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 사건 트럭에 실려 사라진 사람들

현재의 대구지역 모습.

현재의 대구지역 모습.

해방이 되어도 형무소는 초만원

해방 직후 남한의 형무소 수감자는 모두 2,600여 명이었다. 그러던 것이 1949년 8월 기준으로 총 3만 5,119명으로 늘어났다. 만 4년 동안 무려 13배 이상 증가한 수치였다. 1946년 대구10월 사건, 1948년 제주4·3 사건과 여순 사건 등을 거치면서 수감 인원이 폭증했기 때문이었다. 좌우 대립의 양상이 폭력적인 경향을 보이는 만큼 전국의 형무소는 적정 수용 인원을 넘어 물리적인 한계치에 달했다.

당시 형무소 상황을 보도한 기사(서울신문, 1949. 8. 7. 조사보고서 79쪽)는 “저녁에 잘 때가 되면 서로 머리를 반대편에 놓고 다리는 서로 사이에 넣고 자는데 누운 사람의 어깨가 서로 깔리고 덮이고 하여 아침에 일어나면 몸 전체가 진통한다고 하여 더 비좁은 곳은 교대로 잔다고 했다”고 보도했다.

자연히 재소자들의 수감 조건이 열악했다. 특히 심각한 곳은 대구형무소였는데 1,500여 명 정원에 수용인원은 3,068명으로 강당, 창고, 작업장 할 것 없이 모두 감방으로 사용했다.
“…제 수감번호가 3797번이었습니다. 제 수감번호를 보더라도 재소자들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원래 저는 소년수 방에 들어가야 했지만, 만원이라 대인들과 2가사라는 감방에 함께 있었습니다. 형무소 안에는 기결수 방과 미결수 방이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감방에 가지 못하고 강당건물을 치웠던 2가사라는 곳에 있었습니다.” (신○균, 당시 18세, 대구형무소 생존자)

1950년 6월 대구형무소 전체 재소자 3,889명 중 69%에 이르는 2,684명이 좌익사범이었다. 특히 대구10월 사건, 제주4·3 사건, 여순 사건 당시 수감된 재소자들이 많았고 이들은 대부분 형량이 높은 장기수들이었다.
대구형무소(1954년)_원표시. @국토정보맵

대구형무소(1954년)_원표시.
@국토정보맵

“전쟁이 터졌다, 좌익수들을 처리하라”

1950년 7월 7일과 9일 대구형무소 재소자들에 대한 1차 처형이 시작되었다. 형무소에 파견됐던 헌병대와 CIC는 형량이 높은 좌익사범부터 처형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살해된 이들은 제주4·3 사건과 여순 사건으로 수감된 15년형 이상의 장기수 또는 무기수였다.

당시 대구형무소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장기 8년, 단기 3년을 선고받고 수감된 시○천(당시 21세)은 감옥 안에 있으면서 전쟁이 났는지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조용한 감방에 간수들이 사람들을 호명하는 소리가 기분 나쁘게 들려왔다. 처음 불려 나간 사람은 사형수였다. 곧이어 같은 감방에 있던 무기수 몇몇도 불려 나갔다. 시○천은 그때는 그들이 이감 가는 줄로만 알았다.

이곳에 함께 수감돼 있던 허○도 그렇게 끌려 나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밤에 헌병이 명단을 가져와 호명하고 재소자들이 자기 짐을 싸기 시작하면 헌병들이 “필요 없다, 이 새끼”하며 구타를 가했다. 그때 허○은 그들이 이감 가는 게 아니라 죽으러 간다는 걸 알아챘다. 사형수가 먼저 나갔고 이어서 무기수, 10년 이상의 장기수들이 불려 나갔다. 그때 허○은 자기 이름도 호명돼 형무소 마당으로 불려 나갔다.

