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국민보도연맹 사건 죽어서도 ‘국민’이 되지 못한 사람들

진주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지인 마산 진전면 여양리 여항산 폐광. (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

진주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지인 마산 진전면 여양리 여항산 폐광.
(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

태풍 ‘루사’가 드러낸 학살의 증거

2002년 8월 말 태풍 루사가 하루 동안에 한반도 중앙에 쏟아부은 비는 870mm였다. 기상 관측 이래 최대 강수량이었다. 이때 내린 폭우로 경남 마산 진전면 여양리 산태골의 계곡물이 범람해 주변 골짜기의 흙더미를 쓸어내렸고, 그 덕분에 50여 년 전 민간인 학살의 증거가 세상에 드러났다. 그것은 소문으로만 전해져 온 진주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자들의 뼈 더미였다.

그 후 2004년 4~6월 고 이상길 교수를 중심으로 경남대학교박물관이 본격적으로 유해 발굴을 한 결과 163구의 시신이 수습됐고 ‘태인’ 도장, 버클, 탄피 등 각종 자료가 발굴되었다. 이는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사건으로서는 “최초로 정상적인 과정을 거친 유해 발굴 작업”이었다(이상길, 2005). 이 발굴을 통해 비로소 1950년 7월 중순 진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가림막이 걷혀나갔다.
2004년 마산진전면에서 발굴된 유해.

2004년 마산 진전면에서 발굴된 유해.

한국전쟁 전후의 진주

서부 경남의 거점 도시 진주는 1862년 임술농민항쟁부터 1920년 백정해방운동인 ‘형평운동’까지 유유히 이어지는 근현대 사회운동의 무대였다. 지리산 근처의 비옥한 토질로 물산이 넉넉하고 진주고등보통학교 등 4곳의 중등학교가 있어 교육받은 인재들이 많았다. 자연히 진주는 전국적으로 주목받을 만한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해방 이후 인민위원회가 수립되고 1946년 대구10월사건의 물결이 진주에도 이르면서 진주지역의 정치적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이때 시위대에 의해 진양군 정촌지서, 대평지서, 명석지서 등이 시위자에게 점거, 파괴됐고 시위에 참여한 1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주모자로 체포된 진주시 인민위원장 강태창 등 6명은 미군정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로써 인민위원회와 대중적 조직들의 공개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탄압을 피해 지리산으로 간 사람들은 빨치산이 돼 진주로 다시 내려왔다. 1949년 10월 27일 새벽 약 300명의 빨치산이 진주에 주둔한 해병대를 포위하고 공격했다. 이날의 습격으로 해병대의 병사 1동이 전소되고 진주경찰서, 진주형무소 일부와 진주시청 건물이 불탔다.

한국전쟁 발발 후 1950년 7월 25일 진주 국민보도연맹 학살이 시작되었다. 7월 29일에는 진주 방어선까지 북한군이 진격했고, 30일 밤부터 진주 서쪽 4km 지점까지 들어와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했다. 7월 31일 진주는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충성스러운 국민이 되자”

1948년 10월 여순 사건으로 정부 수립 이후 큰 위기를 경험한 이승만 정부는 좌익 활동가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전향자들을 계몽·지도하여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들인다”는 목적으로 1949년 4월 20일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했다. 국민보도연맹은 법령에 근거한 조직은 아니었지만 내무부 장관이 총재를 맡은 정부 주도의 관변단체였다. 보도연맹 지방지부가 도내 각 경찰서 단위로 설립되면서 국민보도연맹은 전국적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경상남도와 진주에도 국민보도연맹 지부가 조직되었다. 12월 8일 오전 11시.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진주극장에서 진주국민보도연맹 결성식이 열렸다. 좌익사상 전향자와 자수자 1,000여 명이 “참다운 길을 걸어갈 길을 찾은 희색을 만면에 띠고” 이른 아침부터 진주경찰서 마당에 집합하여 대회장으로 향했다. 대회가 시작되자 진주시장, 진주경찰서장 등 관공서장과 지역유지의 개회사와 축사가 이어지고, 이에 화답하듯 보도연맹원들이 지난 잘못을 반성하고 앞으로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겠다며 열변을 토했다. 만세삼창을 끝으로 결성대회가 끝나고 진주보도연맹원들이 극장 밖으로 나가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국민보도연맹원증. @문화재청

