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거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1) 토벌군이 들어와서 거제도 전체 섬이
쑥대밭이 되었다

거제도에 나타난 토벌부대

경남 거제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은 1946년 대구10월사건에서 비롯된다. 경북과 경남을 거쳐 전국으로 확산된 시위의 물결이 10월 4~9일 거제에까지 이르렀다. 1947년 8월 19일에는 거제 연초면 다공리, 둔덕면 하둔리에서 미군정의 하곡수집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이듬해 1948년에는 5·10 총선거를 앞두고 남한단독정부 수립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주민들이 봉화를 올리거나 유인물을 배포했고, 일부는 야산대가 돼 지서를 습격하기까지 했다.

1949년 봄, 정부는 거제도에 토벌대를 내려보냈다. 마산에 주둔하던 국군 16연대의 일부 병력과 서북청년회를 중심으로 창설된 호림부대가 주축이었다. 토벌군들은 장승포읍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간첩·밀항자 등을 총살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하는 동시에 해상교통을 차단한 뒤 5월 말까지 약 2개월 동안 거제도에 주둔하면서 야산대 토벌, 아지트 폭파, 좌익 또는 좌익에 협조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색출하고 살해했다.

군이 철수한 뒤에는 거제경찰이 집중적으로 토벌 작전을 이어나갔다. 경찰은 야산대의 아지트를 토벌한 후 자수자를 생포하거나 자수를 권유했다. 당시 자수를 한 전향자들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경우도 있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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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허○○ 진술, 2022. 6. 22.

사람들이 산에 굴을 파고 숨어 있으니, 경찰에서 방송을 해서 “산에 숨어 있는 사람들은 지금 내려와서 자수를 해라”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내려와서 자수를 하니 경찰에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을 시켰습니다. 가입 후 그 분들은 장승포 거제경찰서에 매일 10시마다 가서 출석을 해야 했습니다.

토벌대에 의한 희생 사건이 발생한 장소.

토벌대에 의한 희생 사건이 발생한 장소.

“경찰도 밉고, 살기는 힘들고…”

둔덕면 하둔리 앞산 등 희생 사건

1947년 약 2,000여 명의 농민과 주민들이 둔덕면에서 하곡 공출 반대 시위를 벌였다. 하○○(당시 13세)은 당시 엄마 손을 잡고 시위에 나갔다. 그는 “경찰도 밉고, 관리도 밉고, 살기는 힘드니까 모두 시위에 참여했다”고 증언했다. 1948년 무렵, 둔덕면 청년들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토벌대를 피해 산으로 올라갔다. 1949년 4월 5일(음력 3월 7일) 저녁 거림리 농막마을에 거주하던 우익인사 박○○이 야산대에 의해 피격돼 사망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토벌군이 둔덕면 하둔리에 들어왔다. 토벌군은 우익인사 피격 사건의 용의자를 중심으로 좌익에 협조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둔덕지서로 연행해 가둬놓고 폭행하면서 조사했다. 당시 둔덕면 하둔리에 살던 정○○은 하굣길에 지서에 갇혀 있는 사람을 살짝 엿보았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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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정○○

“군인들은 제무시(GMC) 트럭을 타고 아침에 (윗마을로) 올라가서 저녁에 (하둔리로) 내려오곤 하며 산에 있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녔습니다. 군인들은 잡아온 사람들을 바로 총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는 법도 없을 때니까, 일단 지서에 가둬둔 후 두드려 패면서 조사를 했습니다. 제가 하교를 하면서 지서를 살짝 들여다보면 (지서에 잡힌) 사람들의 한복이 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1949년 4월 25일(음력 3월 27일) 낮이었다. 토벌군은 마을 청년들을 동원해 하둔리 앞산에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구덩이 앞에 좌익에 협조했을 것이라고 의심되는 사람 중 7~8명을 세워두었다. 이 광경을 보게 하려고 토벌군은 둔덕면 전체 주민들을 하둔리에 불러모았다. 주민들은 구덩이로부터 100~200m 거리에서 떨어져 있었다. 먼저 소대장의 연설이 있었다. 대략 “좌익은 이렇게 하면 된다”는 취지였다. 연설이 끝나자 하둔리 앞산에서 조금 떨어진 둑에서 군인들이 총을 쏘았다. 총소리가 날 때마다 등을 보이고 있던 사람들이 한 명씩 순서대로 구덩이에 떨어졌다. 총살이 끝나자 군인들은 주민들을 모두 해산시켜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게 막았다. 이 외에도 토벌군 주둔 시기에 여러 차례 총살이 이루어졌다. 총살에 그친 것이 아니라 토벌군은 마을 주민들을 동원해 총살된 사람의 재산을 빼앗고, 집을 부수거나 불태우기도 했다.