마당에서는 먼저 나온 사람들이 마구 구타당하고 묶여서 트럭에 실리고 있었다. 트럭에 실린 사람들 위를 가마니로 덮은 뒤 헌병 3명이 걸터앉았다. 꼼짝없이 죽는구나 싶어서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헌병이 잘못 불려 나온 것이라며 다시 감방으로 돌려보내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어느 날 간수들이 재소자들에게 전부 엎드리라고 지시했다. 제주4·3 사건으로 10년형을 받은 양○석은 팔을 벌리고 얼굴을 바닥에 댄 자세로 엎드렸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문에 구멍이 있었지만 고개를 돌리면 간수들이 때리기 때문에 꼼짝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 있으니 간수들이 무기징역 받은 사람들을 불러냈다. 그렇게 며칠 후에는 15년, 10년형을 받은 사람들이 불려나갔다. ‘무슨 일일까’ 의심이 들어 방에 있는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니 검은 천을 씌운 차에 그들이 타고 있었다. 형무관들은 그렇게 불러낸 사람들을 헌병들에게 넘겨줄 때 그들이 모두 처형될 것을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 2차 처형

1950년 7월 말이 되자 북한 주력부대가 김천과 안동을 거쳐 대구까지 위협했다. 대구형무소는 1차 처형 후 남은 재소자들을 분류해 7월 27일~31일에 군 헌병대에게 인계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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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당시 34세. 대구형무소 계호과 근무

“개전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형무소에 헌병대가 주둔했다. 헌병대는 형무소 안에 사무실을 두고 15~20여 명이 주둔했다. 헌병대장은 대위급이었으나, 늘 이등중사가 지휘를 했다. 헌병대가 주둔하면서 일반 잡범들은 풀려났고, 잡혀 온 보도연맹원들과 좌익수가 넘쳐나자 헌병대가 끌어내어 죽이기 시작했다. 본인도 직접 죄수들과 보도연맹원을 두 명씩 등을 묶어 트럭에 실었다. 형무관들이 이렇게 묶어주면 헌병들이 트럭에 실어 천막 같은 것을 덮은 뒤 끌고 나갔다. 모두 경산 코발트와 가창 골짜기에서 죽었다고 들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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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당시 대구형무소 형무관

“6·25전쟁이 터지고 대구형무소에 있던 일반 잡범들을 일부 석방했습니다. 형무소 안에는 좌익수와 형이 많은 일반 죄수들만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형무소로 이감 간다며 헌병대가 형이 많은 죄수들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죄수들을 헌병대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런 작업들은 주로 밤에 이루어졌습니다. 수복 이후 이 시기에 끌려간 재소자의 가족들이 면회를 와 찾으면 전부 진주형무소로 갔다고 말은 했지만, 직원들은 이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헌병대에 넘겨진 1,483여 명의 명단에는 ‘진주이송’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러나 ‘진주이송’ 도장보다 먼저 ‘군 헌병대 인도’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재소자들을 넘겨 줄 때는 군 헌병대 인도라고 기록한 뒤 집단 처형한 후에 진주형무소로 이감했다는 도장을 덧찍은 것이다. 형무관들이 두 명씩 등을 대고 묶어 트럭에 실으면 헌병들이 천막 따위로 트럭을 덮고 형무소를 빠져나갔다. 헌병에 의해 끌려 나간 재소자들은 형기의 구분 없이 무차별적으로 희생되었다.
“헌병들이 죄수들을 모두 ‘진주 이송’한다며 끌고 나갔습니다. 특별한 기준이 없습니다. 좌익수라면 다 끌려 나갔습니다. 서무과 명적계에서 죄수들의 기록을 관리했는데 죄수 기록이 산더미로 쌓여 있었고 직원 한 명이 계속 지키고 있었습니다. 헌병대가 죄수들을 데려나갈 때, ‘몇 월, 며칠, 몇 시, 국가보안법 몇백 명’이 적힌 명령서를 들고 옵니다. 그렇지만 죄수들이 너무 많아 분류하는 작업을 하지 못합니다. 명적계 직원들이 닥치는 대로 사람 수를 맞춰놓으면, 헌병대가 죄수들을 인계받아 끌고 나갔습니다.” (원○○, 당시 25세. 대구형무소 서무과 경리계 근무)
1950년 대구형무소 '재소자인명부'. ‘군 헌병대 인도’ 기록 위에 ‘진주이송’이라는 도장이 찍혔다. 사건 조사보고서 91쪽 수록.

1950년 대구형무소 '재소자인명부'. ‘군 헌병대 인도’ 기록 위에 ‘진주이송’이라는 도장이 찍혔다.
사건 조사보고서 91쪽 수록.