국민보도연맹원증. @문화재청

조두규의 국민보도연맹원증(1949년) 2010년 조용원(조카)의 기증으로 처음 실물이 발굴되었다 기록물의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기록원에 영구보존되어 있다. @문화재청

조두규의 국민보도연맹원증(1949년)
2010년 조용원(조카)의 기증으로 처음 실물이 발굴되었다.
기록물의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기록원에 영구보존되어 있다. @문화재청

보도연맹원들은 대부분 평범한 농민들이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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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생) 진술, 2009. 5. 14. 당시 진주지역 대동청년단원, 진실화해위원회 (2009)

“6.25전쟁 전에 보도연맹 제도가 있었다. 면 단위로 가입 대상자를 선정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농민위원회(전국농민조합총연맹)에 소속되어 있었다. 농민위원회 위원장은 사회활동을 했던 사람들이고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들로 이들에 의해 농민위원회에 가입한 사람 대부분은 그저 서명하고 날인한 사람들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이들이 보도연맹원이 된 것이다.”


단지 “살기 위해 좌익에 끌려다녔거나” 단순히 “벽보를 붙인 일”, “좌익계 친구에게 식사를 제공한 일”, “좌익활동을 하던 친구들을 집에서 재워준 일” 따위가 있었다. 심지어 어떤 이는 경찰이 집에 있는 바리캉을 증거로 삼아 빨치산 머리를 깎아주었다며 조사를 받았다.

또 마을에 수색 나온 경찰차를 구경하고 있는데 경찰이 진주경찰서로 잡아가 “지난 밤에 무슨 일을 했느냐?”며 고문하고 구타했다. 이런 이유로 ‘빨갱이’가 된 사람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이 밖에도 면장이나 구장이 회유해서 보도연맹에 가입시키기도 했다. 혜택을 믿은 어떤 면장은 자신과 친척들을 가입시키고 각 마을 구장에게도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배급을 준다고 권유하기도 했다. 당시 면 단위로 몇백 명씩 가입시키라는 할당이 내려와 좌익활동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까지 가입시킨 경우도 있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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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1928년생), 희생자 강○중의 동생, 진실화해위원회(2009)

“당시 이반성면 면장이던 박○○에 의하면 정부에서 좌익으로 활동하다가 자수한 사람들만 보도연맹에 가입시키도록 지시가 내려왔는데 몇 백 명 가입시키라는 할당 지시도 내려와 할당 숫자를 채우기 위해 농부들을 가입시켰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농사만 짓던 사람을 관청에서 오라고 하고 가입하라고 하니 보도연맹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가입한 것이다”



이렇게 갖가지 이유로 보도연맹원이 된 이들은 7월 15일경부터 진주 경찰의 소집 명령에 자진 출두했거나 연행돼 진주경찰서와 진주형무소에 구금되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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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생), 진주형무소 계호과 근무, 진실화해위원회(2009)

“전쟁이 터지니까 경찰관들이 보도연맹원들을 잡아 왔다. 보도연맹원들은 보통 일주일, 10일 정도 형무소에 구금돼 있었다. 군인(김종원의 명령하에 있던 헌병 3*연대)들이 진주형무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부분 며칠 있다가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 그길로 총살당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가는 사정은 무시무시했다. 경남경찰국에서 관할 경찰서에 ‘구속된 불순분자에 대해 엄중 감시하고, 헌병대에서 신변 인계를 요구할 시에는 이를 인도할 것’이라는 내용의 지침을 내린 상태였다.
1933년 지도에 보이는 진주형무소(왼쪽)과 진주경찰서. @국토정보맵

1933년 지도에 보이는 진주형무소(왼쪽)과 진주경찰서. @국토정보맵

진주형무소 전경.

