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 국민보도연맹 사건 보도연맹원들 먼저 피난시켜 줄 테니
쌀 가지고 모이시오

1950년 7월 청주·청원지역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충북 청원군(지금의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에 사망자들을 기리는 원혼비가 세워져 있다.  @최규화

1950년 7월 청주·청원지역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충북 청원군(지금의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에 사망자들을 기리는 원혼비가 세워져 있다. @최규화

학교가 어느 날 감옥이 되었다

1950년 6월 말이었다. 전쟁으로 조기방학을 해서 학생들도 없고 조용하던 충북 청원군 미원면 미원국민학교에 갑자기 군용트럭이 줄지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두 12대가 운동장으로 들어와 600여 명을 내려놓았다. 군인들이 이 사람들을 학교 교실 8개에 나누어 넣고는 가두었다. 교내 곳곳에 경찰이 배치되고 학교는 마치 형무소처럼 분위기가 삼엄해졌다.

미원국민학교 교사 황〇제는 트럭이 들어오는 날 학교에 있었다. 그중에는 황〇제가 잘 아는 교사와 친구가 있었고, 미원국민학교에 다닐 때 교편을 잡으신 은사님도 있었다. 황〇제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없는지, 먹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물어서 구해다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학교에서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났다. 아침에 출근해 보니 큰 길가의 가로수에 시신 여러 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학교 옆 논바닥에도 학교 담장에도 여러 구가 있었다. 갇혀 있다가 모두 총살당할 거라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밤에 학교에서 탈출하다가 총에 맞은 것이라고 했다. 이튿날 부상자만 한 교실에 남겨두고 나머지 사람들을 군용트럭 10대가 와서 태우고 나가버렸다.

황〇제는 나중에 모두 어딘가에서 총살당했다는 얘기만 들었다. 부상자는 다음 날 학교 뒷산에서 총살당해 땅에 묻혔다. 부상자들이 있던 교실에는 누군가 피를 많이 쏟았는지 마룻바닥에 핏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 그런 사건이 있은 후 학교는 다시 조용해졌다.

‘피난시켜 줄 테니 모이라’ 하곤 끌고 가서 총살

미원국민학교에 갇혀 있다 총살당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이들은 청주·청원지역 보도연맹원들이었다.
국민보도연맹 중앙본부가 1949년 10월 25일부터 11월 30일 사이에 남로당원 자수 기간을 두고 대대적으로 보도연맹원을 모집하자 청주경찰서에도 이를 따라 과거 남로당이나 좌익단체에 가입했던 사람들에게 자수하고 보도연맹에 가입하도록 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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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 구술, 당시 대동청년단원, 진실화해위원회(2008) 제2권 70쪽

“(청주나 청원에 마을별로 보도연맹에 어느 정도 조직이 되었을까요?) 다 됐지. 보도연맹 조직이 싹 됐었어.”



1949년 12월 13일 청주 성안길의 청주극장에서 ‘자수 전향자 선포대회’가 열렸다. 이날 지역 주요 인사들을 비롯해 자수자 수천 명이 극장을 메웠다. 이날 “자수전향자 대표 엄철진 군의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선서는 특히 일반 청중의 심금을 울린 바 있었다”고 한다. 이날 국민보도연맹 충청북도연맹이 결성되었다.
경찰은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지난 좌익활동 경력을 없애 준다고 회유했다. 혹은 가입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준다고 위협하고, 안 되면 불러다가 구타했다. 거기에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전쟁이 나도 단체로 피난을 시켜준다는 말도 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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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섭 구술, 삼촌이 보도연맹으로 희생됨. 진실화해위원회(2008), 132~133쪽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된 구체적인 계기는?) “아저씨가 할아버지한테 얘길 했을꺼 아녀. 그러니까 신형식(충북보도연맹 간사장)이한테, 자식을 보호하고 싶은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하니까. 일단 보도연맹에 가입을 하시오. 그러니까 사무적인 아부 거시기도 없이 가입을 한 겨, 나중에 저기서 오라고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이제 또 그놈을 불렀거든. 신형식이를. 참석을 해야 되겠느냐 하니까, 또 똑같은 얘기를 한겨. 단체로 피난을 시켜주니까 절대 안전하다.”



