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마산·창원·진해 국민보도연맹 사건 한 시대를 고민한 형제의 죽음과 삶

바람 소리가 고양이(괭이) 울음처럼 들린다는 괭이바다. 가까운 섬 사이로 멀리 거제도가 보인다.

바람 소리가 고양이(괭이) 울음처럼 들린다는 괭이바다.
가까운 섬 사이로 멀리 거제도가 보인다.

고양이가 우는 바다

노치수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창원유족회 회장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실내는 어두웠다. 마산만 포구와 가까운 오피스텔 건물의 9층이어서 유리창 너머로 바다가 훤히 보일 것 같았지만 창문에는 두꺼운 커튼이 쳐 있었다. 커튼을 젖히면 보이는 바다의 끝에 거제도가 있고 그에 좀 못 미치는 곳이 ‘괭이바다’일 터였다.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면 그 소리가 마치 고양이(괭이) 울음처럼 들린다고 하는 바다. 노치수 회장은 창문 아래 놓인 책상에서 회고록을 탈고 중이었다. 70여 년 전 바다에서 목숨을 빼앗긴 그의 가족과 마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전쟁 발발 후 학살된 국민보도연맹원

1949년 12월 7일 마산시 부림극장에서 국민보도연맹 마산연맹 ‘결성선포대회’가 개최되었다. 보도연맹의 일차적인 가입대상은 ‘좌익전향자’였고, 조직 결성의 대외적 명목은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세력에 기회를 준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보도연맹에 가입하는 전향 좌익에 대해선 과거를 묻지 않는 것은 물론 생활 지원까지 한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정부가 의도했던 만큼 조직 확대가 쉽지 않자 정부는 읍·면·동 등 일선 행정기관에 인원수를 할당했다. 경찰과 행정기관은 할당된 인원을 채우기 위해 주민을 상대로 비료와 밀가루 등 배급을 미끼로 가입을 유도했고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빨갱이로 몰린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좌익활동과 무관한 사람들이 가입되기도 했다.

마산보도연맹은 1950년 1월 5일부터 1월 31일까지 ‘가맹주간’을 정한 후 자수를 종용해 400여 명을 가입시켰다. 신청인과 참고인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 희생자들이 보도연맹 가입하게 된 과정은 대체로 이랬다. 대구 10.1. 사건에 연루되거나, 한국전쟁 발발 전 삐라 등을 살포하다가 체포돼 형무소에 다녀온 경우, 빨치산에게 식량 등 도움을 준 후 자수한 경우, 그 밖에 사소한 이유로 경찰의 눈 밖에 났을 경우, 모든 과거를 용서를 해 준다고 해서 가입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1950년 6월 하순부터 8월 사이) 마산, 창원, 진해의 보도연맹원은 관할지서의 소집 통보를 받거나 경찰관에게 연행돼 갔다. 이들은 마산 앞바다, 창원군 웅남면 아리송골, 김해시 생림면 나밭고개, 진해시 여자동 가마니골과 내서면 진동고개, 진해 앞바다 등지에서 총살당하거나 수장되었다.
희생자들의 소집·연행과정에서 경찰과 군의 지휘 하에 각 지역의 우익청년단, 민보단, 구장 등이 동원됐고 이송은 주로 경찰과 헌병이 담당했다. 끝으로 죽일 사람과 살려줄 사람을 분류하고 총살을 관장한 것은 CIC(특무대)였다.
희생자 명단을 보여주고 있는 노치수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창원유족회장.

희생자 명단을 보여주고 있는 노치수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창원유족회장.

시민극장으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1950년 7월 15일 마산시내 및 인근지역의 보도연맹원들에게 일제히 마산시민극장으로 모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소집에 응했던 김○구는 7월 15일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경찰관이 “시민극장에서 시국강연회가 있는데 참석한 보도연맹원들은 탈퇴한 걸로 간주하고 선처할 방침”이라는 말을 듣고 따라나섰다. 김○구가 시민극장에 도착해 보니 이미 사람들이 구름처럼 많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 인근 농촌지역에서 온 농민들이었다. 이상한 낌새를 챈 김○구는 현장에서 용케 탈출했다. 하지만 극장에 남아 있던 보도연맹원들은 곧바로 헌병 차량에 태워져 마산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증언
닫기
참고인 김○상 진술 녹취(2008. 6. 25.)