진주형무소 전경.

70여 년을 이어지는 기억 속의 총소리

진주형무소에 구금된 사람들은 심사, 분류를 거쳐 갑, 을, 병 등으로 분류됐으며 이 가운데 ‘갑’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7월 21일경 살해됐다. 나머지 보도연맹원들은 7월 26일경까지 몇 차례에 걸쳐 집단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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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1930년생), 진실화해위원회(2009)

“진주경찰서 체육관에서 하룻밤 자고 형무소로 갔다. 남로당 간부이거나 이름 있는 사람들은 ‘갑’으로 분류돼 제일 먼저 7월 21일(음력 6월 7일)에 끌려 나갔다. 감방 안이 너무 좁아서 모두 포개 앉아 있었다. 열흘 동안 앉아만 있었다. 7월 24일과 25일 이틀 동안 형무소에 구금됐던 서부경남 보도연맹원들을 싹 다 실어냈다. 나는 7월 25일경 풀려났다. 나와 함께 구금됐던 화개리 김종범 등 7명의 가족에게 음력 6월 10일에 제사를 지내라고 내가 알려주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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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웅(1936년생), 희생자 심○준의 아들, 진실화해위원회(2009)

“남성동에 거주하던 진주형무소 간수가 부친(심희준)의 유품인 회중시계를 모친에게 전해주면서 부친을 포함한 사람들이 1950년 7월 22일(제사일 음력 6월 8일)경 진주형무소에서 트럭에 실려 나갔다고 알려주었다.”



살해된 장소는 형무소 서북쪽으로 도로가 연결되는 명석면 관지리(화령골, 닭족골)·용산리·우수리와 도심 동쪽으로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 그리고 가장 먼 곳이 마산 진전면 여양리이다. 장소별로 유해 발굴 상황과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한 학살 방식은 다음과 같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집단 희생장소 7곳 일대에 대해 2021~2023년 현장조사를 실시했다.  조사결과 희생 장소로 확인된 곳은 (1) 명석면 관지리[일명 화령골(삭평마을)과 닭족골(신촌마을)] 일대  (2)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 일대(진주시 명석면용산리 산241-1(숯막)·산422번지·산425-1번지·산428번지)  (3) 마산(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 산태골(여항산) 일대 등 3곳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집단 희생장소 7곳 일대에 대해 2021~2023년 현장조사를 실시했다.
조사결과 희생 장소로 확인된 곳은 (1) 명석면 관지리[일명 화령골(삭평마을)과 닭족골(신촌마을)] 일대
(2)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 일대(진주시 명석면용산리 산241-1(숯막)·산422번지·산425-1번지·산428번지)
(3) 마산(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 산태골(여항산) 일대 등 3곳이다.

명석면 관지리 화령골(삭평마을)
닭족골(신촌마을)

명석면은 진주시 서부에 위치해 동쪽으로 집현면, 북쪽으로 산청군 신안면, 남쪽으로 이현동, 판문동, 서쪽으로 대평면에 접하고 있다. 북쪽의 광제봉과 집현산에서 이어지는 산지 지형에 위치하여 크고 작은 골짜기가 많다.
1950년 7월경 명석면 국민보도연맹원들은 진주경찰서와 진주형무소 등에 수감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듣지 못한 국민보도연맹원들은 소집 명령에 평소와 같이 응했고 일부 소집에 불응한 보도연맹원들은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연행된 이후 인민군의 진주 공격이 임박하자 명석면 일대 골짜기로 끌려가 학살당했다.

화령골과 닭족골에서 진주형무소 재소자도 일부 포함된 국민보도연맹 등 예비검속자 150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1기 진실화해위원회, 2009). 당시 관지리 신촌마을에 살았던 17살 구○○은 화령골짜기에 버스 한 대가 서는 것을 보았다. 버스에서 머리에 교도소 대나무 통발을 쓴 사람들이 내렸다. 근처에 총을 맨 사람들이 있었고 조금 있다가 다닥다닥 총소리가 났다. 그 후 다시 버스 한 대가 왔고, 사람들이 올라간 뒤 총소리가 또 났다.

