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주와 소작인 갈등이 전쟁을 만나 폭발했다
한반도 남서쪽에 자리한 전남 신안군은 크고 작은 1,025개의 섬(유인도 72개,
무인도 953개)으로 이루어졌다. 단일 지방자치단체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섬을 가진 곳이다. 신안군은 전국에서 가장 갯벌이 넓고(331㎢), 육지는 여의도 면적의 약
78배에 이르며, 바다는 전남 전체 면적보다 더 크다. 이처럼 넓은 면적에 수많은 섬으로 이뤄진 신안군은 제주도나 진도처럼 하나의 섬에 고유한 생활·문화 공동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행정구역(2개 읍, 12개 면)에 속해도 서로 다른 문화 권역이 형성돼 있다.
임자면은 중동의 사막 지형과 흡사한 지형을 가져 사구가 잘 형성돼 있으며,
모래 속의 물이 모여 만들어진 웅덩이가 있다. 현지인들은 이 웅덩이를 물치 또는 모래치라 부른다. 모래의 영향을 받아 자연산 들깨가 많이 생산된다고 해서
‘임자(荏子)’로 부르게 되었다(<신안군지>, 2024).
신안군은 1896년 지도군이 설치되면서 지도군 관할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돼 무안군에 편입됐고, 1969년 분리돼 지금의 신안군이 됐다. 한국전쟁 당시 신안은 무안군에 소속돼 있었다. 당시 무안군청과 무안경찰서도 목포에 있었다. 육지부 지역은 무안경찰서에서 관할했지만
섬 지역은 목포경찰서에서 관할했다.
다양한 문화와 복잡한 행정 체계를 가진 신안군이지만 농민운동이라는 공통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하의면의 경우 조선시대 왕조의 소유물이었던 땅을 되찾기 위한 농지탈환운동이 일제강점기를 거쳐 약 300년 간 이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암태면에서 비롯해 인근의 자은면, 지도읍, 도초면에서 대규모 소작쟁의가 일어났다. 조선 후기부터 이어져 온 지주와 소작인의 갈등은 일제강점기에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한국전쟁 기간에 이르러 극단적인 형태로 폭발했다.
또한 한국전쟁 전부터 일본 유학생들이 거주하는 섬을 중심으로 신안군에서 좌익세력이 넓게 형성되었다. 그런 배경으로 인민군 점령 기간부터 수복 전까지 지역의 좌익세력들이 부유층, 경찰, 공무원, 우익인사, 기독교인 등 주민들을 집단적으로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특히 가장 많은 집단희생 사건이 일어난 곳이 바로 신안군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임자면이다.
신안군 최대의 학살 현장 된 임자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한 달도 안 됐을 때 인민군은 이미 한반도 서남해 지역까지 내려왔다. 1950년 7월 24일 인민군 6사단이 목포를 점령했고, 소규모로 신안군의 지도읍, 압해면을 거쳐 자은면, 임자면 등지에서 며칠 동안 머물다가
목포로 돌아갔다. 인민군이 왔다 간 뒤부터 신안군은 좌익들의 세상이 되었다. 인민군이 목포를 점령하자 1950년 7월 신안, 무안지역에서 검거돼 목포 앞바다에서 수장당한 보도연맹원 가족들이 경찰 가족들을 보복 살해했다.
[ 주○○ 진술 2022. 11. 1. ]
가해 주체는 마을 좌익이었음. 한국전쟁 전 보도연맹원들이 목포로 잡혀가 죽고 그 유가족들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좌익이 되었음.
이어 신안, 무안 일대의 좌익세력이 군‧면‧리 단위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우익인사들을 체포‧구금‧살해하기 시작했다.
임자면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 발생 장소‧시기.
수복이 늦은 만큼 좌익에 의한 희생 사건 발생 기간도 길어졌다.
