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경찰부대 사건 인민군 행세하며 해남,
완도 일대 휩쓴 나주경찰부대

1969년 항공 사진에 나타난 전남 완도군 청산면 도청리와 도청항. @국토정보맵

1969년 항공 사진에 나타난 전남 완도군 청산면 도청리와 도청항.
@국토정보맵

한국전쟁 발발 이후 인민군은 빠른 속도로 남하해 그해 7월 23일 광주를 점령했다. 인민군이 광주에 이어 나주, 화순, 영암, 목포, 해남, 강진을 계속 침공해 오자
전남 서남부 경찰은 경찰서별로 후퇴를 서둘렀다. 인민군이 7월 25일 구례, 순천, 벌교를 점령하고 26일 여수까지 들어오면서 육로를 통해 부산으로 후퇴하기는 불가능해졌다. 서남부 경찰이 전남 남부 지역에 고립돼 버린 것이다.
전남 서남부 경찰 지휘부는 ‘현 위치에서 사수하다 도서 지방으로 후퇴한다’는
작전 계획을 세웠다.

붉은 완장 차고 해남읍 들어온 나주경찰부대

나주 경찰 역시 인민군이 광주에 침입했다는 전황을 파악하고, 1950년 7월 23일
오전 8시 나주경찰서에 집결했다. 당일 오후 3시, 200여 명이 쓰리쿼터 1대와 징발한 화물차 7대에 나눠 타고 후퇴 길에 올랐다. 그러나 동부 지역이 차단돼 육로를 통해 후퇴하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주 경찰은 관내 사수 작전방침에 따라 움직이되 계속 인민군에게 밀리면 해로를 통해 후퇴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완도를 목적지로 삼아 해남읍으로 들어왔다.

나주경찰부대원들은 국방색 전투복과 전투모, 검은색 농구화를 착용하고 개인별로 38식, 99식, 카빈총, M1 등의 소총을 휴대한 채 7월 25일 오전 해남읍에 진입했다. 부대원 100~200여 명이 차량 10~20여 대를 타고 우슬재를 넘어왔다.
그런데 경찰들은 붉은 완장에 붉은 머리띠를 메고 인민가를 부르며 들어왔다.

인민군을 본 적이 없는 해남 사람들은 진짜 인민군인 줄 알고 “인민군 만세”를 외치며 이들을 맞았다. 이때 경찰은 해남읍이 인민군에게 완전히 장악됐다는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었다. 우슬재를 넘은 나주경찰부대는 현재의 우슬저수지에서 대열을 정비하고, 네 방향으로 해남읍을 포위하듯 들어왔다.

전남 해남읍 나주경찰부대 진입로와 주민 희생지. @1기 조사보고서

전남 해남읍 나주경찰부대 진입로와 주민 희생지.
@1기 조사보고서

“우리가 누구냐” 물으며 해남읍 주민 마구 사살

나주경찰부대 1개 분대 정도의 병력은 우슬저수지에서 ‘앞에 총’을 하고
해남읍 초입 해리에 들어오는 길에 주민 유○남을 만났다. 나주경찰부대는 유○남이 자신들을 인민군인 줄 알고 뒷산으로 도망가자 총을 쏘면서 계속 추격했다.
이 장면을 본 다른 두 주민도 덩달아 도망쳤다. 추격에 실패한 경찰부대는 동네로 들어와 함께 도망친 김○식의 집을 찾아내 총을 난사하고, 근처 여러 집에서 사람들을 끌어내 사살하거나 길거리에 있는 주민들을 조준 사격했다. 그러고는 이웃 마을인 수성리에 들어가 한 집을 향해 “사람 있으면 모두 손들고 나오라”고 소리쳤다.
그때 갑자기 인민군이 온 줄 알고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외친 김○용이 현장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

나주경찰부대는 해남읍 여러 마을을 들어가 집을 뒤져 사람들을 살해하며 돌아다녔다. 해남읍 신안리 마을 어귀에 진입한 나주경찰부대는 인민군인 줄 알고 환영하기 위해 모여 있던 신안리 주민 중 나○집과 김○옥이 “동무”라고 말을 걸자
나○집을 현장에서 사살했다. 또 중앙리에서는 주민들에게 “우리가 누구냐”고 물어 “인민군이다”라고 대답하자 쏘아 죽이기도 했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런 식으로 해남읍 여러 마을에서 30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했다. 신청인·참고인 진술에 따르면 가장 이른 희생 시각이 오전 10시경이고, 가장 늦은 시각이 오후 2시경이었다. 나주경찰부대는 최소 4시간 동안 해남읍에서 비무장 주민을 대상으로 집집마다 수색해 근접사격을 한 것이다. 해남읍뿐만 아니라 마산면 상등리, 화내리, 현산면 일평리에서도 주민들이 나주경찰부대에게 살해되었다.

나주경찰부대 이동 경로.

나주경찰부대 이동 경로.
@1기 조사보고서

죽음의 완도중학교 환영대회… 경찰이 인민군 행세하며 주민들 속여

완도읍 완도중학교 인민군 환영대회 관련 사건

해남읍에 주둔 중이던 나주경찰부대 선발대 12명은 1950년 7월 25일 쓰리쿼터 1대로 완도읍 초입 죽청리에 도착했다. 이들은 이튿날 오전 완도중학교에 들어섰다.나주경찰부대의 손에는 명단 하나가 들려 있었다. 명단에는 어제 나주경찰부대가 죽청리에 들어올 때 인민군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환영하려고 나온
주민 20여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완도읍에서는 인민군들이 광주까지 차지하고 계속 내려오고 있다는 급보가 들어와 주민들을 불안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완도에서 전남 경찰과 인민군이
접전을 벌일 것이며, 완도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거기에 각지에서 후퇴해 온 군경 낙오병들이 완도읍내로 몰려들어 몹시 혼란스러웠다.