당시 19살이었던 박○○도 논을 매고 있다가 관지리 골짜기로 버스가 들어오는 걸 보았다. 버스가 서더니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줄줄이 내렸다. 사람들이 골짜기 그늘 속으로 사라진 뒤 한 시간쯤 후에 타닥타탁 총소리가 났다. 박○○은 혹시나 실종된 아버지도 있을까 해서 형과 함께 가 보았지만 시신을 찾지 못했다. 현장에서 보니 사람들을 횡렬로 세워놓고 죽였는데 확인 사살을 위해서인지 시체에 대검으로 찌른 자국이 있었다. 죽은 사람들은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이튿날 마을 주민들이 시체를 치우러 갔지만 나뭇잎을 대충 덮는 정도에 그쳤다.

총을 세 번 맞고 돌아왔다고 ‘도살이’로 불린 생존자 정○식 사례
명석면 관지리 신촌 화령골 학살현장에서 왼쪽 뺨과 복부에 총상을 입고 생환한 정○식(1990년경 사망)은 1989년 월간 《말》과의 인터뷰에서 경찰이 진주형무소에 구금돼 있던 국민보도연맹원들을트럭에 태워 용산리 골짜기로 끌고 가서 눕혀놓고 총을 난사했다고 증언했다. “두 명씩 묶어 버스에 태웠는데 꽉 차면 백몇십 명이 되는데, 한 차에 순사 7명이 탔다. 보도연맹원들을 신촌 골짜기로 끌고가 눕혀놓고 총을 난사했다. 7명이 따르르 총을 쏘니 아야 소리한 사람도 없었다.
경찰들이 서 있어 송장 밑에 누워 있다가 해가 어둘 무렵에 밑으로 내려왔다. 총상을 입어 걷지도 못하고 손으로 땅을 짚으며 궁둥이를 끌면서 갔다.”(김태광 ‘속 보도연맹 사건’, 월간 《말》, 1989년 2월호. 1기 진실화해위원회(2009) 보고서)
정○식은 학살현장에서 총을 세 번 맞고 살아서 돌아왔다고 하여 ‘도살이’로 불렸다.

명석면 왕지리 추동마을 백〇흠, 강〇상 희생 사례
명석면 왕지리 추동마을 강〇상(1926년생)은 1950년 7월경 보도연맹원 소집 통보를 받고 나갔다가 명석면 신촌마을 골짜기에서 희생되었다. 강〇상은 당시 명석면사무소 면서기로 병무청 업무를 담당했는데, 사촌 강〇〇이 면사무소에 들렀다 가라고 해 1950년 7월 16일 일요일에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가족들은 강〇상이 신촌 ‘대롱골(명석면 관지리 신촌마을 안쪽에 있는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현장으로 찾아갔다.

강〇상의 가족들은 집을 나갈 당시 양복 차림이었던 강〇상이 눈에 띄어 시신을 찾았고 바로 지게로 시신을 지고 와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당시 신촌 골짜기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모두 보도연맹원으로 손이 뒤로 묶여 있었고, 한 줄씩 총살해서 시신들이 포개져 있었다고 한다.

백〇흠(1924년생)과 강〇태(1918년생)는 명석면 신기리 동전마을에서 1950년 7월경 경찰에 의해 소집돼 7월 25일경 명석면 관지리 삭평마을 골짜기에서 희생되었다. 백〇흠은 당시 동전마을 이장 박씨가 박○흠의 도장을 찍어서 보도연맹에 가입됐다고 한다. 강〇태의 딸은 증언하기를 아버지가 일제강점기에 10여 년간 강제동원으로 마을을 떠났다가 돌아왔다고 했다.

