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지역 기독교 희생 사건 (1) 추석 밝은 달 우물에 교인들 수장
비명 소리 감추려 인민군은 풍물을 쳤다

전북 김제 대창교회 마당에 세워진 순교비.

전북 김제 대창교회 마당에 세워진 순교비.
@강변구

‘반동’으로 규정된 기독교인들

한국전쟁 전후 인민군과 좌익세력에게 기독교인들은 군경세력, 지역유지와 함께 주요 공격대상 중 하나였다. 적대세력이 기독교를 공산화에 반대하는 반동으로 규정했고, 기독교인들이 우익 단체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또 예배당 사용 문제를 놓고도 기독교와 인민위원회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기독교는 미국 선교사와의 밀접한 관계로 인해 친미세력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인 집단희생 사건은 인민군 점령기부터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퇴각하는 시점을 전후해 남한 내 여러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발생했다.

한국전쟁 시기 전북 지역에서는 교회 48곳에서 기독교인 총 214명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점령 초기에는 기독교인 중에서 우익 활동을 한 인사가 주로 희생됐고, 인민군 퇴각기에는 많은 교인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전북 지역 내 기독교인 희생자 중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곳은 군산(46명)으로 전북 지역 전체
기독교인 희생자의 21.5%를 차지했다. 다음으로 정읍(41명, 19.2%), 김제(39명, 18.2%)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전북지역 기독교인 희생자와 교회 분포

전북지역 기독교인 희생자와 교회 분포

전북 지역 기독교 희생자 수(단위:  명)

전북 지역 기독교 희생자 소속 교회 수(단위:  곳)

지역배경 군산

군산 지역에는 1950년 7월 19일 인민군 2개 부대가 진주했다. 인민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에 군산 경찰들은 전쟁이 터진 후 유치장에 감금했던 좌익분자와 국민보도연맹원 수십 명을 기관총으로 난사하고 후퇴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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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인 나○○ 면담보고서 2008. 11. 19.〈전북 국민보도연맹 사건〉(1기) ]

“나를 포함하여 군산경찰서 경찰들은 인민군이 군산시에 진입하는 것을 확인하고 후퇴하였다. 후퇴 직전에 군산경찰서 유치장에 검속되었던 좌익들을 사살하였는데 이런 사실은 후퇴할 때 동료 경찰들에게 들었다. 그리고 나의 친척 집에 세를 든 사람이 통행금지에 걸려 유치장에 있었다가 사상범들과 함께 죽었다는 말도 들었다. 당시에는 인민군이 들어오니까 다급하여 조사하고 따로 분류할 시간이 없었다”고 하였다.

전북 옥구군(1995년 군산시에 통합)에서는 7월 25일 경찰이 후퇴하기 전에 군산경찰서에서 학살당한 유가족들이 중심이 돼 지방 치안대가 조직되었다.

군산·옥구 지역에서는 인민군 후퇴기인 9월 27일부터 28일 사이 ‘옥구군 미면 집단희생 사건’이 발생했다. 옥구군 노동당은 인민위원회에 ‘유엔군이 진주한 후
적 진영에 가담해 적극적으로 활동할 자’를 학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또 ‘반동가족’ 일체를 학살하고 학살 장소도 일본군이 구축한 방공호를 사용하되 책임자 재량에 맡기며 학살 방법으로 총살, 죽창, 농기구 등을 사용하라고 했다.
미면 기독교 희생자들 역시 대부분 이 방침에 따라 희생되었다.

신관교회

1950년 9월 26일경 미면 지방좌익들은 방공호 작업 등 부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며 신관교회 교인들의 집에 찾아와 끌고 갔다. 가해자들은 죽창을 들고 와서 사람들의 손을 뒤로 묶어 신관리 토굴로 끌고 갔고, 토굴 앞에 세워두고 ‘콩 튀기듯’ 총을 쏘아 교인들을 살해했다. 당시 지방좌익들은 신관리 토굴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총살했다가, 총알이 모자라 뒤에 있던 사람들은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고 한다. 유족들은 피가 가득한 굴속에서 시신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돼 있어서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는데 일부는 얼굴을 물로 씻어내면서 시신을 찾았다고 한다.

군산 신관교회 교인들의 희생지로 추정되는 ‘신관리 토굴’ 현재 모습(군산대 공대 뒤편).

군산 신관교회 교인들의 희생지로 추정되는 ‘신관리 토굴’ 현재 모습 (군산대 공대 뒤편).

