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태안 부역혐의 희생 사건 학살은 더 큰 보복을 불러왔다

구자환 감독 다큐 태안 스틸컷.

구자환 감독 다큐 태안 스틸컷.

태안 민간인학살 사건의 출발지, 사기실재

2022년 10월 6일 태안작은영화관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태안>(구자환 감독) 상영이 시작됐다. 영화관(태안문화원) 뒤로 넘어가는 길이 백화산 사기실재인데 그곳에는 ‘태안지역 부역혐의 희생 사건’ 희생지 가운데 한 곳임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서 있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서산·태안지역 부역혐의 희생 사건’에 대해 서산과 태안 주민들(희생자로 확인된 사람은 977명, 희생추정자는 888명으로 최소 1,865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판단)이 “1950년 10월 초순부터 1950년 12월 말경까지 서산경찰서·태안경찰서 소속 경찰과 해군에게 충남 서산군 인지면 갈산리 교통호 등 최소 30여 곳에서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살해된 사건”으로 규정했다.
한국전쟁 당시 부역혐의 희생 사건이 벌어진 충남 서산시 현장 전경.

한국전쟁 당시 부역혐의 희생 사건이 벌어진 충남 서산시 현장 전경.

‘서산·태안지역 부역혐의 희생 사건’을 이해하려면 같은 지역에서 일어난 국민보도연맹원 희생 사건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50년 6월 말에서 경찰이 태안에서 후퇴하는 1950년 7월 12일 사이에 보도연맹원들이 예비검속돼 일부는 대전형무소로 끌려가고, 다른 이들은 12일 태안경찰서 경찰에 의해 백화산 사기실재에서 학살되었다. 《태안 민간인학살 백서》에 따르면 이 무렵 태안 보도연맹원으로 희생된 민간인은 모두 115명(추정치 포함)이었다. 인근 마을 사람들이 태안면사무소 옆 창고(고추판매소)로 옮겨다 놓은 시신들은 모두 불에 타서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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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곽O근 진술조서(2008. 9. 30.)
충남 서부지역 국민보도연맹 사건 보고서

“경찰이 후퇴한 직후 시신들을 태안면사무소의 창고에 전부 찾아서 늘어놓았고 광목으로 덮어둔 것을 보았습니다. 시신들은 99구가 있었는데 총에 맞은 후 전부 불에 타서 그 형체가 참혹했습니다. 옷가지가 거의 불에 타고 남은 것은 겨드랑이 근처에 조금 남은 조각들밖에 없었는데 유족들이 그것을 보고 시신을 식별했습니다.”



희생자의 가족들은 겨드랑이에 남은 헝겊 조각 따위로 구별해 시신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처참하게 훼손된 시신이 공개되자 가족들과 주민들은 큰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사기실재에 세워진 희생지 표지판.

사기실재에 세워진 희생지 표지판.

세상이 뒤집히고 보복이 시작되다

사기실재의 학살이 일어난 6일 후, 7월 18일 태안에 인민군이 들어왔다. 인민군이 들어오니 세상이 뒤집혔다. 죽음의 보복이 시작된 것이다. 보도연맹원으로 끌려가 구금됐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을 비롯해 희생자 유가족들이 보복 학살 과정에서 활동했다. 주로 면장 등 공무원, 대한청년단 같은 우익활동 경력자와 그 가족들을 비롯한 다수의 민간인들(추정 9명 포함해 최소 136명)이 희생되었다. 학살을 주도한 사람들은 인민군, 내무서원, 지방좌익들이었다. 인민군이 후퇴하고 경찰과 국군이 아직 들어오기 전인 9월 말~10월 초에는 지방좌익이 학살을 주도했다.

목숨을 잃은 이유는 참으로 가벼웠다. 지역 유지라서, 경찰과 친분이 있어서, 공무원이나 경찰 가족이라서, 이장으로 가지고 있던 마을사람들 명단을 없애서, 좌익에게 협조하지 않아서였다. 심지어 수복되는 줄 알고 국군을 환영하기 위해 태극기를 들고 환영대회를 나갔다가 죽기도 했다.

앞서 끌려가 희생된 보도연맹원들처럼 이들 역시 똑같이 평범한 태안지역 주민들이었다. 적대감과 증오가 세상을 압도해 버리고 나니 얼마 전까지 한 마을 주민이었지만 집안 갈등이나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는 사소한 이유로도 죽여야 할 사람으로 지목되었다. 살해 방식도 총살뿐만 아니라 창이나 죽창으로 찌르는 등 매우 잔인했다.

