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국민보도연맹 사건 그때 부산에서 정말로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2001년 4월 8일 부산 동매산 기슭에서 실시된 한국전쟁 유해발굴 모습. @김기진

2001년 4월 8일 부산 동매산 기슭에서 실시된 한국전쟁 유해발굴 모습.
@김기진

“너무 많다고요? 곧 추려낼 겁니다”

1950년 2월 11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민주국민당 민경식 의원이 내무부 차관 장경근에게 국민보도연맹 조직과 운영에 대한 긴급 질문을 했다.

“보련(保聯)이라고 하면 과거 공산주의 운동을 하던 자로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전향하는 사람을 포섭 지도하는 기관으로 인정하고 있단 말입니다. 문제는 해방 직후에 대세에 이끌려 인민위원회나 농민조합 이러한 데 속한 사람들을 그저 명목만 가지고 보련 가입을 종용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종용이 아니라 만약 가입하지 않으면 신분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협박을 하면서 한 군(郡)에서 만 명 가까운 권유장을 발부하고 있단 말이에요.”

이에 장경근 차관이 답했다.
“이 보도연맹은 지금 형성 도중에 있습니다. 향후에는 조직을 강화하고 사람을 추려가지고 점차 범위를 축소하려고 합니다. 우선은 전부 포섭해 놓고 그중에서 필요 없는 사람은 나가 달라고 할 것입니다. (…) 그렇지만 다소간 결함이 있다고 해서 제도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축구를 할 적에 1년에 사고가 나서 몇 사람 죽을 것입니다. 죽는 사람이 있다고 스포츠를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보련은 운영으로 얻는 이점에 비해 폐단이 적은 것입니다.”
국민보도연맹은 “전향자를 계몽·지도하여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받아들인다”는 목적으로 1949년 4월 20일 창립된 관변단체였다. 당시 김효석 내무부 장관이 총재를 맡고, 장경근 내무부 차관을 비롯해 법무부 차관, 대검찰청 차장이 부총재를 맡았다. 9월부터 도내 각 경찰서 단위로 하부조직을 만들어 이듬해 3월경에는 전국적인 체계를 갖췄다.

보도연맹이 마을과 직장 단위까지 촘촘히 조직망을 뻗어 놓은 지 석 달 만에 전쟁이 났다. 그러자 이승만 정부는 전국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경찰서 구치소와 형무소에 가두었다. 전황이 악화돼 군경이 후퇴할 시점에 이르면 이들을 가까운 골짜기에서 총살하고, 바다에 수장시켰다. 이렇게 희생된 사람이 전국에 최소한 수만 명에서 최고 30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몇 달 전만 해도 국회의원이 필요 이상으로 많이 가입시킨다고 문제를 제기하니, 정부 인사가 곧 추려낼 것이라며 별문제 아닌 것처럼 논의되던 바로 그 국민보도연맹이었다.

비료 줄게 가입해라, 아니면 빨갱이 된다

1949년 11월 20일 국민보도연맹 경상남도연맹 결성 선포식이 부산시 대청동 남일국민학교(현 광일초등학교)에서 개최되었다. 선포식에는 부산지역 검사장, 법원장, 경남도 사찰과장, 23연대장, 도지사 대리, 시장 등 내외빈과 보도연맹원 800명을 포함해 2,000여 명이 참석했다. 한 달 뒤 12월 24일에는 보도연맹 북부산지구(600여 명), 남부산지구(1,000여 명) 결성선포대회가 이어졌다. 진실화해위원회는 1950년부터 전쟁 전까지 보도연맹 가입자 수가 대폭 증가하는 다른 지역 사례에 비춰 볼 때 부산지역 보도연맹원 수도 1,600여 명을 훨씬 넘었을 것으로 판단했다.

보도연맹 가입 대상은 일차적으로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정부는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좌익 활동에 관해 죄를 묻지 않으며 생활 지원까지 해 준다고 선전했다. 그래도 조직 확대가 여의치 않자 읍면동 단위로 인원 수를 할당했다. 이에 경찰이 사소한 좌익 활동 이력을 빌미로 보도연맹 가입을 종용하고, 시골 마을의 이장들이 좌익 활동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주민들까지 보도연맹에 가입시키기 시작했다. 이때 가입하지 않으면 ‘빨갱이’로 몰린다고 협박하거나 비료나 밀가루 따위를 준다고 회유하고 혹은 동네 청년들이 다들 도장을 찍으니까 어쩔 수 없이 가입하기도 했다.
국민보도연맹원 양심서(자료사진). @김기진

국민보도연맹원 양심서(자료사진).
@김기진

“너는 살렸는데 아버지는 못 살렸다”

희생자 송○희(43세)는 일제강점기에 독서회 사건으로 투옥됐고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부산지부 총무부장을 역임했다. 송○희는 부산지역 신간회 회원이었는데 신간회 회원은 좌익사상을 가졌다고 해서 동래경찰서 경찰 최○○, 박○○이 송○희를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1950년 7월 어느 날 아침에 송○희는 보련원 소집에 응해 집을 나간 뒤 소식이 끊겼다. 며칠 뒤 경찰이 집으로 들이닥치더니 “집안에 무기를 감춰둔 혐의가 있다”며 아들 송철순(18세)을 연행해 동래경찰서 유치장에 가두었다.