희생자의 가족들은 삭평마을 사람들에게 트럭에 실려 가는 백○흠이 “나 죽으로 간다. 억울하다”라고 소리를 지르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게 들어서 알고 현장에 가서 아버지의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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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
진주 민간인학살 유족 증언록, 2020

“그때 여름인데(1950년) 음력 6월 열하루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트럭에 실려 있다가 내리는데 (몸이) 네 사람씩 묶여 있었다고 그 동네 사람들 말로는 그랬어요. 우리 아버지가 “백○성이 억울하다”고 고함을 지르면서 올라가더래요. 그걸 본 사람이 있어요. 백○성은 아버지를 집에서 부르던 이름이에요. 그 동네가 삭평부락인데 아버지를 알고 지냈던 사람이 알려줘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버선발로 삭평부락 골짜기로 가보니 피가 난자해서 골을 타고 냇물처럼 내려오더랍니다. 아버지 시체는 고모부 혁대를 빌려 찬 것을 알고 있던 할머니가 찾았어요. 우리 집에서 20리 길인데 바로 소식을 듣고 갔는데도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이 피범벅이 돼 있더래요.”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일명 용산치)

용산리 용산고개에서 진주지역 국민보도연맹원 및 예비검속자들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 이곳에서 보도연맹원뿐만 아니라 진주형무소 재소자도 함께 희생되었다. 용산고개 희생현장 인근마을에 살았던 구〇〇(1941년생)은 1950년 음력 6월경 계엄령이 내려진 후, 주둥이가 길게 나온 버스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고 이 버스가 산골짜기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당시 버스가 올 때면 총소리가 들려서 마을주민들이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를 비롯해 동네 어른들이 용산리 고개에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묻는 부역 일을 갔다 와서 학살지에서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현장에는 총살당한 시신이 여름 날씨와 짐승들에게 뜯겨서 이미 부패돼 있었고 그 시신들을 묻었다고 했다. 이후 희생 장소로 나무를 하러 가서 땅을 조금만 파면 유해가 나왔고, 나무 땔감을 해서 집에 오면 땔감 사이에서 손가락뼈 같은 작은 뼈가 나오기도 했다.(참고인 구〇〇 진술조서(2022. 4. 26.)) 경찰이 다음 날 마을에 와서 동네 사람들을 모아 시신을 묻게 했다. 여름이라 시신들은 얇고 짧은 삼베옷 차림이었다. 시신을 들어 옮길 때마다 벗겨진 피부가 손에 들러붙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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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시 18세·용산리 주민),
진실화해위원회(2009)

“사람들이 죽은 다음날 지서 경찰이 와서 한 집에 한 사람씩 10여 명을 데리고 가서 시체를 묻으라고 했다. 용산리에 있는 하진박골, 우참새무골, 아래참새무골에서 사람들이 죽었는데 나는 우참새무골에 갔었다. 사람들은 총을 맞고 죽은 상태였다. 시체를 묻을 때 마을 구장이 지휘를 했는데 당시는 더운 여름이라 죽은 사람들이 짧은 삼베옷을 입고 있어서 시체를 치울 때 죽은 사람들 살껍데기가 손에 붙어서 일을 하기가 아주 고약했다. 죽은 사람들은 전부 40대 미만의 성인 남자였다.”


시신이 너무 많아서 구덩이를 파서 묻을 수 없어 그냥 고랑에다 던져 놓고 흙을 덮었다. 나중에 소문을 듣고 가족들이 찾아왔지만 골짜기 고랑에 장작처럼 쌓여진 시신 속에서 희생자를 찾기는 어려웠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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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〇수(당시 16세),
진실화해위원회(2009)