원당교회, 해성교회

원당교회 교인 14명과 해성교회 교인 7명 등 21명은 우익 인사의 가족이거나
그들과 같은 교인이라는 이유로 1950년 9월 28일 옥구군 미면 미룡리 미제마을
뒷산 토굴과 원당마을 뒷산 토굴 두 곳에서 지방좌익 등에게 희생되었다.
당시 미면의 좌익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은 이승만을 섬기는 것과 똑같다”며 기독교인을 우익세력으로 간주했다.

원당교회와 해성교회 교인들은 새벽 1시 방공호 작업을 하는 줄 알고 농기구를 들고 인민군과 지방좌익을 따라나섰다가 은파저수지 인근 산 중턱 방공호(원당마을 뒷산 토굴)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본인들이 가져온 농기구로 구타당한 뒤 45도 각도로 뚫려 있는 방공호 속에 생매장됐다. 부역을 하는 줄 알고 부모 대신 따라나선 자식들도 있었다. 수복 후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토굴에서 시신을 수습해 가족별로 묘를 썼다고 한다. 가해자들은 미룡리 미제부락 뒷산 토굴 앞에 희생자들을 무릎 꿇려 놓았다가 나무로 만든 떡메로 뒤통수를 때려 고꾸라지면 굴로 넣는 등
다음 사람에게도 같은 과정을 반복해 살해했다.

원당교회 교인으로 미제마을 뒷산 토굴에서 희생된 홍기성의 배우자는 사건 이후 남편의 희생 사실을 정리해 아래와 같이 군산경찰서에 신고했다.

군산경찰서에 제출된 ‘피해 신고서’

피살연월일 :
4283년(1950년) 9월 27일 오후 11시 경
피살장소 :
옥구군 미면 미제부락 뒷산 토굴
피살 정황과 정도 :
283년 9월 27일 오후 10시경 미면 적구놈들이 본인의 남편인 홍〇성을
소위 미면 인위장 김〇〇가 교살을 전기(前記) 장소에서 실행하여 적구놈들이 타살하였습니다.
신고자 성명 :
정〇〇
4284년(1951년) 9월 옥구군 미면 원당리 〇〇〇

지역배경 완주

완주에는 1950년 7월 20일부터 인민군이 진주했다. 한국전쟁 시기 완주지역에서는 동상면 신월리 골짜기 ‘괴비소’와 봉동읍 봉동소방서 두 곳에서 집단희생 사건이 발생했고, 전주형무소로 끌려가 희생된 경우도 있었다. 신월리 괴비소에서는
1950년 9월 27일(음력 8월 16일)경 기독교 지도자들과 우익인사 약 50명이 지방좌익에게 희생되었다. 동상면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조○○은 9월 26일 기독교인과 우익인사들을 신월리 분주소에 가뒀고, 9월 27일 새벽 이들을 분주소에서 가까운 괴비소 등지(동상초등학교 뒷산, 동상지서 부근 등 포함)에서 집단학살했다. 이 사건으로 마재교회 5명, 단지동교회 2명, 학동교회 5명 등이 희생되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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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인 심〇〇 2008. 9. 23. ]

조〇〇 무리가 마을 사람 중에 똑똑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골짜기에서 죽였고, 가족들이 아우성치는 소리를 들었다.

서두교회, 제내교회

완주군 봉동읍 서두교회와 제내교회 교인 6명은 1950년 9월 28일경 기독교인이며 우익 활동을 했다는 이유 등으로 봉동소방서 창고에서 지방좌익과 인민군에게 희생되었다. 좌익세력에 의해 ‘반동’으로 분류된 우익 인사들(기독교인 포함)이 봉동소방서 창고로 끌려가 9월 28일 총살당한 사건으로 당시 40여 명이 집단으로 희생되었다.

생존자 허〇〇(당시 48세)에 따르면 9월 28일 오후 4시 30분쯤 전주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온 인민군 장교가 따발총으로 무장한 2명의 부하와 창고 앞에 도착했다. 인민군 장교가 한 사람씩 나오라고 소리를 질러 창고 안에 있던 한 명이 나가자 그 순간 총살당했다. 창고 안에 있던 사람들이 겁을 먹고 나가지 못하자 인민군이 총과 칼을 들고 창고 안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찌르고 따발총을 난사해
창고 안은 피바다가 되었다. 잠시 총소리가 멈췄을 때 봉동소방서장이자 씨름장사였던 서대길이 총탄에 뚫린 창고 뒷벽을 밀어 무너뜨려 사람들이 도망가고 인민군은 총을 쏘았다(전북경찰국, 『꽃피는 산하』, 1980, 185~187쪽).

