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코발트광산 사건 바닥 없는 어둠 속으로 떨어지다

비문의 이름을 쓰다듬는 유족.

비문의 이름을 쓰다듬는 유족.

일제 자원수탈 현장에서 민간인 집단희생지로

경북 경산시 평산동에는 오래된 폐광산이 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가장 먼저 개발된 코발트광산으로 채광, 선광, 제련 시설을 모두 갖춘 대규모 광산이었다. 코발트는 포신이나 비행기 등에 사용되는 합금의 원료로 일제가 전쟁을 수행하는 데 꼭 필요한 전략자원이었다. 한때 광산 아래에 300여 호의 광산촌이 형성될 정도로 성업을 이루었다가 해방 직전 전황이 불리해지자 버리고 떠났다. 산을 수평과 수직으로 거미줄같이 파 들어간 갱도를 그대로 방치한 채였다.

이곳에서 1950년 7월 중·하순 무렵부터 8월 중순경까지 경산, 청도, 영동, 대구형무소 등지에서 끌려온 국민보도연맹원 및 요시찰 대상자들과 대구형무소 재소자 중 상당수가 집단희생되었다. 진실화해위에서 희생자가 1,800명을 상회할 것으로 추정할 뿐 정확한 전체 희생자의 수는 확인되지 않았다. 유족회와 시민사회는 희생자 수를 3,500명 이상으로 추정한다. 사건의 가해 주체는 경산·청도지역 경찰과 경북지구CIC 경산·청도 파견대, 국군 제22헌병대다.
수평갱도 내부.

수평갱도 내부.

수직굴 앞에서 총을 쏘아 빠트렸다

평산동의 이웃마을 갑제동 주민 문○○은 뒷산에서 소에게 꼴을 먹이고 있던 중 코발트광산 방향으로 덮개를 씌운 트럭들이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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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문○○, 면담보고(2008. 9. 11.)

“전쟁이 나고 7월 20일이 지났을 무렵 갑제동 산에서 소에게 꼴을 먹이고 있던 중 덮개를 씌우고 군인들이 올라탄 트럭들이 경산 코발트광산 방향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광산으로 올라간 차들은 수직굴 밑에 삼베 및 모시옷 등을 입고 실려 온 사람들을 하차시켰으며 약 10명씩을 수직굴로 데려가 총살을 시켰습니다. 당시 사살현장에는 헌병과 경찰이 있었는데 그때 광산에서 처형된 사람들은 경산에서 경찰에 예비검속된 사람들과 대구형무소에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곳까지 직선으로 2~3㎞ 거리였지만 그때는 온통 민둥산이었기 때문에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었다.

광산으로 올라간 차들은 수직굴 밑에 멈춘 뒤 삼베옷과 모시옷 차림의 사람들을 내리게 한 후 약 10명씩을 수직굴로 데려가 총살시켰다. 총에 맞은 사람들은 그대로 수직굴로 떨어졌다. 수직굴은 광석을 끌어올리는 일종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던 곳으로 두 개의 수평 갱도와 연결되었다. 계속되는 총살로 100여 m가 넘는 수직굴이 시신으로 가득 찼다. 그러자 근처 대원골 골짜기에 구덩이를 파고 총살을 계속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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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이○○, 면담보고(2009. 10. 1.)

“매형은 경산지역 방위장교로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사람들이 총살될 때 현장에 있었다고 합니다. 매형은 현장에서 누군지는 몰라도 총을 쏘라는 지시를 하였는데 도저히 총을 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매형은 계속된 총살로 광산의 수직굴이 가득 차자 수직굴 옆 골짜기에 땅을 파고 총살을 계속하였다고 했습니다.”

당시 총을 쏜 사람들은 경찰과 헌병들이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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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박○○, 면담보고서(2008. 9. 22.)

“전쟁 직후 200~300명 규모의 형무소 재소자들을 본인과 헌병대원들이 직접 인솔하여 칠곡 신동재로 데려가 사살하였으며 이후 형무소 근무를 교대하였는데 교대한 다른 소대원으로부터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재소자들을 사살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트럭이 오는 날에는 주변 동네 사람들이 집 밖으로 일체 나오지 못하도록 방송을 하고 총을 쏘아 위협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차 소리를 듣고 몇 대가 얼마 간격으로 올라오는지 알 수 있었다. 트럭은 보통 하루에 많게는 8대 이상이 올라왔다.
“1950년 7~8월경 헌병과 백골부대원, 경찰들이 대구형무소에서 끌고 온 사람들을 코발트광산으로 데려와 물이 차있던 수직 동굴 앞에서 처형하였는데 당시 처형장 50~100m 주변에는 본인을 포함해 청년방위대원들이 M-1 소총을 소지하고 경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구에서는 30~40명의 사람들을 실은 트럭이 하루에 많게는 8대 이상 왔으며 군경에 의한 처형은 약 10일간 지속되었습니다.” (참고인 김○○ 면담보고서 2008. 2. 11.)