“한국전쟁 발발 후 진전지서로 진전면 보도연맹원이 소집되었는데 약 70여 명이었고 우리 마을 곡안리는 15명이었다. 소집된 사람들은 경찰의 인솔로 트럭에 실려 마산형무소에 구금되었다. 마산형무소에 도착하여 약 5~6일 정도 마당에 구금 되었는데 마당은 붙잡혀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구금 중 사복을 입은 사람들(경찰인지 CIC인지 알지 못함)이 고백서를 작성하라고 했다. 나중에 풀려 나와서 생각해보니 나처럼 백지를 낸 사람은 나오고 뭔가 활동 내용을 쓴 사람은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형무소 마당에서 5~6일 정도 지낸 후 감방으로 입감되었다. 입감 약 10여 일 후 곡안리 15명 중 10명이 한꺼번에 불려 나갔는데 그 뒤 소식이 없다. 그날이 8월 23일이었다고 한다. 마산형무소에 구금 중 나는 재판을 받지 않았으며 불려 나간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은 풀려 난 뒤에 알았다.”



마산형무소에서 CIC가 보도연맹원을 A, B, C로 분류해 A는 감방에 수용하고 B, C는 운동장에 수용했다. 감방에 있던 A가 밤에 없어지면 B가 입감되었는데 B도 밤에 없어졌다. 마산형무소에 구금됐다가 생존한 김○상은 형무소 마당에서 5~6일 정도 보낸 후 감방으로 입감됐다고 증언했다. 입감 후 10여 일 뒤 감방에서 불려나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마산형무소에 구금된 보도연맹원은 360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1960년 10월 마산피학살자유족회 대표 노현섭이 마산보도연맹 학살에 가담한 경찰관 등을 고발하는 고발장에 언급돼 있다(마산매일신문, 1960년 10월 23일자). 진실화해위원회는 이같은 고발장 내용은 유족회 측의 주장이지만 이 사건의 윤곽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고 판단했다.

1960년 경남도지사실에서 열린 국회 양민학살특위에서 마산 피학살유족회 간부 김용국은 위원장 최천 국회의원의 “(희생자들이) 보련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김용국은 “보련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그 당시 민보단이니 경찰 이런 사람들이 자기들이 과거부터 좋지 않게 평가한 사람들은 모조리 다 불러나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무슨 이유로 잡아갔느냐?”는 국회특위 위원장의 계속되는 질문에 “민보단이라든지 청년운동원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보련은 아닙니다만 ‘시민극장에서 강연회가 있다’ 그래가지고 데려간 것입니다”라고 답변했다.
마산문화예술센터 마산시민극장

1946년 개관한 마산시민극장은 1970~1980년대 마산 창동의 번화기를 상징하는 장소였으나
1995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상영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그 후 창원시와 시민들이 뜻을 모아 2021년 4월 ‘마산문화예술센터 마산시민극장’으로 새로 문을 열었다.

현재 주차장이 된 옛 마산형무소 터.

현재 주차장이 된 옛 마산형무소 터.

괭이바다에 총살 후 수장

마산시 창포동 해안가(현 마산항 제1부두)에서 보도연맹원들이 LST(전차양륙함)에 실려 나가는 것을 목격한 윤○근(마산시 창포동 주민, 한국전쟁 발발 당시 20세, 현재 사망)은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당시 철도병원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한국전쟁 발발 후 한 달 정도 지나서 아침 출근길에 만난 친구에게 ‘오늘 시민극장에 모여 띠 메고 군대에 간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뒤 약 20여 일이 지난 후 어느 날 점심 무렵 GMC 트럭 열 몇 대 정도가 사람들을 가득 싣고 창포동 해안가로 오는 것을 보았다. 트럭에서 짚으로 만든 벙거지를 쓴 사람들이 내렸는데 모두 손이 뒤로 묶였고 앞뒤 사람의 허리에도 로프가 묶여 있었다. 이때 LST 두 척이 왔는데 트럭에서 내린 사람들이 옮겨 탔다. 나중에 들으니 그들은 괭이바다에서 총살된 후 수장되었다고 한다.”[김주완 《토호세력의 뿌리-마산현대사를 통해 본 지역사회의 지배구조》, 2006]

