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산청·거창 등 민간인 희생 사건 검둥개가 오면 다 죽는다

지리산 천왕봉. @산청군

지리산 천왕봉.
@산청군

벼 타작하는 날 들이닥친 토벌대

지리산 자락에 있는 일물리 마을은 산골에 위치한 탓에 빨치산들이 몇 번 내려와서 밥을 해 달라고 했다. 또 인민군이 후퇴하는 길목이었기에 인민군 부상병을 옮겨주기도 했다.
“빨치산이 마을에 몇 번 온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밥을 해 달라고 하면 해주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이 밥을 해 준 이유는 총을 가지고 와서 밥을 해 달라고 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해주었을 겁니다.… 수복 직후 인민군 퇴각 시기에 후퇴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던 관계로 주민들이 인민군 부상병을 단까에 실어 나른 적이 있습니다.… 워낙 깊은 산중이라 마을 근처에서 빨치산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빨치산이 쏘는 총소리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신청인 김○수 진술, 2009. 10. 20)

지리산 토벌부대는 일물리 마을을 평소 빨치산에게 협조하는 마을이라고 못마땅하게 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49년 11월 9일 아침녘에 일물리 마을에 진입하면서 빨치산에게 협조하고 있다고 판단한 마을주민 배○돌을 사살하고, 목을 쳐서 마을주민 민○○를 시켜 막대기에 끼워 오부면지서로 갖고 가게 하는 동시에 주민들을 체포하고 집들을 불태웠다. 당시 8살이었던 정○길은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때 ○길의 아버지도 살해되었다.

“마을 공터에서 벼 타작을 하고 있었는데 군인들하고 경찰들 하고 마을에 왔습니다. 마을에 들어와서 성인 남자들은 포승줄로 꽁꽁 묶어서 한쪽으로 모아 놓았습니다. 그중 한 사람만 묶어 놓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김○구의 아버지였는데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만 묶어 놓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만 잡혀가지 않고 마을 성인 남자 5~6명은 다 잡혀갔습니다. … 마을의 젊은 남자들을 묶어 놓고는 마을에 있는 여자들하고 아이들을 전부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여자와 아이들을 바깥 일물 쪽으로 넘어가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바깥 일물 쪽으로 넘어갈 때 군인과 경찰들은 추수하던 짚을 묶어서 마을의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당시에는 추수할 시기여서 건조한 상태였기 때문에 가옥들은 금방 불에 탔습니다. 마을의 모든 가옥이 불에 탔습니다.”[신청인 정〇길, 진술조서(2009. 1. 19.)]

군경은 바깥 일물에도 들어왔지만 그날 마을을 소각시키지는 않았다. 한 달 후 다시 와서 마을주민 20여 명을 묶어 산청경찰서로 끌고 가고, 며칠 후 당시 토벌군이 주둔하던 금서면 수철리 산골짜기에서 처형했다. 당시 토벌대에 부식을 날라주었던 의용 경찰 민○○은 처형 현장에서 핫바지 차림의 시신을 목격했다.
“우리는 지게를 짊어지고. 탄환, 식량 등을. …수철에서부터 군인들 부식을 30~40명의 주민이 지게로 져날랐다. 이때쯤이던가? 성재라고 있어. 한라산 같을까. 가운데가 벙벙해. … 지금은 못 찾을 기라. 길이 있는데 그 길에 사람들 시체가 여기저기 있는 기라. 다음 해 봄까지 있었어. 같이 있던 인부들이 “오부면 사람들”이라고 했다. 핫바지를 입은 20여 명의 시체가 그 이듬해 봄까지 있더라. (당시 시신들의 상태는?) 핫바지를 입고 있었다. 일하다가 와 죽은 거 같애. 오부사람들이라고 했는데, 산이 너무 깊어서 사람들이 찾으러 못 온 기라.” (참고인 민○○ 진술, 2009. 12. 1)
경남 산청군 지도(1918년). 송의산 밑에 내일물동과 일물리가 남북방향으로 자리잡았다. @국토정보맵

경남 산청군 지도(1918년). 송의산 밑에 내일물동과 일물리가 남북방향으로 자리잡았다.
@국토정보맵

“적의 손에 든 자들은 모두 총살하라”

1949년 12월 25일 지리산 자락의 산청·함양·하동 일대에 지리산지구전투사령관 김백일의 명의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령에 따르면 이 지역 주민들은 “각 거주지(마을)에서 백 미터를 이탈치 못하며, 군경 관용차를 제외한 정기적 교통차 및 기타 일반용차”를 타고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이를 어길 시에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적 또는 이적행위자로 인정하여 무조건 사살”한다고 돼 있었다. 마치 적국의 시민을 대하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토벌대가 보기에 이 지역 주민들은 모두 잠재적인 이적행위자였다.