둔덕면 상둔리 함덕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던 손○복(1927년생, 농업)은 이날 총살로 희생되었다. 그는 1949년 4월 호출을 받고 둔덕지서에 출석했다가 지서에 며칠간 갇혀 있었다. 그러다가 4월 25일 총살되었다. 사건 당일, 둔덕지서는 손○복의 가족들을 호출했다. 손○복의 아내 반○○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산꼭대기에서부터 한참을 걸어 내려갔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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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반○○

“지서가 있는 하둔리에 내려가보니 이미 둔덕면 주민들이 잔뜩 나와 있었고 (군경이) 주민들에게 전부 서 있으라고 했습니다. 지서 맞은편 산 아래 7명 정도가 서 있었습니다. 그 중 누가 신랑인지도 못 알아볼 정도의 먼 거리였습니다. 군경은 한 명 한 명에게 총을 쐈습니다. 서 있던 사람들은 총을 맞고 뒤로 넘어졌습니다. ‘무슨 이런 일이 있나’ 싶어서 미칠 것 같았습니다. (이후 해산을 시키자) 할 수 없이 다시 집으로 올라왔습니다.”



손○복이 총살되고 며칠 후, 군경은 사람들을 동원해 손○복의 집을 부쉈다. 군경의 지시를 받은 사람들은 손○복의 가족들에게 집을 부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줘 짐을 미리 꺼내놓게 한 뒤 집을 부수었다. 그로부터 다시 며칠 후, 둔덕지서는 손○복의 가족들에게 “시체를 찾아가라”고 통보했다. 손○복의 가족들은 하둔리 앞산으로 가서 손○복의 시신을 수습했다.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러 갔을 때 시신은 가매장된 상태였는데, 시신을 꺼냈을 때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수습해온 손○복의 시신은 공동묘지에 매장했다. 손○복의 제사는 그가 희생되기 하루 전날인 매년 음력 3월 26일에 지냈다.
희생 장소인 둔덕면 하둔리 앞산.

희생 장소인 둔덕면 하둔리 앞산. 문○○(현장 목격자) 진술에 따르면, 희생 장소는 ①이다. ②의 위치에서 군인들이 화살표 방향으로 발포했고, 주민들은 ③의 위치에서 현장을 목격했다. 둔덕지서는 ④에 위치해 있었다.

잡혀 온 어업조합 서기도 죽고, 담배 한 개비 준 면서기도 죽었다

하청중학교 앞산 희생 사건

국군 16연대 일부는 1949년 5월 하순에 일주일가량 하청중학교에 주둔했다. 토벌군은 하청중학교 교사를 유치장으로, 교실을 조사실로 사용하면서 장목면·연초면·하청면의 좌익 또는 좌익에 협조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 수십 명을 연행한 뒤 고문하면서 조사했다. 그리고 하청중학교 앞산 등에서 이들을 총살한 뒤, 지서 특공대에게 시신을 매장하라고 지시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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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원○○ 진술, 2022. 3. 28.

군인들이 들어와서 하청중학교에 잡혀있던 사람들을 총살해서 죽인 다음 특공대한테 연락을 하면 가서 시체를 대충 묻어주기도 했다. 내가 하청중학교 앞산에서 총살당한 사람들을 대충 묻어놓았던 적이 있다.



우○동(1923년생, 어업)은 하청면 칠천도의 대곡리 송포마을에 거주했다. 우○동은 1934년 하청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칠천도 어업조합에서 근무했다. 1949년 5월경 하청면에 토벌군이 주둔하던 무렵 하청면소재지에 갔다가 토벌군에 의해 하청중학교로 연행되었다. 우○동은 1949년 5월 24일(음력 4월 27일) 하청중학교 앞산(하청면 서리 대밭)에서 군인에게 희생되었다.

