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 임시수도 부산에서 벌어진 자국민 살해

1926년 부산 서구 동대신동 부산형무소 전경.

1926년 부산 서구 동대신동 부산형무소 전경.

“도살장” 같았던 1950년의 부산형무소

고〇원은 부산형무소 재소자 생존자이다. 그는 1948년 제주4·3사건 당시 산에 들어가 도피 생활을 하다가 도중에 귀순해 서귀포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주정 공장에 수감 중에 군법회의를 받았고, 이때 고〇원을 비롯한 제주 사람 300여 명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대구형무소에 와서야 자신이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15년 형을 받았음을 알았다. 1950년 1월경에 부산형무소로 이송되었는데 그때의 경험을 증언했다.

“부산으로 (제주 사람) 300명이 모두 이감이 됐습니다. 1950년 1월 달이었습니다. 그 추위에 부산에 내려가니까, 이젠 세상이 또 틀립니다. 도살장 같았습니다. 형무소 안에 들어가니까, 사람 타작하는 소리, 우는 소리가 막 나는데, 겁이 났습니다. 그렇게 하는데, 한 방에 24명씩인가? 그렇게 앉으니까, 눕지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거기서 6개월을 살았습니다. …(중략)…거기서 6․25사변이 났습니다.”

당시 부산형무소 형무관이었던 박〇〇도 당시 초과 수용 상태였던 감방의 실상에 대해 알려준다. 그에 따르면 부산형무소에서 기결수는 1, 2사에 수용했는데 감방이 모두 40개 정도였다. 감방 하나에 10명이 최대 정원이었으나 전쟁 직전에 20~30명까지 수용되었다고 한다.
1950년 항공 사진에 찍힌 부산형무소. @국토정보맵

1950년 항공 사진에 찍힌 부산형무소.
@국토정보맵

전쟁 직후의 1차 학살 (1950년 7월 26~30일)

전쟁이 나자 부산형무소에서 7월 들어 소위 ‘잡범’들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원래는 하루 평균 4~5명 정도 석방되었는데 전쟁 직후 7~8월 두 달 동안 절도·강도 등 일반사범 767명이 형무소를 나갔다. 특히 전세가 악화된 8월 2~6일 나흘 동안 무려 236명의 일반 사범들을 집중적으로 가석방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조치를 내보낸 수만큼 감옥 안의 공간을 만들어 낸 것인데 이는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들을 수감하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7월 하순 무렵이었다. 고〇원은 밤에 트럭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나면 감방 하나 만큼씩의 사람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죽음은 그의 바로 옆방에서 멈추었다.

“밤 11시쯤, 차 소리가 부룽부룽 났습니다. 차 소리는 군용트럭 소리가 틀림없었습니다. 한 5일간 그런 소리가 났습니다. 그리고 한 5일이 지나니까, 이제 차 소리가 안 났습니다. 당시 한 방에 27∼28명씩 수용되어 있었으니까, 우리 제주 사람들이 방 10개에 300명 정도 있었는데, 하룻저녁에 방 하나씩마다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계속 한 방씩 사람이 없어지다가, 내가 수감돼 있는 감방 바로 옆에서 멈췄습니다.”

일반사범들이 무더기로 가석방됐지만 반면 좌익사범들은 무더기로 끌려 나가 학살되었다. 1950년 7월 26~30일 동안에 부산형무소 재소자들에 대한 1차 학살이 일어났다. 형무소에 파견을 나온 헌병대와 CIC가 중형을 받은 좌익사범을 먼저 처형하기 시작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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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형무소 제주 4·3사건 수형인 부○방의 증언, 제주4·3연구소(2002)

“제주 사람들은 20년 형을 받은 사람과 15년형을 받은 사람들이 한 감방에 있었습니다. 20년형을 받은 사람들이 두 번에 걸쳐서 불려 나가서 ‘이상하다? 어디 일을 나가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간수가 저녁 먹었던 그릇을 가지러 와서는 ‘너희들만 밥 먹으니 맛 좋지?’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죽으러 갔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때 화북 사람 임아무개도 20년형을 받고 우리와 같은 방에 있었는데, 그분도 끌려가서 죽었습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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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형무소 형무관 김〇〇 증언