9·28수복 이후 산청, 함양, 거창 등 지리산지역 토벌 작전은 11사단(사단장 최덕신) 9연대가 주로 맡았다. 11사단의 빨치산 토벌 방식은 이른바 ‘견벽청야’ 작전이었다. 빨치산의 보급원을 없앤다는 이유로 산간마을 주민을 소개시키고 집과 가재도구들을 모두 불살랐다. 이는 일본군이 만주에서 사용했던 초토화작전과 비슷했다. 일본군은 “백 명의 군중을 죽이면 그 가운데 공산당이 한두 명은 있을 것”이라며 대학살을 자행했다.

국군은 “각 부락 중에는 물론 양민도 있거니와 약 7할 이상이 공비에게 협조하여 식량보급 및 정보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지리산 토벌 작전에 적에게 이용당하는 인원 및 가옥을 파괴하지 않으면 작전수행을 도저히 할 수 없는 고로 불가분의 조치”라고 했다. 하지만 주민 소개 과정에서 주민 보호라는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철저히 ‘작전의 편의’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다. 토벌대가 지나가는 길에서 일단 마을에 나타나면 주민들 모두 마을에서 나가라고 하고 곧바로 집에 불을 놓았다.

소개 작전 뒤에는 마을에 젊은 사람들은 다 주변 지역이나 산으로 피신하고 노인과 여성, 아이들이 집을 지킨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나이가 많거나 피란할 형편이 못 되었던 것인데 토벌대는 마을에 남아 있는 주민을 보이는 대로 무차별 사살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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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인 차〇현, 통화보고서(2008. 8. 6.)

“희생된 조모님은 당시 62세였다. 마을에서 젊은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 피란을 갔고 나이 많은 사람들은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당시 조모님이 집을 지킨 이유는 조부님이 차황면에서 일꾼을 여러 명 데리고 나락을 옮기려고 했기 때문이다. 집에 있던 나락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 위해 일꾼들을 데리러 갔는데 조모님은 그 일꾼들 밥을 해주기 위해 남아 있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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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심○○, 진술조서(2009. 5. 18.)

“군인을 보고 무서워서 다들 산으로 도망갔어요. …그때 거창 쪽에서는 경찰이 들어오고 산청 쪽에서는 군인과 경찰이 함께 들어왔는데, 모두들 마을에 있는 주민들을 보고 빨치산이라고 생각한 건지 마을로 총을 쏘면서 들어왔던 거예요. 그 총을 피하려고 주민들이 모두산으로 도망갔는데 군경이 산으로도 쫓아왔어요.”

소개 후 남아 있는 주민을 적성주민 또는 통비분자로 간주한 것이다.
이는 1951년 2월 2일 11사단 9연대 작전명령, “적에 손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 적은 주둔지 및 각지 촌락에서 귀환하지 않고 암암리에 행동을 감행하고 있으니 차(此)를 용허치 못할 것임”에 따른 조치였다.

1950년 9월 이후 인민군이 퇴각해 산으로 들어가면서 빨치산의 규모가 더 커지고 경찰서 습격, 철도 파괴 등 활동도 더욱 대담해졌다. 이에 미8군사령관 밴플리는 미8군 작전명령서에 의해 백선엽을 사령관으로 하는 백야사(Task Force Paik)를 발족시켰다. 작전명은 ‘쥐잡기 작전(Operation Rat Killer)’이었다.

백야사의 작전 방식도 역시 ‘견벽청야’ 개념으로 “국내 공산유격대를 격멸소탕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물자와 보급품 일제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지리산을 3만 여 병력이 포위하고 정상을 향해 토끼몰이하듯 올라가면서 산간마을의 가옥과 시설을 모두 초토화시켰다.
한국전쟁 당시 백선엽 육군소장(1951. 8. 13.). @NARA

한국전쟁 당시 백선엽 육군소장(1951. 8. 13.).
@NARA

“검둥개가 오면 주민들 다 죽는다”