해군 309정을 타고 상륙한 청년단원들

안흥항 바로 인근의 가의도로 피난 갔던 근흥면 치안대장 최○○은 해병대원 6명과 청년단원 80명을 지휘해 안흥항 상륙 작전을 수행했다. 최○○의 증언에 따르면 해군 309정이 본인을 상륙 작전 지휘자로 임명했다고 한다. 상륙 과정에서 해병대원 1명과 치안대원 1명이 희생되었다. 상륙한 당일 근흥면 주민 수십 명이 부역혐의로 체포돼 안흥항 바위(현재 수협창고)에서 살해되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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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최○○ 진술녹취(2008. 4. 8)

“해군 특무상사가 “너(김○○) 소원이 뭐냐” 하니까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더라고. 권총을 꺼내더니 얼굴에 대고 6발을 쏘더라고. 그러니까 얼굴이 아주 형체가 모가지 위로는 없어. 그렇게 돼서 그냥 버리고 안흥으로 갔지. 안흥지서로 가니까 그날 생포한 사람이 37명이여. 애매한 사람이 많아. 흑백을 분류하려니까 함장이 오더니 “지금 무엇을 하는 거지?” 내가 “흑백을 대별하려고 합니다” 하니까. “흑백? 흑백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전부 일어서” 하면서 다 끌고 나가는 겨. 옛날 안흥수협 자리. 그때는 건물도 없고 바다 돌이 있어. 조금 지나니까 “탕탕” 소리가 나더라고 “잘 죽인다.” 나중에 “탕탕” 소리가 세 발이 나더라고. 그것은 수류탄 까는 소리여. 총도 쏘고 나중에 수류탄을 깐 거여. 가보니 꿈틀거리긴 뭐가 꿈틀거려, 하나나. 거기 여자도 둘 끼였는데. 오래돼서 이름을 잘 모르겠는데 윤○○하고 장○○라는 사람 둘이 끼었어.”


근흥면 치안대장 최○○의 지휘 아래 당시 함께 상륙한 청년단원 이○○과 최○○은 살해 현장을 목격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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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김○○‧이○○
진술녹취(2008. 3. 27)

“정○○이 그때 끌려갔어. 그 집이하고 김○○, 김○○이(별명), 김○○이(별명) 3형제가 한 번에 다 죽었어. 안흥서 막둥이는 닻줄 매는 데 있잖아, 거기 올려놓고 총을 쏘니까 뺑돌면서 낭 아래로 툭 떨어지더라. 고○○(고○○), 최○○, 정○○, 장○○. ○○는 시체 찾았어. 아랫산께 바위(현재 안흥수협)에다 올려놓고 쐈어. 김○○은 배로 끌려갔어.”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의 관련 부대가 태안반도를 순회하던 해군309정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10월 8일 태안반도를 순회하던 해군 309정이 안흥항(근흥면 정죽리)에 상륙했다. 9월 30일 경찰 선발대가 서산에 들어온 데 이어 서산경찰서 경찰도 같은 날 경찰서로 복귀해 서산군 전체가 수복되었다.

이후 경찰은 읍, 면 단위로 인민군 점령기의 부역혐의자를 색출해냈다. 이들은 경찰서와 지서 유치장, 각 읍면사무소 창고에 구금되었다. 이들의 목숨을 좌우한 것은 경찰, 치안대, 지역유지들로 구성된 ‘부역자 심사위원회’였다. 여기서 부역혐의자들은 A, B, C 세 등급으로 분류돼 처형되거나 재분류 후 처형 또는 훈방되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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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정○○(2008. 4. 10)
당시 서산경찰서 사찰계 내근형사

“지서에서도 수복해가지고 이내 지서에서 많이 처단했고. 아! 본서(서산경찰서) 들어오면 유치할 때나 있어? 그러니까 지서에서 유치해서 골라서 처단했지. 지서장이 결정했는데 혼자 결정하는 것은 아니고 면 협의체서 협의를 했지.”


처형으로 분류된 부역혐의자들은 서산 갈산리 교통호 등 수십 곳에서 경찰서 및 관할 지서 소속 경찰에게 살해되었다.

“경찰관 들어왔으니까 좌익들 잡아다가 면사무소 창고에 가득 가득 잡아다놓았지. 취조계원이 있었어. 취조계원이 작성한 내용을 내가 낭독을 해. 지서 직원이나 근흥면 유지들을 앞에 놓고서 내가 ‘이 사람은 어떻게 할 거냐? 이렇게(손가락으로 총을 쏘는 모양을 하면서) 할 것이냐, 아니면 석방을 할 것이냐?’라고 하면 (지서 경찰과 유지들이) ‘이렇게 하자’라고 하면, 내가 ‘그렇게 하면 안 돼.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근흥면 면장하고 이장들도 그 쓸 만한 이장들도 모여 갖고. 이름이 없고 협의체여. 지서장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면장, 지서장, 각 리 이장, 그리고 나, 다 합의를 봐야지. 그놈은 옆에 무릎 꿇어 앉혀 놓고 내가 낭독하는 것 낭독하고 묻지. ‘너 여기 취조계원들이 취조한 대로 사실이 맞느냐 안 맞느냐?’ 그러면 거개가 안 맞는다고 하지. 살려고.” [참고인 최○○ 진술녹취(2008. 4. 8)]
경찰연혁사(서산경찰서, 1951~1986) / 신원기록 심사보고(서산경찰서, 1980).