“전쟁이 발발하고 7월 말인가 8월 초부터 헌병대가 와서 재소자들을 내어달라 했습니다. 명적계가 죄가 중한 좌익사범부터 넘겨주었습니다. 헌병들이 헌병대 트럭 적재함에 푸른 옷의 재소자들을 실은 뒤 엎드리게 했습니다. 타고 있는 사람이 엎드리면 외부에서는 사람이 타고 있는 줄 모릅니다. 한 트럭에 15~20명 정도 탈 수 있었습니다. 한두 번 실어 간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싣고 갔습니다. 산속에 가서 총살시켰다고 들었습니다.

전황이 악화된 후의 2차 학살 (1950년 8월 2일~3일)

1950년 8월 2∼3일 재소자들에 대한 2차 학살이 이어졌다. 8월 1일 북한 7사단과 8사단이 낙동강 도하를 시작하면서 전세가 더욱 악화되자 부산형무소는 일반사범들을 대규모로 석방하고 남은 재소자들을 분류해 헌병대와 CIC에게 인계했다.
당시 형무관이었던 박〇〇은 헌병들이 죄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끌어내 갔다 ‘버렸다’고 증언했다.
“사상범은 미결수도 따로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헌병대에서 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감방마다 문 앞에 있는 사람부터 끌어내어 갔다 ‘버렸습니다’. 헌병이 한 트럭에 한 20명씩 손을 묶고 얼굴을 가리고 태워서 10트럭 정도 싣고 나갔습니다. 헌병들은 형무소에 상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명단을 가지고 오지는 않았고, 간수들에게 좌익사범들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헌병대가 재소자들을 데려가는 걸 제가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수복 직전의 3차 학살 (1950년 9월 2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이 수복되기 직전이었다. 부산형무소에서 3차 학살이 일어났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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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형무소 간수 박○용 증언, 국민일보 2002. 4. 10자 기사

“1950년 9월 어느 날 해가 넘어갈 무렵 군인들이 죄수들에게 새까만 옷을 입힌 뒤 트럭에다 싣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 트럭에 30~40명씩 태워 며칠간 계속 싣고 나갔는데 한번 실려 간 사람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저녁때 빈 차만 되돌아왔다. 그때 군인들이 싣고 간 사람들을 2m 정도 구덩이를 파서 다 집어넣고는 총을 마구 갈긴 뒤 모두 죽은 걸 확인하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파묻어버렸다.”

기록상으로 1950년 9월 25일 재소자 중 1,450명이 줄어들었는데 이 인원이 다른 형무소로 이감을 간 것으로 되어 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당시 전황과 관련 기록을 분석한 결과 다른 형무소로 이송됐다고 기록된 1,450명 중 대구형무소로 이송된 507명을 제외한 943명은 모두 희생되었을 개연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형무소 재소자들에 대한 학살은 9·28수복 이후 전세가 유리해지고 이승만 정부의 학살금지령이 떨어진 이후 중단되었다. 당시 동아대 교수로 예비검속돼 수감된 김병희는 어느 날 간수가 죄수들 앞에서 환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이제는 살았습니다. 오늘 저녁부터는 호명이 없습니다. 죽이는 일도 없습니다.”