1950년 10월 2일, 목포가 수복됐지만 신안은 10월 중순까지도 수복되지 않았다. 게다가 섬마다 수복 시기가 달라 이 기간에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서울 수복 이후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직감한 좌익은 우익인사뿐 아니라
일반 지역주민까지도 살해하기 시작했다. 신안에서 본격적인 수복 작전이 시작되자 좌익세력은 영광 불갑산 등지로 빠져나갔다. 수복 이후에는 또다른 학살이 이어졌다. 목포 경찰이 신안지역으로 들어와 인민군 점령기 당시 좌익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지서로 연행해 구금한 뒤 진리해상이나 마을 등지에서 살해한 것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신안군에서 발생한 국민보도연맹 사건, 적대세력 사건,
부역혐의 사건 등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의 희생자를 1,600명 이상으로 추정했다. 임자면에서만 1,300여 명이 희생됐다. 당시 임자면에 1만여 명이 거주했으니 자그만치 인구의 13%가 한국전쟁 동안 군경과 좌익세력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호국영령추모탑 앞에서 진행된 임자면 현충일 기념식.
임자면 6·25참변 순사자 현황.
호국영령 추모의 탑.
임자면순사자명부(荏子面殉死者名簿)는 1955년 제작된 명부이다.
한국전쟁 후인 1952년부터 임자면사무소 주도로 면사무소 직원들이 각 마을을 방문해 유가족과 이장 등에게 설명을 듣고 조사했다. 1961년까지 수정‧첨삭해 최종 완성되었다. 명부에는 한국전쟁 당시 좌익에 의해 희생된 마을주민 992명,
순직 경찰관 유가족 23명, 기타 사망자 180명, 대한청년단 단원 212명의 명단이 기재돼 있다.
1차, 2차 시기에 걸친 학살
임자도에서는 해방 이후 강○, 강○○, 주○○ 등을 중심으로 좌익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1950년 7월 24일 인민군이 목포를 점령하기 하루 전 임자면 경찰은 부산으로 후퇴했다. 경찰이 사라지자 임자면의 좌익들은 면사무소를 차지하고 인민위원회와 내무서 등을 조직했다. 임자면에 인민군이 들어온 것은
1950년 7월 말쯤으로 추정된다. 당시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인민군은 임자면에 며칠 동안 머물다 나갔으며, 인민군에 의한 희생 사건은 없었다고 한다.
[ 주○○ 진술 2022. 11. 1. ]
군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총을 든 인민군은 배를 타고 임자면에 들어와 하룻밤 정도 후에 나갔음.
임자면에서 식량을 구해서 갔는데 시기는 모르지만, 더웠던 기억이 남. 인민군은 좌익들에게 사람들을 죽이지 말라고 할 정도로 인민군에 의한 피해는 없었음. 인민군이 가고 나서 좌익들이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음.
[ 남○○ 진술 2022. 11. 1. ]
임자면에 상륙한 인민군이 사람들을 잡아가거나 죽인 일은 없었음. 가해자들은 지방 폭도들이었음.
임자면의 대표적인 좌익은 강○○, 강 ○, 탁○○,
김○○ 등이 있었음.
학살을 두고 좌익들은 서로 갈라져 대립하기도 했다. 우익 인사들을 모두 죽이자는 ‘사파’와 이에 반대하는 ‘생파’로 갈라졌고 이는 좌익 내부의 갈등과 주민 희생으로 이어졌다.
인민위원회를 조직해 신안의 행정과 치안을 장악한 지방 좌익들은 가장 먼저
공무원, 경찰, 부유층 등 우익인사들을 선별해 진리 농협창고에 구금했다.
구금된 우익인사들은 며칠 후 진리선착장에서 배에 실려 진리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이후 추석이 지난 음력 8월 23일(양력 10월 4일) 전후 앞서 희생된 우익인사의 가족들이 진리선착장에서 배에 실려 진리 앞바다에 수장되거나 대기리 백산들에 매장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7월 중순에서 8월까지 우익인사를 검거해 진리 앞바다에 수장한 시기를 1차 시기라고 부른다. 추석이 지난 후 비가 많이 내리는 날에
남은 가족들이 대기리 백산들로 끌려가 희생된 시기가 2차 시기다.
임자면 대기리. 면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3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동네 앞쪽에 넓은 농지가 형성돼 있다.