트럭 짐칸에 굴비처럼 엮인 사람들이 약 30명씩 타고 그 위에 가마니를 씌웠다. 거기에 헌병이 짐칸의 네 모퉁이에 총을 들고 섰다. 그렇게 올라가면 40~50분가량 총소리가 났다. 사건 이후 광산 아래 대원골 골짜기를 따라 한동안 핏물이 흘러내려 그 물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애를 먹었다고 한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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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이○녕 진술조서(2006. 7. 21.)

“당시 현장에 지금보다도 시신의 수가 수도 없이 많았으며 인근 대원골 골짜기에는 시신으로 인한 핏물이 많이 흘러 인근 주민들이 아주 애를 먹었다.”

경산 코발트광산 전경.

경산 코발트광산 전경.

코발트광산 단면도(경산시의회, 2003). 산을 뚫어 내려간 수직굴과 광석을 운반하는 수평굴이 연결되어 있다. 수직굴 입구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최승호 〈경산신문〉 대표는 2000년 전후부터 경산코발트광산 학살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앞장서 왔다.

코발트광산 단면도(경산시의회, 2003).
산을 뚫어 내려간 수직굴과 광석을 운반하는 수평굴이 연결되어 있다.
수직굴 입구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최승호 〈경산신문〉 대표는 2000년 전후부터 경산코발트광산 학살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앞장서 왔다.

경산 코발트광산 발굴된 유해 및 도장.

경산 코발트광산 발굴된 유해 및 도장.

‘밤손님’이 가고 나면 경찰이 왔다

경산지역은 북쪽의 팔공산, 남쪽 청도의 운문산과 연결되는 곳으로 전쟁 전부터 빨치산들이 이동하는 경로상에 위치했다. 빨치산은 밤에 마을로 내려와 식량과 의복을 거둬가거나 남로당 가입을 종용했다. 혹은 삐라를 뭉텅이로 주면서 뿌리게 했다. 총구 앞에서 그들의 요구를 거절할 방법은 없었다.
날이 새면 어떻게 알았는지 경찰이 마을로 찾아왔다. 이때 검거되거나 자수한 사람들은 ‘부역자’가 되고, 요시찰 대상이 돼 경찰의 감시와 통제를 받았다. 이들은 대부분 좌익 활동과 상관없는 평범한 농민들이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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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신○○, 면담보고서(2009. 1. 2.)

“당시 경산지역에서 죽은 사람들 대다수는 실제 좌익활동과 무관한 사람들이었던 관계로 억울하고 아까운 죽음을 당했다.”



좌우대립이 격심해지고 형무소가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채워지던 1949년, 전국적으로 국민보도연맹이 조직되었다. 지역의 면장과 경찰들이 ‘빨갱이’ 활동을 하거나 그들에게 도움을 준 죄가 있는 사람이라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죄를 씻어준다고 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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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고○○, 진술조서(2007. 11. 29.)

“그냥 무엇인지도 모르고 죄를 면하게 해준다고 가입하라고 해서 가입을 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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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신○○, 면담보고(서(2009. 1. 2.))

“전쟁 전 빨치산 협조 및 남로당 가입혐의 등으로 경찰에 연행된 적이 있거나 검찰로 송치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


혹은 경찰의 위협에 어쩔 수 없이 가입하기도 했고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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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변○○, 진술조서(2008. 2. 28.)

“남로당에 가입한 사실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경찰이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하여 보도연맹에 가입을 하게 되었으며 가입절차는 가입신청서에 서명을 하거나 도장을 찍으면 가입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 밀가루를 준다고 해서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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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인 정○호 진술조서(2006.12.07.)

“큰형 정〇〇는 면에서 밀가루를 준다고 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했는데 이로 인해 평산지서 경찰에게 연행되어 창고에 1달간 갇혀 있다가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죽었다.”

, 좌익 사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단순히 가입하는 경우도 많았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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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손○○, 진술조서(2007. 10. 18.)