보도연맹원·예비검속자 학살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이어진 재소자 학살이 끝나자 이번에는 울산, 부산, 김해, 양산 등지에서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들이 형무소로 들어와 감방을 다시 채우기 시작했다. 부산에서 CIC와 헌병, 경찰들이 대대적으로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들을 소집·연행해 부산형무소에 수감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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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철도경찰 김○○ 증언

“내가 전쟁 시 경찰을 할 때, 윤○관과 김○만(철도공작청 노동조합 간부)이 보도연맹가입에 가입했는데, 정복 입은 헌병과 사복 입은 경찰이 잡으러 왔습니다. 군경합동한테 잡혀가면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특히 부산철도청과 조선방직에 근무하던 보도연맹원들을 부산형무소로 출근을 시켜 형무소에 수감하였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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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형무소 형무관 김○○ 증언

“당시 부산철도청, 조선방직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보도연맹, 빨갱이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그 사람들 전부를 도시락을 들고 형무소로 출근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출근한 사람들은 옷을 벗기고 감방에 수감을 했습니다.”



감방은 다시 “생지옥”이 되었다. 당시 보도연맹원으로 수감된 이만석은 그때 경험을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수감될 때 형무소에는 4~5인용 감방에 40~50명을 한꺼번에 집어넣어 층층이 쌓여서 잠을 잘 정도로 참혹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군인들에게서 밖으로 불려나간 사람들이 전원 돌아오지 않아 나중엔 감방이 처음처럼 비좁지 않았다.”(국민일보 2002. 4. 10. “부산형무소 의혹 사건”)

“또 온다, 차가 또 오네”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들은 CIC와 경찰에 의해 A, B, C, D 급으로 분류되었다. 밤 12가 되면 이들이 이름을 호명하는 소리가 형무소에 울렸다. 자기 이름을 불린 사람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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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형무소 예비검속 생존자 김○희(당시 동아대 교수) 증언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밤 12시가 되면 여러 사람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자기 이름이 불리면 밖으로 끌려 나갑니다. 자기 이름이 불린 사람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들이 CIC와 헌병대에 넘겨져 사하구 구평동 동매산 8부 능선, 해운대구 장산골짜기, 부산 오륙도 인근 해상에서 총살 또는 수장된 것으로 판단했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 부산·경남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 사건)

조사결과 사하구 구평동 동매산 8부 능선 3군데에서 부산형무소 수감자 160여 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당시 사하구 구평동 주민 이○관(현 사망)이 그때 상황을 상세하게 증언했다.
“미군 GMC 트럭으로 40여 명을 싣고 오더니 차는 구평동과 감천동 경계지점에 세워놓고 산을 넘어왔다. 학살현장을 지휘한 군인은 누런색 군복과 모자를 쓰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군인들은 10여 명가량 되었다. 그들은 총살에 앞서 미리 파놓은 구덩이 위에다 가로로 나무를 두세 개씩 걸쳤다. 그러곤 구덩이 위쪽에 포박된 사람들을 4열종대로 앉힌 뒤 앞에서부터 두 사람씩 차례로 나무 위에 걸터앉혔다. 현장 지휘자로 보이는 군인이 호각을 불면 M1이나 카빈소총을 들고 구덩이 옆에 서 있던 군인들이 그들의 등 뒤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군인 여럿이 총을 쏘았기 때문에 시신에는 여러 발의 총탄이 박혔다. 총을 맞은 사람들은 총탄의 충격에 앞으로 고꾸라져 구덩이 속으로 떨어졌고, 같은 방법으로 끌려온 사람 모두가 처형되었다. 이 암매장 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도 40여 명 가량이 묻혀 있다. 그 지점에서 사하구 신평공단이 보이는 방향으로 경사지를 50~60m 가면 큰 구덩이가 나오는데 이곳에 60여 명이 묻혀 있다.”
동매산 발굴에서 출토된 유물. @김기진

동매산 발굴에서 출토된 유물.
@김기진

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 조사결과 부산 사하구 구평동 동매산 8부 능선 3군데에서 부산형무소 수감자 160여 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김기진 제공

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 조사결과 부산 사하구 구평동 동매산 8부 능선 3군데에서 부산형무소 수감자 160여 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김기진 제공

사하구 구평동 동매산 8부 능선(왼쪽), 해운대구 장산골짜기(현 대우2차아파트)(오른쪽).

사하구 구평동 동매산 8부 능선(왼쪽), 해운대구 장산골짜기(현 대우2차아파트)(오른쪽).