하지만 좌익활동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대개 마을 구장이나 과거 좌익활동을 했다가 자수한 사람들이 경찰의 지시를 받아 주변 사람들을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단순히 보도연맹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구장이나 위세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도장을 찍으니 마지못해 따라서 찍었다. 식량 배급을 준다, 비료를 준다 하며 회유하기도 하고 가입하지 않으면 품앗이나 배급 등 마을 공동생활에서 불이익이 올 수도 있다고 위협도 했다.

어떤 사람은 마라톤, 축구를 하는 운동부에 가입했는데 운동부 리더에 의해 보도연맹에 가입하기도 했다. 이렇게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애초에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에 ‘좌익을 전향시켜 충성스러운 국민으로 만든다’는 목적을 걸고 전국에 걸쳐 조직되었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을 아무런 기준도 없이 대거 가입시키면서 결과적으로는 관이 주도하는 대규모 반공 단체로 변질되었다.

전쟁이 발발한 직후 이승만 정부는 전국 경찰조직을 통해 보도연맹원들을 일제히 소집해 구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충북지역 역시 충북경찰국-청주경찰서를 통해 각 지서가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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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 구술, 당시 대동청년단원, 진실화해위원회(2008) 제2권 71쪽

“(보도연맹원 소집이 어떻게 됐어요? 경찰서에서 잡으러 왔나요?) 아니여. 한번 얘기하면, 연락망이 다 돼서, 이리 전파되고 저리 전파되서 싹 모였었지. (몇월 며칠인지 기억이 나세요?) 50년 7월 8일인가, 7일인가. 본인들이 갔지. (…) 그날 저녁에 청주경찰서에서 재운 모양이여. 쭈글트리고 세웠을 테지 뭐. 날이 새니까 피난 준비를 해 와라 해서 집으로 돌려보냈어. 쌀두 가져 와라 여비두 가져와라 해서 보냈나봐. (막내 매형 포함해서 보도연맹원들이 죽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은 못 해 보신 거죠?) 못 한 거지. 그런 거 알았으면 내가 보내나. 매형을 죽으러 가게 두겠어? 더군다나 내가 우익 청년회 당당한 대원이었는데.”

이 과정은 청주경찰이 실행했지만 CIC(방첩대)의 지휘와 헌병대의 주관 아래 이루어졌다.

청주시와 청원군의 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 일부는 청주경찰서에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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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 구술, 당시 청주 경찰. 진실화해위원회(2008) 제2권 56쪽

“(무덕전에서 며칠을 재운 건가요?) 내가 경찰에 있을 때니까, 한 나흘인가 닷새, 제일 먼저 모인 데가 오창이 먼저여. 여기보다도 오창 보도연맹원들이 그 다음에 청주, 청주서 전부 미원초등학교로 이송해서 그라고서 교도소에 있는 건 직접 데리고 가서 강원도 경찰이 사살하고.”

소집된 후 구금됐다가 청주형무소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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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 구술, 당시 청주형무소 간수. 진실화해위원회(2008) 제2권, 98쪽

“(그러고 또, (청주형무소로) 보도연맹원들이 들어왔던 거죠, 거기에?) 그렇지 들어왔는데, 하룻밤 자고, 묶어서 갔다가 처형시켰지. (…) (몇 명 정도나 됐었어요?) 100~200명 됐었지 아마. (그분들도 분터골에서 죽은 건가요?) 거기서 죽었지 다. 분터골인지 어딘지 나는 가보지도 안하고. (…) (선생님 보시기에 보도연맹원들 그렇게 죽은 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라에서 하는 걸 내가 뭐. 나라에서 좌우하는 긴데 뭐.”

, 남일초등학교, 미원초등학교, 미원면 담배창고로 이송되거나 사건 현장으로 바로 이송된 후 희생되었다(조사보고서 292쪽). 학살 장소는 쌍수리 야산, 분터골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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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터골 2매장지 소유주 및 현장 목격자 이○희 구술, 진실화해위원회(2008) 제2권, 145쪽.