재소자 학살이 시작된 직후인 7월 중순부터 대구시내·청도·경산·영천 등지의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들이 대구지구 헌병대와 CIC, 대구지역 경찰들에 의해 대거 연행돼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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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이○○ 진술, 2008. 12. 11

“대구 공회당에 보도연맹원들이 모이기도 했으며 전쟁 전 사찰계에서는 보도연맹원들을 A, B 등급으로 분류하여 요시찰 대상으로 관리하였다. 이후 전쟁이 나고 정부는 이들이 인민군에 동조할 위험이 있다고 간주하여 사찰계와 대구 주둔 헌병(16헌병대), CIC 등을 통해 보도연맹원들을 검거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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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 당시 23세, 남대구경찰서 현풍지서 의용경찰

“전쟁 발발 직후 내무부에서 치안국, 경찰국, 남대구경찰서를 거쳐 지서로 보도연맹원들을 연행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으며 지서에서는 요시찰인 명부를 통해 관할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을 연행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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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당시 23세, 대구형무소 생존자

“영덕사람 하나가 논에서 모를 심다가 보도연맹이라고 잡혀왔다. 그는 산사람들이 배가 고프다며 집으로 왔기에 밥을 해줬는데 그것 때문에 보도연맹에 가입했고, 대구형무소로 잡혀왔다가 이틀 만에 끌려 나가서 신동재에서 죽었다.”

형무소로 들어오는 수가 너무 많아서 학살 직전 3,700명이던 재소자가 8,000명까지 늘어났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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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당시 25세, 대구형무소 서무과 경리계 근무

“대구형무소 안에 보도연맹원이 잡혀 들어왔으나 그 수가 얼마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보통 3,000~4,000여 명이던 수용자가 다른 지역 죄수들과 대구시내 보도연맹원까지 합하여 8,000여 명에 이르렀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보도연맹원들은 대부분 죽었다.”

형무관들은 이들 역시 같은 방식으로 헌병대에 인계하고, 헌병대는 이들을 트럭에 싣고 나갔다.
“헌병들이 형무관들에게 보도연맹원들을 묶으라고 시켰습니다. 그러면 형무관들은 보도연맹원들을 두 명씩 전깃줄로 묶어 트럭에 싣습니다. 당시 군용 트럭에 보도연맹원들이 한가득 실리고 나면, 갑바 같은 것을 씌우고 헌병들이 트럭에 4명~6명씩 탄 채로 형무소를 나갑니다. 이렇게 대구형무소에 들어온 보도연맹원 대부분은 모두 처형되었습니다. 제 학교 친구와 동네친구도 대구형무소에 끌려왔으나 제가 구해줄 수 없었습니다. 끌려 나간 보도연맹원들은 모두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죽었습니다.” (장○○, 당시 23세, 대구형무소 계호과 근무)

골짜기로, 광산 수직굴로, 고갯마루로…

어두운 밤, 트럭에 실려 나간 사람들은 모두 학살당했다. 대체 어디서 그 많은 사람들을 살해했을까?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한 장소는 가창 골짜기와 경산 코발트광산이었다.

경산시 대한청년단원 문○○은 7월 20일이 지났을 무렵 산에서 소에게 꼴을 먹이던 중 덮개를 씌우고 군인들이 올라탄 트럭들이 경산 코발트광산 방향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군인들은 수직굴 밑에 삼베옷이나 모시옷을 입은 사람들을 내리게 한 후 10여 명씩 수직굴로 데려가 총살시켰다. 코발트광산에는 수직굴이 있었는데 굴 입구에 사람을 꿇어 앉히고 총을 쏘면 아래로 떨어져 시신이 차곡차곡 쌓였다. 당시 민둥산이라 학살 광경을 다 볼 수 있었다. 가창 골짜기에서는 일꾼들을 동원해 미리 긴 굴을 파 놓은 다음 보도연맹원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총살한 후 흙으로 덮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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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대구경찰서 보안계 근무

“어느 날 밤 대구경찰서로 잡혀온 보도연맹원들을 트럭에 태우고 가창골 현장으로 데려갔는데, 가창골 현장에는 이미 큰 구덩이를 파놓았으며 그 구덩이 속에 보도연맹원들을 몰아넣고 처형하였다. 현장에는 대구경찰서뿐만 아니라 남대구경찰서원도 함께 갔으며 경찰 이외에 사복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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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당시 25세, 대구경찰서 사찰계 근무

“가창골에서 처형이 있은 후 특경대장(당시 경감)의 지시로 특경대원 80명이 3대의 트럭에 분승하여 현장을 확인하러 간 적이 있다. 사건현장에는 처형될 사람들이 직접 팠던 3개의 구덩이가 있었으며 각 구덩이마다 약 100명 정도 그러니까 총 300명이 묻혀 있었다.”