만석꾼 집안이 몰살당했다
- 대기리 김귀성 가족 15명 희생
김귀성 가족은 한국전쟁 당시 대기리에 살았고, 김귀성의 둘째 부인 조괘일과 자녀들은 조삼마을에 거주했다. 김귀성 집안은 만석꾼이라 불렸다. 집안에 일꾼이 3∼4명 있었고 대기리 논밭 대부분이 김귀성 집안의 토지일 정도로 부농이었다. 김귀성의 동생 김지배는 서울 서대문경찰서에 근무하는 경찰이었고, 전쟁 발발 후 집에 내려와 가족과 함께 지냈다. 1950년 8월경 밤 빨간 완장을 차고 머리에 띠를 두른 좌익 5∼6명이 김귀성 집으로 찾아왔다. 가족들을 포승줄로 묶어 끌고 가
진리 창고에 가뒀다. 갇혀 있던 가족 중 김귀성과 김국배, 김지배 3명은 진리 앞바다에 수장되었고, 나머지 가족들은 대기리 백산들 모래사장에서 죽창에 찔리고 몽둥이에 맞아 희생되었다.
좌익들은 김귀성의 첫째 부인 유선임을 몽둥이로 구타해 죽였고 둘째 부인 조괘일은 임신한 상태로 희생되었다. 김귀성은 저동마을 사람과 함께 묶였는데, 경찰이었던 저동마을 사람이 칼을 들고 있어 줄을 끊는 바람에 두 명 다 헤엄쳐 도망쳤다고 한다. 김귀성은 살아 돌아온 후 약 2개월 동안 산속에 숨어 지내다 밥을 가져다주던 여자아이가 좌익들에게 김귀성이 숨어 있는 장소를 말해줘 다시 잡혀가
대기리 백산들에서 희생되었다.
김삼기(1941년생, 김귀성의 딸)는 “아버지는 큰아들 김종국이 농사를 짓게 했고 나머지 자녀들은 공부를 많이 시켰다. 삼촌 김지배는 당시 서울에서 경찰로 근무했고 삼촌 김용배는 교사였다. 전쟁 발발 후 아버지가 목포에 집을 구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좌익들에게 붙잡혀 먼저 진리 창고에 갇혔다”고 증언했다.
당시 10살 소녀였던 김삼기는 가족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았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희생되었는지 들었다.
임자면 삼두리. 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6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동쪽에는 삼각산, 북쪽에는 불갑산이 가로놓여 있고 남쪽으로 농경지가 형성돼 있다.
“젊고 가난한 사람이 좌익이 돼
부자들을 죽이고 재산을 차지했다”
- 삼두리 노운빈 가족 23명 희생
1950년 음력 8월 20일 아침 좌익들이 삼두리 노운빈의 집으로 몰려와 가족을 구타한 뒤 데리고 나갔다. 그날 오후 가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수소문해 삼두리 해안에서 시신을 수습했다. 시신에 구타당한 흔적과 죽창에 찔린 흔적이 있었다.
정○○(1936년생, 노운빈의 손주며느리)는 당시 15살이었다. 그는 “노운빈 가족이 삼두리에서 가장 재산이 많았다. 좌익들이 밤에 노운빈 집으로 찾아와 가족들을 묶어서 몽둥이로 때리고 죽창으로 찌르면서 삼두리 마을 불안 모래사장으로
끌고 가서 죽였다. 좌익들이 노운빈은 나이가 많아서 살려주었다가 나중에 다시 찾아와서 결국 죽였다”고 증언했다.
김○○(1935년생, 이웃)는 “삼두리에서 젊고 가난한 사람들이 좌익이 되었고 부자들을 죽이고 그 집을 차지하려고 했다”고 진술했다. 또 “삼두리에서는 전쟁 전 경찰들과 함께 좌익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잡는데 공을 올렸던 유○○가 제일 먼저 희생되었고, 좌익들은 그 집을 사무실로 사용했다”고 한다.
임자면 광산리.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5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마을 중앙에 진리와 독우를 연결하는 도로가 있다. 동북쪽에는 병산을 등지고 있고,
남쪽에는 작무산과 불갑산이 가로놓여 있다.
자고 일어나 보니 온 가족이 사라져…
- 광산리 김제수, 김중수 가족 7명 희생
김길순(1942년생)의 가족은 광산마을에 거주하며 농사를 지었다. 어느 날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동생만 남아있고 가족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무서워서 울면서 나와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간밤에 가족들이 전부 좌익들에게 끌려가 대광해수욕장 부근 부엉산 아래에서 생매장당해 죽었다고 했다. 집에서 200m 정도 떨어진 작은아버지 집에 가 보니 사촌 형 김태권이
울고 있었다.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도 간밤에 같이 끌려가서 죽은 것이다.