“용산리 골짜기에 포승에 묶인 채로 총을 맞은 시신들이 엎어져 있었다. 한 구덩이에 40~50구의 시신이 있었는데, 그런 구덩이가 20~30개가 있었다. 깊은 골짜기를 따라서 구덩이를 파지도 않고 그냥 죽였다. 총살시킨 이후에 인근 주민을 동원해서 골짜기에다 그냥 장작더미 쌓듯이 쌓은 뒤 흙을 덮어 놓았더라. 형의 시신을 찾는다고 그 구덩이를 다 뒤지고 다녔지만 결국 형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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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〇순(당시 28세·희생자 안〇식의 아내),
진실화해위원회(2009)

“도랑이 제 키보다 넓고 깊이가 서너 길 되었는데 시체를 한 데다 처넣고 위에 흙을 덮어놓았다. 안 죽으려고 나무를 붙잡았는지 나무가 부러져 있었고 당시 허리끈 짜맨 것도 보이고 옷고름 짜맨 것도 보이는데 다부진 사람 같았으면 시체를 들춰보며 찾았을 텐데 냄새가 나니까 그러지 못했다.여기서 죽었으면 그 혼이나 우리 따라 가자 하고 그만 와버렸다.”

2014년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에서 발굴된 유해.

2014년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에서 발굴된 유해.

명석면 우수리 산 5번지와 콩밭골

명석면 우수리 산5번지(갓골)와 콩밭골에서는 보도연맹원 및 예비검속자뿐만 아니라 진주형무소 재소자까지 80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우수리 갓골에서 시신을 매장하는 데 동원된 김○○(당시 17세)은 “인민군이 들어오기 며칠 전, 점심 무렵에 버스 한 대가 마을에 들어섰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 중에는 죄수복 입은 사람도 있었지만 민간복 입은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은 손이 뒤로 묶인 채 굴비처럼 엮어 있었다. 좀 있으려니 ‘다다다’ 소리가 났고 경찰 두 명이 칼빈 총을 들고 내려와서 이장더러 ‘죽은 사람들을 빨리 묻어라. 내일 와서 확인하겠다’고 했다. 이장이 마을 사람들을 데려가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매장했고 나도 함께 가서 시신을 매장했다. 시신은 모두 43구였고 젊은 남자들이었다”고 진술했다.(김○○ 면담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2009)

당시 우수리 송고 콩밭골 근처 우수골에 살았던 최○○(당시 10세)과 김○○(당시 9세, 최○○의 부인)도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인민군이 진주에 들어오기 전이었다. 마을에 군용 트럭 2대가 들어왔다. 끌려온 사람들은 하얀 옷과 이 옷, 저 옷을 입은 일반인이었고 두 명씩 손이 묶여 있었다. 총을 멘 검정색 경찰복 차림의 경찰 6명 정도가 앞뒤에서 이들을 끌고 송고 콩밭골 방향 ‘골목등’으로 끌고 올라갔다. 뒤이어 총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 뒤에 40여 명이 죽었고 죽은 사람들이 보도연맹원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시신을 찾으러 온 사람들은 있었는데 수습했는지는 모르겠다. 비가 온 뒤에 마을로 뼈가 떠내려 온 적도 있었다.”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범재골)

진주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는 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학살 관련 2009년 유해 발굴’ 사업으로 유해를 발굴한 장소이다. 문산읍 상문리 ○○○번지(일명 가늘골)에서 발굴된 유해 54구는 거의 모두 2명씩 짝을 지어, 죄수복을 찢은 천으로 뒤로 묶여 있는 상태였다. 구덩이에 사람을 엎드리게 한 뒤 1명당 1발씩 조준해 사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가족들이 현장에 접근하기도 어려웠지만 와서도 시신이 워낙 많이 쌓여 있어 수습해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해 발굴을 담당한 경남대학교박물관이 발굴 결과를 토대로 학살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50여 명의 민간인들이 2명씩 뒤로 묶인 상태에서 산으로 올라가, 매장지 근처에 줄지어 서서 죽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맨 먼저 8명(2인 4개 조)이 구덩이의 가장 높은 곳에 엎드렸고, 뒤에 서 있던 군인들이 총을 쏘았다. 다음 7명(2인 3개 조와 혼자 뒤로 묶인 1명)이 먼저 죽은 사람들의 다리 사이에 머리를 두고 엎드렸고 다시 총성이 울렸다. 이런 과정이 9번 반복되면서 엎드린 채 죽은 사람은 늘어났고, 총을 쏘는 사람은 차츰 뒤로 물러났다. 학살이 끝난 후 억지로 끌려온 마을 주민들이 소나무 가지를 덮고 좌우의 흙을 파서 시신 위를 간단하게 덮는 것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경남대학교박물관, 2009)
문산읍 상문리 〇〇〇번지 발굴 모습