하청지서 특공대로 활동했던 원○○은 하청중학교 보초를 서면서 하청중학교에 구금된 우○동을 목격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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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원○○

“칠천도 송포에 살던 우○동이라는 사람은 하청중학교에 잡혀 와서 갇혀 있었습니다. 당시 하청중학교에 면서기 이○○가 와 있었는데, 우○동이 이○○에게 담배를 하나 달라고 해 이○○가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우○동에게 담배를 줬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제가 경비를 서다 그 모습을 봤습니다. 그 후 우○동도 군인들에게 죽었습니다.”



1949년 5월 24일 우○동은 하청중학교 앞산(하청면 서리 대밭)에서 군인에 의해 총살되었다. 우○동의 가족들은 소식을 듣고 우○동이 총살된 이튿날 칠천도에서 하청면 서리로 배를 타고 가서 시신을 수습했다.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러 갔을 때 시신은 가매장된 상태였는데 총살 이튿날 시신을 수습했기 때문에 모습을 온전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당시 시신에는 가슴, 어깨 등에 총상이 있었다. 수습해온 시신은 장례를 치르고 송포마을에 매장했다.
희생 장소인 하청중학교 앞산.

희생 장소인 하청중학교 앞산. 사진촬영 장소는 ①이며 참고인 원○○의 진술에 따르면, 희생 장소는 ②이다. ①에서 ②까지는 직선으로 약 140m 떨어져 있다. ③은 하청중학교, ④는 하청면사무소이다.

연초면 송정고개 희생 사건

하청중학교에 주둔하던 국군 16연대는 토벌 마지막 날인 1949년 5월 28일 연초면 송정고개에서 좌익 또는 좌익에 협조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총살한 후 철수했다. 1949년 5월 28일 오전, 국군 16연대 토벌군은 인근 마을(상송마을)의 젊은 청년들을 동원해 구덩이를 파게 한 뒤 최소 10명에서 최대 30명 내외의 사람들을 총살했고, 마을 주민들에게 구덩이를 덮게 했다. 연초면 상송마을에 거주하던 참고인 옥○○은 총살 당일 총성을 들었다. “어스름한 아침, 오전 6시 무렵 될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소 풀을 먹이고 학교에 가야 했기 때문에 이른 시간에 소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마을 앞산에 올라 있었다. 그때 마을 앞에서 총소리가 났다.”

당시 군인들은 사람들이 완전히 묻힌 것을 확인하지도 않고 바로 철수했다. 이때 희생된 박○정은 독립운동가 신철(신용기)의 제자로, 연초면 다공리에 거주했다. 박○정은 1949년 5월경 군인들에게 연행돼 하청중학교에 구금되었다. 구금 며칠 후인 5월 28일, 가족들은 박○정이 연초면 송정고개에서 총살됐다는 소식을 들었고, 사건 현장으로 가서 시신을 수습해 매장했다. 당시 딸 박○○도 시신을 수습하러 현장에 갔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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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박○○

“할머니와 함께 연초면 송정고개에 가보니 큰 무덤이 있고 근처에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애통해서) 가슴을 몇 번 치더니 흙을 손으로 파기 시작했고, 주위의 사람들도 다 같이 흙을 팠습니다. 처음에 시신 한 구가 나왔는데, 목에 총을 맞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에 우리 아버지의 시신이 나왔습니다.”



한편 연초면 다공리 주민 윤○○은 당시 하청중학교에 연행·구금되었다. 윤○○은 박○정이 하청중학교에 구금돼 있던 것을 목격했다. 윤○○은 박○정이 군인들의 토벌이 끝난 마지막 날 총살당했고, 시신은 당일 바로 수습했다고 증언했다.
희생 장소인 연초면 송정고개.

희생 장소인 연초면 송정고개. 1949년 당시 산 아래에 조그마한 밭이 있던 곳으로, 이 자리에는 현재 건물이 들어서 있다. 참고인 옥○○은 연초면 송정고개 희생 사건의 희생 장소가 이 건물 마당의 중간쯤이라고 진술했다. ①은 상송마을회관, ②는 현재 옥포고등학교 위치다.