“보도연맹원 중에는 사상이 뭔지도 모르고 경찰에 의해 가입된 경우도 꽤 많았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렇게 보도연맹원이 된 사람들의 숫자가 경북에서만 3,332명을 훨씬 넘을 것이고, 영동지역은 약 500여 명으로 판단했다.

한국전쟁 직후 경산경찰서는 경북지방경찰국으로부터 보도연맹원 및 요시찰인들을 연행하라는 지시를 받고 경산지역 보도연맹원 및 요시찰대상자들을 예비검속해 경찰서 유치장, 수리조합 창고, 대구형무소 등에 구금한 후 갑, 을, 병으로 분류하여 병은 풀어주고 나머지는 코발트광산으로 끌고 갔다.
“1950년 모내기가 끝나갈 무렵 경산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으며 사찰계 형사와 육군 중위로부터 봉화불을 놓는데 동원된 사실이 있는지에 대해 1차례 조사를 받았습니다. 당시 그곳으로 끌려왔던 사람들은 조사를 통해 갑, 을, 병으로 분류되었으며 이후 갑과 을로 분류된 사람들은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처형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경산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약 20여 일간 경산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었으며 이후 야간에 호명되어 트럭에 실려 경찰의 호송을 받으며 현재 경산시청 인근에 위치한 수리조합창고로 이송되었습니다. 수리조합창고에 도착했을 당시 약 100명의 사람들이 구금되어 있었으며 수리조합창고에서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보름 이상을 주먹밥을 먹으며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생활하였습니다. 당시 수리조합창고에는 구금자 중 반장을 정해 놓고 엄격한 규율이 있었으며 CIC대원들이 창고 입구에서 경비를 하고 있었는데 한번은 CIC 중령이 창고로 찾아와 당시 경산지구 CIC 중대장이었던 대위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중령이 ‘여기 잡혀 있는 사람들은 누구야?’라고 하자 대위가 ‘병입니다’라고 대답하며 갑과 을은 이미 이동을 시켰다고 하는 이야기를 직접 들었습니다. 또 CIC대원들이 대화하던 중 ‘나는 오늘 총을 한 발도 쏘지 않았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는데 창고에서는 약 보름 정도 후 새벽에 풀려났습니다.” (참고인 김○○, 면담보고 2008. 8. 26.)
처형자로 분류된 이들은 육군정보국 산하 CIC 경산파견대와 경산경찰서 경찰, 제22연대 헌병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경산에 이웃한 청도 사람들도 희생

경산 바로 남쪽에 접한 청도에서도 운문산을 비롯해 높고 깊은 산이 많은 탓에 빨치산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래서 수시로 군경이 토벌 작전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좌익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연행돼 조사를 받거나 희생됐다고 한다.

당시 청도경찰서에 근무한 박○○은 “전쟁이 나고 남로당과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 삐라를 뿌리거나 봉화불을 올리는 데 동원된 사람들을 포함해 조금이라도 사상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은 군·경·우익청년단에서 연행을 하여 조사를 하였으며 죄가 있는 사람들의 경우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시켰다.”고 증언했다[참고인 손○○, 진술조서(2007. 10. 18)].

또 당시 대한청년단으로 근무했던 양○○은 “대한청년단이 경찰과 CIC청도 파견대를 도와 좌익활동을 한 사람들을 예비검속한 사실이 있으며 당시 예비검속된 사람들은 김〇〇의 집으로 연행되어 일시 구금된 후 그곳에서 경찰, 호림부대, CIC 등에 의해 조사를 받고 분류과정을 거쳤다”고 증언했다. 청도경찰서 유치장에서 처형자로 분류된 보도연맹원들은 트럭에 실려 경산 코발트광산으로 갔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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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이○○ 진술조서(2007. 11. 8.)

“어느 날 유치장에 잡혀 있던 사람들 중 보도연맹원들만 사라졌는데 그들은 트럭에 실려 경산으로 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선배 경찰들이 보도연맹원들을 경산 코발트광산에 집어 넣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사살된 청도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의 수는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 자료에 기록된 청도지역의 희생자가 291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최소 100명 이상이 경산 코발트광산으로 끌려와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대부분 평범한 농민들이었다. 단지 산 아래에 살아서 빨치산에게 피해를 입었던 것인데 도리어 부역혐의자가 되어 희생된 것이다. 경찰들조차 이 사건의 희생자 대다수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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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손○○, 진술조서(2007. 10. 18.)

“빨갱이들 때문에 민간인들이 피해를 많이 봤는데 당시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최소한의 재판절차도 없이 불법적으로 살해되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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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이○○, 진술조서(2007. 11. 8.)

