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10월사건 관련 민간인 희생 사건 1946년 10월, 대구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 일대에 건립된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 일대에 건립된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사건은 경찰의 총구에서 시작되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0월 1일이었다. 그날 아침 대구 시내에서 노동자들이 무더기로 깃발을 앞세우고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했다. 일부는 트럭에 타고 이동했다.
“1946년 중앙통에서 식당종업원으로 일하며 대구10월사건 현장을 목격했다. 시위자들은 트럭을 타고 가기도 하고 무더기로 깃발을 앞세우고 노래 부르며 가기도 했다. 그 뒤를 따라가 보니 대구역 옆 공회당에 시위자들이 많이 집결하여 경찰과 대치하면서 고함지르고 구호를 외쳤다. 경찰은 검은 제복을 입고 있었고 숫자는 알 수 없었다.” (김○, 1931년생 당시 대구 중구 주민, 대구10월사건 목격자)

시민들이 밖으로 나와 행렬을 구경했다. 어린 아이들은 무슨 신나는 일인 양 시위대의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시위 행렬은 대구역과 길 건너 대구공회당(현 대구콘서트하우스) 근처 ‘시투’(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의 약칭) 사무실 주위에 도착했다. 그렇게 모인 노동자의 수는 수천 명에 달했다. 그때부터 100여 명의 경찰과 대치가 시작되었다.

시위대의 규모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불어났다. 경찰도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 경찰당국이 30여 명의 경찰을 보내 시투 간부들과 군중 해산 문제를 협상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시위대는 1만 5,000명으로 불어났고, 경찰이 시위대에 포위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권영석 5관구 경찰청장이 무장경찰 60명을 대동하고 현장에 나타났다. 경찰청장이 해산 명령을 발동했지만 군중들은 해산을 거부했다. 오후 6시, 대구역 앞에서 경찰과 철도노조원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대구경찰서 수사주임과 경찰 3명이 출동했다. 그런데 이들이 군중들에게 뭇매를 맞고 중상을 입는 사태가 일어났다. 오후 7시,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경찰 지휘관이 검지를 하늘을 향해 치켜든 후 사격 방향을 가리키는 순간 경찰이 발포를 시작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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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1922년생

“나는 1946년 10월 1일 제5관구경찰청 앞에서 보초를 서다가 출동명령을 받고 대구역 앞으로 진압을 나갔다. 그날 낮에 출동해서 현장에서 철야한 뒤 이틀 정도 있다가 경찰청으로 돌아왔다. 현장에서 총을 발사한 적 있으며, 총을 발사할 때는 경찰 지휘관이 검지를 하늘을 향해 치켜 들면서 손가락으로 지시하면 졸병들이 명령에 따라 한 발씩 발사했다.”


이때 두 사람이 총에 맞아 죽었다. 그중 한 명은 대구역 철도노조원 김용태였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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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 1929년생
당시 대구철도노조원

“1946년 10월 1일 대구공회당 앞 시위 현장에서 내가 서 있던 인근에서 노조원 김용태가 경찰의 총격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고 2시간 뒤 시위 현장에서 철도병원 의사 서영덕에게서 대구의전 학생들이 김용태의 시신을 들것에 싣고 시위하려 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시위 발포 현장 사진.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에서 공개한 사진으로 거리 한쪽에 장총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엄폐물 뒤에 쪼그려 앉아있고 반대편으로 피신한 시위군중 쪽에는 여러 명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시위 발포 현장 사진.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에서 공개한 사진으로 거리 한쪽에 장총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엄폐물 뒤에 쪼그려 앉아있고 반대편으로 피신한 시위군중 쪽에는 여러 명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다.