지역배경 고창

고창 지역은 1950년 7월 20일경부터 9월 28일까지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
인민군 후퇴 이후에도 좌익에 의한 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고창에서 활동하던 빨치산들은 선운산, 방장산 등을 근거지로 두고 활동했다. 고창군 전 지역의 수복은 1951년 3~4월이 돼서야 가능했다. 고창읍교회 4명, 덕암교회 20명 등
모두 24명의 희생자가 확인되었다.

덕암교회

진실화해위원회는 고창군 공음면 덕암교회에서 1950년 10월부터 11월 사이
4차례에 걸쳐 빨치산에 의해 목회자와 교인 20명이 희생된 사실을 확인했다.
이는 덕암교회 희생자 중 타지역 교회에서 희생된 사람을 제외한 수치다.

고창 덕암교회 앞에 세워진 25인의 순교 기념비.

고창 덕암교회 앞에 세워진 25인의 순교 기념비.

오병길은 전북에서 의사와 약사이자 이름난 전도사였다. 그의 친척 오계환과
아들 오주환, 사돈 김순서는 1950년 10월 19일(음력 9월 9일) 공음면 용산마을 앞산에서 우익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빨치산에게 희생되었다.
오병길·오계환·오주환은 김순서 집 광에 굴을 파고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대한민국이 온다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1950년 10월 18일 지방좌익들이 김순서 집을 둘러싸고 굴을 파서 오병길·오계환·오주환과 그들을 숨겨준 김순서까지 4명을 끌고 나오며 태극기, 성경, 신문 몇 장 등을 찾았다. 좌익들은 이들을 새끼줄로 묶어
마당에 꿇어 앉히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이때 오병길이 하느님을 부르자 좌익들이 몽둥이로 오병길의 입을 쳐 피가 났다고 한다.

이들은 공음면 분주소로 끌려가 1950년 10월 19일 저녁 인민재판을 받았고, ‘미국과 내통하는 스파이’ 등의 죄목으로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죽창에 찔리고, 용산리 골짜기(용산마을 앞산)에 생매장되었다. 당시 김순서 집에 굴을 팔 때 흙을 나르는 것을
윗집 사람이 보고 좌익 쪽에 신고해 발각된 것으로 알려졌다. 시신은 사건 발생
한참 후에 공음면 분주소 근처 구덩이에서 수습되었다. 시신을 알아보기 힘들어 옷을보고 찾았다.

지역배경 정읍

정읍 지역도 1950년 7월 20일 인민군에 점령되었다. 10월 7일경 정읍경찰서가 수복됐지만 1951년 4월까지 빨치산에 의한 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8개 이상의 교회에서 희생자 41명이 확인되었다. 이 중 두암교회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두암교회

정읍 소성면 두암교회 설립자 김용은은 정읍 일대 농민들을 대상으로 전도하고
반공 집회를 크게 여는 등 우익 활동을 했다. 김용은은 남장로교 선교사와도
관계가 있어 친미세력으로 분류된 것으로 보인다. 김용은의 모친 윤임례는 상황이 심각해지자 김용은을 피신시켰고, 빨치산들은 김용은을 찾기 위해 가족과 교인들을 괴롭혔다. 1950년 9월부터 11월 사이 빨치산은 두암마을을 습격해 김용은의 가족과 일가친척, 교인들을 살해하고 집을 방화했다. 이 학살로 윤임례 집사 등 23명이 희생되었다. 일부 교인들이 우익 활동을 했고, 우익 인사와 같은 교인이라는 이유였다.

정읍 두암교회 순교탑.

정읍 두암교회 순교탑.

지역배경 익산

익산 지역은 1950년 7월 19일 인민군에게 점령돼 9월 29일경 수복되었다. 대부분의 교인이 개별적으로 끌려갔다. 모두 9개 교회에서 희생자 24명이 확인되었다.

대장교회

대장교회 박병욱 전도사는 박상래 장로의 장남으로 고등학교 시절 대원 30여 명 규모의 이리기독학생 노방전도대를 조직하고 밴드부를 만들어 활동했다.
이후 목회자가 되기 위해 서울 조선신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 10여 일간 걸어 고향 익산군 춘포면에 도착해 콩밭에서 일하며 숨어 지냈다. 인민군이 신학교에 다니는 박상래 장로 아들을 찾아다니자 동네 청년이 박병욱을 밀고했다.

