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1) 울산보도연맹 사건,
그리고 유족회의 진실규명 운동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 104호)인 울산광역시 구 삼호교 아래에서 1960년 유족회가 결성됐다. 삼호교는 일제 강점기에 군수산업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목적으로 건설된 울산 지역 최초의 근대식 철근콘크리트조 교량이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 104호)인 울산광역시 구 삼호교 아래에서 1960년 유족회가 결성됐다.
삼호교는 일제 강점기에 군수산업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목적으로 건설된 울산 지역 최초의 근대식 철근콘크리트조 교량이다.

명단의 마지막 숫자 ‘1561’

1949년 12월 9일 울산 태화국민학교(현 울산초등학교) 강당에서 ‘국민보도연맹 울산군연맹’ 결성되었다. 이 자리에 울산군수, 울산경찰서장, 보도연맹 경남도본부 공작원 등 각계 대표들이 참석했다. 1949~1950년 당시 울산군의 관할 행정구역은 2개 읍, 15개 면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17개 읍·면에 모두 보도연맹 지부가 조직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국민보도연맹 울산군연맹’이 조직될 당시 보도연맹원은 228명이었다. 그러면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보도연맹원 수는 얼마나 늘었을까? 울산 보도연맹원 명부에 나타난 일련번호의 마지막 숫자는 ‘1561’번이다. 따라서 울산지역 보도연맹원 수는 최소 1561명이었다. 명부에 신원이 기재된 경우는 672명인데 이들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283명이 문맹이며, 527명(78.4%)이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고, 560명(83%)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다음으로 바다에 접한 울산의 지리적 특성상 어업에 종사하거나 선원인 경우가 55명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1950년 8월 5일부터 8월 26일까지 울산경찰서 사찰계 경찰과 울산지구CIC 대원들은 10여 차례에 걸쳐 울산지역 보도연맹원을 비롯한 예비검속자들의 손목을 묶은 채 트럭에 태워 울산군 온양면 운화리 대운산 골짜기와 울산군 청량면 삼정리 반정고개로 이송해 최소 1명, 최대 212명까지 집단 총살했다. 이때 최소 870여 명이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녀올게’ 하며 집을 나선 마지막 모습

한국전쟁 당시 정부가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집단 살해한 사건은 전국에 걸쳐 일어났다. 인터넷 검색창에 무작위로 행정구역명과 ‘보도연맹’을 함께 넣으면 거의 예외 없이 보도연맹 학살 기사를 볼 수 있다. 검색을 거듭할수록 희생자의 수가 늘어나고, 우리는 충격을 넘어 의문이 생긴다. 이들은 대체 왜 죽임을 당한 것일까? 울산의 보도연맹원들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평범한 농민들이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도장 한 번 잘못 찍은 것’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먼저 좌익 활동을 했다고 추정되는 경우를 보면 좌익 활동을 했거나, 전쟁 전 수감된 경력이 있거나 농민조합 같은 좌익 관련 사회단체에 가입한 적이 있으면 보도연맹에 가입해야 했다.

직접 좌익 활동을 하지 않았더라도 좌익에게 쌀이나 돈을 주거나 그들이 시키는 심부름을 하고 삐라를 살포했거나 아니면 집에 숨겨주었거나 어찌 됐든 좌익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그러나 신청인과 참고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한 것이 좌익 활동과는 무관했다고 했다. 즉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땅을 나눠 준다, 가입하면 버스비도 공짜이며 비료도 공짜로 준다, 가입하면 머슴살이를 안 해도 된다, 배급을 준다, 군대·부역을 면제해 준다는 말을 듣고 가입했다. 심지어 어디 가입하는지도 모르고 가입하면 좋다는 주위의 권유에 가입한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점점 길어진 명부가 전쟁이 나자 무시무시한 살생부로 변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명부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은 꼼짝없이 예비검속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평소에도 교육이나 훈련, 작업 동원 등으로 자주 소집되곤 했기 때문에 사건 당시에도 별 의심 없이 소집에 응했다. 그래서 희생자의 가족들은 아버지, 남편, 아들이 여느 날처럼 무심히 집을 나서는 모습을 죽기 전의 마지막 기억으로 갖고 살아가게 되었다.
《좌익계열자 명부》 표지(왼쪽)와 명단. 이름, 본적, 주소, 학력, 직업, 정당단체, 현재동향 등이 실려 있다.