문산읍 상문리 〇〇〇번지 발굴 모습.

문산읍 상문리 법륜골 유해 매장지.

문산읍 상문리 법륜골 유해 매장지.

마산 진전면 여양리 산태골(여항산)’ (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

진주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 및 예비검속자 163명 이상이 희생된 곳으로 2002년 9월 태풍 루사에 의해 유골이 흙 밖으로 드러났다. 2004년 처음 유해수습이 시작됐지만 여러 지역에서 늘 하던 방식대로 포크레인과 작업자를 동원한 형태였다. 고 이종길 경남대 교수가 언론 보도를 보고 전문가에 의한 체계적인 발굴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 후 경남대학교박물관에서 현장을 인수해 유해 발굴을 진행했다. 2004년 4월 24일부터 6월 30일까지 발굴 결과 3개 지점 7개소에서 163구의 시신이 수습되었다.

희생자들은 팔을 벌리고 일렬로 몇 겹의 줄을 선 상태에서 양쪽에 설치된 기관총으로 살해되었다. 이반성면 가산리 중촌마을 심〇이는 총격 후 확인 사살 과정에서 경찰의 대검에 목을 찔려 한뼘 길이의 자상을 입었다. 그가 살아서 돌아온 덕분에 마을 사람들이 희생된 장소와 학살 방식이 알려졌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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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〇순(1930년생), 희생자 김〇기의 아내, 진실화해위원회(2009)

“‘범재골’(진성고개)로 시체를 찾으러 시부모님과 함께 갔다. 그런데 지프차가 다니고 미국 사람들이 지나가니까 시아버지는 무서워 못 올라가고 시어머니와 가보니 산이 무너져 있는데 시체가 몇 차나 올라온 건지 많았다. 시체가 탁탁 엎어져 있는데 발이 모아져 있었고 손도 엮여 있었다. 내가 찾아보려고 3번째 시체를 끄집어내는데 시어머니가 제 치마를 잡고서는 ‘머리가 쭈뼛하니 서서 누가 잡아당기는 것 같고 무섭다. 우리가 어떻게 시체를 찾느냐, 집에 애들한테 말해서 찾으러 다시 오자’고 하시는데 나는 눈이 뒤집혀서 무서운 지도 몰랐다. 비가 와버리니까 전날 대원들이 수구포를 깔고 덮어놔도 덮여 있지도 않았다. 그런 말하려니까 목이 막힌다. 남편 시체를 찾지 못했다.”



일반성면 운천리의 희생 사례
일반성면 운천리는 산으로 연결되어 있어 평소에 빨치산들이 내려와 곡식을 가져가거나 심부름을 시키는 일이 있었다. 또한 마을에서 몇몇 청년들은 좌익 활동을 하면서 집 구들장에 무기를 숨겨두기도 했다. 이에 대동청년단이 운천리에 들어와 젊은 청년들을 죄다 좌익으로 몰면서 주민들을 심문하곤 했다. 한국전쟁 발발 전에 대동청년단원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좌익혐의에서 벗어난다고 위협하며 주민들을 억지로 가입시켰다고 한다.

