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지역 적대세력 사건 낙동강 서쪽 지리산 일대는
인민군 세상이었다

1948년 10월 20일 여순 사건이 진압되자 살아남은 반란군 1,000여 명이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사진은 지리산 천왕봉 @산청군

1948년 10월 20일 여순 사건이 진압되자 살아남은 반란군 1,000여 명이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산청군

인민군 점령지가 된 경남 서부지역

1948년 10월 20일 여순 사건이 진압되자 살아남은 반란군 1,000여 명이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이들은 지리산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덕유산, 백운산으로 분산돼 무장유격대(빨치산)로 활동했다.
이들 지역이 빨치산의 활동 무대가 되면서 깊은 산골에 깃들어 살던 마을들이 피해를 당했다. 빨치산 대원들은 경찰 활동이 멈추는 밤 시간에 마을로 내려와 식량과 옷을 걷어가고 주민들을 부역에 동원했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다음 날부터 거꾸로 ‘부역자’가 돼 경찰을 피해 다니거나 보복을 각오하고서라도 신고를 해야 했다.

남한 군경이 1949년 말까지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벌인 결과 빨치산 활동이 잠잠해졌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들이 남하하면서 빨치산들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50년 7월 27일 인민군은 경남 함양을 점령하고 이어 부산 점령을 위해 마산-함안에서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전선이 낙동강을 넘지 못하면서 8월 4일을 기점으로 국군과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선(Walker Line)이 형성되었다.

이때부터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퇴각하는 시점까지 약 두 달 동안 낙동강 서쪽, 즉 경남 서부지역 일대(고성, 거창, 남해, 마산, 의령, 사천, 산청, 진주, 하동, 함양, 합천)가 인민군 점령지가 되었다.
인민군은 점령 직후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치안 유지를 위해 동리마다 유격대(치안대)를 설치했다. 경찰 조직을 대신해 내무서와 분주소도 두었다. 인민군은 주민들을 부역에 동원하거나 의용군에 징집했고,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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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인 이○수 진술조서(2007. 11. 21.)와 참고인 김○○ 진술조서 (2009. 7. 30.)의 내용을 정리한 조사보고서 본문

한국전쟁 발발 후 고성군 회화면에 인민군 선발대가 들어오자, 이○수의 가족들은 인민군을 피해 이정수의 처가인 거류면으로 피신했다. 은월리는 130여 호 되는 마을로 이○수의 처가가 은월리에서 제일 잘 사는 집이었다. 인민군이 거류면에 들어오고 일주일 후, 인민군과 지방좌익이 이○수의 처가로 들이닥쳤다. 인민군을 보고 놀란 이정수는 의용군으로 징집되는 줄 알고 저녁을 먹다 말고 담을 넘어 옆집으로 도망갔다. 이정수가 갑자기 달아나자 인민군은 이○수가 수상하다고 생각하여 이○수를 쫓아가서 총을 쏘아 사살했다.

식량을 차출해 갔다.

곧이어 경찰, 군인, 공무원, 이장, 우익단체 활동자, 지역유지 등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인민위원장이나 당위원장이 숙청자 명단을 작성해 읍면동 자위대에 제출하면, 인민위원회 위원과 치안대원들이 명단에 포함된 사람들을 체포해 내무서나 분주소에 구금했다. 이들에 대한 처리는 공식적으로 인민재판을 통해 이루어졌다. 인민재판에 의한 처벌은 인민군 정규군이 아니라 대부분 산에서 내려온 빨치산이거나 지방좌익들이 담당했다고 한다.

경찰과 군인은 처형자 명단 첫머리에

김○환은 전쟁 전 경비대에 자원입대해 지리산 공비토벌 때 작전에 참여했다. 늑막염으로 병가를 받고 집에 와 있을 때 인민군이 함양읍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천면으로 몸을 피했다. 그런데 마천면은 당시 인민군이 이미 점령한 지역이었다.

마천면 지방좌익들이 마을 부자로 알려진 서○인, 방위대 소위 이○○, 군대 갔다 온 김○○를 잡으러 왔다가 김○환까지 마천분주소로 끌고 갔다. 당시 치안대장이 부자 서○인의 아들에게 이들이 인민재판을 받고 다음 날인 1950년 8월 7일 새벽 3시경 총살당했다고만 알려주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이야기는 이랬다. 인민재판을 받고 끌려가는 도중 방위대 소위 이○○과 군대 갔다 온 김○○이 도망가자 그 자리에서 김○환과 서○인을 사살하고 강가 모래 구덩이에 묻었다. 김○환의 시신은 그의 어머니가 인민군의 눈을 피해 밤에 몰래 가서 수습했다.
경남지역 인민군 점령실태(사건 조사보고서 101쪽).

