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옥천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 경찰서 다녀온다고 나서고는
그걸로 끝이에요

충북 옥천군 군서면 희생지.

충북 옥천군 군서면 희생지.

빗물에 드러난 47년 전의 사건

1997년 7월 5~6일에 큰비가 내려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평산리 들미의 비탈 흙이 무너져 내렸다. 평산리 주민 고 이종학 선생은 집으로 들어가는 도로에 쌓인 흙더미를 치워내고 있었다. 그런데 흙 속에서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뼛조각이 드러났다. 거기에 매듭지어진 삐삐선(군용 전화선)과 아직 밑창이 그대로인 고무신 등이 따라 나왔다. 선생은 47년 전 그날의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다[《옥천신문》 1997. 7. 12., 2021. 6. 3. 기사)].

철도청 대전사무소에서 토목기사로 일하던 이종학(당시 22세)은 전쟁이 나자 고향인 충북 옥천군 동이면 평산리로 피란와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때는 1950년 7월 초순경이었다. 이종학이 소를 몰고 논으로 일하러 나갔다가 해질녘에 옥천 쪽에서 트럭 두 대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지서의 순경들이 “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가라”고 닦달했다. 다시 소를 몰고 돌아가는데 언덕에 약 20m 길이로 파낸 구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 트럭 두 대에서 평상복을 입은 사람들 수십 명이 내렸다. 그들은 양손이 삐삐선으로 묶인 채 구덩이 앞으로 끌려갔고, 무릎이 꿇린 자세로 총살당했다. 이튿날 나가보니 평산리 들미에 시신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이들은 옥천지역 곳곳에서 연행돼 온 보도연맹원들이었다[《한겨레: 온》 2019. 9. 2. 기사].
평산리 들미 사건 장소.

평산리 들미 사건 장소.

진실화해위원회는 옥천유족회 안내로 옥천지역 국민보도연맹 주요 희생지인 옥천군 동이면 평산리를 현장조사했다. 이 지역은 도로에서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외진 곳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옥천유족회 안내로 옥천지역 국민보도연맹 주요 희생지인 옥천군 동이면 평산리를 현장조사했다.
이 지역은 도로에서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외진 곳이었다.

보도연맹원 대부분이 좌익과 관계없는 농민들

국민보도연맹 옥천군연맹은 1949년 12월 22일 옥천경찰서 연무장에서 결성대회를 열고 활동을 시작했다. 옥천군연맹 아래 옥천읍과 8개 면에도 보도연맹 지부가 조직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도연맹 가입자들은 대개 농사를 짓는 남성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 일부는 좌익활동 전력으로 보도연맹에 가입했거나 비료를 준다거나 땅을 준다고 해서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진실규명 신청인들의 증언에 따른 보도연맹 가입 사례를 보면 남로당에 가입한 이후 옥천경찰서에 자수하고 “다시는 좌익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도장을 찍고 보도연맹에 가입하는 경우, 특정인의 회유에 좌익단체에 가입했다가 보도연맹원이 된 경우 등이 있었다.

특히 청산면에서는 전쟁 전 이장이 동네 청년들의 도장을 가지고 다니며 당사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다수를 보도연맹에 가입시킨 일도 있었다. 옥천경찰서 수사계에 근무하던 장○○은 “옥천 보도연맹원은 전쟁 전 사찰계가 모집, 관리했고 수시로 경찰서로 불러 조사를 했다. 대부분이 농사꾼이고 좌익 활동한 사람은 몇 안 됐다. 청성면 능월리에 남로당 책임자가 있었고 전향 후 보도연맹 가입을 권유하고 다녔다”고 증언했다[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 2006)]

정부는 애초에 국민보도연맹을 창설할 때 회원 가입 대상을 과거 좌익 활동자로 정했다. 국민보도연맹의 주된 가입 대상은 좌익 활동자 중 전향자, 남로당원·민족청년동맹·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자 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경찰서별로 할당된 인원을 채우기 위해 군 단위 연맹결성 이후 좌익 활동자보다 식량·비료 등 제공을 내세워 좌익과 무관한 사람들까지 무리한 회원 가입이 이루어졌다[진실화해위원회(2009), 조사보고서 174쪽].