“당시 보도연맹원들이 재판도 받지 않고 불법적으로 사살되었는데 그 사람들의 경우 재판을 받았으면 다 살았을 사람들이었다”

경산 코발트광산 수평굴 입구.

경산 코발트광산 수평굴 입구.

경산 코발트광산 사건으로 희생된 민간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배롱나무를 심었다.

경산 코발트광산 사건으로 희생된 민간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배롱나무를 심었다.

충북 영동에서 경산으로 와 희생된 청년방위군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7월 초 무렵 영동의 각 면별로 방위군들이 소집되었다. 이들은 전쟁 전부터 기초 군사훈련을 위해 정기적으로 소집되어 훈련을 받았다. 전쟁이 나자 영동군 내의 방위군들이 영동읍으로 소집돼 신병교육대에 입소했다. 그런데 밤에 자꾸만 내무반을 벗어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보도연맹원들이었으며 조사를 받기 위해 내무반을 이탈했던 것이었다.

전선이 영동까지 밀려 내려오자 신병교육대 전원이 영동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를 거쳐 경산으로 왔다. 경산중앙국민학교에서 교육을 받던 청년방위대원 중에서 보도연맹원들을 분리했는데 보도연맹원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강당에 따로 교육을 받았다.

당시 용화면 청년방위대 소대장이었던 강○○은 이같이 증언했다. “당시 보도연맹원으로 분류된 교육생 중 20여 명이 용화면 청년방위군이었는데 왠지 이들의 신상에 문제가 있을 것 같아 당시 교육대장인 중령을 찾아가 별문제가 없을 거란 약속을 받고 돌아왔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1950년 7월 20일 이후 약 100명 가량의 보도연맹원들이 경산에 주둔 중이던 헌병들에게 연행되어 갔으며 이들은 당시 경산의 금광으로 알려진 광산으로 끌려가 처형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증언했다[참고인 강○○, 면담보고서(2008. 10. 2.)].

역시 용화면 청년방위대원이었던 이○○도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전쟁이 나고 영동군 방위대원들이 영동읍으로 소집되어 영동읍의 강변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당시 훈련 받은 사람들의 규모는 수백 명에 달했다. 영동에서 약 2일간 훈련을 받은 후 영동역에서 화물기차를 타고 경산으로 이동하였는데 도착한 곳은 경산의 어느 국민학교였으며 그 국민학교에서 집에 보내줄 테니 보도연맹원들은 손을 들어라고 하며 보도연맹원들을 분리하였다. 이후 보도연맹원들은 행방불명되었고 죽었다는 소문만 들렸다”고 증언했다[참고인 이○○, 면담보고서(2009. 10. 8.)].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 결과 정확한 희생자 수를 확인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영동지역 청년방위대원들 중 보도연맹에 가입된 약 100명 정도가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신원기록편람》(청도경찰서, 1982) 중 1980년 11월 11일 작성된 ‘사실조사서’.

《신원기록편람》(청도경찰서, 1982) 중 1980년 11월 11일 작성된 ‘사실조사서’.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 과정에서 청도경찰서가 작성한 《신원기록편람》에서 청도지역 예비검속자가 경산코발트광산에서 처형되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상사건 개요’란에 “1948년 월일 불상경 남로당에 가입 운문산에서 입산공비로 활통타가 1950년 월일불상경 CIC에 검거되어 동년 7월 경산읍 소재 코발트폐광에서 처형된 자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구형무소에서 최소 1,000명에서 수천 명 희생

진실화해위원회는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경산, 청도, 영동지역의 보도연맹원뿐만 아니라 대구지역에서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일부와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들 상당수가 희생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조사보고서에서 밝혔다. 전쟁 전부터 보안법 위반자와 여순사건 관련자들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 수가 점차 늘어 1949년 8월 당시 대구형무소에는 수용 정원의 두 배가 넘는 3,068명이 수감돼 있었다.

당시 보안법 위반으로 수감돼 있던 허〇은 1950년 7월 31일 형무소 앞 빈터에서 헌병이 재소자들을 트럭에 싣고 이동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허〇 혼자 트럭을 타지 않은 것은 자기 이름이 잘못 호명돼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그는 간수들이 그날 실려 간 사람들이 경산 코발트광산으로 가서 희생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당시 대구형무소 간수로 근무한 하○○은 형무소에 헌병이 파견돼 있었음을 증언했다.