《좌익계열자 명부》 표지(왼쪽)와 명단. 이름, 본적, 주소, 학력, 직업, 정당단체, 현재동향 등이 실려 있다.

《대공인적위해요소 명부(처형자 명부)》에 실린 6·25 당시 처형자 명단. 1975년 울산경찰서 대공과에서 작성했다. 처형자 이름, 생년월일, 주소 등 신원이 기록돼 당시 예비검속과 처형의 정황을 파악할 수 있다.

《대공인적위해요소 명부(처형자 명부)》에 실린 6·25 당시 처형자 명단. 1975년 울산경찰서 대공과에서 작성했다.
처형자 이름, 생년월일, 주소 등 신원이 기록돼 당시 예비검속과 처형의 정황을 파악할 수 있다.

총살당했는데도 석 달 후 퇴학당한 울산농업중학교 학생

울산군 울산읍 태화리 말정마을에 살던 서○○(1932년생)는 당시 울산농업중학교 학생이었다. 전쟁이 일어난 뒤 7, 8월경이었다. 경찰 2명이 서○○를 찾아왔다. 서○○는 미리 알고 아랫마을 작은아버지 집에 도망가 숨어 있었다. 경찰들은 1주일 정도 집 근처에서 잠복했지만 서○○를 잡지 못했다. 그러다가 얼마 뒤 어찌 알았는지 작은아버지 집에 경찰이 들이닥쳤고 작은어머니와 마을 사람 2명이 보는 앞에서 서○○가 붙들려 끌려갔다. 나중에 말이 나오기로 동네 주민 중 한 명이 형을 밀고했다고 했다. 부친이 울산경찰서로 수차례 찾아갔지만 아들을 만날 수 없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처형자명부》에서 서○○가 1950년 8월 18일 처형됐다는 사실이 기재된 것을 확인했다. 이와 함께 학적부 기재 사항 등을 근거로 서○○가 울산경찰서 소속 경찰에 의해 1950년 8월 18일 희생됐다고 판단했다.

1960년 서○○ 부친은 반정고개에서 유족회와 함께 유해 수습에 참여했지만 시신을 수습하지는 못했고, 이후 백양사 추모제를 함께 지냈다. 희생자의 가족은 이 사건으로 마을에서 따돌림을 당해 결국 이사를 가야 했다.
서○○의 울산농업중학교 학적부. 그는 1950년 8월 18일에 울산경찰서 경찰에 의해 이미 처형되었다. 그런데 ‘입학○의 이동 및 사유’ 칸에 단기 4283년(1950년) 11월 11일 “보련관계로 퇴학”된 것으로 기재되었다.

서○○의 울산농업중학교 학적부. 그는 1950년 8월 18일에 울산경찰서 경찰에 의해 이미 처형되었다. 그런데 ‘입학○의 이동 및 사유’ 칸에 단기 4283년(1950년) 11월 11일 “보련관계로 퇴학”된 것으로 기재되었다.

백양사 입구. 백양사는 1960년 당시 희생자 유해를 발굴하고 합동묘와 추모비를 세웠으나 이듬해 5·16군사정권 수립 후 묘가 파헤쳐지는 수난을 겪었다.

백양사 입구. 백양사는 1960년 당시 희생자 유해를 발굴하고 합동묘와 추모비를 세웠으나
이듬해 5·16군사정권 수립 후 묘가 파헤쳐지는 수난을 겪었다.

도장 찍으면 축구도 계속 잘할 수 있고 출셋길 열린다는 서류

신청인 이○□(1939년생)가 기억하는 작은아버지 이○○(1927년생)는 축구를 좋아해서 자주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축구 시합을 했다. 그날도 축구를 하러 가는 길이었는데 길에서 마주친 누군가가 오늘은 축구를 안 한다며 동부리 쇠평마을에서 놀자고 했다. 그 말에 작은아버지는 조○○, 김○○ 등과 함께 따라갔다.