북한군이 수원까지 내려오자 경찰이 마을로 들이닥쳤다

옥천 국민보도연맹원을 비롯한 예비검속자들(최소 450~500여 명)은 전쟁이 발발한 후 북한군이 수원쯤 진격했을 때(6월 말)부터 연행되거나 소집되었다. 옥천경찰서 유치장이 만원이어서 예비검속자 일부를 창고에 가두었고, 각 면의 지서에도 구금시켰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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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당시 옥천경찰서 수사계 근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2006). 진실화해위원회(2009), 239∼240쪽

“인민군이 수원쯤 왔을 때 상부에서 경찰서장에게 보도연맹원 소집 명령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다. 명령에 따라 각 지서에서 보도연맹원을 소집하면 본서에서 싣고 왔다. 당시 유치장에는 감방 5개에 30여 명씩 150여 명의 예비검속자들이 구금돼 있었다. 모두 보도연맹원으로 일반 잡범은 없었고 사람이 많아 창고와 운동장에도 100~150여 명을 추가 구금했다. 그 후 한 트럭에 40~50명씩 사흘 동안 동이면 평산리 등지로 싣고 가 사살했다고 들었다.”

일부 경찰서 지서장이나 경찰들은 예비검속자들의 희생을 줄이려고 도망갈 기회를 주기도 했으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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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창(동네 주민, 23세).
진실화해위원회(2009), 231쪽

“조○○는 전쟁 직후 어느 날 새벽 경찰들에게 연행되었다. 지서주임이 점심을 먹고 오라며 도주의 기회를 줬으나 집에 왔다가 다시 지서로 돌아갔다. 그 후 옥천군 동이면 평상리에서 희생되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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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조카, 29세), 진실화해위원회(2009)

“숙부 송○선은 전쟁 직후 경찰에게 연행되었다. 옷을 갈아입고 오라고 해 집에 왔다가 다시 지서로 갔다. 옥천읍 인근 골짜기에서 사살됐다는 소문을 듣고 갔으나 부패가 심하고 시신이 많아 찾지 못했다.”

많은 보도연맹원들이 7월 20일 전후 차례로 실려나가 동이면 평산리 들미, 군서면의 월전리 말무덤재, 군서면 용머리 바위, 군서면 오동리의 강당뜰 등 옥천군 일대에서 희생되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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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건목격자 당시38세), 2008. 7. 9. 면담조사, 진실화해위원회(2009)

“전쟁 직후 어느 날, 경찰이 군서면 오동리 강당뜰에서 네 사람에게 구덩이를 파게 함. 트럭에 약 30~40여 명이 실려와 일렬로 강당뜰로 걸어가는 것을 봤으며, 얼마 후 총소리가 났음. 또한 군서면 월전리 용머리바위에서도 보도연맹원들의 사살이 있었다고 들었으며 이 지역에서는 많이 알려진 사실임.”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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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정○○ 면담보고서(2009. 7. 9.),
진실화해위원회(2009)

“전쟁 직후 현재 공원묘지로 이용되는 말무덤재와 군서면 월전리 용머리바위(서화천변)및 군서면 오동리 강당뜰(작은범어리, 현 기독교 수양관 앞)에서 수많은 사람이 사살됐음. 말무덤재 입구에서는 군․경이 사람들을 시켜 구덩이 파는 것을 직접 목격했고 이튿날 총소리가 요란했음. 또한 군서면 오동리 강당뜰에서는 구덩이에 사람들을 둘러 앉혀놓고 사살하는 광경을 근처의 산마루에서 목격했음. 현장에는 경찰들과 헌병으로 보이는 철모에 흰 띠를 두른 군인들이 사람들의 등 뒤에서 총을 쐈음.”

사건 이후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려 했으나 희생 장소를 알 수 없었고, 현장에 갔어도 부패가 심한 시신이 대부분이어서 찾을 수 없었다.
서화천을 따라 월전리부터 오동리까지 이어진 희생 장소. 말무덤재는 현재 선화원 공원묘지다. @구글맵

서화천을 따라 월전리부터 오동리까지 이어진 희생 장소. 말무덤재는 현재 선화원 공원묘지다.
@구글맵

동네 청년 27명이 한꺼번에 끌려가

1950년 7월 12일, 13일경이었다. 옥천경찰서 동이지서에 한 가지 정보가 입수되었다. 세산리의 정○○이라는 사람이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회합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참고인 증언에 따르면 상부에서는 비밀회합을 하는 사람은 모두 잡아들이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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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강○○, 2008. 7. 10. 면담조사

“전쟁 당시 옥천경찰서 관할 동이지서에서 근무했음. 1950년 7월 12~13일경 동이지서에 세산리의 정광용이라는 사람이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회합을 한다는 정보가 입수됐고, 상부에서 비밀회합을 하는 것은 모두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림.”