창원군 진전면 조○이(참고인, 당시 13세)도 당시 사건을 증언했다. 1950년 음력 6월 어느 날 아침, 전지서 경찰관 1명이 마을로 와서 논일을 하고 있던 심○섭(희생자) 등 마을사람 4~5명을 진전지서로 데려갔다. 그 뒤 그 사람들을 마산형무소에 감금시켜 두었다가 마산 괭이바다 물속에 빠뜨렸다고 한다. 그중 문○출이 바다에 빠졌을 때 암초가 있어서 거기서 포박을 풀고 살아 돌아왔고 나머지는 모두 희생되었다. 문○출이 전하기를 경찰서에 구금돼 있을 때 밤마다 몇 사람씩 호출돼 밖으로 나갔으며 그 이후 소식이 전혀 없었고, 자신은 호출되지 않아서 살아 돌아왔다고 했다[신청인 심○규 진술조서 2008. 9. 9.].

마산항 제1부두에서부터 LST(전차상륙함)에 실려 괭이바다까지 온 보도연맹원들은 얼굴에 용수를 쓰고 양손을 결박당한 채였다. 게다가 헌병과 경찰들이 7~8명씩 모아서 허리를 나일론 줄로 묶고 돌을 매달아 놓았다. 갑판에 세워두고 총을 쏘면 줄줄이 바다로 떨어졌다. 숨이 붙어 있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기라도 하면 성벽 같은 갑판 위에서 기관총을 쏘아댔다. 숨을 곳은 오히려 물속이었다. 사람들은 숨이 막혀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총알이 물속으로 핑핑 꽂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마산의 보도연맹원들은 물속에서든 물 밖에서든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증언
닫기
1960년 6월 5일 경상남도지사실에서 열린 ‘국회 양민학살사건 조사특별위원회’ 조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희생자 유족 김용국

“50년도입니다. 그때 지서에서 나와 가지고 시민극장에 모아가지고 마산형무소에 일단 수감을 했습니다. 그런 케이스가 하나 있고 또 하나는 헌병들이 직접 과거 복역한 사람, 구속되어 있는 사람 중 과거 보련에 관계있던 사람들 명단을 다 뽑아 갔습니다. 그때 이 사람들도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현재 없어진 것이 1,681명입니다.”



돌덩이는 가차 없이 중력이 이끄는 대로 지구의 중심부를 향해 시신을 끌고 들어갔다. 그렇게 바다의 밑바닥에서 밧줄에 엮인 시신들이 해초처럼 너울거리다가 바윗돌에서 놓여나기라도 하면 물 위로 떠올라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진실이 떠오르듯 중력에 저항하는 바다의 부력이었다. 시신의 일부는 밀물을 타고 고향을 찾아가듯 마산포구의 바닷가 마을들로 되돌아갔다. 노치수 회장의 고향인 마산시 구산면 안녕마을과 심리마을, 남포마을 주민들도 그렇게 떠밀려 온 시신을 발견해 매장해 주었다. 증언
닫기
참고인 최○분, 노○섭 진술. 2008. 9. 23.

한국전쟁이 나고 피난 갔다 온 후, 안녕마을 바닷가에 20여 구의 시체가 떠밀려 와서 현재의 노아주식회사 뒤편에 매장함.

간혹 먼바다로 떠내려간 시신은 대마도에 이르기도 했다. 그때 대마도 사람들도 자기 마을 앞바다에 밀려온 시신을 뭍에다 고이 묻어주었다고 한다.
1950년 마산 시내 항공사진

1950년 마산 시내 항공사진.
마산극장에 소집된 보도연맹원들은 마산형무소로 소집됐다가 마산항제1부두에서 LST에 실려 바다로 나갔다.
1960년 첫 합동 위령제가 신마산역 광장에서 열렸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떠오른 곳 역시 마산항 제1부두 인근이다.
@국토정보맵

2022년 11월 건립된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창원위령탑.