진실규명 신청인 정○용은 형 정○○을 면회하러 갔다가 부산 해운대 장산골짜기(현 해운대구 좌동 대우2차아파트) 학살 현장을 목격했다. 그는 형무소에서 출발해서 학살 장소에 이르기까지 상세한 증언을 들려주었다.

“내가 형무소로 면회를 가보니 형무소 안에 죄수들이 4∼5줄로 앉아 있었습니다. 한 줄에 7∼8명정도 될까, 전부 다 포승줄로 묶여져 있었습니다. 앞에 GMC가 2∼3개가 세워져 있었고, 헌병들이 카빈총을 메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출발을 시키는데, GMC에 (죄수들을) 한 20여 명씩 태웠습니다. 헌병 4명이 앞뒤자리에서 카빈총을 들이대고 재소자들을 전부 다 앉혔습니다. 그리고 재소자들의 얼굴에 갑바 같은 걸 씌우고 그길로 차가 출발했습니다. (중략)
형무소 트럭이 도착한 곳은 현재 해운대 대우아파트가 있는 곳입니다. 청사포 위에서 차는 보이지 않지만 ‘윙윙’하면서 GMC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차가 올라오는 소리가 중단되고 조금 있으니까 ‘파파파박’하면서 마구 사격하는 소리가 굉장히 났습니다. 다시 차가 ‘질질질’ 내려가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차가 한 대 올라오고 ‘파파파박’하며 콩 볶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결국 그 차가 내려가고 그날은 거기서 끝났습니다. 그날 차가 몇 대가 왔는지는 모릅니다. 그리고 그길로 내려가니 인근 마을의 할머니들이 ‘또 온다, 오늘 여러 대 오네, 차가 또 오네’라고 했습니다. 제가 ‘하루에 몇 대 옵니까?’하니까, ‘아이고, 하루 몇 대가 오는지 모릅니다. 천지로 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희생자들은 부산 오륙도 인근 해상에서 수장되기도 했다.
당시 철도경찰 김○○은 “한국전쟁이 나자 국가 안보가 위험하다며 전평, 남로당, 보도연맹원들을 전부 잡아다가 바다에 빠뜨려 수장시켰습니다. 이들은 모두 행방불명으로 알고 있을 겁니다”라고 학살 사실을 증언했다. 인근 주민들도 당시 오륙도 앞바다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증언을 했다. 이때 학살된 시신이 가슴과 양손이 묶인 채로 대마도에서 인양되기도 했다.

고문, 가혹행위, 굶주림, 동사…

형무소를 가득 채웠던 재소자,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자들이 끌려나가고 살아남은 재소자들은 마산·진주형무소 등으로 대거 이감되었다. 그렇게 10월 말이 되자 재소자 수가 겨우 전쟁 이전과 비슷한 정도로 떨어졌다. 그러나 9·28수복 이후 경남지역에 부역자 처벌과 토벌이 이루어지면서 감방은 다시 채워졌다.

1·4후퇴 이후 서울과 중부지역 부역혐의자들이 대거 이송되면서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이 과정에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많은 재소자들이 사망했다. 당시 부산형무소 의무과에서 근무했던 박○○은 “이들은 초량역에서 내렸는데, 언젠가 한 번은 기차가 왔을 때 기차 안에서 죽은 사람이 350명 정도 되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인천에서 출발해 1950년 1월 2일 부산항에 도착한 LST(전차상륙함) S. S. 사우스윈드(Southwind)호에는 재소자·피난민·경찰 4,207명이 타고 있었다. 여기에 부역혐의자 605명이 포함돼 있었다. 인천에서 떠나기 전에 10명, 부산으로 오는 도중에 13명이 죽었다. 그리고 배에서 내리는 동안 4명이 사망했다. 남은 사람 중에 118명도 들것에 실려 나갔다. 배 위에 쌀이 충분히 있었지만 좌익 재소자들에게는 물과 음식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형무소로 들어오는 부역혐의자는 대개 연행돼 조사받는 과정에서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했다. 다치고 쇠약해진 몸으로 형무소의 열악한 상태를 견디지 못해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재소자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그냥 방치되어 있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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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김○○ 진술, 2007. 12. 6. 부산형무소 형무관으로 근무

“너무 굶어 재소자 한 명이 죽었는데, 그 옆 재소자가 죽은 것을 신고하지 않고 자신이 며칠 동안 죽은 재소자의 밥을 몰래 타먹은 일도 있었다.”