경남지역 인민군 점령실태(사건 조사보고서 101쪽).

지역유지 일가족을 바다에 수장

조○실과 김○배 부부는 사천군 삼천포읍 실안동 일대의 유지였다. 이들의 둘째 아들 조○○이 대한청년단 감찰부장이었다. 전쟁 전부터 지방좌익들이 조○○을 잡으려고 별렀는데 잡지 못하고, 대신 그 가족들을 ‘반동분자’로 분류해 주시하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난 후 가장 먼저 조○실이 치안대에게 붙들려 인민재판을 받은 후 구타당해 숨졌다. 치안대는 조○실의 시신을 밀물 때 바다에 수장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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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인 조〇권(당시 15세)의 진술 요지

1950. 8. 18. 신청인의 큰아버지인 지방유지 조〇실이 실안동 치안대원에게 잡혀 자택에서 인민재판을 받고 8. 21. 바다에 수장되었음. 조〇실의 아들 조〇암이 대한청년단원이었음.



그 뒤 아내 김○배와 아들 둘까지 치안대에 끌려가 인민재판을 받았다. 어머니와 두 아들이 제각각 손발이 묶이고 머리만한 돌을 매단 채 바다에 던져졌다. 천행으로 넷째 아들 조○채는 돌을 단 줄이 풀려 살아나왔다.

빨치산 근거지를 신고했다가 보복 살해당해

산골마을 주민들에게 빨치산과 경찰 모두 두려운 존재였다. 둘 다 무기를 지니고 있었고 시키는 일을 거역할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해 반동으로 몰리거나 반대로 빨갱이로 지목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빨치산이 밤에 마을에 왔다 가면 주민들은 생사를 건 선택의 갈림길에 서야 했다. 경찰에 빨치산을 신고하자니 보복이 두렵고, 그렇다고 신고를 안 하면 부역자로 몰릴 위험이 있었다.

1949년 7월 4일 합천군 합천읍 장계리 이장 김〇동은 자기 집 뒷마당에서 빨치산에게 총살당했다. 한 달 전에 유잠산에서 활동하는 빨치산들이 마을에 내려왔는데 이를 김〇동이 신고했다. 곧바로 경찰이 빨치산을 토벌했다. 그날 비 오는 밤에 산에서 내려와 김〇동을 살해한 자들은 토벌에서 살아남은 빨치산이었다. 김〇동은 그해 마흔여덟이었다.

전〇식은 함양군 서하면 다곡리 이장으로 대한청년단장이었다. 1949년 겨울, 빨치산 김〇〇이 식량을 얻으러 다곡마을에 내려왔다. 김〇〇은 원래 같은 다곡마을 출신으로 빨치산이 된 사람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김〇〇을 잡아 경찰에 신고했다. 신고받고 온 서하지서장은 김○○의 목을 잘라서 가져가 버렸다. 이런 사건이 있은 지 한 달 후에 빨치산들은 그 보복으로 이장 전〇식의 집과 그 처가에 불을 질렀다. 인민군이 함양을 점령했을 때 전〇식과 그의 형이 진주형무소에 수감됐는데 인민군이 퇴각할 때 대황재에서 총살되었다.

같은 마을에서 한 집안을 반동으로 몰아 생매장

좌우 대립은 이웃 간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오래 쌓여 있던 감정이 폭발했다. 하동군 금성면 갈사리 연막마을은 100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다. 그중 엄 씨가 20호 정도로 많았고, 다음으로 하 씨가 많았다. 엄 씨와 하 씨 두 집안은 해방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해방 후 엄 씨 집안 남자들은 대부분 대한청년단에 가입했고, 하 씨 집안 남자들은 보도연맹원이 되었다.