“(하루에 트럭이 몇 대나 왔나요?) 열대 미만인 거 같아서. (오전, 오후에 왔나요?) 오후에는 안 오고 오전에 온 거 같아. (며칠 정도 왔나요.) 글쎄, 며칠 왔어. (계단식 논에서 좀 더 가면 두산2리 백산에서도 죽였다고 하더라구요?) 계단식 논에서 묻고 더 이상 죽일 때가 없어서 그렇게 한 거 같어. 급할 때니까 넘어오면서, 이 사람들 그냥 놔두면 다 죽일 거 같으니까 죽이구서는 후퇴하려고.”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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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 구술, 당시 대동청년단원, 진실화해위원회(2008) 제2권 71쪽

“(고은리 분터골 가 보셨나요?) 보도연맹원들 죽인다고해서 6호 새 자전거를 타고 전속력으로 갔지. 고은리 올라가는 거기에 또랑이 있어. 지금 도로 밑으로, 수멍통 마냥, 거기 가니께 경찰관들이 보초를 서고 있어. 고 언저리에 수천 명들이 피난민이 서 있어. 못 가게 막었나봐. 하거나 말거나 자전거를 타고 고개 7부쯤인가 8부쯤에 올라갔더니, GMC자동차 두 대가 청주 쪽 앞을 두고 서 있더라고. 그래 ‘어떻게 되었느냐고 하니까’, ‘다 끝났어요’ 하길래, ‘하이고 살릴 사람이 있는데’ 그랬더니 ‘할 수 없죠’ 그래. 드문드문 총소리가 나는데, 저게 확인사살하는 거라고 그래.”

, 아치실로 확인되었다. 보도연맹원들을 살해한 주체는 청주경찰서 소속 경찰, 헌병대, 청주CIC 군인이었다.
청주 보도연맹원들이 구금됐던 무덕관 실내. @박만순

청주 보도연맹원들이 구금됐던 무덕관 실내. @박만순

청주경찰서와 청주형무소(당시 청주시 탑동에 위치)에 구금돼 있던 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들이 분터골과 미원면으로 이동했던 경로.

청주경찰서와 청주형무소(당시 청주시 탑동에 위치)에 구금돼 있던 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들이 분터골과 미원면으로 이동했던 경로.

충북 최대의 학살 현장인 분터골

청원 분터골 1지구 전경.

청원 분터골 1지구 전경.

청주 분터골 제2학살지에 새로 자란 나무. @최규화

청주 분터골 제2학살지에 새로 자란 나무. @최규화

진실화해위원회는 2007년 8월 8일 충북대 박물관이 주도한 첫 분터골 유해발굴 결과를 공개했다. 유해발굴 상태를 보아 유추한 당시 학살 현장은 이렇다.
보도연맹원들이 분터골 웅덩이 주변에서 능선 방향 비탈을 바라보며 30여 미터 길이로 나란히 섰다. 그들은 철심을 빼고 반으로 가른 삐삐선으로 손목이 묶인 채 서거나 무릎을 꿇고 있었다. 총구는 등 뒤 가까운 곳에서 겨누고 있었고, 발사 명령에 따라 일제히 사격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비탈에 엎어졌다. 시신을 묻기 위한 구덩이도 없었다. 살해 후 다른 곳의 흙을 퍼 와 시신 위에 얇게 덮었다. 유해발굴 용역조사단(2008)은 분터골에서 2007년에 118구, 2008년에 214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분터골이 위치한 고은3리에 살던 이○희는 청주형무소 재소자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분터골에서 학살당하는 현장을 목격했다. 이○희는 자신의 집에서 분터골로 경찰들이 장총을 들고, 정장모자를 쓰고(턱에 끈이 달린 모자) 하얀 윗도리를 입은 사람들(청주형무소 재소자로 추정)을 20여 명씩 허리를 줄로 엮어서 끌고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경찰들이 보초를 서고 아무도 집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당시 산에 나무가 울창하지 않았기에 끌려 온 사람들의 하얀 윗도리를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에 트럭이 10대 미만으로 왔다. 학살이 이어지는 동안 마을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집 밖을 나오지 못했다. 학살이 끝난 후 시체가 부패하는 분터골에 앞이 완전히 안 보일 정도의 엄청난 모기떼가 몰려들었다. 아마 당시 보도연맹원들도 비슷한 형태로 학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 청원 분터골 유해발굴 현장설명회.