대구의전 학생들의 ‘시신시위’와 대구경찰서 습격

이튿날 오전 8시. 대구역 앞에는 여전히 수천 명의 군중과 무장경찰이 대치하고 있었다. 그때 군중을 헤치며 최무학을 비롯한 대구의전 학생들이 들것에 시신 한 구를 메고 어제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사람이라고 외치면서 대구경찰서로 향했다. 행렬의 뒤에는 중학생들이 따랐다. 이들은 대구경찰서 2층 서장실로 올라갔다. 서장실에는 한국인 경찰서장과 미국인 경찰서장이 있었다. 학생들이 들이닥치자 서장이 권총을 뽑아 들었다. 그래도 학생들은 굴하지 않았다.
학생대표단은 미군정을 상대로 “구금자 석방, 경찰의 무장해제, 대중 발포와 폭력 진압 중지”를 요구했다.
“대구10월사건은 서민들(특히 귀환동포들)과 노동자, 학생들이 합세하여 일어난 것이다. 당시 마루보시 앞에서 철도노조원과 경찰이 싸우면서 총격이 일어나 노동자 2명이 죽었다. 이에 분노한 학생들이 그 시체를 당가에 매고 대구경찰서로 갔다. 대구의전 최무학과 남택상이 주도하고 중학생들이 뒤따랐다. 대구경찰서 2층에는 한국인 경찰서장과 미군 서장이 있었는데 학생들이 들어가자 서장이 권총을 뽑아들고 발포하겠다고 했고 학생들이 굴하지 않자 경찰이 항복했다.” (성○연, 1918년생. 전 동아일보 대구지사장. 대구10월사건 목격자)

오전 10시경 대구경찰서 앞에는 학생과 교수, 노동자, 시민 등 1만여 명이 모였다. 이에 권영석 경찰청장이 시위 군중을 해산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미군정 경찰부장 프레이저는 이성옥 대구경찰서장에게 무력으로 시위 군중을 해산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성옥 서장은 명령을 거부했다. 부하 경찰들에게 총기를 모두 무기고에 넣으라고 지시한 뒤, 경찰 병력들을 본정소학교(지금의 종로초등학교)로 철수시켰다. 곧이어 군중들이 대구경찰서를 점거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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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배, 1935년생
대구10월사건 목격자

“10‧1사건 날 때 덕산국민학교 학생으로 군중들을 따라다니며 구경했다. 사람들이 대구경찰서를 습격해서 2층에서 순사 모자 핑핑 날리고 만세를 불렀다. 순사는 자전거 타고 내빼다가 미처 못 내뺀 것은 소방 곡괭이로 맞았다. 사람들이 순사 집을 습격하여 먹을 것을 나눠먹었다.”



오후에 미군의 명령을 받은 경찰 150명(또는 특경대 200여 명)이 군중이 많이 모여 있는 대구역 인근 ‘시투’ 본부에 출동해 발포했다. 이때 민간인 17명(또는 18명)과 경찰 4명이 사망했다. 대구 시내 도처에서 군중들이 들고일어나 지서와 파출소를 점거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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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1927년생 대구10월사건 목격자
1950년 8월 이후 대구경찰서 경찰 근무

“1946년 대구 북성로 인근에서 대구10월사건을 목격했다. 대구10월사건은 이틀 동안 계속되었는데 많은 시위자들이 완장을 팔에 두르고 큰 기를 들고 도요다 트럭 훔친 거 타고 시내를 다니며 쌀을 차에 싣고 다니는 것도 목격했다. 당시 그들이 파출소들을 부수고 파출소 순경들은 본서로 왔다. 대구경찰서 30미터 인근 도로에서 경찰이 죽은 시신을 가마니로 덮어놓은 것을 본 적 있다. 그리고 이틀 후 미군 장갑차가 대구경찰서 앞과 시내 요소요소에 배치되었다. 미군이 들어오니 각 서에 있던 경찰이 파출소로 복귀했다.”