2022년 11월 건립된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창원위령탑.
위령탑은 사건 당시 LST(전차상륙함)가 희생자들을 싣고 간 마산만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꿈에서 만난 아들

노치수 회장의 할아버지는 일제 때부터 어장을 2군데 갖고 있었다. 육지에 그물 한쪽을 매어놓고 고기가 지나는 길목에 그물을 펼쳐놓는 정치망 어장이었다. 봄부터 여름까지는 멸치를 잡고, 가을부터 늦봄까지는 대구를 잡았다. 덕분에 큰아들 노상도(노치수 회장의 부친)와 작은아들 노현섭을 둘 다 일본에 유학시켰다. 노상도 선생은 부산 동래 공립 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2년에 독립만세 주모자로 지목돼 5학년 초에 퇴학당했다.

그 후 일본에서 대학을 마치고 일제의 징병을 피하기 위해 군수품을 생산하는 기계공업회사에 들어가 일했다. 해방 이후 귀국해 부산 대연동에 있는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1947년 4월 1일 마산공립중학교(현 마산고등학교)로 전근을 왔다. 노상도 선생은 고향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사회운동의 길을 걸었다. 재판 기록에 나오기를 같은 해 7월, 자택에서 제작한 방(榜)을 상남동 일대 11군데에 붙였다. 당시 미군정을 향해 ‘정권을 국민에게 넘겨라’, ‘토지를 농민에게 주어라’, ‘남녀평등을 실시하라’,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철저히 숙청하라’ 등의 주장을 담았다. 그때가 새로 부임한 학교에서 1학기를 마친 방학 중이었다. 또 어느 부락에서 주민들을 모아놓고 토지 무상 분배와 유상 분배에 대해 토론했다고 한다. 이것으로 징역 8월에 벌금 1만 원을 선고받았다.

노상도 선생은 48년에 다시 연행되었다. 이번에는 국방경비법 위반이었다. 4년 형을 받았다가 감형돼 49년 9월 만기 출소한 그는 꼼짝없이 보도연맹에 가입해야 했다. 전쟁이 일어나고 7월 중순 노상도 선생은 부역 나간다고 소쿠리와 삽을 들고 구산면 면소재지에 나갔다가 행방불명되었다. 노상도 선생의 아버지가 면사무소와 지서로 쫓아다녔지만 소용없었다. 수소문 끝에 특무대장을 만나 돈을 얼마라도 드릴테니 아들을 살려달라고 사정했다. 그때 특무대장이 했다는 말이 “당신 아들은 대한민국 땅을 다 줘도 못 살린다”였다.

당시 마산에서는 1950년 7월 15일 보도연맹원과 요시찰인들이 일제히 마산시민극장 등으로 소집되었다. 그곳에서 곧바로 마산형무소로 이송돼 구금된 상태로 1~2주 동안 CIC(특무대)에 의해 분류되었다. 그중 일부가 석방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LST에 실려 괭이바다에 수장되었다. 아버지 노상도 선생 역시 이때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노치수 회장의 할아버지는 아들이 없어진 날부터 새벽마다 목욕 재개한 후 새로 빤 옷을 입고 치성을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치성을 드리는 중에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아들을 보았다. 아들은 집 나갈 때 입은 옷 그대로였다. 그런데 바닷속이었다. 아들은 고래처럼 물 위로 솟구쳤다가 아래로 자맥질하기를 세 번 하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꿈에서 깬 할아버지는 그때 아들이 바다에서 죽었다는 것을 직감하고 치성드리기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노상도(왼쪽)와 동생 노현섭. 노치수 유족회장은 숙부 노현섭이 대학에 진학할 무렵에 찍은 것으로 알고 있다. @노치수

노상도(왼쪽)와 동생 노현섭.
노치수 유족회장은 숙부 노현섭이 대학에 진학할 무렵에 찍은 것으로 알고 있다. @노치수

“조국의 산천도 고발하고 푸른 별도 증언한다”

노상도 선생에게는 열 살 터울인 동생 현섭이 있었다. 노현섭은 일본 중앙대 법과를 졸업하고 마산상업고등학교(현 용마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이후 3개 부두 노조를 통합한 단일 지역 노조인 대한노총 자유연맹 마산부두노조를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형 노상도 선생과 같이 자신도 트럭에 실려갔지만 도중에 뛰어내려 목숨을 구했다.

