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 곡계굴 미군폭격 사건 그날 동굴 입구에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하늘에서 본 2022년 단양 곡계굴 유해발굴 현장. 수습된 유해는 추모의집에 안치돼 있다.

하늘에서 본 2022년 단양 곡계굴 유해발굴 현장. 수습된 유해는 추모의집에 안치돼 있다.

“많은 수의 군인과 가축들, 굴을 공격함”

1951년 1월 20일, 차가운 겨울 하늘에 구름이 약간 흩어져 있었다. 이날 가시거리가 11~24㎞에 이르러 전투기 조종사들이 시야를 확보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미군 정찰기 한 대가 충북 단양군 영춘면 용진리 상공을 선회했다. 오전 8시 30분 미군 정찰기가 용진리 북부에 ‘적 50명이 10마리의 짐실이 가축을 끌고 가는 것’을 발견하고 폭격 요청을 보냈다. 9시 50분에 정찰기의 인도에 따라 미 35전투요격단 소속의 F-51 무스탕 두 대가 날아와 용진리 북쪽 목표지점에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폭격기들은 먼저 네이팜탄을 이용해 민가에 불을 지르고, 로켓포를 쏘아 서 있는 모든 건물을 파괴했다. 발견된 ‘적군’은 폭격기에 장착된 캘리버50으로 총탄을 흩뿌려 사살했다. 폭격은 계속되었다. 오전 10시 20분에 ‘100명의 적과 10대의 소달구지’가 발견됐다는 또 다른 보고와 함께 폭격이 요청되었다.

폭격 요청과는 별개로 이미 F-80 슈팅스타 8대와 T-33 한 대로 이루어진 두 그룹의 폭격대가 대구 기지를 출발했다. 이미 폭격 중이던 F-51 무스탕에다 뒤에 합류한 폭격기들까지 합세해 영춘면 일대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다. 폭격은 모두 3회(09:50, 10:25, 10:25~11:00)에 걸쳐 이루어졌다. 폭격이 끝나고 오후에 영춘면 읍내로 미 17연대가 들어와 폭격 후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201840 : 영춘―동쪽 부분만 유일하게 남음.”

폭격이 거의 끝나던 시각인 오전 10시 55분에 폭격기들이 특별한 표적 하나를 공격했다. 앞서 정찰기가 폭격 대상 지역에서 동굴과 그 안에 있는 ‘적군’을 발견하고 좌표를 제공한 데 따른 것이었다. 미 17연대 작전일지를 보면 “많은 수의 군인들, 짐실이 가축들, 그리고 굴을 공중공격함”이라고 기록돼 있다. 또 미 7사단 작전일지에도 “13대의 비행기가 굴속의 적군들과 다수의 짐실이 가축들에 대해 공중공격, 다수의 사상자 발생, 그리고 가축들을 모두 잡았음.”이라고 적혀 있다.
이 굴은 어디 굴을 말하는 걸까? 그리고 굴속에 정말 적군(인민군)이 숨어 있었을까?
F-80 슈팅스타. @위키피디아

F-80 슈팅스타. @위키피디아

F-51 무스탕. @위키피디아

F-51 무스탕. @위키피디아

동굴 앞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버들골(현 단양군 영춘면 상2리)에서 북쪽 태화산 방향으로 올라가는 기슭에 마름모 형태로 뚫린 돌 틈이 있다. 입구는 좁아도 80m 이상 길이로 뻗어 있으며 안에는 꽤 넓은 공간이 있었다. 그 일대가 석회암 지대라서 강을 따라 석벽이 발달했고 크고 작은 동굴들이 형성돼 있었다. 폭격의 표적이 된 곡계굴도 그중 하나였다.

폭격이 있기 며칠 전부터 곡계굴에는 상리 주민 수백 명과 외지에서 온 피란민이 들어와 있었다. 동굴 안이 아늑하고 따뜻해서 겨울 추위를 피할 수 있는 데다 폭격에도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눈 쌓인 굴 입구에는 피란민들이 끌고 온 소와 닭들이 묶여 있고, 피란 떠날 때 챙겨온 가재도구들이 쌓여 있었다.

폭격 당일 오전 10시경(또는 10시 30분경)이었다. 곡계굴 입구에서 부모를 따라 피란 온 아이들 15~20명이 놀고 있었다. 그때 미군 정찰기가 곡계굴 가까이 접근했다. 정찰기가 매우 낮게 떠서 돌자 놀란 아이들은 바로 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이들이 굴 안쪽으로 채 10m도 못 들어왔을 때였다.

굴 앞에 네이팜탄이 떨어졌다. 순식간에 굴 안으로 검은 연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굴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피란민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면서 일부는 굴 안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는가 하면 일부는 굴 밖으로 뛰쳐나왔다. 밖에서는 폭격기가 기총사격으로 동굴 주변을 훑고 있었다. 굴 안에서는 연기에 질식해서, 밖에서는 총탄에 맞아 피란민들이 쓰러졌다.