쇠평마을에 도착하자 안내한 사람이 작은아버지와 같이 간 사람들에게 서류 하나를 내밀더니 하는 말이 ‘여기에 도장을 찍으면 축구도 계속 잘 할 수 있고 출세할 수 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작은아버지는 무슨 서류이길래 출세할 수 있다는 것인지 의아했지만 막연히 좋은 것인 줄로 알고 도장을 찍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보도연맹 가입서였다.

그 후로 작은아버지와 친구들에게 방어진지서에 출석해 교육을 받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경찰 말을 안 들을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매일 점심을 싸서 방어진읍 소재지까지 걸어서 20여 일 동안 교육을 받으러 다녔다. 증언
닫기
신청인 조○□ 진술, 1953년생, 2021. 9. 1

작은아버지[조○○(1930년생]는 마을 주민 이○○, 김○○ 등과 같이 매일 점심을 사서 방어진읍 소재지까지 걸어가 20여 일간 교육을 받다가, 어느 날 돌아오지 않음. 이후 소식이 없음.

그런데 당시 지서에서도 교육에 대해 좋은 말만 했다. 교육을 수료하면 군에도 갈 수 있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거였다.

교육을 받으러 간 지 20일 정도 되었을 때였다. 작은아버지는 형수(신청인의 어머니)에게 우울한 표정으로 오늘은 도시락을 싸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는 울산경찰서로 갔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편 작은아버지에게 보도연맹 가입을 권유했던 사람은 청년방위대원 황모 씨인데 일본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처형자 명부》에 기재된 이○○의 1950년 8월 18일 처형 사실 등을 근거로 울산경찰서(방어진지서) 소속 경찰에 의해 구금돼 1950년 8월 18일 희생되었다고 판단했다.

11살 소년에게 권총을 들이댄 경찰

진실규명 대상자 박○○(1910년생)은 울산군 농소면 송정리에 농사를 지으며 살던 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울산경찰서 경찰에게 예비검속돼 1950년 8월 15일 울산군 온양면 운화리 소재 대운산 골짜기에서 희생되었다.
아들 박○□(1946년생)은 아버지가 국민보도연맹에 연루돼 희생당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아버지가 연행돼 희생된 사건에 관해 동네 어른과 형 등에게서 들었다. 1950년 8월경 박○○은 농소지서에 자수했다. 그러나 자수한 이후 대운산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가족들은 1950년 당시 박○○의 유해를 찾지 못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고 1960년 유해발굴 때 큰아들이 박○○의 허리띠를 알아보아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어머니로부터 듣기로 아버지는 당시 누군가의 꼬임에 넘어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고 했다. 그때 마을에 국민보도연맹원들이 많았다. 박○○은 1950년 8월 15일경 농소지서 경찰이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말을 하길래 믿고서 지서에 가서 자수했던 것이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지서에 가서 자수하기 전의 일을 잊지 못한다. 집으로 찾아온 경찰이 권총을 꺼내더니 그에게 들이밀었다. 그때 그는 11살 소년이었다. 경찰은 총을 겨눈 채 “니 아버지 어디 있노”라며 거칠게 추궁했다.

4·19 이후 진상규명 운동

1960년 4·19 이후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장면 정권이 들어서자 전쟁 시기에 군경에 의해 가족이 희생당한 전국의 유족들이 진실규명을 요구하며 유족회를 결성하기 시작했다. 울산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울산유족회 총무를 담당했던 이건은 “4·19 후 사람들이 자유롭게 돼 어떤 통로로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태화강 삼호다리 밑에 한 200명 정도가 모였다”고 증언했다. 이때 삼호다리 아래서 처음으로 울산유족회가 결성되었다.

1960년 5월 31일 오전 11시경 태화강변 백사장에서 100여 명(혹은 200여 명)의 부인들이 전쟁 발발 후 양민 1,000여 명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경찰과 군을 규탄하는 ‘데모’를 벌였다. 이들은 오후 1시경 울산경찰서로 옮겨 저녁 늦게까지 농성을 했으며, “학살 당시의 학살 주모자의 명단을 제시하라”는 등의 6개 항목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약 3시간 정도 연좌데모를 감행했다. 다음날(6월 1일)에도 다시 200여 명이 경찰서로 가서 시위를 했는데 유족들이 요구하는 6개 항은 “첫째, 학살자명단을 밝히라. 둘째, 학살된 장소와 생사 여부를 밝혀라. 셋째, 학살 주모자의 명단을 제시하라. 넷째, 유족에 대한 정부의 금후 대책을 세우라. 다섯째, 학살되었으면 이에 따른 호적정리를 하라. 여섯째, 학살책임자를 의법 조치하라”였다.

