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 1일이었다. 포항 영일만 바다가 보이는 송골해변에는 흰옷 차림의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대개 가족끼리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개중에는 잘 때
덮을 이불과 냄비 따위 살림 도구들을 벌여놓은 가족들도 있었다.
그 수가 족히 1,000여 명은 됐는데 해안 가까이의 환호동과 여남동에서는
주민의 7~8할이 나와 있었고, 포항 시내와 여타 북부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점심 때가 되어 모래밭에 솥을 걸고 밥을 하니 불 때는 연기가 온 사방에 가득했다. 이들은 언뜻 놀러나온 것 같았지만 피난민이었다.그것도 노인과
병약한 남자, 여성, 어린이가 대부분이었다. 젊고 건강한 남자는 이미
군에 입대했거나 보이는 대로 징발해버렸기 때문에 낮에 나와 있을 수가 없었다.
해변가의 피난민들
당시 포항지역에서는 8월 초 구축된 낙동강 방어선을 뚫고 내려오는 인민군과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국군 3사단, 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인민군은 영덕 전투 후에 더 밀고 내려가지 못하자 산을 타고 우회해 포항을
기습 점령했다. 8월 20일 국군이 1차로 포항을 수복했지만 그때부터 송골해변 북쪽에 위치한 천마산 고지를 둘러싸고 서로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사건이 발생한 9월 1일 국군은 낮부터 자정까지 일시적으로 천마산을
점령할 수 있었다.
남쪽 포항 중심지가 전투지역이 되자 미군의 함포 사격과 폭격이 이어졌고,
포항 주민들은 남쪽으로 피난 가지 못하고 오히려 북쪽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그때 환호동과 여남동 주민 160~170호 중 미리 피란 가지 못한 주민 대다수가
인근의 송골해변으로 모여들었다. 그곳은 뒤가 바위산이고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지형이기 때문에 육지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맞은 편 바다에 떠 있는 미군 함정에서는 나무 한 그루 가리는 것 없이 그들이 민간인임을 뻔히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주민들은 해변이 오히려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8월 20일 전후부터 주민들이 피난한 뒤로 열흘 정도 전투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1950년 9월 1일, 그날은 오전부터 날씨가 좋았고
마치 전쟁이 다 끝난 것처럼 사방이 고요했다.
1953년 항공 사진에 나타난 환여동과 송골해변 모습.
환호동과 여남동은 1966년 환여동으로 통합됐으나 한국전쟁 당시에는 두 개의 행정지역이었다. @국토정보맵
미군 함선에서 날아온 포탄
여남동에서 피난 온 11살 소년 김○수는 식구들과 떨어져 친구와 함께
조개를 잡는다고 삿갓불을 지나 죽천동 쪽 바다에서 자맥질도 해가며 조개를
잡고 있었다. 그때가 오후 2시경이었다. 아침에 맑았는데 오후에 흐려지더니 이불이 젖을 정도로 꽤 많은 비가 내렸다. 김○수와 친구는 그대로 비를 맞으면서 조개를 잡고 있는데 갑자기 포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누가 다쳤는지 비명 소리가 들리고 삿갓불에서부터 사람들 수백 명이
달려오고 있었다. 김○수와 친구도 물에서 나와 옷가지를 들고 죽천동 쪽으로 뛰었다. 뒤로 포 소리가 여러 발 연이어 들렸다. 어느 순간인가 포 사격이 멈췄다.
김○수가 가족을 찾으러 되돌아가 보니 삿갓불에서부터 포탄에 맞은 사람들이 머리가 터지거나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간 채 죽어 있었다. 어떤 사람은 물에 빠진 채 뱃속에서 쏟아진 내장을 부여잡고 악을 썼다. 깨끗하던 모래가 피로 흥건하고,
밥 냄새 대신에 피비린내가 생선 썩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역하게 올라왔다.
가족이 있던 곳으로 정신 없이 가 보니 형님(당시 23세)이 왼쪽 다리가 떨어진 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김○수가 당황해서 옷가지로 매어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피가 계속 쏟아져 나왔다. 몸이 약해 군대에 가지 않았던 형님은 그해 겨울
끝내 숨을 거두었다.
미군 함정에서 쏜 첫 포탄은 피난민이 모여 있던 곳의 중간 부분에 떨어졌다.