그곳에서 송철순은 동래경찰서 건너편 소방서 건물 2층 사무실에 송○희를 비롯한 마을 사람 200여 명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두 보도연맹원들이었다. 동래경찰서 유치장은 3호방까지 있었고, 한 방에 17~18명 정도가 있었다. 매일 자정 때가 되면 유치장 앞에 스리쿼터(적재량이 4분의 3톤인 트럭의 일종)가 왔다. 곡괭이, 삽 등을 싣는지 금속성 소리가 들렸고 이내 주민 6~7명이 철사에 손목이 묶여 끌려 나갔다. 송철순은 오늘 밤 혹시 자기 차례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면서 20여 일간 갇혀 있었다. 동래경찰서 경찰 김○○가 사촌누나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송○희와 아들 송철순을 풀어주기로 약속이 되었다. 그리고 이틀 후 새벽 송철순만 석방되었다. 몇 시간 뒤 김○○가 찾아와 “너는 살렸는데 아버지는 못 살렸다”는 말을 했다. 소방서에 있던 보도연맹원들은 9월 7일 이후 모두 사라졌다.
1950년 7월 영국의 사진잡지 《픽처 포스트(Picture Post)》에 ‘War in Korea’라는 제목으로 실린 사진. 공주형무소 수감자들이 트럭에 실려 학살 현장에 끌려가는 모습이다(자료 사진). @Picture Post

1950년 7월 영국의 사진잡지 《픽처 포스트(Picture Post)》에 ‘War in Korea’라는 제목으로 실린 사진.
공주형무소 수감자들이 트럭에 실려 학살 현장에 끌려가는 모습이다(자료 사진).
@Picture Post

고문으로 희생된 부산일보 문화부 기자

1947년 좌익 계열의 예술단체인 조선문화단체총연맹이 부산, 인천 등 지방에 ‘문화공작대’를 파견해 연극, 영화, 음악, 시 낭송 등을 공연했다. 당시 부산일보 편집차장 겸 문화부 기자였던 전○수도 문화공작대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1950년 8월 문화공작대 가담 혐의로 다른 기자 5명과 함께 경남도경실로 연행됐고, 8월 15일 고문으로 사망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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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을 증언, 1925년생, 자유민보 기자, 당시 희생자와 함께 연행됐음

1950년 6월 하순이나 7월 초순경 경남경찰국 사찰계에 자유민보 이○우, 부산일보 정○업, 신○균, 김○렬, 전○수, 박○봉 등과 함께 연행돼 구금되었다. 자유민보 기자 김○언은 보도연맹원이었는데 김○언이 호명한 사람들이 사찰계에 연행된 것이다. 연행된 후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당시 CIC 사무실은 부산 광복동 입구 한일은행 맞은편이었다. 희생자는 부산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던 중 행방불명되었다.

생일날 끌려간 우리 어머니

전쟁이 난 후 부산 경남여중에 군인들이 주둔하고, 학생들은 밖에서 천막을 치고 공부했다. 그때 경남여중에 다닌 남○복은 14살이었다. 그녀는 어머니 배○미가 1949년 부산 동부경찰서에 연행되었고, 그때 지은 죄를 없애준다는 경찰의 말에 보도연맹에 가입한 것으로 기억했다. 그리고 이듬해 1950년 7월 28일에 다시 동부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이날은 어머니 생일이었다.

어머니는 동부경찰서에서 영도로 이송되었다. 면회 간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내일 CIC로 넘어가는데 살지 못할 거다”라고 말했다. 남○복은 나중에 그때 CIC로 끌려간 사람들이 트럭에 실려 양산 등지에서 구덩이에 넣어져 몰살당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오륜동에는 그 또래 남자가 없다”

1950년 당시 오륜동에 살던 청년 문○환(1930년생)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사건에 대해 증언했다.

