일 경찰이 홍성을 수복한 후, 홍성 각 마을에서 인민군 점령 시기에 인민군에게 협조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인민군에게 협조한 사람들에 대한 보복 사살이었다. 인민군 점령 시기에 무슨 일을 했다고 손가락질을 받으면 경찰에 끌려가 희생되었다. 개인 원한으로 손가락질을 받고 희생된 사람도 있고 물꼬 싸움으로 원한을 사서 손가락질 받고 희생된 사람도 있었다. 홍성읍에서 손가락질을 받은 사람들은, 소향리 옛 홍성여고 정문 앞 산골짝 웅덩이(붉은 고개)에서 희생되었다.(최○○ 진술조서, 2022. 5. 26)

결성면 형산리 조○○(1938년생)은 마을 어른들에게 같은 형산리의 원형산 마을에 살던 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박○○은 마을 유지였고, 경찰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세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박○○은 자신의 형이 인민군 점령 시기에 집안의 일꾼에게 희생되었다. 그런데도 9·28 수복 후에 인민군에게 부역했다고 의심받은 결성면 사람이 죽임을 당할 위험에 처하자 방공호에 숨겨서 살려 주었다. 그는 인민군에게 어쩔 수 없이 협조한 사람들도 같은 마을 사람인데 살려야 된다면서, 방공호 안으로 음식을 주며 상황이 누그러질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홍성에서 인민군 점령기의 우익인사 학살을 주도한 이들은 내무서원, 인민군, 지방좌익 들이었다. 지방좌익은 대상자들을 연행·감금하는 데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지역에서 따라서는 직접 사살에 가담하기도 했다. 총살은 주로 내무서원과 인민군이 집행했다. 희생자들은 국민회,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 회원, 경찰, 공무원 또는 그들의 가족이었다.

결성국민학교에서 인민재판으로 아버지를 잃은 김○○는 마을에는 한국전쟁 전에 좌우익의 갈등이 없었다고 했다. 주민들은 양조장을 제외하고 부농, 빈농 없이 비슷하게 살았다. 수복 후에 도망가지 않은 좌익과 그 가족들은 우익에게 희생되었다. ‘빨갱이 가족’들은 전쟁 이후에 마을에서 맥도 못 추었다.(김○○ ‘1938년생’ 진술, 2021.9.6.)
사건명 충남 홍성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1)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충남 홍성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1)〉(2기)
관련 사건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홍성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1기)
진실화해위원회 〈충남 서부지역 국민보도연맹 사건〉(1기)
지역 충남 홍성군 월산리 백월산·소향리 뒷산과 홍북면 용봉산, 결성면 읍내리 결성초등학교, 광천읍 소암리 소용마을, 예산군 오가면 공동묘지
사건 발생일 1950년 9월 27일~10월 3일
진실규명 신청인 송○준 외 18명
[1기 위원회] 진실규명 대상자 6명과 미신청 희생자 2명 등 8명 확인, 미신청 희생자 55명 추정
진실규명 결정일 2022년 6월 21일
진실규명 인원 송○○ 등 19명
결정사안 인민군 후퇴 시기인 1950년 9월 27일부터 1950년 10월 3일 사이에 홍성지역에 거주하던 진실규명 대상자 19명이 인민군 및 지방좌익 등 적대세력에 의해 희생당한 사실을 확인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내무서원, 인민군, 지방 좌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