이들은 수용 공간이 없어 형무소 마당, 심지어 형무소 밖에 수용되기도 했다. 이는 집단 총살 외의 또 다른 형태의 집단 학살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부산형무소 희생자 수를 다음과 같이 판단했다. “부산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에서는 8월 3일 헌병대와 CIC에 인계된 109명은 희생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와 함께 7월 26~30일 ‘타 형무소로 이송’된 징역 3년 이상의 재소자 468명 그리고 9월 25일 ‘타 형무소로 이송’된 943명 등 총 1,411명도 희생됐을 개연성이 높다. 또한 부산형무소에 구금됐던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 4,253명 중에 희생이 확인된 사람은 92명이지만, 실제로는 대다수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재소자 고〇원이 부산형무소로 이감 온 직후 본 광경을 ‘도살장’이라고 한 것은 무서울 정도로 정확한 표현이었다.

1950년 7~8월 부산형무소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코앞에 닥친 죽음을 모른 채, 굶주리고 고문당하면서, 무덥고 비좁은 공간을 견디느라 지쳐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사람으로서의 존엄을 빼앗긴, ‘빨갱이’라는 하나의 비(非)인간이었다.
1950년 9월 1일 부산형무소 재소자들이 학살 현장으로 끌려가기 직전 트럭에 실려 있는 모습.

1950년 9월 1일 부산형무소 재소자들이 학살 현장으로 끌려가기 직전 트럭에 실려 있는 모습.

사건명 부산·경남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부산·경남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1기)
관련사건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부산·경남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 사건(Ⅱ)〉(1기)
지역 부산
사건 발생일 1950년 7월~9월
진실규명 신청인 김〇길 외 158명
진실규명 결정일 2009년 2월 2일
진실규명 인원 유〇호 등 149명(희생자: 신청사건 중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부산형무소 36명, 마산형무소 63명, 진주형무소 64명 등 총 163명. 신청사건 외에 국가 공식 기록과 참고인 조사를 통해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부산형무소 112명, 마산형무소 296명, 진주형무소 6명 등 총 414명)
결정사안 1. 부산형무소에 수감된 유○호 외 147명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예비검속자들이 1950년 7∼9월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 부산지구 CIC, 부산지구헌병대, 부산지역(부산·북부산·동래·수상) 경찰, 부산형무소 형무관에 의해 부산 사하구 구평동 동매산과 해운대구 장산골짜기에서 집단 총살당하거나 부산 오륙도 인근 해상에서 수장당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2. 마산형무소에 수감된 배○기 외 358명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이 1950년 7∼9월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 마산지구 CIC, 마산지구헌병대, 마산경찰서 경찰, 마산형무소 형무관에 의해 총살당하거나 마산 구산면 앞바다에서 수장당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3. 진주형무소에 수감된 김○홍 외 69명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이 1950년 7월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 진주지구 CIC, 진주지구헌병대, 진주경찰서 경찰, 진주형무소 형무관에 의해 진주 명석면 우수리 갓골과 콩밭골, 관지리 화령골짜기와 닭족골, 명석면 용산리 용산치,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 마산 진전면 여양리 산태골에서 집단 총살당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부산지구 헌병대[대장 이○○ 소령, 200여 명]
부산지구 CIC[대장 백○○ 소령(1950. 2~1950. 7. 30.), 김○룡 중령(1950. 8. 1.~1950. 9. 20)]
참고자료 사진: 서울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