경찰이 정○○을 연행하러 갔더니 없었다.

당시 종을 치면 정○□의 집으로 모이게 돼 있었기 때문에 동네청년 27명이 그의 집에 모였다가 군·경에 연행돼 간 후 옥천경찰서로 이송됐고, 3일 동안 구금돼 있다가 사살되었다. 지서주임 이○○이 정○○을 찾아서 다시 출석하라며 모두 석방시켰는데 이들은 달아날 생각도 못 하고 3~4일 후 정○○을 찾을 수 없다며 지서로 그대로 돌아왔다. 동이지서 경찰 강○○은 출장을 갔다 왔을 때 유치장에 구금돼 있던 사람들이 모두 없어진 걸 알았다. 그가 전해 듣기로 옥천경찰서에 나와 있던 헌병들이 구금된 사람들을 모두 말무덤재와 세산리 고개로 싣고 가 사살했다는 것이었다.

중학생까지 보도연맹이라고 희생

김○○은 옥천군 청성면 산계리에 거주하는 농민이었다. 그리고 전○원은 옥천군 청성면 산계리에 거주하며 청성중학교에 재학중인 학생이었다. 1950년 7월 초 새벽에 청성지서 경찰 한 명과 청성면 서기가 농민 김○○, 청성중학교 학생 전○○, 한○○까지 세 명을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청성지서로 연행했다. 김○○과 전○○은 청성지서에 하루 갇혀 있다가 다음 날 청산지서로 이송되었다.

끌려간 사람들이 옥천으로 이송된다는 연락을 받고 김○○의 어머니와 부인, 전○○의 형과 가족들이 청산지서로 달려갔다. 청산지서에 연행된 사람들은 손이 포승줄에 묶인 채 트럭 3~4대에 태워져 있었다. 이 모습을 김○○과 전○○의 가족들이 직접 보았다. 트럭에 실린 사람들은 옥천군 동이면과 군서면에서 총살되었다. 그 후 가족들이 옥천경찰서에서 시신을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고 가 보니 시신에 기름을 붓고 불태워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와 청년들의 마지막 모습

대다수 가족들에게 희생자에 관한 마지막 기억은 경찰서에서 부른다며 스스로 가거나 경찰에 연행되는 뒷모습이었다. 당시 사건이 일어난 때가 여름이라 시신이 빨리 부패했기에 수습도 어려웠다. 유족들은 지금이라도 유해를 수습하고 싶지만 학살지에 공원묘지(선화원)가 조성돼 있어 유해 발굴이 여의치 않았다. 이에 유족회는 유해발굴을 추진하지 않는 대신 추모사업을 하기로 했다.(《옥천신문》 2022. 9. 2. 기사) 2022년 6월 9일 공원묘지 입구에 옥천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이 세워졌다.
평산리 들미 희생자 무연고묘 표지판.

평산리 들미 희생자 무연고묘 표지판.

사건명 충북 옥천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충북 옥천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1)〉(2기)
지역 충북 옥천군 동이면, 군서면 등
사건 발생일 1950년 7월 초·중순
진실규명 신청인 김○〇 등 19명
진실규명 결정일 2022년 11월 29일
진실규명 인원 1차 조사결과 김○□ 외 19명
결정사안 1950년 7월 옥천지역에 거주하던 국민보도연맹원 등 진실규명대상자 19명이 옥천군에서 옥천 경찰에 의해 희생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충북 옥천경찰서와 관할 지서 경찰
참고자료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충북 국민보도연맹 사건 – 영동·옥천·보은·충주·음성·진천·제천·단양-〉(1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 《기억여행: 탑연리에서 노동리까지》, 2006
《옥천신문》 1997년 7월 12일자 <보도연맹 집단학살 현장 확인>
《옥천향수신문》 2021년 6월 3일자 <비극적 역사를 껴안은 ‘이종학 선생’>
《한겨레: 온》 2019년 9월 2자 <은빛 자서전-인생은 아름다워⑤>“죽기 사흘 전까지 땀 흘려 일하는 게 소원”
《옥천신문》 2022년 9월 2일자 〈보도연맹사건 희생자 유해발굴 어렵다면 추모사업 강화해야〉
영상: KTV 국민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