남편이 총살된 날, 아내는 딸을 낳았다

토벌군은 1949년 5월 10일 전후 일운지서가 있는 지세포리에 주둔하며, 구조라리와 지세포리 일대 주민들을 구타하면서 좌익 또는 좌익에 협조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과 은신처 등을 조사했다. 윤○원(1929년생, 농업)은 일운면 옥림리 하촌마을에 거주하던 중 1949년 5월 10일(음력 4월 13일) 일운면 옥림리 가실바구미 인근 굴에서 군인에 의해 희생되었다. 윤○원은 일운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옥림리 하촌마을에서 농사를 지었다. 옆 마을 옥림리 상촌마을에는 박상○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고, 윤○원은 박상○의 동생 박세○과 친한 친구였다. 1949년 4~5월 토벌군이 거제도에 주둔하던 시기, 토벌군은 ‘박상○이 사는 마을’이라는 이유로 옥림리에 들어와 마을 청년들을 불러내 구타하거나 연행했다. 마을 청년들은 군인들을 피해 도망을 다니거나 산으로 숨기도 했다. 옥림리 가실바구미 인근에는 윤○원을 포함한 5~6명의 청년이 굴을 파고 숨어 있었고, 토벌군은 윤○원을 쫓으며 아버지 윤○○와 아내 주○○을 구타했다.

1949년 5월 초, 윤○원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생활했다. 당시 윤○원은 토벌군에게 구타당해 다리를 다쳐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군인들이 집으로 와 일운지서로 연행했다. 윤○원은 연행된 후 2~3일간 조사를 받았는데, 경찰과 지서 보안대는 윤○원이 원하는 정보를 말하지 않자 윤○원의 집으로 와 “왜 남편이 사실대로 말을 하지 않느냐”며 임산부인 아내 주○○을 구타하기도 했다. 윤○원이 연행된 지 2~3일 후인 1949년 5월 10일, 토벌군과 일운지서 경찰들은 윤○원을 앞세워 가실바구미 인근 굴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러나 가실바구미 인근 굴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이미 모두 도망을 간 후였다. 군경은 그 자리에서 윤○원을 총살했다. 윤○원의 아내 주○○은 남편이 잡혀가던 모습을 목격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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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주○○

“군인들이 집에 와서 남편을 데리고 갔습니다. 남편이 잡혀갈 때, 시숙이 (경찰들에게) 맞아도 아프지 말라고 (남편의) 옷을 두껍게 입혀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잡혀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총을 맞아 죽었습니다. 남편은 군경에게 굴의 위치를 알려주고, 굴에서 총을 맞고 죽었다고 합니다. 남편이 ‘같은 조선사람인데 살려주세요. 이 앞에 논 세 마지기가 있는데 그걸 드릴테니 살려주세요’ 하는데도 총을 쐈다고 합니다.”



윤○원이 희생된 뒤 ‘지서 보안대’로 근무하던 동창 김○○가 윤○원의 가족들에게 총살됐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윤○원은 배에 총을 맞고 혼자 사망했으며, 부모와 형제들이 시신을 수습해 선산에 매장했다. 그리고 윤○원이 희생된 날, 아내 주○○은 딸 윤○연을 출산했다.
사건명 경남 거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1)
사건조사보고서 〈경남 거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1)〉, 《2022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3권, 2023.
관련 사건조사보고서 〈거제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권, 2009.
〈경남 통영ㆍ거제 국민보도연맹원 등 민간인 희생 사건〉, 《2009년 조사보고서》 5권, 2010.
지역 경남 거제지역
사건 발생일 1949년 4월〜1950년 6월
진실규명 신청인 김○연 등 14명
진실규명 결정일 2022년 12월 27일
진실규명 대상자 김○주 등 14명
가해주체 국군 16연대, 호림부대, 거제경찰서 경찰 등
결정사안 한국전쟁 발발 전 경남 거제에 거주하던 김○주 등 14명이 국군 16연대, 호림부대, 거제경찰서에 의해 연행‧구금됐다가 둔덕면 하둔리 앞산, 하청면 하청중학교 앞산, 연초면 송정고개 등에서 집단 살해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참고자료 KTV 국민방송, [진실 그리고 화해 시즌2] 침묵의 바다 - 거제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