그곳은 해변이 급히 꺾이는 부분으로 ‘삿갓불’이라고 불렸다. 피난민들은 포탄을 피해 양 옆으로 급히 피하기 시작했다. 대다수가 집 방향인 남쪽 환호동과 여남동 방향으로 뛰었다. 포탄은 일정하게 30초나 1분 간격으로 15~30분간 환호동과 여남동 방향의 해변으로만 떨어졌다. 그리고 정찰기가 다시 나타났다. 정찰기는 저공으로 천천히 해변 위를 돌면서 찬찬히 살펴보는 듯했다. 주민들은 비행기 안에 탄 조종사의 얼굴과 어깨 윤곽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흰 옷가지를 벗어 흔들면서 포를
그만 쏘라고 애원했다. 정찰기가 그걸 알아들었는지 돌아간 뒤로 함포사격이 멈췄다.
환여동 해변. 산 끝 부근이 첫 포탄이 투하된 자리다.
중간에 움푹 들어간 부근에 포탄이 많이 떨어졌다.
당시에는 우거진 소나무가 없어 절벽이 드러나 있었고,
물가로 20~30m의 모래사장이 있었다. @1기 조사보고서
바로 뒤 바닷물이 들어와 있는 자리가 당시 백사장으로,
그곳에 첫 포탄이 투하됐다. @1기 조사보고서
왜 피난민에게 함포 사격을 했을까
생존자들은 그날 갑자기 내린 비를 피해 집으로 가던 중 정찰기 한 대가
공중을 맴돌다가 돌아간 조금 뒤에 포격이 시작됐다고 했다.
신청인 안○석, 2008. 5. 14
오후 2시경 날씨가 흐려지더니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피난민들은 비를 피할 수 있는
준비를 하지 않고 간단한 차림으로 피난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1km 떨어진 집으로 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정찰기 한 대가 저공비행으로 피난민들 상공을 지나간 후 조금 지나
함포 사격이 떨어졌다.
피난민들은 해변에서 피난하는 동안 그 정찰기가 날아다니는 것을 자주 봤기 때문에 익숙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정찰기는 1~2명이 탈 정도의 작은 비행기이고,
헬리콥터 종류가 아니라 1개의 프로펠러가 앞에 달려 있었다. 긴 양 날개가 동체의 바로 위쪽에 붙어 있었고 느리게 비행하는 모습이 마치 잠자리 같았다.
생존자들은 송골해변 뒤가 바위산이고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지형이기 때문에 육지에서 이곳을 정찰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국군이나 유엔군이
피난민의 동태를 파악했다면 포격 직전에 날아갔던 바로 그 정찰기의 보고를 받고나서 포 사격이 시작됐을 것이라고 했다.
신청인 박○택, 2009. 1. 21
정찰기에서 보았으니 민간인인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위에서 명령이 있지 않고서는 포격이 있을 수 없다.
L-5 연락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당시 이 사진을 보고
다수 생존자가 당시의 정찰기와 비슷하다고 증언했다. @1기 조사보고서
생존자들은 당일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앞 바다에서 배 3척 정도를 봤는데,
포격할 당시에는 배 1척이 보였고 그 배가 함포 사격을 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송골해안에 함포 사격을 한 배는 미구축함 헤이븐호(De HAVEN)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헤이븐호의 1950년 9월 1일자 전투일지를 분석했다.
전투일지에 따르면 헤이븐호는 1950년 9월 1일 새벽 6시 27분부터 흥해-천마산 사이에 10여 발의 포탄을 정기적으로 발사하고 있었다. 그러다 오후 2시경
갑자기 3사단(혹은 3사단 소속의 어느 연대)의 해안사격통제반(SFCP)으로부터
함포 사격 명령을 받았는데, 헤이븐호의 함포사격반이 표적을 확인해 보니
다름 아닌 함정 정면인 해변의 피난민이었다.
함포사격반은 당일 새벽부터 계속 본, 800m 정도 거리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민간인들을 포격하라는 명령에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혹시 어떤 착오가 있는 것은 아닌지 표적의 재확인을 요청했다. 그러자 해안사격통제반의 해군 연락장교는 표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며 피난민 중에 적군이 섞여 있다는 육군 정보가 있고,
육군이 발사해주기를 요청하고 있다며 재차 함포 사격을 명령했다.
어쩔 수 없이 구축함의 함포사격반은 10여 분 동안 5인치 포탄을 총 15발 발사했다. 그리고 해변정찰을 수행하던 3사단의 정찰기에 무선교신하며 포격 결과를 문의하니 정찰기는 포격 지점에 근접해 자세히 정찰하고 포탄에 맞은 사람들이
어린이, 여성들이 대부분인 민간인임을 다시 확인해주었다.