인민군은 박병욱을 포승줄로 묶어 끌고 가며, 집에 있던 기독교 서적과 전도대원들의 명단을 가져갔다. 1950년 9월 28일 인민군은 소라산(현 이리기계공고 뒷산)에서 박병욱 등 15명가량 깊은 구덩이를 파놓고 총살했다. 시신을 묻고 인민군 1명이 밤새도록 보초를 섰다. 부친 박상래 장로가 현장에 가서 시신을 인근 산으로 옮겨 가매장했다.

지역배경 김제

1950년 7월 20일 새벽 만경강을 건너 인민군이 김제지역을 점령했다. 이때부터 국군이 김제를 수복하는 9월 27~28일 인민군과 지방좌익에 의해 부유층 우익 인사, 기독교인과 그 가족이 희생되었다. 김제 지역에서는 모두 10개 교회에서 39명의 희생자가 확인되었다.

대창교회

김제 죽산면 대창교회는 1903년 세워진 후 여느 교회와 마찬가지로 한 번도 예배를 거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전쟁이 나고 인민군이 점령한 후 교회를 주재소로 사용하면서 교인들의 예배를 막았다. 신앙인들에게 이런 행위는 있을 수 없는 불의였다. 교회 청년들이 행동에 나섰다. 가까운 죽동교회와 명량교회의 청년들도 함께했다. 이들은 9월 18일 죽동고개를 넘어 분주소를 향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갔다가 인민군이 총을 난사하자 흩어져 3일간 들판에 숨어 있다 돌아왔다.

인민군은 만세사건 주동자로 5명을 지목해 김제지서로 끌고갔다.
9월 26일 가해자들은 이들을 죽창으로 찌른 뒤 관제저수지(현 한전 김제지사 인근)에 빠트렸다. 이 중 한 사람이 죽창에 찔렸으나 다행히 빗나가서 숨이 붙어 있다가
다른 1명과 살아나와 마을 사람들에게 사건 현장의 위치를 알려주어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만세사건 이후 교인들은 대창교회 안덕윤 목사에게 피신을 권유했으나 피신하지 않았다. 1950년 9월 28일 지방좌익들이 교회에 있는
안덕윤 목사를 잡아다가 교회 근처 논 수로에서 죽창으로 찌르고 개머리판으로 구타해 살해했다.

1960년대 항공 사진.

1960년대 항공 사진. 교회 청년들이 죽동고개를 넘어 신작로를 따라 죽산지서로 향했다.
죽동고개 남북으로 뻗은 신작로는 현재 김제 메타세쿼이아길이다.
@국토정보맵

만세사건 이후 교인들은 무차별로 연행돼 영당(미곡 처리장) 창고에 감금되었다. 인민군과 지방좌익들은 창고에 불을 지를 심산이었다. 증언에 따르면 그때
미군 비행기가 폭격한 후 이들이 혼비백산해 다 변산 쪽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그제서야 창고 문을 열고 교인들이 탈출할 수 있었다. 대창교회 교인들은
몰살당할 뻔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만경교회

김제 만경읍 만경교회는 인민군 점령기 동안 사무실이나 선전장으로 쓰였다.
하지만 평소처럼 예배는 볼 수 있었다. 9월 초 서울 조선신학교(총신대학교의 전신) 1학년에 다니다가 고향에 내려온 최정렬은 친구 김방서를 찾아갔다.
최정렬은 인민군이 지금 후퇴하는 중이며 수복될 때를 대비해 반공투쟁을
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갔다. 그 후로 교회 내에서 최정렬의 권유를 받아
여성 신도 3명이 가입 지장을 찍었다.

최정렬은 친구 김방서를 다시 찾아가 ‘반공혁명단’이라는 단체명을 알려 주고
가입 원서를 받아 갔다. 바로 이튿날(9월 12일) 새벽이었다. 최정렬을 비롯한 반공혁명단 단원들이 체포되고 김종한 목사 등 교회 어른들까지 배후 역할을 의심받아 인민군 주둔지로 연행되었다. 반공혁명단원들은 아무도 모른 채 전주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김종한 목사와 교인들은 곧 풀려났다가 26일 추석날 새벽에 다시 연행되었다. 반공혁명단이 탄로난 까닭은 최정렬이
국민학교 동창 한 명을 가입시켰는데 그가 밀고했기 때문이다. 그 동창생 형이 좌익 활동을 하고 있었다.