“1950년 8월 9일경 밤에 석대파출소 경찰인 듯한 사람이 마을 위쪽부터 아래쪽으로 (보도연맹) 명단을 갖고 수색을 하면서 청년 9명을 끌어내는 것을 보고 급히 몸을 숨겼다. 다음날 같은 마을에 사는 주○길이 동래경찰서에 연설 들으러 가자고 권유했지만 가지 않았다. 동래경찰서에 간 주○길은 전날 끌려온 청년들과 함께 트럭에 실려 갔다. 청년들 부모들이 동래경찰서에 갔는데 트럭에 사람이 실리는 것을 보았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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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 증언, 1938년생. 희생자 김○도의 동생

전쟁 발발 후 석대지서에서 경찰이 나와서 마을사람들의 도민증을 걷어 갔고, 그날 밤 마을 청년들을 잡아갔다. 청년들 부모들이 동래경찰서에 갔는데 차에 사람들을 싣는 것을 목격했다. 어느 골짜기로 데려가서 죽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후 어느 골짜기에서 죽었다는 소문만 들렸다.” 마을에서 문○환을 빼고 그의 친구들이 모두 끌려가서 희생된 것이다.

좋은 것인 줄 알고 보련 가입한 대한조선공사 직원들

대한조선공사는 1950년 1월 설립된 국영기업으로 일본 미츠비시중공업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합작으로 설립된 조선중공업의 후신이었다. 생존자 백○의(1932년생)는 1947년경 농민조합에 가입한 일로 울산경찰서에 2번 구속됐고, 1950년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했다.

그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당시 사건에 대해 말한 내용은 이렇다. 대한조선공사의 직원 수는 3,000여 명이었는데 직원 대부분은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과거의 잘못을 없애준다는 말을 믿고, 가입하면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에게는 ‘보도연맹원 증명’이라는 신분증을 주었는데 이름과 주소가 기입돼 있었고 본인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보도연맹원들에게는 도민증이 나오지 않았다.

1950년 8월 2일 대한조선공사 보도연맹원들은 헌병들에 의해 수상경찰서(현 부산영도경찰서)로 이송됐고, 그 후 부산형무소에 구금되었다. 보도연맹원들은 과거 좌익 활동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 조사 후 좌익 활동 경력에 따라 보도연맹원들을 분류했는데 활동 경력이 많은 보도연맹원은 밤에 불려나간 후 죽었고, 활동 경력이 적은 보도연맹원은 1개월가량 지나 풀어주었다.
대한조선공사 기공식 모습. 한국전쟁 때 직원 수가 3,000여 명이었는데 대부분은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과거의 잘못을 없애준다는 말을 믿고, 가입하면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부산박물관

대한조선공사 기공식 모습.
@부산박물관

대한조선공사 보도연맹원 명부(보고서 316쪽 수록)

대한조선공사 보도연맹원 명부(보고서 316쪽 수록)

동료 권유로 보련 가입한 조선방직 경비원

조선방직은 1917년 일본 자본이 설립한 한국 최초의 기계제 면 방적 회사였다. 부산 좌천동에 살았던 희생자 강○중(1919년생)은 조선방직 경비실 직원이었다. 그에게는 아직 돌도 안 된 아들이 있었다. 강○중은 경비실 동료의 권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전쟁이 난 직후 동부경찰서로 연행되었다. 희생자의 모친이 부산지검에 있는 친척을 통해 석방해 주도록 부탁했고, 서류에는 분명 석방했다고 기재됐는데 실제로는 희생자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연행될 당시의 모습을 목격한 동료 박○금(1934년생)은 조선방직에서 베를 짰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강○중은 뒷문 쪽에서 경비 근무를 하던 중 다른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을 듣고 있는 중에 잡혀갔다고 한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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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섭 증언, 1932년생, 희생자의 조카

1950년 여름 강○중은 당시 범일동 소재 조선방직 경비실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동료가 보도연맹원으로 잡혀갔다. 잡혀간 동료가 강○중의 이름을 불러서 근무 중이던 강○중도 조사할 것이 있다고 경찰이 동부경찰서로 연행했다. 소문에는 동부경찰서에 모아놓고 보도연맹원뿐만 아니라 강○중 같이 억울한 사람도 같이 한 차 가득 싣고 나가서 어디에 생매장했다고 한다.

보도연맹 희생자가 다닌 부산 범일동 조선방직(1926년 촬영). @한국저작권위원회

부산 범일동 조선방직(1926년 촬영). @한국저작권위원회

골짜기로 끌고 가 총살하고, 오륙도 바다에다 수장시켰다

보도연맹원으로 끌려간 이들은 어디서 어떻게 희생되었을까? 진실화해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조사결과를 내놓았다. “부산지역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들은 한국전쟁 발발 후인 1950년 7월부터 8월 중순 사이에 경찰과 CIC에 소집돼 부산형무소에 갇혔다가 희생되었다. 일부는 각 경찰서에 소집된 후 희생 장소로 끌려가 희생되었다. 이들이 희생된 장소는 사하구 구평동 동매산과 해운대 장산골짜기, 부산시 금정구 회동동(당시 경남 동래군 북면 회동리) 골짜기 등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부산 오륙도 인근 해상에서 수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 지역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들은 동래경찰서에 소집돼 부산시 금정구 회동동(당시 경남 동래군 북면 회동리) 골짜기, 부산시 금정구 선동, 부산시 기장읍 장안리 길천리 등에서 희생되었다.”

