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석달 사건 산골 마을에 닥친 한낮의 악몽

2022년 10월 24일 열린 석달마을 위령제. 현수막의 글씨가 사건의 기억처럼 생생하다.

2022년 10월 24일 열린 석달마을 위령제. 현수막의 글씨가 사건의 기억처럼 생생하다.

문경 석달마을(경북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동)은 배너미산(813m)과 단산(956m), 조항령(673m)으로 둘러싸인 깊은 산골마을이다.
사건 발생 당시 마을에는 24가구 127명이 살았다. 1949년 12월 24일(음력 11월 5일). 그날도 여느 산골 마을의 겨울처럼 낮부터 추위가 매서웠다. 그날 정오경에 무장 군인 70여 명이 마을에 들이닥치더니 다짜고짜 초가집에 불을 지르고, 뛰쳐나오는 주민들을 모두 마을 앞 논에 모아 놓고 특별한 이유 없이 소총을 갈기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사람을 확인사살한 후 마을 뒤 산모퉁이로 이동하면서 마을로 돌아오던 청·장년과 학생들에게도 총격을 가했다.

마을 주민 127명 중 81명이 현장에서 즉사했고, 부상자들 가운데 4명은 방치돼서 그리고 1명은 병원에서 치료 중에 숨을 거뒀다. 그날은 아무 특별할 것 없는 겨울의 하루 낮이었다. 벼락처럼 내리친 이 사건으로 희생된 마을 주민은 모두 86명이었다.
마을은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전체 주민 127명 중에서 86명이 희생되고 마을의 전체 가옥 24채와 가을걷이한 곡식을 저장해 놓은 창고까지 모두 불에 탔다. 마을 자체를 없애버리겠다는 의도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희생자 가운데 첫 돌이 지나지 않은 유아 5명을 포함해서 12세 미만 어린이가 26명이었고, 65세 이상 노인이 10명, 여자가 절반인 42명이었다. 그중 국민학생이 6명이나 됐고, 타지역 동민도 1명 있었다. 전 가족이 몰살된 집이 5세대, 여자 1명만 생존했거나 남자 1명이 생존했어도 고령이어서 대가 끊긴 경우도 6세대나 되었다.
석달마을이 있던 자리. 학살 장소인 옴팡논은 현재 사과밭이 되었다.

석달마을이 있던 자리. 학살 장소인 옴팡논은 현재 사과밭이 되었다.

“산 사람을 살려줄 테니 일어서라”

문경석달양민집단학살피학살자유족회 채홍달 총무는 그날 사건에 관해 날씨를 가장 먼저 기억했다.
“추운 날에는 지금도 마을 어른들은 ‘꼭 사변 날 때처럼 춥다’ 그라십니다.”
여기서 ‘사변’은 6‧25가 아니라 문경 석달마을의 학살을 말한다. 그는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다. 어머니 뱃속의 태아로. 그는 사건 이후 13일 만에 “기적처럼” 태어났다. 채홍달에게는 어릴 때부터 유복자라는 말이 따라다녔다.
“동네 어른들은 저를 볼 때마다 ‘야가 간가?’하고 안쓰럽다고 했어요. 그라고는 또 그때 이야기들 하시고…….”

어린 채홍달은 어른들 어깨너머로 한 마디라도 더 들어서 누가 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마을 사람들을 죽게 했는지 밝히겠다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채홍달은 학살에서 살아남은 홀어머니의 고생을 눈으로 보며 자라났다. 군 제대 후 울산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해 35년을 근무하고 퇴직했다. 그때가 2008년. 고향으로 돌아와 벼농사를 짓고 살면서부터 유족회 총무 일을 맡았다.

사건 당시 24가구 127명이 살았던 마을은 채 씨 집성촌이었다. 마을 전체가 하나의 대가족을 이루고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다. 학살 사건의 생존자 중 한 사람인 채홍연은 당시 열한 살이었는데,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지냈다. 그날 채홍연은 옆집의 세 살짜리 어린애와 놀고 있었다. 촌수로 할머니뻘 되는 아이 엄마가 점심으로 죽을 내올 때였다. 어디선가 호각 소리가 째지듯 울리고 “질러! 질러!” 하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둘러보니 주변 집에 불이 붙었고, 채홍연의 집 초가지붕에도 불길이 치솟았다.