추석 다음 날인 9월 27일 드디어 인민군과 지방좌익들이 김제에서 물러갔다.
늦은 오후부터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던 주민들이 하나둘 돌아오고 있었다. 의용군으로 끌려갔던 사람들도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분주소로 연행된
김종한 목사 일행과 어디로 끌려갔는지도 모르는 반공혁명단 단원들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인민군이 완전히 물러간 소식을 들은 마을사람들이 29일부터 실종자들을 찾아 골짜기와 야산을 뒤지기 시작했다.

1954년 항공 사진에 나타난 만경교회와 만경분주소.

1954년 항공 사진에 나타난 만경교회와 만경분주소.
@국토정보맵

김제 만경교회 희생자 유족인 송봉호 목사(오른쪽)와 전철희 목사.

김제 만경교회 희생자 유족인 송봉호 목사(오른쪽)와 전철희 목사.
이들 뒤로 희생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반공혁명단원비.

반공혁명단원비.

학살 현장인 만경지서 앞 느티나무. 2023년 초여름 지서 확장 공사로 베어졌다.

한국전쟁 때 교인 15명의 희생 사실이 기록된 김제 만경교회 교회록.

한국전쟁 때 교인 15명의 희생 사실이 기록된 김제 만경교회 교회록.

다른 사람들이 거의 다 돌아오니 실종자 가족들은 더 애가 탔다. 마을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서의 우물을 살펴보았다. 지서의 우물은 두 개였는데 하나는 지서 건물 앞에 있고, 또 하나는 지서 뒤 지서장 사택 옆에 있었다. 사택 옆에 있는 우물은 흙으로 꽉 메워져 있었다. 지서 앞의 우물은 시간이 없었는지 메워져 있지는 않았으나 주변의 흙에서 핏자국이 발견되었다. 긴 대나무 장대로 저어보니 시신이 걸려 올라왔다. 날이 저물어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다음 날 다시 모이기로 했다.

10월 1일, 마을 어른들이 지서 앞의 우물에서 시신을 수습했다. 그 우물 속에는 여자들만 있었다. 당시 11세 소년이었던 송봉호(현 만경교회 원로목사)는 지서 앞마당에 심어놓은 어린 느티나무 옆에 서 있었다. 맨 먼저 장대 끝에 동네 아주머니 시신이 걸려 나왔다. 그리고 두 번째로 송봉호의 할머니 모습이 보였다. 세 번째 나온 시신은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품에는 젖먹이 동생이 달려 있었다. 할머니와 동생을 안은 어머니의 시신이 환한 달빛 아래 드러날 때 소년 송봉호는 제 팔뚝만한 느티나무 줄기 옆에서 그 장면을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았다.

목사와 다른 남자 교인들의 시신도 뒤편 우물에서 발견되었다. 끌려간 사람들은 대장간에서 사용하는 큰 망치로 뒷머리를 맞거나 죽창에 옆구리를 찔린 채로
우물 속에 던져졌다. 9월 27일, 학살을 자행하던 그때 비명 소리를 감추기 위해
마치 명절 때처럼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풍물을 쳤다고 한다.

사건명 한국전쟁 전후 적대세력에 의한 종교인 희생 사건(1) -
전북지역 기독교 희생 사건 ①
사건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한국전쟁 전후 적대세력에 의한 종교인 희생 사건(1)-전북지역 기독교 희생 사건 ①〉(2기)
지역 전북 군산, 김제, 완주, 전주, 임실, 고창, 정읍, 익산
사건 발생일 1950년 7~11월
진실규명 신청인 직권조사
진실규명 결정일 2024년 4월 16일
진실규명 인원 전국에서 종교인 희생자 1,700여 명 명단을 파악한 후 순차적으로 진실규명 진행
가해주체 인민군, 지방좌익세력
결정사안 1950년 7월부터 11월까지 전북 군산, 김제, 완주, 전주, 임실, 고창, 익산, 정읍에서 김○대 등 104명이 기독교인이며 우익 활동을 했거나 좌익에 비협조적이고, 이러한 인사의 가족 또는 같은 교회 교인이라는 이유 등으로 적대세력에게 희생된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을 결정한 사례
참고자료 1기 진실화해위원회, 〈김제에서 이석상 등이 적대세력에 의해 희생된 사건〉,
〈전북지역 적대세력 사건>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전쟁 전후 기독교 탄압과 학살 연구〉(진실화해위원회 용역보고서),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