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산 박사리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1) 빨치산이 마을을 습격한 그날

경북 경산시 박사리 전경.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경북 경산시 박사리 전경.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마을에 들이닥친 하룻밤의 재앙

박사리 사건 학살의 현장. @박기옥

박사리 사건 학살의 현장.
①④는 피해자들의 집, ②는 정미소 마당, ③은 홰나무 보, ⑤는 대동초등학교. 빨간 점들은 당시 불에 탄 집이다.
@박기옥

경산 박사리 마을은 산골치고는 들이 꽤 넓었다. 팔공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은 사철 마르는 법이 없이 박사천을 이루어 들녘을 적시고 금호강으로 흘러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었으며 일요일마다 박사교회를 다니며 신앙을 키웠다.

사건이 일어난 그날은 한해 농사일이 끝난 초겨울이었다. 청년들은 예닐곱씩 동네 사랑방에 모여 앉아서 새끼를 꼬거나 장기를 두고 놀았다. 그리고 집집의 어린아이들은 대부분 잠에 빠져 있었다.

마을 한가운데에 정미소가 있었다. 그날은 정미소 주인 정원덕 씨의 장례날이었다. 정미기 벨트에 팔이 말려드는 사고를 당했는데, 출혈이 심했던 탓이었다. 몇몇 마을 사람들이 문상을 왔다. 정미소 울타리는 철망이 둘러쳐 있고, 그 앞에 널찍한 논 마당이 있었다.
맞은편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곳에서 끔찍한 살인이 일어날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한 사람이 없었다.
빨치산들의 주둔지 양시골.

빨치산들의 주둔지 양시골.

마을 사람들은 저녁 8시 무렵이었다고 기억한다. 총과 칼,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마을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마을 서쪽 성황당나무 아래에서 출발해 세 개 조로 골목을 훑어나가며 청년들을 끌어냈다. 사랑방과 초당방, 마을회관같이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연설회를 하니 모이라고 하거나 총으로 위협했다.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면 몽둥이와 칼을 휘둘렀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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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인 김○수(1934년생)

“빨치산들은 팔공산에서 저녁 8시경 몰래 마을로 내려온 뒤 마을 서쪽 경빈각단의 성황당 나무 주변에서 중대를 3개로 나누어 박사리 각지의 집집마다 들이닥쳐 사람들을 끌어낸 뒤 사람들을 몽둥이로 폭행하고 칼로 베거나 찔렀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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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인 정○환(1942년생)

“1949. 10. 9.(음력) 저녁 8시경 아버지가 가족들을 깨워 밖으로 나왔더니, 공비 10여 명이 있었다. 공비들이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지시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전부 세워두게 했는데, 아버지가 지서 쪽으로 도망을 갔다. 공비 2명이 도망가는 아버지를 쫓아가 칼로 찔러 살해하고 불이 붙은 짚단을 집에 던져 불을 질렀다.”



청년 최○택(당시 17세)은 그날 이웃집에서 장기를 배우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문을 열리더니 무기를 가진 사람들이 들어왔다. 15살 이상이면 손을 뒤로 묶어서 끌고 나갔다. 최○택은 엉겁결에 14살이라고 해서 잡혀가지 않았다. 최○택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들로 도망을 치면서 마을을 둘러보니 마을이 불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있었던 배○기는 새끼줄로 묶여 끌려 나갔다. 15살이었지만 덩치가 컸기 때문이다. 그는 휘두르는 칼을 순간적으로 손으로 막다가 손목이 잘려 나갔다.
진실규명 대상자 배O기가 상해를 입은 모습.

진실규명 대상자 배O기가 상해를 입은 모습.

스무 살 박○생은 사촌동생과 함께 가마니를 짜고 있었다. 하룻저녁에 두 장을 짜는 게 목표였다. 두 번째 장을 짜기 위해 새끼를 가마니틀에 걸 때였다. 동네 개들이 짖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세 사람이었다.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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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박○○(1949년생)

“박○생은 동생과 같이 가마니를 짜고 있을 때 무장공비 3명이 박○생을 정미소 앞마당으로 끌고 갔고 그곳에는 열너댓 명이 부채꼴 형태로 꿇어앉아 있었다. 공비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한 사람씩 끌고 가 칼로 죽였고, 박○생도 칼에 목덜미와 등에 칼을 맞고 쓰러졌다. 박○생은 공비들이 도망간 후 깨어났고, 박사교회로 옮겨져 트럭을 타고 도립병원에 후송되어 4개월 만에 퇴원했다.”