어른들이 시신을 수습해 주었는데 그때 광산마을에서 아홉 가족이 한꺼번에 희생되었고 시신 수습 당시 모래사장 구덩이에 다른 가족 시신들과 같이 떡시루처럼 포개져 있었다. 김길순은 그때 시신 코와 눈에 모래가 많이 들어가 있었으며
냄새가 났던 것이 지금도 기억난다고 증언했다. 사건은 1950년 10월 8일
(음력 8월 27일)경 일어났다. 김길순의 가족과 작은아버지네 가족 7명은 임자면 광산리 수문 앞 백사장에서 지방 좌익에게 희생되었다. 기독교인, 우익인사 및
그 가족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임자면 진리. 동쪽 수도와 연결하는 선착장이 있어 교통의 요충지이며,
1개의 자연마을인 진리로 형성되었다.
가족 걱정에 고향에 온 경찰, 일가족 희생…
- 진리 김진성 가족 10명 희생
김진성과 그의 장남 김천록은 임자면 진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둘째 아들 김만록은 분가하여 어업에 종사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좌익들이 김만록을 포함하여 반공청년단 활동을 하던 마을 주민 40여 명을 임자지서 유치장으로 끌고 가 고문하였다. 당시 김만록의 동서가 좌익활동을 하다가 지서장으로 왔다. 그는 김만록과 동서지간임에도 살생부에 이름을 적어 죽이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음력 6월 30일(양력 8월 13일) 좌익들이 지서 유치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줄로 묶어 진리 선착장으로 끌고 가 배에 태워 진리 앞바다에 수장시켰다. 김진성 가족 중에 김만록이 첫 희생자였고, 이후 가족 10명도 김진성이 재산이 많고 김만록이 반공청년단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모두 희생되었다.
김진성의 아들 김○○는 청와대에 근무하는 경찰이었다. 그는 전쟁이 발발하고 가족들이 걱정돼 임자도에 내려왔다가 좌익들한테 잡혀 지서에 갇혔다.
그때 지서에서 먼저 잡혀 온 형들을 만났고 며칠 뒤 큰형과 둘째 형이 차례로 불려 나가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큰형수로부터 가족들이 전부 좌익들에게 잡혀서 희생됐다고 들었다. 김○○도 좌익들에게 끌려 나왔는데 설사를 핑계로 빠져나와 작은 고깃배를 타고 도주했다. 수복 후 가족들을 찾아다녔으나 결국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임자면 이흑암리. 동쪽 수도와 연결하는 선착장이 있어 교통의 요충지이며,
1개의 자연마을인 진리로 형성되었다.
임신 중인 딸 위협당하자
어쩔 수 없이 끌려간 아버지
- 이흑암리 화산마을 정태석 가족 4명 희생
화산마을의 정태석은 전쟁이 터진 후 좌익들을 피해 뒷산에 숨어 지냈다. 식사 때가 되면 집에 내려왔는데 어느 날 좌익 2명이 죽창을 들고 집에 찾아와 임신 중인 딸
정○○을 위협했다. 벽장에 숨어 있던 정태석이 그 소리를 듣고 나왔다가 끌려가
진리 농협창고에 갇혔다. 정○○이 농협창고로 밥을 싸들고 가 보니 이미 어머니를 비롯해 다른 가족들도 잡혀 와 있었다. 이후 정태석 가족 4명은 이흑암리 화산마을 앞 뻘등으로 끌려와 죽창에 찔린 후 매장되었다. 정○○ 부부가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해 화산마을 악새바구 산에 매장했다.
형을 못 찾으니
동생과 그의 처자식을 먼저 죽였다
- 화산마을 윤덕보 가족 8명 희생
화산마을 윤덕보와 아들 윤상겸의 가족은 부유했기 때문에 좌익들의 표적이 되었다. 1950년 8월경 한밤중에 좌익들이 집으로 찾아와 윤상겸을 찾다 보이지 않자
대신 윤상겸의 동생인 윤상찬과 자녀들을 끌고 가 마을 앞 구덩이에 매장해서 죽였다. 다음날 윤상겸과 윤덕보, 정은임(어머니) 등 나머지 가족도 끌고 가서 매장해
모두 8명이 희생되었다. 마을 주민들이 윤덕보 가족 8명의 시신을 수습해
조삼마을 뒤편에 묻어주었다.