경북 경산코발트광산 수직굴 입구. @강변구

경북 경산코발트광산 수직굴 입구. @강변구

칠곡군 신동재에서도 많은 이들이 학살되었다. 3사단 22연대 소속 헌병으로 대구형무소에 파견됐던 박○○의 증언에 따르면 재소자 200~300명을 트럭 5~6대에 나눠 신동재로 실어갔다. 대구형무소에 파견된 22연대 직할 헌병들이 모두 나갔으며 신동재에서 직접 총살을 실행했다. 신동재 학살 때 주변을 순찰하던 미군이 총소리를 듣고 현장에 와서 학살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당시 민병대 소속으로 현장에 동원되었던 임○○은 죽은 사람들은 “농민, 청년, 학생들이었으며 이들은 실제 국법을 어기고 잘못을 해서 죽은 사람들이 아니었다.”고 했다.(사건 조사보고서 104쪽)

대구시 달서구 본리동과 송현동에서도 대구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의 희생되었다. 18살 이○복은 학살현장을 목격했다. 매번 학살 전날 노무자들이 구덩이를 40~50개씩 파 놓으면, 다음날 헌병들이 사이렌을 울리며 들이닥치고 뒤이어 수감자들을 가득 태운 트럭이 따라왔다. 학살 현장으로 죄수들이 2열 종대로 올라가고 나면 이윽고 총소리가 한참 이어졌다. 총성이 멈춘 후 이○복은 친구들과 현장으로 가보았다. 구덩이에 총 맞은 시신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흙이 제대로 덮이지 않아 팔다리가 비죽 솟아 있기도 했다. 얼마 후 현장은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 후 그곳에는 풀이 유난히도 무성하게 자라서 아무도 얼씬하지 않는 곳이 되었다.
1960년 대구시 본리동 발굴현장 및 발굴유해. 사건 조사보고서 105쪽 수록.

1960년 대구시 본리동 발굴현장 및 발굴유해.
사건 조사보고서 105쪽 수록.

남한의 거의 모든 형무소에서 일어난 학살

학살은 대구형무소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경북 김천형무소와 안동형무소에서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재소자들과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자들이 학살되었다. 한국전쟁 시기에 3·8선 이남에 형무소가 20곳이 있었는데 그중 16곳에서 군경에 의한 학살이 일어났다. 한강 이남으로 보면 모든 형무소에서 학살이 자행되었다.(임재근 《한국전쟁 시기 대전지역 민간인 학살 연구》, 2016)
이렇듯 해방이 돼도 형무소는 더욱 ‘죄수’들로 가득 찼고, 전쟁이 나자 이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남한 정부에게 그들은 적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로 ‘처리’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그들은 보호해야 할 ‘국민’이 아니었다.
사건명 대구ㆍ경북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대구·경북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 사건〉(1기)
지역 대구, 김천, 안동
사건 발생일 1950년 7월경
진실규명 신청인 김○학 외 110명
진실규명 결정일 2010년 6월 29일
진실규명 인원 총 111명
- 대구형무소 82명(희생자: 1,400여 명 추정, 신원 확인 유○창 외 85명
- 김천형무소 22명(희생자: 최대 650명 이상 추정, 신원 확인된 희생자 및 희생추정자 박○순 외 47명)
- 안동형무소 7명(희생자: 최소 600명 이상, 신원 확인된 희생자 및 희생추정자 김○조 외 9명)
결정사안 대구ㆍ경북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사건 조사결과 대구형무소, 김천형무소, 안동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 예비검속자들이 관할 CIC, 헌병대, 국군·경찰 등에 의해 대구, 경북의 여러 지역에서 집단희생된 사실을 확인하고 진실규명 결정한 사례
가해주체 각 지역 CIC와 헌병대, 및 각 지역 경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