집으로 뛰어가 살림살이를 꺼내는데 총을 든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채홍연은 그때 군인을 처음 봤다. 군인들은 채홍연을 비롯해서 사람들을 마을 앞 약간 옴팡진 논으로 몰아넣었다.
불길을 피해 뛰쳐나왔다가 군인들에게 몰려 논에 모인 마을 사람들은 추위와 공포로 몸이 벌벌 떨렸다. 대부분이 할아버지와 할머니, 엄마와 품에 안긴 아기, 어린이들이었다. 채홍연은 옆집 할머니가 가져온 이불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 겁에 질려 있었다. 그때였다.
“탕탕탕!”

군인들의 손에 들려 있던 M1 소총과 BAR(브라우닝 자동소총)이 불을 뿜었다. 사람이 퍽퍽 넘어갔다. 옆 사람 살점이 채홍연의 손등에 튀어들었다. 그때 마을 아주머니 한 분이 일어나서 “죽을 때 죽더라도 무슨 이유로 죽는지 알고나 죽자!” 하고 소리쳤다. 또 한 발의 총성과 함께 아주머니가 쓰러졌다.

채홍연과 옆집 할머니를 비롯해 스무 명 못 되는 사람들이 운 좋게 살았다. 그때 군인들이 “산 사람은 살려주겠다”라고 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논둑에 세웠다. 그런 다음 또다시 사격을 가했다. 총알이 채홍연의 오른팔 팔뚝을 뚫고 지나갔다. 채홍연은 순간 기절해서 서너 시간 동안 쓰러져 있었다. 그때 채홍달의 어머니도 총에 맞았지만 천행으로 목숨을 건졌다. 총알이 오른편 어깨를 관통했는데 뼈는 건드리지 않았다. 학살이 끝나고 장교 하나가 담배를 피우려는데 손이 떨려서 불을 못 붙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군인이 성냥을 그어 대줬다고 한다.
문경석달양민집단학살피학살자유족회 채홍달 총무.

문경석달양민집단학살피학살자유족회 채홍달 총무.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산 아래 굴 속에 몸을 숨기고 하룻밤을 지새웠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산 아래 굴 속에 몸을 숨기고 하룻밤을 지새웠다.

국민학교 아이들까지…

이 무렵 학교에서 아이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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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진술조서, 《2007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문경 석달 사건, 431쪽

사건이 발생한 시간과 관련해 당시 제2소대원이었던 노○○은 석달마을에 도착한 시간이 점심때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당시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을 목격했기 때문이라고 진술하였다.


그날이 방학식을 한 날이어서 아이들은 ‘방학책’을 들고 신나게 집으로 뛰어왔다. 그러다 마을로 넘어가는 산등성이에 올랐을 때, 경계를 서고 있던 군인들과 마주쳤다.
“야, 여기 더 있다!”
소리를 듣고 군인들이 몰려와서 아이들을 에워쌌다. 14명 되는 아이들은 군인에게 붙들려, 학살이 일어난 논 위쪽, 마을 뒷산 바위 앞으로 끌려 내려갔다. 거기에 이미 마을 아저씨와 형님들 일곱 명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리고 2차 학살이 일어났다. 청·장년 6명과 국민학생 6명이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때 시체 아래 깔려 생존한 채의진은 평생 학살 트라우마에 고통받으면서도 석달 사건의 진상규명과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헌신했다.
12세 미만 희생자 명단.

12세 미만 희생자 명단.

이 악몽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이 사건은 신성모 당시 국방부 장관이, 아이들이 다닌 김룡국민학교를 찾아올 정도로 중대하게 취급됐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국군이 아닌 ‘공비들에 의한 소행’으로 규정됐다. 대체 이 악몽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먼저 학살 주체는 국군 2사단 25연대 2대대 7중대 2소대 및 3소대 대원 70여 명이었다.

대부분의 신청인들은 사건의 가해 주체에 대해 군인 또는 국군이라고 했다. 가해자들이 군복과 철모에 군화를 신고 있었고, 소총(경우에 따라서는 M-1 총으로 특정)을 들고 배낭을 메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군인(국군)이라고 알아본 것이다. 또한 군인들에게 석달마을까지 길을 안내한 노○근에 의하면, 당시 그 사람들은 철모를 착용하고 소총을 휴대한 것으로 보아 군인들이라고 확신했고, 70여 명 정도 되어 보였다고 했다.