“누구냐?”
“니도 팔공산에 나무하러 자주 댕기제?”

그들은 총구를 가슴팍에 대고 박○생을 정미소 마당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는 이미 마을 사람들 십 수 명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문상객을 받던 정미소 대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문상 오는 사람은 잡아 놓고, 초상집 안에 있는 사람은 건들지 않았다. 끌려 온 사람들은 부채꼴 모양으로 앉아 있다가 한 사람씩 골목으로 잡혀갔다.

곧이어 비명 소리가 들렸다. 차례로 한 사람씩 그렇게 죽어갔다. 박○생은 대여섯 번째에 차례가 돌아왔다. 골목에 들어서자 몽둥이로 다짜고짜 머리를 치고 날이 선 일본도가 목덜미와 등을 내리쳤다. 그대로 쓰러졌지만 의식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뒤이어 딴 사람들이 끌려와 같은 방식으로 죽었다.

빨치산들이 집집마다 불을 지른 탓에 동네가 대낮같이 환했다. 불길에 놀란 개들이 짖고, 닭과 소가 울고, 뜨거워진 장독이 터져나갔다. 처마에서는 미처 달아나지 못한 참새들이 다급하게 날갯짓을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사방이 다시 조용해졌다. 박○생은 다친 몸을 끌고 집으로 갔지만 이미 불에 탄 재만 남아 있었다. 그는 다른 부상자들과 함께 박사교회로 옮겨졌고 새벽녘에 도립병원에 입원했다. 넉 달 만에 퇴원했으나 박○생은 그날 입은 상처로 인해 평생 동안 허리가 구부정한 채로 살았다.
진실규명 대상자 박O생이 상해를 입은 모습.

진실규명 대상자 박O생이 상해를 입은 모습.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

산에서 내려와 마을을 습격한 사람들은 빨치산이었다. 박사리 뒤로 팔공산 자락이 뻗어 올라가는데 박사리에서 직선거리로 5km 떨어진 양시골이란 곳이 그들의 근거지였다. 1949년 11월 29일, 빨치산들은 양시골에서 밤길을 도와 대한리와 신한리를 거쳐 박사리로 들어왔다. 그들은 총과 죽창, 일본도로 무장하고 마을의 15~60세 사이의 남자들을 골라 살해하고 집들을 불태웠다.
빨치산 이동 추정 경로.

빨치산 이동 추정 경로.

박사리사건유족회에 따르면 이날 습격으로 박사리와 인근 마을인 음양리, 대동리 등에서 살던 주민 38명이 사망하고, 28명이 중상을 입고, 집 108채가 불에 탔다.

1946년 대구 10월 사건과 1948년 말 시작된 대구 6연대 반란 사건 이후 대구 인근의 운문산과 팔공산, 영천 보현산으로 들어간 좌익 세력과 반란군들이 있었다. 이들이 2·7 사건 이후 남로당의 방침에 따라 형성된 소규모 무장 게릴라 조직과 결합하면서 영남 일대 빨치산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이와 함께 빨치산 토벌을 위한 군경의 작전 또한 잦았다. 박사리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1949년 10월 8일 40여 명의 빨치산이 경산시 하양면을 습격한 적이 있었다. 경찰은 1949년 10월 30일 토벌 작전에 돌입했다.
남침공비현황도(1949.12.15)_1기보고서 수록.

남침공비현황도(1949.12.15)_1기보고서 수록.

경산은 지리적으로 대구와 청도의 경계에 있었기에 운문산과 팔공산을 오가는 빨치산들의 이동 경로가 되었다. 이들은 사건 전후로도 박사리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곤 했다. 한 번은 논을 갈고 있는 황소를 보고 주인을 위협해 빼앗아 간 일도 있었다. 이런 탓에 평소에도 박사리를 비롯한 경산의 산골 마을 사람들은 빨치산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 이들에게 위협을 받아 밥을 해 주거나 옷, 곡식, 가축 등을 주면 ‘부역혐의자’로 몰리고, 그렇다고 섣불리 대항하면 ‘반동’으로 몰려 해코지를 당할 수 있었다.
미국 군사고문단 정보일지(G-2 Periodic Report, no.222).