경찰연혁사(서산경찰서, 1951~1986) / 신원기록 심사보고(서산경찰서, 1980).

수복 후 경찰에 의한 부역혐의자 집단살해

경찰이 갈산리 교통호에서 부역혐의자들을 총살한 사건은 지곡리 치안대장 최○○ 등이 목격했다.
“○○ 아버지. 이름은 몰라. 김 누구더라? ○○씨 하고 단짝이었거든. 나이 많이 잡수셨었지. 장현리 살았지. 우덜이 그때 사람 잡으러 다녔거든. 치안대. 이제 죽일 사람들만 태워갔고 가는 겨. 대산지서서 오다가 장곡 백토구덩이에서 총살시키고 또 서산 갈산 가서 죽이고. 그것도 경찰들이지. 그때도 한 10여 명 됐지. 다 취조 받고 죽일 사람 데리고 오다가 그런겨. 이○○도 죽었어. 방공구덩이 팠으면 그리로 들어가라. 다 고개 다 땅으로 박으라고 그러지. 이렇게. 그러고 쏘지 인제. 그리고 긁어 묻으라고 혀.” [참고인 최○○ 진술녹취(2008. 5. 14)]

이 밖에도 서산군 각 면의 관할 지서별로 부역혐의자가 연행돼 여러 곳에서 학살당했다. 부역혐의자 살해를 주도한 것은 서산경찰서‧태안경찰서 내의 사찰계였다. 당시 서산경찰서 지곡지서장이었던 이○○은 부역자 처리에 대한 지시는 경찰서 사찰계를 통해 내려왔다고 했다. 그 위로는 충남경찰국의 부역자 처리 지시가 있었다.
“고 모퉁이에 호를 파논 데가 있어요. 신작로서 끌고 올라가서 하나 갖다 놓고 ‘팡’하고 총 쏘고 또 하나 놓고 ‘팡’ 하고 총 쏘고 몇 번을 그랬어요. 경찰들이 쐈지요. 서산읍 경찰서에서 나와서. 서산경찰서 감옥소 있잖아요. 거기지, 딴 데 있간. 거기서 끄집어내가지고 차에다 싣고 나와서 죽였지. 도락구(트럭), 쓰리쿼터, 여러 가지 차를 썼어요. 처음에 ‘뜨르르르’ 갈기고, 도망간 사람이 있으니께 나중에 하나씩 세밀하게 죽이더구만요.” [참고인 이○○ 진술·영상녹취(2008. 5. 27)]

태안지역을 포함해 서산군에서 부역혐의자로 학살된 주민은 최대 1,865명(부역혐의 희생자 또는 희생추정자 1,078명과 부역혐의 희생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신원기록심사보고》에 처형되었다고 기재된 자 787명)에 달했다. 희생자 수만 보면 앞선 국민보도연맹 사건이나 인민군 점령기에 일어난 학살 사건에 비해 무려 10배 이상 큰 규모였다.

경찰은 치안대의 도움을 받아 부역혐의자를 살해했다. 태안면의 경우 치안대는 면, 리 단위로 조직돼 있었다. 이들은 부역혐의자를 체포해 치안대 사무실 등에 가두어놓고 혐의를 조사하다가 경찰의 명령을 받으면 혐의자들을 태안경찰서로 이송했다.

이렇듯 민간인으로 구성된 치안대가 같은 태안주민의 학살 과정에 깊이 개입했다. 또 부역자 심사위원회에 치안대와 함께 인민군 점령기의 희생자 유족들이 들어가 활동했다. 정부가 치안대에 주민들을 체포, 구금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공포와 증오심이 커질 대로 커진 좌익세력에 의한 피해 유족들을 부역혐의자 심사에 참여시켜 학살이 더욱 큰 규모로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다.
서산 부역혐의 희생 사건 유해발굴 현장.

서산 부역혐의 희생 사건 유해발굴 현장.

사건명 서산·태안 부역혐의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서산·태안 부역혐의 희생 사건》(1기)
지역 충남 서산시
사건 발생일 1950년 10월 초순 ~ 12월 말경
진실규명 신청인 정○희 외 15명
진실규명 결정일 2008년 12월 2일
진실규명 인원 977명
결정사안 충남 서산군 주민 함○범 등이 1950년 10월 초순부터 1950년 12월 말경까지 서산경찰서‧태안경찰서 소속 경찰과 해군에게 충남 서산군 인지면 갈산리 교통호 등 최소 30여 곳에서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살해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서산경찰서, 태안경찰서, 치안대, 해군
참고자료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서산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 2009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충남 서부지역 국민보도연맹 사건》, 2009
박현정·최태육·현석이,《태안 민간인학살 백서》, 2018
영상: KTV 국민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