인민군이 하동에 들어오자 곧바로 엄 씨 집안사람들은 남해로 피난했다가 하동으로 돌아왔다. 그때 하 씨 집안 사람들은 치안대가 돼 ‘반동분자’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1950년 8월 26일경 엄 씨 일가 20여 명이 연막 수협창고에 감금되었다. 연막 창고에서 때리는 소리, 고함 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감금되었다. 엄 씨네 부인이거나, 부인이 없으면 어머니를 감금하고 구타했다. 여자들은 풀어주었지만 남자들은 배에 싣고 가 마도백사장에 산 채로 매장했다. 이때 최소 28명이 희생되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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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인 박○이(당시 14세) 외 진술 요지

1950. 8. 28.(음력 7. 15.) 엄○수 등 엄 씨 일가 8명이 지방좌익에 의해 수협창고에 감금됐다가 마도 백사장에 생매장되었음. 금성면 갈사리 연막부락에서 해방 전부터 좌익 활동을 했던 하 씨와 갈등이 있었고, 한국전쟁 이후 그 갈등이 불거져 인민군 점령 당시 엄 씨 일가가 희생당했음.

경남 하동군 금성면 연막마을과 마도. 1969년 항공 사진. @국토정보맵

경남 하동군 금성면 연막마을과 마도. 1969년 항공 사진.
@국토정보맵

끝내 대황재 고갯길을 넘지 못하고….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연합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자 인민군은 일제히 퇴각했다. 9월 27일 함양에서 인민군이 완전히 퇴각했다. 점령기간 동안 인민군들은 경찰, 공무원 등 우익인사와 그 가족들을 ‘반동분자’라고 해서 진주형무소에 수감했는데, 후퇴할 때 이들 300여 명을 트럭으로 싣고 갔다. 그런데 트럭이 대황재(大篁嶺) 고갯길을 넘지 못했다. 인민군들은 우익인사들을 차에서 내리게 해 대황재를 넘다가 도중에 집단 학살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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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〇순(당시 23세)의 신청인 진술 요지

1950. 9. 27. 신청인의 아버지인 대한청년단장 전〇식과 큰아버지 전〇식은 인민군에게 끌려가 진주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인민군 후퇴 시 함양군 지곡면 대황재에서 희생당했음.



또 9월 27일, 28일 이틀 동안 함양군 서하면 대황재 부근 일대에서 약 500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목격자들은 죽은 사람 대부분이 한복이나 평상복 차림이고 줄에 묶여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줄에 묶인 채 한곳에 몰려서는 난사하는 총에 맞아 숨졌다.(함양문화원, 2017)
1950년 9월 27~28일 경남 함양군 서하면 대황재 부근 일대에서 약 500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사진은 대황재 전경. @디지털함양문화대전

1950년 9월 27~28일 경남 함양군 서하면 대황재 부근 일대에서 약 500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사진은 대황재 전경.
@디지털함양문화대전

우리가 겪은 전쟁은 더 길었다

인민군이 퇴각할 시기에 미처 후퇴하지 못하고 고립된 인민군 상당수가 지리산과 덕유산으로 들어가 기존의 빨치산과 합류해 몸집을 불렸다. 1953년 종전 이후에도 수년 간 빨치산 소탕 작전이 이어졌다. 이곳 주민들에게 전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한국전쟁이 3년간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마천을 포함한 지리산 일대의 산골주민들에게는 여순사건부터 1963년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이 붙잡힐 때까지 15년 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마천애향회 《마천 향토사》, 1994]
산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에게 전쟁은 능선만큼 길고, 골짜기만큼 깊었다.
사건명 경남지역 적대세력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경남지역 적대세력 사건〉(1기)
지역 경남 거창군, 고성군, 남해군, 동래군, 밀양군, 사천군, 산청군, 양산군, 울주군, 의령군, 의창군, 진양군, 진주시, 창원군, 하동군, 함안군, 함양군, 합천군 등 18개 시군
사건 발생일 1948년 3월~1953년 4월
진실규명 신청인 권○현 등 74명
진실규명 결정일 2009년 11월 17일
진실규명 인원 표○준 등 80명 (희생, 강제연행, 상해 확인 또는 추정 총 134명)
결정사안 신청인 권○현 등 74명이 한국전쟁 동안 경상남도지역에서 진실규명대상자 표○준 등 총 80명이 적대세력에 의해 희생·강제연행 되었거나 상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며 진실규명을 요청한 것에 대해 진실규명으로 결정한 사례
가해주체 지방좌익, 인민군, 빨치산 등
참고자료 함양문화원 《함양지리산의 빨치산 이야기》, 2017
남재우 〈한국전쟁 전후 함양지역 민간인 희생의 배경과 그 양상〉, 《역사와경계》(71), 2009
디지털함양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