25연대는 1949년 9월 28일부터 1950년 5월 4일까지 태백산지구 일대에서 실시된 동부지구 공비토벌작전에 주력으로 참가한 부대 가운데 하나였다. 2소대와 3소대는 학살 전날(23일) 오후 4시에 각자의 주둔지인 점촌과 예천을 출발해, 이튿날 오전 10시 호계면 선암리(상선암)에서 합류했다. 여기서 점심을 얻어먹은 후 마을 청년 두 명을 길잡이로 세워 석봉리 석달마을로 향했다.

미군 자료에 나타난 당시 한국군 이동 경로(조사보고서 437쪽의 지도를 토대로 함)

미군 자료에 나타난 당시 한국군 이동 경로(조사보고서 437쪽의 지도를 토대로 함)

마을에 이르러 지휘관들은 마을을 포위하고 집집에 불을 놓게 했다. 소대원들이 주저하자 지휘관들은 ‘명령불복종’이라고 을러댔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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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당시 제2소대원 노○○ 진술조서

“그 당시에는 무슨 이유 때문에 불을 지르라고 하였는지 전혀 몰랐다. 다만 사건 발생 이후 그 마을 주민들이 마을 뒷산에 있던 공비들에게 식량 등을 보급해줘서 불을 질렀다고 하는 소문만 들었다.”


이들은 원래 석달마을 주변의 산길을 따라 수색정찰을 하고 갈평리로 이동하라는 명령에 따라 출발했다. 석달마을은 수색정찰로상의 단순 경유지였을 뿐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지휘관들이 석달마을 사람들이 공비들에게 협력했을 것이라는 짐작만으로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과정에서 가해 이유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로 군인들이 한 말을 기억하고 있는 신청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에 의하면 군인들은 마을 주민들을 ‘빨갱이’라고 하면서 또는 ‘빨갱이’들에게 밥을 해준 사람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하면서 총을 쏘았다고 한다.

여전히 남은 과제들

문경 석달마을 학살사건은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에 착수한 지 1년 만인 2007년 상반기에 진실규명을 이뤄냈다. 당시 채의진 유족회장이 미국의 방선주 박사로부터 미군 자료를 입수하는 등 많은 자료와 증언을 정리해 두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채홍달은 진실규명 결정에 바로 이어 개인 명의로 이의신청을 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규명 결정과 함께 발표한 권고사항에 배·보상 문제가 빠져 있는 등 미흡한 부분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진실규명을 통해서는 ‘범인’이 밝혀졌을 뿐입니다. 먼저 가해자의 사과가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 전체 피해자를 위한 위령비 건립, 피해자에 대한 배상 등 아직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이제 사건 생존자들도 거의 돌아가시거나 연로하셔서 증언할 수 있는 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진실의 여정은 여전히 먼데 산골의 겨울해가 1949년의 그날처럼 짧기만 하다.
문경양민학살어린이위령비

문경양민학살어린이위령비.

'어린이 위령비'에 새겨진 어린이 희생자 명단. 첫 돌도 되기 전에 희생돼 ‘남아기’, ‘채아기’ 등으로 기록된 이름이 보인다

어린이 위령비에 새겨진 어린이 희생자 명단. 첫 돌도 되기 전에 희생돼 ‘남아기’, ‘채아기’ 등으로 기록된 이름이 보인다.

문경 석달 양민희생자 합동위령제(2019)

문경 석달 양민희생자 합동위령제(2019).

사건명 문경 석달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문경 석달 사건≫(1기)
지역 경북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현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동)
사건 발생일 1949년 12월 24일(음력 11월 5일)
진실규명 신청인 채○진 외 27명
진실규명 결정일 2007년 6월 26일
진실규명 인원 김○춘 외 86명(희생자: 김○춘 외 85명)
결정사안 1949년 12월 24일(음력 11월 5일) 정오 무렵, 국군 제2사단 제25연대 제2대대 제7중대 제2소대 및 제3소대 소속 군인 70여 명이 경상북도 문경군(현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 앞 논(제1현장)과 마을 뒤 산모퉁이(제2현장)에서 당시 석달마을 주변에 출몰하고 있던 공비들(또는 빨치산들)에게 마을 주민들이 음식 등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고 단정하고서, 가옥 24채를 전소시키고 주민 86명을 집단총살한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한 사례
가해주체 국군 제2사단 제25연대 제2대대 제7중대 제2소대 및 제3소대
참고자료 영상: KTV 국민방송
사진: 강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