일부 군중은 경찰을 살해하고 경찰·관리·부자들의 집을 공격했고, 관리와 부자들의 집에서 식량과 재산을 가져와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오후 3시, 마침내 미군이 장갑차 4대와 기관총 부대를 현장에 투입했다. 4시 30분, 충청도에서 온 경찰 지원 병력들도 대구로 들어왔다. 5시에 미군이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러자 파출소를 떠났던 경찰들이 다시 복귀했다. 7시가 되자 대구시 전역에 통행금지 조치가 떨어졌다. 경찰들은 큰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조건 체포하기 시작했다.
구 대구의학전문학교. 현재 경북대 의과대학 본관 건물이다. @문화재청

구 대구의학전문학교. 현재 경북대 의과대학 본관 건물이다. @문화재청

경북을 거쳐 전국으로 퍼진 봉기

1946년의 대구10월사건은 이틀간의 소요 사태로 끝나지 않았다. 미군에 의해 진압당한 시위대는 경북지역 곳곳으로 흩어졌다. 1~2일에 이미 달성군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2~3일 칠곡·고령, 3일 성주·영일 등 19개 군으로 파급되었다. 지역별로 주민들이 경찰서를 점령하거나 면 내 곳곳에서 주민봉기가 일어났다.

경북에서 일어난 봉기는 충남, 충북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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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1926년생, 당시 상주경찰서 근무

“대구10월사건 당시 상주에는 충북경찰 한 부대가 내려와서 빨갱이를 잡았다. 현지 경찰인 우리는 피신하느라 작전을 하지 않았다. 경찰서에 안 나오고 각자 가정에 있었다. 충북경찰과 서로 접촉은 없었다. 당시 상주에서 미군은 보지 못했다. 경찰 쪽 피해는 없었고 진압을 하면서 빨갱이들 몇이 잡아서 유치장에 넣었는데 형무소에 넘겨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 경기도에서 지원 온 경찰과 미군, 국방경비대(충남)에다가 김두한의 우익청년단원과 파업파괴단, 각 지방의 우익단체 등이 나서서 진압했다. 농민들이 대부분인 군중들이 죽창, 낫, 도끼, 일부 탈취무기를 지닌데 비해 미군과 경찰은 장갑차와 소총, 기관총을 동원했다.

그럼에도 봉기는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3·1제 소작 제도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추수봉기와 결합해 경남(10월 7∼14일)과 충남·충북(10월 17∼19일), 경기도와 황해도(10월 20∼22일), 강원도(10월 29일∼11월 첫 주), 전남(10월 29일∼11월 4일, 11월 7일 이후), 전북(12월 18일)으로 번져 12월 중순까지 전국 73개 시군으로 확산되었다.

“쌀을 주시오!”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미군정이 좌익세력을 탄압하자 이에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이 미군정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신전술’을 채택하면서 ‘9월총파업’이 일어났다. 대구에서는 9월 23일부터 대구에서 노동조합들이 파업에 들어가고 27일에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시투)를 결성한다. 미군정은 경찰, 우익청년단, 대한노총을 동원해 파업본부를 진압하고 노동자 1,200여 명을 검거했다. 9월 30일 시투 간판 철거 문제로 사태가 악화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10월 1일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2일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가 사망하면서 사태가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사태가 확산된 또 다른 원인은 극한의 상황에 몰린 당시 시민들의 처지였다. 해방이 되었어도 식량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미군은 ‘미곡수집령’을 발표해 쌀을 강제로 수집하여 제한 배급을 실시했다. 충군기에 보리, 밀 같은 하곡까지 거두어갔다. 해방 후 귀환 동포들이 늘어나자 식량 사정은 더욱 나빠졌다.

게다가 대구·경북 지역에 5월 들어 콜레라가 창궐하고 6월에 수해까지 겹쳤다. 방역을 위해 교통을 차단하자 대부분 기아 상태가 되었고 경북 주민들도 청송 등 북부 산간지역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미군정은 양곡 수집을 더욱 강압적으로 시행했는데 경북 지역에서 특히 심하게 이루어졌다.

1946년 7월 초 경북의 경찰들이 총동원돼 수집독려대를 조직해 각 지역에 파견했다. 영천에서는 군수가 나서서 미곡수집령을 위반할 경우 엄벌에 처하겠다고 위협했고, 청도 군수 김종환은 하곡수집 실적이 부실하다고 파면되었다.(정해구, 《10월인민항쟁연구》, 1988)

생명이 위태로울 만큼 굶주림에 시달린 시민들이 당국에 쌀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바로 기민(飢民) 시위, 즉 ‘굶주린 백성들’의 시위였다. 대구10월사건의 첫날인 10월 1일에 오전, 노동자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그때에도 부녀자와 어린이 등 시민 1,000여 명이 대구부청 앞에서 쌀을 달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대구 시민들의 기아시위 모습.