윤○○(1940년생, 윤덕보의 아들)는 이렇게 증언했다. “1950년 음력 8월 27일경 한밤중에 좌익들이 집에 쳐들어와 큰형 윤상겸을 불렀다. 큰형이 벽장에 숨고
형수가 남편이 없다고 대답하자 좌익들은 셋째 형 윤상찬과 형수, 딸 윤유아,
넷째 형 윤응순을 끌고 가 화산마을 앞 갯벌에 미리 파놓은 큰 구덩이에 손을 묶고 생매장했다. 큰형은 다음날 콩밭에 숨어 있다가 발각돼 화산마을 동각에 밧줄로
묶여 있었고 그날 저녁 아버지, 어머니, 큰형수까지 잡혀가 마을 앞 갯벌구덩이에 함께 생매장되었다. 화산마을에 음력 8월 26일에 제사를 지내는 집이 일곱 집이다. 실제로는 그날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다.”
“물레바퀴는 돈다. 항상 너희 세상이 되진 않는다”
- 이흑암리 유윤식 가족 5명 희생
유윤식은 일제강점기에 아버지 유용준과 함께 나진에서 토목건축일을 했다.
유○○과 유윤식은 해방 후 고향인 이흑암리에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살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대한청년단원으로 활동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유윤식은 다른 대한청년단원들과 함께 흑산도로 피신했고, 가족들을 만나러 잠시 이흑암리에 돌아왔다가 좌익들에게 끌려갔다. 유윤식은 이후 진리 창고에 갇혀 있다가
진리 선착장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유윤식이 죽고 약 한 달 뒤 김귀례(아내),
유병조(아들), 유희금(딸), 유희숙(딸)도 끌려가 진리 창고에 갇혀 있다가
진리 선착장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유○○(1938년생, 유윤식의 조카)이 기억하기에 고향 이흑암리는 원래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좌익 사상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전쟁이 나고 좌익에서
모든 재산을 나눠 가진다고 하니 사람들이 완전히 변해 버렸다. 유윤식이 죽고 난 뒤
좌익 집안의 한 여성이 그 집을 교실처럼 사용했다. 유○○의 언니가 그 사실을 알고 화가 나 그 여성과 싸웠다. 유○○의 어머니는 그 좌익 집안 여성에게
“물레바퀴는 돈다. 항상 너희 세상이 되진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토록 많은 희생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2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 신안군 임자면에서 발생한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 269건의 가해 주체는 모두 지역 출신의 지방좌익이다.
다른 내륙 지방과는 달리 신안지역에 들어온 인민군은 2〜3일 머물다 돌아갔기 때문에 희생자들은 모두 지역 출신의 지방좌익에게 희생되었다. 신안지역에는 여전히 가해자와 피해자 유족들이 공존하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도 신청인과 참고인들은 증언할 때 가해 행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지방좌익‘으로만 진술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안군 임자면이라는 하나의 섬에서 이처럼 많은 희생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딱 집어서 몇 가지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결과를 종합해 볼 때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이어져 온 계급적 갈등, 우익 인사와 경찰, 공무원과
그 가족이라는 이유, 경제적으로 부유하다는 이유 등이 전쟁 상황과 혼재돼 작용한 것으로 판단했다.
사건명 |
전남 신안군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5) -임자면을 중심으로- |
사건조사보고서 |
전남 신안군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5) -임자면을 중심으로- |
관련 사건조사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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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남 신안군 임자면 |
사건 발생일 |
1950년 7~10월 |
진실규명 신청인 |
김○해 등 47명 |
진실규명 결정일 |
2024년 4월 16일 |
가해주체 |
지방좌익 |
결정사안 |
1950년 8월부터 10월까지 전남 신안군 지도읍에서 김○홍 등 52명이 경찰・공무원・우익인사와 그 가족, 경제적으로 부유하다는 이유 등으로 지방좌익에게 희생된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을 결정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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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오마이뉴스, 2024. 4. 8. 〈임자도 민어 낚시배에 실린 시신… 피바다로 변한 섬〉
신안군지편찬위원회, 《신안군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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