보도연맹원인 형을 면회하기 위해 1950년 9월 부산형무소에 갔던 정○용은 부산형무소에 헌병 2명이 탄 군용 트럭이 있었고 재소자들은 고깔모자를 쓴 채 5∼6명씩 묶여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재소자들을 태운 군용 트럭이 부산형무소 밖으로 나가자, 정○용이 트럭을 따라갔는데 트럭은 해운대역을 지나 어느 이름 모를 산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총소리가 났다.

한참 후 산으로 들어갔던 트럭이 내려오는데 트럭에는 헌병들만 타고 있었다. 당시 주변 마을 사람들이 정○용에게 군인들이 죄수들을 총으로 쏴 죽였고, 군인들에게 고용된 주변 마을 사람 10∼20명이 골짜기에 시체를 던진 뒤 삽으로 흙을 덮었다고 알려 주었다[국민일보, 2002. 4. 10일자 기사]

좌익 활동 경력으로 전쟁 발발 직후 부산형무소에 수감됐던 이○형은 이렇게 증언했다. “어느 날 제가 간병부 반장을 하는 친구의 일지를 훔쳐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망자의 누계와 그 처리 내역이 적혀 있는 서류였는데 석 달 동안 무려 4,832명이 죽어 나갔더군요. 사망 원인은 괴혈병이 제일 많았습니다. … 6․25가 나고 얼마 있다가는 형기가 많은 사람부터 몇십 명씩 묶어서 총살을 시킵디다. 제가 간수에게 분명히 들은 이야깁니다. … 하긴 전쟁통에 억울한 죽음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마는 6․25 당시 부산형무소에서는 정말 많은 인명이 죽었어요.”

군사정권에 의해 두 번 죽임당한 희생자들

보도연맹 생존자 송철순은 이후 부산일보 기자가 되었다. 사회부 출입기자로 활동하며 1960년 9월 동래지역 유족회를 결성했다. 피해자들을 수소문해 340여 명을 찾아냈다. 동래유족회는 사건 당시 동래 지역 경찰로부터 학살 장소를 알아내 동래컨트리클럽, 회동수원지 입구, 고리원자력발전소 뒤, 반송동 운봉부락, 해운대구 우동 산기슭 등지에서 유해를 발굴했다. 이때 송철순은 동래컨트리클럽 발굴에서 아버지 이름이 새겨진 도장을 찾았다.

유족회는 발굴된 유해를 모아 부산 연제구 거제동 화지산 정상에 합동분묘와 위령비를 세웠다. 그러나 1961년 5·16후 합동묘는 파헤쳐지고, 위령비는 파괴됐으며, 유족회 간부들은 구속되었다. 송철순도 3년 7개월 동안 감옥 신세를 져야 했다. 당시 파괴된 합동묘 위령비 뒷면에는 이런 시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이 무덤의 사연을 후세에 전해주구려”
사건명 부산 국민보도연맹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부산·사천 국민보도연맹 사건〉
지역 부산, 사천
사건 발생일 1950년 7~9월
진실규명 신청인 지○일 외 46명
진실규명 결정일 2009년 9월 22일
진실규명 인원 부산·사천지역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들의 전체 희생 규모는 확인하지 못함. 다만 조사결과 신원이 밝혀진 희생자 중 희생 확인자는 53명,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2명, 진주형무소 6명 등 총 414명)
결정사안 부산·사천지역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들이 1950년 7∼9월 부산지구 CIC, 부산지구 헌병대, 부산지역 경찰, 동래경찰서 경찰, 사천 경찰에 의해 부산과 사천 일대에서 집단 희생된 사건에 대해 진실이 규명된 사례
가해주체 부산지구 CIC, 부산지구 헌병대, 부산지역 경찰, 동래경찰서 경찰, 사천 경찰
참고자료 《부산일보》 2000년 7월 4일자 “분단의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 (3) 보도연맹 희생자 가족 송철순 씨”
《부산일보》 2001년 4월 9일자 “구평서도 6.25 집단학살유골 발견”
《국민일보》 2002년 4월 10일자 “수감자 대량학살 의혹 1-2: 부산형무소 의혹 사건”
조은정(2014) 〈해방기 문화공작대의 의제와 성격〉, 상허학보
부산역사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