    청원 분터골 유해발굴 현장설명회.

  • 2007년 충북 청원 분터골 유해발굴 설명회에 참석한 유족들.

    2007년 충북 청원 분터골 유해발굴 설명회에 참석한 유족들.

2007,2008년 청원 분터골에서 발굴된 유해.

2007,2008년 청원 분터골에서 발굴된 유해.

아버님의 마지막 얼굴

보도연맹원 소집령을 받은 청주시 영운동의 오○희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땔감을 해다가 마차로 형님댁에 실어다 주고, 형수가 앉아 있는 마루에 벌렁 누우며, 이렇게 말했다.

“형수, 나 가기 싫은데.”
“그래도 오라는데 가야지 어떻게 해, 삼촌….”

오○희는 집에 들러서 쌀을 챙겨 청주경찰서로 갔다. 며칠 후 보도연맹원들이 경찰서에서 나와 걸어서 보은 방면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행렬이 오○희의 집 앞을 지나갈 때였다. 오○희의 아내는 무수한 사람들의 행렬 속에서 남편의 얼굴을 발견했다. 남편은 연신 기웃거리며 아내와 아들을 찾고 있었다. 아내는 큰 소리로 남편을 불러보지도 못했다. 그때 오○희가 26세였고 아내의 등에 업혀 있던 아들은 생후 18개월이었다.

어머니마저 재혼한 뒤 아들 오○규는 늘 기가 죽어서 지냈다. 당시 영운동 모집책으로 아버지에게 보도연맹 가입을 집요하게 권유한 김○○의 아들과 함께 국민학교를 다니면서도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공부를 잘해서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할아버지가 월사금을 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17살 때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24살에 중매로 결혼했고, 28살부터 택시운전, 트럭운전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1년이면 몇 번씩 기관에서 사찰을 나오던 것이 83년도에서야 조금 풀렸다. 2006년부터는 청주·청원 유족회 활동을 시작했다. “하여간 내 나름대로는 보람을 느끼고 있어요. 우리 유족들이 쫌 더 협조를 해 줬으면 하는 건 내 욕심이구. 돌아가신 분들의 위령이라든가, 배상을 한다라고 하면, 힘들게 살아오신 분들에게 다소나마 위로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2007년 유해발굴 보고서》 제2권 149쪽 이하. 오○균 구술)
분터골 유해 매장지 위치도. 《2007년 유해발굴보고서 제1권》 수록

분터골 유해 매장지 위치도. 《2007년 유해발굴보고서 제1권》 수록

분터골에서 출토된 신발 밑창. ‘大同江’ 표시는 신발의 상표로 추정된다. 당시 ‘大同江’ 상표는 청주에 소재한 청주합동고무신공업사에서 생산한 것이다.

분터골에서 출토된 신발 밑창. ‘大同江’ 표시는 신발의 상표로 추정된다.
당시 ‘大同江’ 상표는 청주에 소재한 청주합동고무신공업사에서 생산한 것이다.

사건명 청원 국민보도연맹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청원 국민보도연맹 사건》(1기)
지역 청원군(현 청주시)
사건 발생일 1950년 6월 말~7월 중순
진실규명 신청인 오〇균 외 154명
진실규명 결정일 2008년 11월 26일
진실규명 인원 오○희 등 169명 (희생자: 오○희 등 165명)
결정사안 1950년 6월 말~7월 중순 청주·청원지역 국민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들이 청주경찰서 경찰과 헌병대, 청주 CIC 등에 의해 경찰서와 지서, 형무소 등에 소집·구금됐다가, 1950년 7월 초부터 7월 중순까지 충북 청원군 일대와 보은군 일부 지역에서 집단희생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청주경찰서 소속 경찰과 국군 소속 헌병대와 청주CIC 군인들
참고자료 진실화해위원회·충북대학교 박물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관련 2007년 유해발굴 보고서》 제1~3권, 2008
영상: KTV 국민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