일반성면의 보도연맹원들은 평소에도 지서 사택 정리 정돈 및 지서 우물 청소 따위 일을 하러 소집되곤 했기 때문에 사건 당일 학살을 예상하지 못하고 소집에 순순히 응했다. 몇몇 경찰과 가까운 사람은 소집 명령이 있기 전에 몸을 피하거나 며칠간 억류된 사람 중에 눈치를 채고 도망치거나 돈을 주고 빠져나오기도 했다. 혹은 당일 소집에 늦었거나 잠시 자리를 비워 트럭에 타지 못해 살게 된 사람도 있었다.

신청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손○이(1921년생)을 포함한 운천리의 희생자들은 그날 논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1950년 7월 15일 오전에 논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진주경찰서 일반성지서 순경 2명이 보도연맹원 명단을 들고 찾아와 손○이를 비롯한 마을사람 몇몇을 연행했다. 이들은 일반성지에서 있다가 두 명씩 철사줄에 묶인 채 트럭에 태워져 진주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진주형무소에서 일주일 정도 구금되었다가 갑·을·병으로 분류돼 1950년 7월 20일경 진전면 여양리 폐광으로 끌려가 희생되었다고 한다.
마산(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 여항산 폐광.

마산(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 여항산 폐광.

  • 창원 마산합포구 여양리 희생현장의 총포 지지대 흔적.

    창원 마산합포구 여양리 희생현장의 총포 지지대 흔적.

  • 마산 여양리 현장에서 발굴된 태인 도장.

    마산 여양리 현장에서 발굴된 태인 도장.

진주형무소 팽나무는 다 보았다

1990년 진주형무소가 도시 외곽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학살의 기억을 담은 중요한 현장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져갔다. 그 와중에 살아남은 기억의 흔적이 있었다. 아파트 한구석 놀이터에 늙은 팽나무가 있었는데 1915년 진주교도소가 건립될 때 임병환 진주 군수가 옮겨 심어 놓은 거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팽나무도 수명을 다해 진주형무소의 흔적은 모두 사라졌다. 가해의 기억이 사라지는 세월 동안 피해자들의 기억은 잊혀질 수가 없었다. 2022년 집현면 봉강리에서 41구가 발견되고, 2023년에 명석면 관지리에서 또 유해 20여 점이 출토되었다. 지금도 발굴하지 못한 매장추정지가 더 있다. 여전히 진주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진실은 한 뼘 깊이의 어둠 속에 갇혀 발견되는 날을 기다린다.
진주 초전공원에 세워진 '6.25전쟁 진주 민간인 희생자 추모비'.

진주 초전공원에 세워진 ‘6.25전쟁 진주 민간인 희생자 추모비’.

2회 합동위령제 모습.

2회 합동위령제 모습.

62년을 기다린 미망인의 마지막 가는 길.

62년을 기다린 미망인의 마지막 가는 길.

사건명 경남 진주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1)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경남 진주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1)(2기)
관련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1기) 조사보고서 《진주 국민보도연맹 사건》, 2009
지역 경남 진주
사건 발생일 1950년 7월경
진실규명 신청인 강○숙 등 7명
진실규명 결정일 2022년 11월 1일
진실규명 인원 1차 조사: 강○상 등 7명(희생자: 강○상 등 7명)
[1기 위원회 조사결과] 희생자 400여 명(신원확인 77명)으로 추산
결정사안 한국전쟁 발발 후 경남 진주지역에 거주하던 강○상 등 7명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 등으로 군경에 의해 예비검속됐다가 진주 명석면 관지리 화령골․닭족골 및 마산 진전면 여양리 산태골(여항산)에서 집단 살해된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을 결정한 사례
가해주체 진주경찰서 소속 경찰, 육군정보국 진주지구CIC(방첩대), 진주지구헌병대 등
참고자료 〈남조선민보〉 1949년 12월 10일자 “진주보련결성대회 전향자 충성을 맹약”
경남대학교 박물관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가늘골) 유해발굴 중간보고》, 2009.
이상길 〈한국전쟁시기 마산 여양리 민간인 학살사건의 실상과 성격〉, 역사와경계, 2005
영상: KTV 국민방송
사진: 한국전쟁전후진주민간인피학살자유족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