이 보고를 받은 해안사격통제반이 그제야 사격 중지에 동의했다.
구축함 헤이븐호는 10여 분 간 해변의 피난민에게 5"/38 구경 AAC 5발과
5"/38 구경 VT 10발을 발사했다. 두 폭탄은 모두 과녁부근에서 폭발해 콩알처럼
크고 작은 파편이 넓은 범위에 확산되는 폭탄으로, 인명살상 효과가 큰 무기였다. 생존자들은 폭탄이 떨어져도 땅이 거의 파이지 않았고, 땅에 닿자마자
그대로 터졌으며 불발탄이 있어 살펴보니 크기가 정종 병 정도였다고 했다.
미 구축함 헤이븐호(De Haven). @위키피디아
적군 편이 아닌 것이 분명히 확인되기 전까지는 적으로 간주하라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이 단순한 오폭은 아니며, 미 해군 함정이 민간인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 포격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그러면 왜 해안사격통제반(SFCP)은 현지 함포사격반의 표적 재확인 요청을 묵살하고 포격을 하도록 명령했을까?
먼저 이 사건의 계기는 1,000여 명의 피난민이 무리를 지어 (비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집이 있는) 남쪽으로 급히 이동하려는 움직임이 아군 방어선 부근의 피난민을 경계하고 있던 정찰기에 발견돼 해안사격통제반(SFCP)에 보고된 것이었다.
당시 여남동 송골계곡은 아군 방어선에 아주 가까운 주요 경계 지역이었다.
당시 미군에게 ‘무리를 지어서 있는 피난민 집단’은 공격 대상이었다.
1950년 7월 25일 실행한 작전을 설명하는 미 항모 밸리포지(Valley Forge) 활동요약보고서에는 “15명에서 20명의 흰옷을 입은 사람들 집단 몇 개를 발견했다. 첫 번째 집단은 육군 측에서 제공한 정보에 의거 기총사격이 실시되었다. 그 정보는 8명에서 10명 이상의 집단은 부대(troops)로 간주되며, 공격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고 쓰여 있다. 미군은 전쟁 발발 직후 발생한 수많은 피난민들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자 아군의 전선으로 접근하는 피난민이 적군편이 아닌 것이
분명히 확인되기 전까지는 적군으로 간주한다는 정책을 수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함포 사건의 직접적 원인은 함정에서 표적이 민간인임을 확인시키면서 발포의 타당성을 문의했음에도 안이하게 피난민 정체를
파악하지도 아니한 채 포격을 명했던 함포사격반과 적이 민간인으로
위장할 수도 있다고 의심해 눈앞에 보이는 피난민에게 함포 사격을 가한
미 해군의 현장결정의 오류”라고 판단했다. 또한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보면
이는 ‘아군의 전선으로 접근하는 피난민이 적군편이 아닌 것이 분명히 확인되기 전까지는 적으로 간주하라’는 취지의 피난민 정책과 적이 민간인으로 위장할 수도 있다는 미군들의 의심이 결합된 결과”라고 결론지었다.
포항지역에서는 환여동 외에도 미군 폭격으로
흥안리마을,북송리와 인근지역,흥해읍 용한리 해변,흥해읍 칠포리 등 여러 지역에서 민간인 희생이 발생했다.
2018년 ‘한국전쟁 미군폭격사건 민간인희생자 위령탑’ 앞에서 열린 추모식 모습.
사건명 |
포항 환여동 미군함포 사건 |
사건조사보고서 |
〈포항 환여동 미군함포 사건〉,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5권, 2010. |
지역 |
경북 포항시 환여동 송골해변 |
사건 발생일 |
1950년 9월 1일 |
진실규명 신청인 |
최○출 외 41명 |
진실규명 결정일 |
2010년 6월 22일 |
진실규명 대상자 |
최○학 등 51명 |
가해주체 |
미군, 미 태평양함대 소속 구축함 헤이븐호(DD 727 De Haven) |
결정사안 |
한국전쟁 중인 1950년 9월 1일 낮 미 군함이 피난민임을 알면서도 사격통제반의 포격 명령에 따라 해변의 피난민을 포격한 사건에서 51명의 희생 사실을 확인하고 진실규명으로 결정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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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임자도 민어 낚시배에 실린 시신… 피바다로 변한 섬 오마이뉴스〉, 2024. 4. 8.
신안군지편찬위원회,《신안군지》,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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