사건 희생자들 가운데 갓난아기를 비롯해 19세 이하 미성년자가 희생자의 62%를 넘었다. 또 남성보다 여성이 많았다. 주민들은 곡계굴이 안전한 피란처라고 여겼기에 우선 보호해야 할 어린이나 여성들을 곡계굴에 피난시켰기 때문이다.

“캄캄한 느낌,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던 건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이 있어요. 할아버지하고 고모하고 이틀을 여기서 잤는데, 그날은 하도 울어가지고 쫓겨난 거야. 열세 살이던 고모가 나를 업고 나와서 엄마한테 데려다 주고는 다시 굴로 들어갔는데, 다음 날 아침에 폭격을 한 거야.” (조병규 유족회장 인터뷰. 진실화해위원회 소식지 《진실화해》 6호)
곡계굴 입구에 선 조병규 단양곡계굴유족회장. 이곳에서 할아버지와 고모, 두 살배기 동생이 희생되었다.

곡계굴 입구에 선 조병규 단양곡계굴유족회장.
이곳에서 할아버지와 고모, 두 살배기 동생이 희생되었다.

곡계굴 내부.

곡계굴 내부.

곡계굴 내부를 안내하는 조병규 단양유족회장.

곡계굴 내부를 안내하는 조병규 유족회장.

“모조리 불태우고 쓸어버려라”

인천상륙작전으로 수세에 있던 전황을 반전시키고 전선이 두만강과 압록강까지 북상했지만 1950년 말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한국전쟁은 완전히 ‘새로운 전쟁’으로 전환되었고, 유엔군은 다시 후퇴를 거듭했다(도진순, 2005). 1월 4일 다시 서울이 함락되자 인민군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강원도 산악지대를 통과해 미 10군단과 국군 3군단 사이의 틈을 뚫고 영월, 단양 등 소백산맥 북쪽 사면까지 내려왔다. 1950년 1월 소백산맥 북쪽의 충북 단양과 남쪽의 경북 예천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최대의 격전장이 되었다.

유엔군 사령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에서 인민군의 남하를 막아야 했다. 특히 미 10군단장 아몬드 소장은 게릴라전을 펼치는 인민군을 잡기 위해서는 공군력과 화력을 총동원해 적과 적의 은신처로 이용될 만한 곳을 모두 태워 없애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곡계굴 폭격이 있기 6일 전인 1951년 1월 14일, 10군단 사령부의 명령(CX 17244)이 예하 부대에 내려갔다.

“미 2사단에 의해 이미 실행된 바 있는 적 전방 구조물을 조직적으로 파괴하는 특별 프로젝트를 연장하여, 미 7보병사단, 한국군 5사단, 8사단 등은 적의 은신처로 사용되거나 또는 사용될 것으로 의심되는(susceptible) 전방 주거지나 건물들을 지체 없이 조직 파괴(without delay methodical destruction)해야 한다. 포격과 소이탄을 포함하여 이용 가능한 모든 지상무기와 더불어 공중 공습을 동원하라. 이 명령을 받은 각 부대는 1월 16일까지 완벽한 계획과 매일의 진행 과정을 10군단에 보고해야 한다.”(도진순, 2005)
수정됨_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당시 맥아더 총사령관과 아몬드 10군단장(오른쪽).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당시 맥아더 총사령관과 아몬드 10군단장(오른쪽).

막혀버린 피난길, 굴로 들어간 사람들

1월 3일 미8군 내부 회의에서, 사령관 리지웨이 중장은 미 1군단과 미 9군단장에게 주민의 이동을 제지할 권한을 주는 결정을 했다. 이는 통제 명령을 무시하는 민간인에 대해 사격을 가하거나 공중지원을 요청할 권한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미군은 무수히 밀려오는 피란민 물결에 인민군이 섞여들 것이라고 의심했다. 이와 동시에 단양은 미군의 초토화 작전(scorched earth policy) 대상 지역이었다. 1월 7, 8일경이었다. 주민들은 집에서 폭격을 맞거나 피난을 가야 했다.

하지만 피난길은 얼마 못 가 향산리에서 막혔다. 미군이 탱크로 길을 막고 피란민들에게 “피난을 갈 수 없으니 돌아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증언
닫기
참고인 조○원

“소개명령이 있었는지는 명확치 않으나, 누군가로부터 마을을 떠나라는 소리를 들었고 다수의 주민들이 마을을 떠났다. 단양군 가곡면 향산리 근방에서 탱크를 앞세운 미군이 길을 통제하고 있었고, 마을사람들을 통과시키지 않아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마을로 돌아왔다. 공무원, 경찰, 방위대 등 인민군의 표적이 될 만한 이들은 그곳에서 미군이 통과시켜주어 무사히 피난하였다.”