유족 1,000여 명은 1960년 8월 20일과 21일 이틀에 걸쳐 울산군 온양면 대운산과 청량면 반정고개에서 유해발굴을 벌여 두개골 825구, 탄피 5관, 희생자들의 손발을 묶은 철사줄, 금이빨, 도장, 처녀의 머리털 등을 발견·수습했다. 유족들은 유해발굴을 마치고 그날 저녁 9시경 울산경찰서 앞에서 학살일시, 명단, 경과, 학살 주모자와 관련자를 밝혀달라고 요구하면서 농성했다.

현장에 있었던 신청인들의 진술에 따르면 유해발굴 희생자의 손목을 묶었던 철사줄, 도장(대현면 ‘천말선’), 여성의 머리카락 등이 나왔다. 유족회는 희생 규모를 정확히 알 수가 없어서 큰 관을 여러 개 준비했다. 하지만 발굴 결과 유해가 너무 많이 나오는 바람에 준비한 관으로는 부족해 가마니에 담아서 트럭에 실었다고 한다.

유해발굴을 마친 유족들은 분노했다. 유해를 실은 트럭을 곧바로 울산경찰서로 몰고 갔다. 신청인들이 기억하기로 이때 근무 중이던 경찰들이 모두 겁을 먹고 도망가버렸다고 한다. 발굴된 유해는 성안동 함월산에 소재한 백양사 앞에 합동으로 안장하였으며 안장하기 전까지 유골들을 백양사의 법당에 모아놓고 향불을 피워놓고 교대로 곡을 하며 뼈를 지켰다고 한다.

그 후 언론보도에 따르면 8월 24일 오전 10시 울산국민학교 광장에서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오후에는 백양사에서 장의식을 올렸다. 당시 합동위령제에는 울산국민학교에서 백양사까지 사람이 두 줄로 연결이 될 정도로 유족들이 많이 참여했다고 한다. 유해는 백양사 앞 현재 주차장 자리에 큰 합동묘를 만들어 안치했다. 합동묘 옆에 추모비를 세웠으며 비문은 울산 출신 국어학자 최현배가 썼고 추모비 뒷면에는 면별 희생자 이름이 모두 적혀 있었다고 한다.
1960년 10월 1일, 함월산 백양사 옆 합동묘와 비석 앞에서 울산 유족회 간부 33명이 합동제사를 마친 후 함께 찍은 사진.

1960년 10월 1일, 함월산 백양사 옆 합동묘와 비석 앞에서 울산 유족회 간부 33명이 합동제사를 마친 후 함께 찍은 사진.

진실규명 대상자 연고자에 대한 신원조사 기록에서 진실규명 대상자의 처형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진실규명 대상자 연고자에 대한 신원조사 기록에서 진실규명 대상자의 처형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둑맞은 유해, ‘빨갱이’로 남은 유가족들

1961년 5·16이 일어나고 이틀 후인 5월 18일부터 전국의 피학살자유족회 대표들을 검속되기 시작했다. 경북 대구, 경남 밀양과 거창, 부산, 마산, 제주도의 백조일손유족회 대표 등 수많은 이들이 ‘혁명재판(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유족회와 유족들의 진상규명 활동에 적용된 죄명은 특수범죄처벌에관한 특별법 6조에 규정된 ‘특수반국가행위’로 ‘빨갱이’ 유골을 발굴해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혁명정부는 유족회 간부들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울산유족회 간부들도 연행되거나 구속되었다고 한다.