“1950년 7월경 대구형무소는 삼덕동 82번지 1호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군 형무소와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형무소에는 헌병대가 파견되어 있었으며, 헌병대장은 1등 상사였고 대원은 10여 명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대구형무소에는 수용인원을 초과할 만큼 재소자가 많이 있었는데 어느 날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이 형무소로 끌려왔으며, 그 사람들은 형무소에서 하루를 보내고 모두 경산 코발트광산으로 끌려가 처형당했다고 군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참고인 하○○ 전화통화보고서(2008. 2. 11.)]

진실화해위원회는 여러 조사 결과를 종합해 “당시 경산 코발트광산에서는 대구에서 끌려 온 대구형무소 재소자들이 헌병과 경찰, CIC 등에 의해 희생된 것은 사실로 판단되며 희생자의 수 또한 최소 1,000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결론내렸다.

다시 햇볕을 본 희생자들

전쟁이 끝난 후 동네 아이들은 수직굴 근처로 올라와서 놀았다. 아이들 중 하나가 시멘트로 된 사각형 입구에 돌을 떨어뜨리면 한참 후에야 ‘첨벙’하고 물소리가 났다. 어른들은 그곳에 절대 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아이들은 위험한 줄도 모르고 네모 모양으로 뚫린 수직굴 입구를 뱅글뱅글 돌며 놀았다. 혹은 땅 위로 드러난 사람 뼈를 주워 장난을 쳤다.

두개골의 내부와 치아의 흙을 털어내 땅에 내려놓은 후 갈빗대를 찾아 나란히 늘어놓고 팔과 다리뼈까지 제자리에 놓아 사람 모양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싫증이 나면 땅에 놓인 뼈들을 발로 헤집어 버리고 떠났다. [경산시의회(2003), 44~46쪽] 1950년 무더운 여름의 그 사건은 점차 잊혀져 갔다. 갱도에 고인 물속과 통로에 갇힌 수천의 유해들만이 끝 모를 고통 속에서 떠돌았다.

1993년 8월 <경산향토신문>(현 경산신문)의 최승호 기자가 경산 코발트광산 사건을 지역에 알리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2000년에 경산유족회가 결성되고, 2001년에는 드디어 갱도가 개방되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이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해 시멘트로 봉인된 수평굴 입구를 폭파한 것이다. 폭발과 함께 갱도에 가득 차 있던 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희생자의 유해를 품고 있던 산이 오래 참았던 숨을 내뱉는 것 같았다.
당시 3일 동안 유해 40구를 수습했고, 이 과정이 전국에 방송되었다. 2007년에 이르러 진실화해위원회의 공식 유해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다. 흉흉한 소문으로, 불길한 기억으로 전해져 오던 경산 코발트광산의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이 국가에 의해 공론화되는 계기가 됐다.

마침내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가 경산 코발트광산 사건에 대해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완전한 유해 수습이 과제로 남아 있다. 모든 유해가 오롯이 모셔지고 영령들이 편히 쉬는 날까지 그날의 학살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위령탑.

위령탑.

2022년 열린 경산 코발트광산·박사리 사건 화해 행사(위쪽) 경산 코발트광산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 모습(아래쪽).

2022년 열린 경산 코발트광산·박사리 사건 화해 행사(위쪽)
경산 코발트광산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 모습(아래쪽).

사건명 경산코발트광산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경산 코발트광산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1기)
관련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경북 경산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1)》, 2022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군위·경주·대구지역 국민보도연맹 사건》, 2009
지역 경북 경산시
사건 발생일 1950년 7월~8월
진실규명 신청인 이○준 외 125명
진실규명 결정일 2009년 11월 17일
진실규명 인원 도○팔 등 131명(희생자: 최소 1,800명 추정, 신원확인 127명)
결정사안 한국전쟁 발발 직후 1950년 7월부터 8월 사이, 경산·청도경찰서, 경북지구CIC 경산·청도 파견대, 국군 제22헌병대가 경산, 청도, 대구, 영동 등지에서 끌려온 국민보도연맹원 및 요시찰 대상자들과 대구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재소자 중 상당수를 적법한 절차 없이 경산시 평산동에 위치한 경산코발트광산 등지에서 집단적으로 살해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각 지역 경찰서, 경북지구CIC 및 각 지역 CIC파견대, 국군 제22헌병대
참고자료 경산시의회(2003), 《경산시 평산동 코발트광산 민간인학살 진상조사 청원심사결과보고서》
영상: KTV 국민방송
사진: 강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