미국 군사고문단 정보일지(G-2 Periodic Report, no.222).

어느 나뭇꾼의 말 한 마디

박사리 사건은 어느 나무꾼의 말 한 마디에서 시작되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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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인 박○철(1959년생)

“팔공산에 나무를 하러 갔던 동강리 주민이 빨치산을 만났는데, 빨치산이 ‘어디 사느냐? 신고하지 않으면 살려준다’고 하자, 그 주민이 ‘와촌면 박사리에 산다’고 거짓으로 답하였다. 동강리 주민은 팔공산에서 내려와 지서에 신고를 하였고 그 이유로 빨치산이 마을을 공격했다.”


박사리 근처 동강리에 사는 사람이 나무하러 팔공산에 들어갔다가 양시골에서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빨치산은 나무꾼에게 어디 사는지 물어보았다.
“박사리 삽니다.”

빨치산은 박사리 산다는 나무꾼의 말을 믿고 풀어주었다. 나무꾼은 산에서 내려온 후 지서에 신고했다. 군과 경찰의 대대적인 토벌이 시작됐고 양시골의 빨치산들은 모두 죽거나 생포되었다. 그중 몇 명이 달아나 겨우 목숨을 구했다. 박사리 사건은 이때 토벌로 죽은 동료 대원들에 대한 보복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후 경찰과 군이 다시 출동해 팔공산에서 추격전을 벌였다. 이때 생포한 빨치산 대원 한 명을 마을로 데려왔다. 마을 사람들 앞에서 공개처형하기 위해서였다. 열대여섯 정도의 앳된 얼굴이었다. 한 어머니는 자식의 원수를 갚겠다고 울부짖다가 정신을 잃었다.
박사리 사건이 살린 1949년 당시의 신문 기사.

박사리 사건이 살린 1949년 당시의 신문 기사.

진실이 규명되다

빨치산들의 습격이 있고 난 뒤 마을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었다. 돌아가신 분들을 제대로 장례 지내 모실 수도 없었다. 어떤 어머니는 사건 후에 아들 무덤에 자주 갔는데 한번은 여우가 묘를 온통 파헤쳐 놓았다. 여우가 시신을 건드리지는 않았지만 무명 베 바지를 이빨로 물어뜯어 갈갈이 찢어놓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집에서는 어머니가 힘든 농사일을 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장남은 일찍 철이 들어 학업을 포기하고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고, 형님을 잃은 동생들은 한국전쟁 때 군에 자원입대했다. 아버지를 잃은 어린아이들은 친척 집에 얹혀살았다. 그러다 더러는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헤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아픈 기억은 생존자들의 가슴 속에 오래 묻힌 채 함께 살아 있었다.

박사리 사건은 사건이 일어나고 60여 년이 흐른 2010년에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첫 진실규명을 받았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경북지역 적대세력 사건(경산군 와촌면 박한태 희생 사건)에 대한 조사를 통해 박사리 마을주민 박한태가 1949년 11월 29일 밤 빨치산에 의해 희생된 사실을 확인했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으로 박사리와 인근 마을주민 38명이 희생되었음을 확인하고 21명은 상해를 입었다고 규명했다. 이후 2022년 2기 진실화해위원회도 추가로 희생 사실을 확인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반공혼비(왼쪽), 반공희생자위령비(오른쪽).

반공혼비(왼쪽), 반공희생자위령비(오른쪽).

사건명 경북 경산 박사리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경북 경산 박사리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1)<2기>
지역 경북 경산시 와촌면 박사리
사건 발생일 1949년 11월 29일
진실규명 신청인 박○철 등 33명
진실규명 결정일 2022년 10월 18일
진실규명 인원 34명
결정사안 1949년 10월경 군경에 의해 빨치산 토벌이 진행된 후 그 보복으로 빨치산이 1949년 11월 29일 박사리 마을을 습격해 박사리와 인근 마을 주민 32명이 희생을 당하고 2명이 상해를 입은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을 결정한 사례
참고자료 박기옥 ≪박사리의 핏빛 목소리≫(홍익출판사, 사진 제공)
진실화해위, ‘경산 박사리 민간인 희생 사건’ 진실규명 결정(뉴스민, 2022. 10. 20)
진실화해위, 경산 박사리 희생 사건 진실규명 결정(TBC, 2022.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