7월 26일 아침이었다. 완도경찰서 소사가 “인민군 환영대회가 완도중학교에서 있으니 모두 모이라”고 소리치며 읍내를 돌아다녔다. 운동장에는 200~300명 정도로 상당히 많은 사람이 모였다. 그때 인민군 대표라는 사람이 나타나 “공무원과 경찰 가족은 나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도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다시 “어젯밤에 우리를 환영했던 사람 앞으로 나오라”고 하니 6~7명이 앞으로 나갔다. 그제서야 “우리는 인민군이 아니고, 나주 경찰이다. 공무원과
경찰 가족은 앞으로 나오라”고 하며 모자에 두르고 있던 하얀 띠를 풀자 경찰 마크가 나타났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눈치챈 죽청리 남자 1명이
재빨리 도망쳤다. 어제 환영대회에 나갔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경찰은 그를 운동장에서 바로 총을 쏘아 사살했다. 총소리에 놀란 사람들은 혼비백산해
학교 담장을 넘어 도망쳤고, 현장에서 붙들린 사람들은 완도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구금된 사람들과 그날 달아난 사람들도 나중에 체포돼 완도 경찰에게 살해되었다.

옛 완도중학교 전경.

옛 완도중학교 전경.
@1기 조사보고서

“안 나가면 무슨 해라도 입을까봐 나갔는데…”

청산면 도청리 인민군 환영대회 사건

인민군이 완도읍까지 점령하자 전남 서남부 경찰은 청산도로 완전히 후퇴해 주둔했다. 한국전쟁 당시 청산도는 아군 경찰부대의 최후 방어 저지선이었다.
전남 서남부 경찰은 청산도를 주둔지로 해서 완도군 관내 도서 지역에 나타나는 인민군과 접전을 벌였다.

1950년 7월 27일 오전 청산면 주민들은 청산면 도청항으로 인민군이 온다고
동네 구장이 환영대회에 나오라고 해서 선창가에 모여 인공기를 흔들며 환영했다. 그러나 도청항에 입항한 배는 완도 경찰 경비정이었고, 하선한 사람들은
인민군이 아니라 경찰이었다. 하선장 근처에서 환영하던 사람들이 도망치자
경찰이 난사해 6명의 주민이 현장에서 희생되었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7~8명으로 전투복을 입고 모자에 리본을 묶고 있었으며
이들 중에는 청산지서에 근무했던 경찰 2~3명도 있었다. 배에서 내린 경찰은 선창가에 모인 사람들에게 도청리 청산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모이라고 했다. 학교운동장에서 경찰은 ‘경찰, 군인, 공무원 가족’을 분류하고 김○동을 사살했다. 당일 경찰은 운동장에서 주민 20~30여 명을 체포해 오후에 배에 싣고
도청항을 출발해 위치를 알 수 없는 바다에 수장했다.

배에 인공기 달고 들어온 완도 경찰

노화읍 이포리 배남재 사건

1950년 7월 29일 완도 경찰 ○○○와 사복 차림의 나주경찰부대원 5명이
동신호에 인공기를 달아 위장하고 노화읍 이포리 선착장에 상륙했다. 배가 입항하자 이포리 선착장 근처에 있던 주민 10여 명이 선착장 주변으로 나와 구경했는데
경찰이 이들을 위협해 지서 쪽으로 끌고 가면서 이포리 길가에 있던 주민들까지
모두 30여 명을 노화지서로 연행했다. 경찰은 이포리 노화어업조합에 가서
근무자 이상배에게 기름을 요구했으나 없다고 하자 그도 연행했다.
경찰은 연행자들을 지서 마당에 무릎 꿇려 두었다가 항의하거나 반항한 주민 6명을 포박해 약 2km 후방에 있는 배남재 쪽으로 끌고 가 사살했다. 그중 김○규는 현장에서 생존했다.

경찰은 왜 인민군 행세를 했을까

해남과 완도 주민들은 경찰도 모두 빠져나가고 없는 상황에서 피난민이
몰려오는 것을 보니 전황이 몹시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러나 피난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그저 곧 인민군이 오리라는 것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그때까지 인민군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경찰 복장 역시
눈에 익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마을 구장이 인민군이 온다고 환영대회에 나오라고 했다. 당일에는 초라한 행색을 한 나주경찰부대가 태극기와 경찰 마크를 가리고 인민군인 척 행세를 하니 주민들은 혹시라도 환영대회에 나가지 않으면
해를 입을까 두려워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나주경찰부대는 경찰이라는 사실을 감춰 지역 주민들이 자신들을 인민군으로
잘못 알도록 한 후 살해했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나주경찰부대가 주민들이 무장하거나 경찰에 조직적으로 저항하지 않아 상황이 심각하지 않음을 파악했음에도 오히려 이를 빌미로 좌익세력을 척결하고자 했던 것이 사태를 걷잡을 수 없는 형국으로 몰고 간 것으로 판단했다.

사건명 나주경찰부대 사건
사건조사보고서 〈나주경찰부대 사건〉, 《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지역 전남 나주
사건 발생일 1950년 7월 하순
진실규명 신청인 이○열 외 52명
진실규명 결정일 2007년 10월 23일
가해주체 나주경찰부대 및 완도 경찰
결정사안 이원암 외 96명이 1950년 7월 하순,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마산면 상등리, 마산면 화내리, 현산면 일평리, 완도군 완도읍,
소안면 비자리, 노화읍 이포리 등지에서 후퇴 중이던 나주경찰부대 및 완도 경찰에 의해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살해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