주민들은 꼼짝없이 전쟁터 한복판에 갇혀 버렸다. 보따리를 이고 지고 아이들 손을 잡고, 가축까지 몰고 나온 사람들은 마땅히 갈 곳이 없어 곡계굴로 들어갔다.
곡계굴 사건 현장. 사건이 일어나기 전 느티마을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 마을이었다.

곡계굴 사건 현장. 사건이 일어나기 전 느티마을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 마을이었다.

그곳에 인민군은 없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대부분의 진술인들은 인민군들이 상리마을에서 폭격 전날 모두 떠났다고 말했다. 더욱이 인민군들은 마을을 떠나기 전, “굴은 이미 미군에게 노출된 지역이고, 폭격당하면 다 몰살하므로 오히려 인근 나무 밑이나 산에 숨는 것이 안전하다”고 주민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또 “그들은 포격이 있을 것이니 굴에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하며, 하얀 보자기를 쓰고 눈밭에 엎드려 있으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이를 종합해 진실화해위원회는 인민군이 사건 당일 굴이나 굴 근처에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판단했다.

신청인의 증언에 따르면 폭격 일주일 정도 후에 미군이 곡계굴 현장을 찾아왔다. 이때 신청인의 남편이 동굴 내부의 시체를 치우고 있었다. 그들은 국방색 군복에 어깨에 붉은 견장을 붙이고 있었다(미7사단 견장의 바탕색은 빨간색이다). 굴속에 들어간 미군 자신들도 참혹한 광경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신청인 신〇길·윤〇자 진술조서). 미군의 현장 조사에 대해 고(故) 조〇형이 언론과 인터뷰한 것이 사건 조사보고서에 수록돼 있다.

“미군 헬리콥터가 동굴 앞 밭에 앉더니 미군 두 사람이 내렸다. (…) 미군 둘은 사진기를 들고 동굴로 가더니 여기저기 사진을 찍었다. 그땐 연고 없는 시체가 여전히 동굴 안에 꽉 차 있을 때였다. 미군들 모습은 우리 형제뿐 아니라 상당수의 동네 아이들이 봤다. 두 미군 중 한 명은 사진 찍기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말도 그때 돌았다.”(오연호, 《노근리 그 후》, 1999)
곡계굴 사건 현장에 세워진 표지석.

곡계굴 사건 현장에 세워진 표지석.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민간인 집단희생

1951년 3월 영춘면 주도로 곡계굴 내부에 있는 시신을 꺼내 매장했다. 이때 일한 인부들이 시신이 대략 360구 정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주민들은 전체 희생자 수를 360명으로 알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청인의 진술을 통해 파악된 희생자 수는 167명이고 이들은 모두 상리와 인근 지역 거주자들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여기에 타지에서 온 피난민이 많았다는 증언과 굴에 300~400명이 피신하고 있었다는 증언을 감안하면 전체 희생 규모는 200명을 훨씬 상회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곡계굴 사건을 “미군의 네이팜탄 폭격과 기총사격으로 인해 비전투 민간인들이 집단적으로 희생된 사건”으로 규정했다. 또 “전투지역에서 작전상 피난민 통제가 불가피했다고 하더라도 미군은 민간인들이 생존을 위해 전투지역을 벗어나려는 피난 행위를 저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은 다수의 민간인들이 존재하는 봉쇄된 전투근접지역에 무차별 폭격을 단행하였으며, 정찰 및 공중공격 과정에서도 인민군과 민간인을 구별하려는 노력을 충분히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곡계굴 폭격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고 결론지었다.
2022년 곡계굴 사건 무연고 희생자 유해발굴 모습.

2022년 곡계굴 사건 무연고 희생자 유해발굴 모습.

사건명 단양 곡계굴 미군폭격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단양 곡계굴 미군폭격 사건〉(1기)
지역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상리
사건 발생일 1951년 1월 20일
진실규명 신청인 엄○원 외 51명
진실규명 결정일 2008년 5월 20일
진실규명 인원 149명(희생자: 총 200명 이상 추정, 신원 확인 167명)
결정사안 1951년 1월 20일 수백 명의 민간인이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리 소재 곡계굴에서 피신하던 중 미 7사단 제17연대의 요청으로 미 6147전략통제단 소속 정찰기의 인도하에 미 5공군 예하 제35전투요격단, 제49전투폭격단, 제7·제9전투폭격대의 전투폭격기에 의해 영춘면 상리와 용진리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공중공격 과정에서 희생된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미 7사단 제17연대, 미 6147전략통제단, 미 5공군 예하 제35전투요격단, 제49전투폭격단, 제7·제9전투폭격대
참고자료 도진순 《1951년 1월 산성동 폭격과 미 10군단의 조직적 파괴 정책》, 역사비평, 2005
영상: KTV 국민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