노현섭은 형을 비롯해 마산 지역민들의 죽음에 대해 진상을 밝혀야겠다고 결심했다. 4·19 직후인 1960년 5월 24일자 일기에 노현섭은 이렇게 적었다. “상오 11시부터 하오 1시까지 ‘정부는 6·25 당시의 보련(保聯)관계자의 행방을 알려라!! 만일 죽였다면 그 진상을 공개하라!!’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김용국 군과 단 둘이서 침묵의 시위를 온 시내로 하였다. 1600명의 행방불명자의 영혼이 내 가슴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이 시위가 출발이었다. 6월 12일 유족회를 조직했고 8월 28일 신마산역 광장에서 합동위령제를 개최했다. 노현섭은 경남유족회 결성에 이어 전국유족회를 결성을 주도해 회장을 맡았다. 이로써 가라앉은 학살의 기억 이후 다시 떠오르는 진실규명 운동이 시작되었다.
시신이 떠오른 곳에 세워진 김주열 열사의 동상. 김주열 열사가 4·19혁명의 밑불이 되었고, 4·19 이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실규명 운동의 깃발이 올라간다.

시신이 떠오른 곳에 세워진 김주열 열사의 동상.
김주열 열사가 4·19혁명의 밑불이 되었고,
4·19 이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실규명 운동의 깃발이 올라간다.

마산지구 피학살자 합동위령제(1960년 8월 27일). 현재 마산합포구 월포 벽산 블루밍아파트 정문 앞이다. @마산문화원

마산지구 피학살자 합동위령제(1960년 8월 27일).
현재 마산합포구 월포 벽산 블루밍아파트 정문 앞이다. @마산문화원

배옥자 여사가 합동 위령제가 열렸던 장소에서 당시 성지여고 학생으로 위령제에 참석해 조시(弔詩)로김소월의 “초혼”을 낭독했다고 증언했다. 배 여사의 부친 역시 마산 보도연맹 희생자로 2023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규명 결정을 받았다.

배옥자 여사가 합동 위령제가 열렸던 장소에서 당시 성지여고 학생으로 위령제에 참석해 조시(弔詩)로김소월의 “초혼”을 낭독했다고 증언했다.
배 여사의 부친 역시 마산 보도연맹 희생자로 2023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규명 결정을 받았다.

사건명 경남 마산·창원·진해 국민보도연맹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경남 마산·창원·진해 국민보도연맹 사건〉(1기)
관련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경남 창원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1)〉(2기)
지역 경남 창원(마산, 창원, 진해)
사건 발생일 1950년 6 ~ 8월
진실규명 신청인 김○복 외 67명
진실규명 결정일 2009년 11월 3일
진실규명 인원 김○복 등 77명
결정사안 한국전쟁 발발 직후 경남 마산·창원·진해 지역에서 김상복 외 76명이 거주지 관할경찰 등에게 국민보도연맹원 혹은 인민군에 동조할 혐의가 있다는 이유 등으로 예비검속돼 1950년 7월경 살해된 사건의 진실을 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마산지구 CIC와 마산육군헌병대 소속 군인 그리고 마산·진해경찰서 소속 경찰
참고자료 김주완 《토호세력의 뿌리-마산현대사를 통해 본 지역사회의 지배구조》, 불휘, 2006
김주완(편저) 《1950년 마산의 참극 -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마산유족회 자료집》,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마산유족회, 2009
박영주 《그 질로 가가 안 온다 아이요 -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창원유족회 증언자료집》, 해딴에, 2015
영상: KTV 국민방송
사진: 강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