대구 시민들의 기아시위 모습.

1946년 10월 2일 대구시위 피살자 사진.

1946년 10월 2일 대구시위 피살자 사진.

관련자 색출과 토벌 작전으로 희생된 사람들

대구10월사건과 그에 이은 각지의 봉기에 관련된 사람들은 경찰 등에게 바로 살해되거나 검거돼 감옥으로 갔고, 혹은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유격대가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빨치산 토벌 작전이 계속됐고, 이 과정에서 관련 없는 지역 주민들이 살해되기도 했다.
1946년 10월 5일 오후 5시쯤이었다. 칠곡경찰서장 장례식이 동명묘지에서 치러졌다. 장례식에 참석한 경찰 20여 명은 묘지에서 내려오는 길에 칠곡군 동명면 금암동 마을로 총을 쏘며 들어왔다. 마을 입구에 살던 박○도(상업, 1917년생)는 병으로 방에 누워 있다가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보았다. 총을 든 경찰 20여 명이 자신의 집 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경찰서장의 죽음으로 흥분한 경찰이 우물물을 마시러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박○도가 놀라서 영문도 모르고 부엌 쪽으로 달아나자 경찰이 뒤쫓아왔다. 집 밖으로 나와 마을 동쪽 샛보 도랑에 숨은 박○도를
경찰 한 명이 찾아냈다. 경찰은 박○도를 향해 총 서너 발을 쏘아 사살했다.
증언에 따르면 사건 당일 장례식에 참석한 어느 경찰이 학교 후배에게 말하기를 “오늘 칠곡경찰서장 장사 지내러 간다. 혹시 난리가 날 수 있으니 총소리가 나거든 밖으로 나오지 마라”고 말했다고 한다.
박○도의 시신은 가족이 바로 수습했지만, 신원조사 기록에 남로당 가입자로 기록되었다. 그의 아들은 해당 내용이 허위로 기재돼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이에 참고인 최○무는 “박○도는 남로당 가입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순한 사람이었다. 경찰이 잘못해서 사람을 죽였는데 발을 뺐다. 내가 죽기 전에 한 사람의 영혼을 바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진술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사건 관련자들이나 그 가족들이 보도연맹원으로 예비검속돼 대구형무소 등에 수감되었다. 이들도 역시 불법적으로 살해되었다.
“아버지 유〇동은 1946년에 의무노조 활동을 하면서 대구10월사건에 참여했다. 아버지는 1950년 8월 22일 경찰에게 연행된 뒤 1950년 8월 말에 대구형무소에서 끌려나가 살해되었다. 나는 철도노조 활동을 하다가 1949년 5월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는데 1950년 6.25 이후 아버지가 대구형무소로 잡혀왔다. 이후 8월 말경 밤에 간수가 아버지 이름을 호명하여 아버지가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당시 대구형무소에서는 밤 12시 넘어 각 감방에서 호명한 재소자들을 사무실 앞 광장에 줄을 세워놓았다가 트럭에 싣고 나갔다. 나는 두 번 정도 그렇게 싣고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나중에 출소한 뒤 가족들로부터 아버지가 8월 22일에 대구경찰서 경찰에게 강제연행되었다고 들었고, 달성 광산에서 총살되었다는 소문도 들었다.” (유〇화, 1929. 당시 철도노조원)
73년만에 시작된 대구 가창 용계리 유해발굴 현장.