인민군이 퇴각하고 국군이 수복할 시기에 주민들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국군이 마을을 수복하면 인민군 치하에 있던 마을사람들을 모두 죽인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한겨울 추위 속에 온 가족이 이불까지 챙겨서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자국 군대를 피해 숨어든 곳은 어처구니없게도 빨치산 유격지구였다. 군경의 토벌 작전에서 민간인 마을이 초토화되는 것을 본 사람들은 차라리 ‘군인이 오면 다 죽는다. 우리를 따라오면 산다’는 빨치산의 선전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백야사 토벌군은 산에서 빨치산이 아닌 가족 단위 피난민을 보고도 그대로 사살하는 경우가 흔했다. 18살 나이로 지리산 토벌을 다닌 산청경찰서 특공대원은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토벌 시 젊은 남자들은 없고 피란민으로 보이는 어린아이와 여자들, 노인들만 있었다. 군인들이 이들을 발견해 이들이 갖고 있던 고추, 파, 소금 등은 눈밭 위에 다 버려 버리고, 쌀과 소고기는 빼앗아 먹어 버리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나이 든 할아버지를 몽둥이로 구타하는 장면도 목격하였다. … 피란민들은 빨치산이 “검둥개가 오면 주민들 다 죽는다”고 하여 지리산에 들어갔는데, 군인들이 이들을 다 빨치산으로 몰아 토벌했다.”[참고인 이○○, 면담보고서(2009. 10. 22.)]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 결과 백야사가 1951년 12월 2일부터 1952년 3월 14일까지 총 4기에 걸친 작전 가운데 지리산으로 피란한 많은 주민들이 희생된 것은 주로 1기(1951. 12. 2.~12. 14.)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백야사 토벌 작전의 총 전과는 1만 3,721명(사살 6,606명, 생포 7,115명)이었다. 예상했던 빨치산 숫자(4,000명)의 무려 3배가 넘는 수치였다. 결과적으로 빨치산보다 더 많은 수의 피난민이 토벌 대상에 포함됐던 것이다.

비무장 민간인 재판 없이 살해한 불법행위

진실화해위원회는 보고서 결론에서 ‘경남 산청·거창 등 민간인 희생 사건’에 대해 “토벌 작전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대부분 빨치산이나 인민군 점령 시 이들로부터 생명을 위협받거나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협력할 수밖에 없었던 평범한 주민이었다. 토벌 군경은 이들에 대해 토벌 작전의 명분으로 그리고 빨치산과 인민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좌익으로 취급하고 법적 절차 없이 살해했으며, 이러한 행위는 명백한 위법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전쟁 당시 국군에게 좌익과 그들의 협조자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었다. 동시에 자국 군대에 학살당한 민간인들에게는 자신을 지켜 줄 나라와 군대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경남 산청군 금서면에 있는 산청·함양 사건 추모공원 전경. @산청군

경남 산청군 금서면에 있는 산청·함양 사건 추모공원 전경.
@산청군

2023년 4월 열린 한국전쟁 전후 거창지역 민간인 희생자 합동추모제 모습.

2023년 4월 열린 한국전쟁 전후 거창지역 민간인 희생자 합동추모제 모습.

산청·함양 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를 마친 후 슬픔에 젖어 있는 유족의 모습. @산청군

산청·함양 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를 마친 후 슬픔에 젖어 있는 유족의 모습.
@산청군

사건명 경남 산청·거창 등 민간인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경남 산청·거창 등 민간인 희생 사건〉(1기)
지역 경남 산청·거창·함양·고성·사천·거제
사건 발생일 한국전쟁 전후 시기
진실규명 신청인 정○길 외 72명
진실규명 결정일 2010년 6월 29일
진실규명 인원 88명(희생자: 경정결정 1명 포함해 109명)
결정사안 정○조 등 경남 산청·거창·함양·고성·사천·거제지역 주민 108명이 한국전쟁을 전후해 좌익활동 혐의·군경 토벌작전·부역혐의 등으로 작전지역 또는 관할지역의 국군과 경찰 등에 의해 적법절차 없이 희생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하고, 경남 거창군 마리면 주민 김○락(호적상 김○락)에 대해서는 불법적인 공권력에 의한 희생 여부를 확인할 수 없어 ‘진실규명 불능’으로 결정한 사례
가해주체 한국전쟁 전에는 여순사건의 수습을 위해 구성된 호남방면전투사령부와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 등의 예하 부대, 즉 국군 제3연대·5연대·9연대·16연대·17연대 3대대·19연대·20연대(4연대의 재편)·23연대 1대대·독립유격대대·해병대(일명 김○○ 부대)·호림부대 등과 본 사건 관련 지역 경찰서이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국군 제11사단 제9연대·백야전 전투사령부와 본 사건 관련 지역 경찰서 및 사찰유격대 등으로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