울산유족회 공동부회장이었던 박소선의 아들 김재홍에 따르면 그 당시 진술인의 “집이 유족회 사무실로 돼 있어서 (유족회) 간판이 있었는데 군인들이 백양사를 정리(합동묘와 묘비를 훼손)하고 난 후에 진술인의 집에 찾아와 나무로 돼 있던 간판을 떼어 부순 다음 모친을 연행했다”고 했다. 신청인들은 5.16 후 합동묘가 해체돼 유골들은 모두 사라졌고 추모비가 훼손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소문으로 듣기에 유해를 화장시켜 강 혹은 바다에 뿌려졌으며, 이런 행위는 희생자를 두 번 죽이는 부관참시라고 하면서, 사라진 유해의 행방을 알고자 했다. 그 후로도 유족들은 빨갱이 가족이라는 오명을 쓰고 경찰로부터 감시와 취업 제한 등 온갖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1960년 백양사에 세운 ‘6·25사변 당시 원사자 합동묘비’ 내용. 한글학자 고 최현배 선생이 쓴 비문을 유족이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1960년 백양사에 세운 ‘6·25사변 당시 원사자 합동묘비’ 내용.
한글학자 고 최현배 선생이 쓴 비문을 유족이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한글학자 최현배는 울산 하상면 출신이다. 그는 6.25 사변 당시 원사자 합동묘비 비문을 썼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여기 죄 없이 학살당한 700여 명 혼백이 영원한 잠에 들어 있다. 6.25사변 당시 이 분네들이 하루아침에 경찰에 불리어 나간 뒤로 종적이 일향 모연하여 부모형제 자매 부처자녀 친척을 잃은 유족들은 구곡간장에 맺힌 원한을 풀길이 바이 없어 십년의 세월을 보내었더니 금년 사월혁명으로 무폐무법의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짐을 보고 그 유족 일동이 기를 쓰고 다투어서 드디어 대운산 및 반정골짝에서 그 무참하게도 구덩이 죽임을 당한 곳을 찾아내었다. 수천의 유족들은 다시금 새로와 진통의 정을 품 안고 누루 퇴적한 백골들을 파내어 담아 여기에 합동장을 지내고 이 비를 세워 그 연유를 적고 그 명복을 비는 바이다.
4293년 8월 육이오사변 당시 울산군 원사자유족회 글 지은이 최현배”
2021년 6월 10일 울산보도연맹 희생자 위령탑 제막식이 열렸다. 위령탑은 고깔과 장삼을 걸치고 두 개의 북채를 쥐고 춤추는 민속춤 승무(僧舞)를 형상화 했다. 상처와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고 날아가는 영혼의 날개 짓을 표현했다. @울산시

2021년 6월 10일 울산보도연맹 희생자 위령탑 제막식이 열렸다.
위령탑은 고깔과 장삼을 걸치고 두 개의 북채를 쥐고 춤추는 민속춤 승무(僧舞)를 형상화한 것으로 상처와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고 날아가는 영혼의 날개 짓을 표현했다.
@울산시

진실화해위원회의 직권 조사 결정

울산보도연맹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2006년 9월 29일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대해 직권조사를 의결해 비로소 국가에 의한 진상규명의 길이 열린 것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울산지역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경우 관련자료가 확보됐고 희생 규모가 매우 큰 사례이므로 우선 조사지역으로 선정했고, 1960년 유족회 활동과 1961년 5·16 이후 유족회 탄압과정 등 사건의 전체적인 조망이 가능하다고 판단해 우선 조사 대상으로 설정했다고 밝혔다. 2023년 현재에도 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여전히 밝히지 못한 희생자들의 억울함을 달래기 위해 진실규명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사건명 울산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울산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1)〉(2기)
지역 울산광역시
사건 발생일 1950년 8월경
진실규명 신청인 김○순 등 62명
진실규명 결정일 2022년 7월 19일
진실규명 인원 김○○ 등 60명(희생자: 김○○ 등 60명)
결정사안 1차 조사결과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후 울산지역에 거주하던 김○성 등 60명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 등으로 군경에 의해 예비검속돼 구금됐다가 1950년 8월 군인과 경찰에 의해 울산 온양면 대운산, 청량면 반정고개 일대에서 집단 살해된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을 결정한 사례
가해주체 울산경찰서 소속 경찰, 육군정보국 소속 CIC 울산지구 파견대 등
참고자료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울산 국민보도연맹 사건〉(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울산 국민보도연맹 사건 II〉(1기)
영상: KTV 국민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