73년만에 시작된 대구 가창 용계리 유해발굴 현장.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대구10월사건을 조사한 결과 사건의 가해주체가 경상북도 5관구경찰청 특경대, 대구경찰서부대, 남대구경찰서부대 경찰과 경북 각 경찰서 경찰, 충남·충북·경기도에서 지원 온 경찰, 서북청년단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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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이〇〇, 1928년생

“나는 1946년 3월 15일 월남 후 서울에서 서북청년단에 가입했다. 이후 대구로 가 대구역 근처 서북청년단 경상북도 본부에서 지냈다. 대구10월사건 때 내가 거기 있었다. 서북청년단원은 도당에 있었던 100명이 전부 (신분을 감추기 위해) 완장을 떼고 현장으로 나갔는데, 시위자가 수만 명이라 싸울 수가 없었다. 그때 대구경찰서는 시위자들에게 점령당해 경찰이 손들고 나왔다. 그리고 미군이 탱크를 몰고 오니까 시위자들이 길바닥에 누워서 탱크가 못 오게 막았다. 나는 대구 폭동 진압 끝나고 포항, 구룡포, 거제도로 토벌을 다니다가 1948년 11월에 경찰에 들어가 이후 경남에서 여순사건을 진압했다.”

, 지역청년단·특경대 등임을 확인하였다.
2023년 5월 대구 달성군 가창면 '10월 항쟁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앞에서 열린 '대구‧경북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 유해발굴 개토제'에서 참석자들이 삽으로 땅을 파는 개토 행사를 하고 있다.

2023년 5월 대구 달성군 가창면 '10월 항쟁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앞에서 열린 '대구‧경북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 유해발굴 개토제'에서 참석자들이 삽으로 땅을 파는 개토 행사를 하고 있다.

2023년 5월 대구 달성군 가창면 '10월항쟁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앞에서 열린 '대구‧경북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 유해발굴 개토제'에 앞서 열린 위령제 모습.

2023년 5월 대구 달성군 가창면 '10월항쟁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앞에서 열린 '대구‧경북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 유해발굴 개토제'에 앞서 열린 위령제 모습.

채영희 유족회장 등 유족들이 유해발굴 중 발견된 물품을 보고 있다.

채영희 유족회장 등 유족들이 유해발굴 중 발견된 물품을 보고 있다.

이 사건의 일차적 책임은 민간인을 법적 절차 없이 임의로 살해한 현지의 경찰에게 있다. 또 사건의 책임 소재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 미군정기에 발생한 사건으로, 당시에는 미군정이 남한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했기 때문에 경찰의 행위를 관리·감독해야 할 책임도 지니고 있었으므로 미군정도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2023년 10월 10월항쟁 유족회가 사건을 알리기 위해 마련한 '그해, 10월' 사진전 전경.

2023년 10월 10월항쟁 유족회가 사건을 알리기 위해 마련한 '그해, 10월' 사진전 전경.

2023년 10월 10월항쟁 유족회가 사건을 알리기 위해 마련한 '그해, 10월' 사진전.

2023년 10월 10월항쟁 유족회가 사건을 알리기 위해 마련한 '그해, 10월' 사진전.

사건명 대구 10월사건 관련 민간인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대구10월사건 관련 민간인 희생 사건-대구·칠곡·영천·경주-》(1기)
지역 대구, 칠곡, 영천, 경주 등
사건 발생일 1946년 10월
진실규명 신청인 김○상 등 6명
진실규명 결정일 2010년 3월 30일
진실규명 인원 김○억 등 6명(희생자: 조사과정에서 희생사실을 확인한 55명을 포함한 60명 추산) ※대구, 칠곡, 영천, 경주지역의 일부만 조사한 결과이므로 이 사건의 실제 희생자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
결정사안 1946년 10월 초부터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이전까지의 기간에 김제억 등 5명을 포함한 민간인 60명이 대구·경북의 각 지역에서 소위 ‘대구10월사건’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에게 적법절차 없이 희생된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경상북도 5관구경찰청 특경대, 대구경찰서 부대, 남대구경찰서 부대 경찰과 경북 각 경찰서 경찰, 충남·충북·경기도에서 지원 온 경찰, 서북청년단, 지역청년단·특경대 등
참고자료 김상숙 ≪10월 항쟁-1946년 10월 대구, 봉인된 시간 속으로≫, 돌베개, 2016
영상: KTV 국민방송
사진: 10월항쟁민간인희생자유족회,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