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미도 미군폭격 사건 왜 미군은 월미도 마을을 폭격했을까? - 방어 요새로 구축된 월미도

9월 10일 오전 7시, 월미도 마을에 네이팜탄이 떨어지다

 1950년 9월 초,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푸르러 가을빛이 완연했다. 월미도 해안마을에 살던 이〇기(월미도 주민, 당시 18세)는 지난밤 내내 월mi산에서 인민군 진지 공사에 동원돼 일하다가 동틀 무렵에야 집에 돌아왔다. 인민군은 월미산 산허리를 감아 도는 일주도로를 따라 위아래 두 줄로 교통호를 내고, 주요 요소마다 방공호, 벙커, 사격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인민군 방어 병력은 주로 월미산 서쪽 진지에 배치돼 참호와 벙커에 고사포와 해안포, 기관총 등을 설치하고 바다를 경계했다.

월미도를 방어 요새로 만들기 위한 인민군의 계획에 따라 참호 공사는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1950년 9월 10일, 이〇기는 지난밤 공사에 동원돼 일하다 새벽에 집에 돌아왔다. 평소에는 피곤을 못 이겨 금세 곯아떨어졌지만 그날은 아직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그때가 아침 7시쯤이었다. 이〇기는 그날따라 비행기 소리가 유난히 자주 들려 이상했다. 그런데 마을 위를 지나가는가 싶던 비행기가 다시 돌아오더니 머리 위로 비행기 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 커지고 곧바로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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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〇기 구술, 2012. 10. 11.

“그때가 9월 10일이던가. 낮에 보면 팔미도 바깥으로 배가 항시 들어와 있었어요. 항공모함도 가끔 들어와 있었고 정찰기도 떴죠. 그런데 그날따라 비행기가 많이 뜨기 시작하더라고. 한 너덧 대가 월미도 상공을 척 지나가더니, 저쪽 영종도, 작약도에서 방향을 틀어가지고서 내리꽂히는 거지. 내리꽂히면서 동네에다 네이팜탄을 던지는 거야.”



큰 폭발음에 깜짝 놀란 이〇기와 가족들은 부리나케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첫 폭탄은 마을 한가운데에 떨어졌는데 다행히 그의 집은 마을 바깥쪽에 있었기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또다시 폭격기가 날아오면서 연이어 폭탄을 떨어뜨렸다. 첫 폭격에 이미 마을은 기름을 태울 때 나는 시커먼 연기에 휩싸였다. 당시 월미도 주민들의 집은 대부분 초가집이었기 때문에 쉽게 불에 타 쓰러졌다.
마을에 떨어진 폭탄은 목표물을 불태워 없애기 위해 고안된 ‘네이팜탄’이었다. 폭격이 시작된 순간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전날 밤사이 참호 공사에 갔다 와서 곯아떨어져 잠을 자던 시각이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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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〇기 구술, 2012. 10. 11., 출처=강변구, 2017

“당시는 밤에 작업 나갔던 사람들이 대부분 잘 때였거든. 밤새 일을 했으니까요. 그런 곳에다 네이팜탄을 투하시킨 거지. 폭격기 넉 대가 돌아가면서 동네에 떨어뜨린 거야. 집들이 밀집돼 있는 데다 집이 전부 황토집이니까, 나무로 만들고 지붕에는 이엉을 얹었으니까 네이팜탄이 떨어지니 불이 나는 거지.”

월미도 항공사진

미 해병대를 따라 종군했던 사진팀이 촬영한 월미도 항공사진(1950년 9월 19일) @인천시립박물관

월미도 마을 지도

원주민들의 기억으로 만든 1950년 당시 월미도 마을 지도. 9월 10일 폭격에서 첫 네이팜탄이 투하된 장소(가운데 원)는 민가가 밀집한 마을 한복판이었다. 마을 바로 아래에는 철망을 경계로 두고 해방 후 진주했다가 철수한 미군 기지 건물이 있었다.
@월미도귀향대책위원회

콜셰르 폭격기

월미도 폭격 임무를 담당한 콜셰르 폭격기(F4U-4B). @위키피디아

대피하는 주민들에게도 기총소사

마을 사람들은 놀라서 집에서 뛰쳐나왔다. 당장 피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마을 앞은 미군 부대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어서 모두들 바닷가 다리 쪽으로 몰려갔다. 섬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천으로 연결되는 유일한 길목인 다리를 건너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폭격기가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도 기관총을 쏘아댔다. 몇몇 사람이 혼비백산해서 다리를 건너 인천 쪽으로 뛰기 시작했는데, 폭격기는 뛰어가는 사람들에게도 총을 쏘아 쓰러뜨렸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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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〇자 진술, 2007. 10. 25.

“우리 가족은 전쟁이 시작되고 월미도를 떠나 영종도에 피난 가 있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할머니랑 사촌 동생을 데리러 월미도에 들어갔었다. 그날 아침 폭격을 피해 아버지는 할머니와 사촌 동생을 데리고 갯벌로 뛰었다. 그때 비행기가 아버지 쪽으로 날아오더니 기관총을 쏘았다. 아버지는 왼손에는 사촌 동생을 오른손으로는 할머니를 붙잡고 있었다. 총소리가 들리는 순간 아버지가 사촌 동생을 품에 안고 엎어졌다. 일어나서 보니까 총알 자국이 아버지 왼쪽 옆구리를 따라 죽 그어져 있었다. 조금만 비켜났다거나 사촌 동생이 아닌 할머니를 품에 안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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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〇춘 진술, 2008. 2. 11.

“우리 식구는 폭격을 피해 방공호에 숨었는데, 옆에 폭탄이 떨어졌는지 연기가 확 스며들어 숨을 쉴 수가 없어 밖으로 나왔다. 어느 집에 들어가 동생들과 함께 숨어 있다가 다시 나와 북쪽 해군 관사, 조탕 부근으로 뛰었다. 북쪽 해변 부근에는 사람들이 이미 많이 모여 있었다. 잠시 후 월미도 북쪽 지역에서 폭격이 시작되자 개펄로 뛰었는데 동생이 안 보여서 뒤를 돌아보니 동생이 갯골에 빠져 있었고, 기관총 자국으로 봐서 동생의 주변으로 기관총이 빗발쳤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동생을 갯골에서 끌어내 인천 방면으로 정신없이 뛰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마을 청년 몇몇이 재빨리 갯벌에 둥그렇게 둑을 쌓고 물을 가두어 진흙탕을 만들었다. 그리고 주민들이 한 명씩 진흙탕에 굴러 온몸에 진흙을 묻혔다. 이렇게 해서 다리 아래 갯벌에 엎드려 있으면 폭격기가 알아보지 못하거나 발견하더라도 이미 죽은 것으로 알까 싶어서였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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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〇기 구술, 2012. 10. 11.

“다리 밖은 노출이 되니까, 아무것도 없으니 숨을 데가 없단 말이야. 갯벌로 나오면 괜찮겠지 했는데 기총소사를 하니까 갯벌에 가서 전부 위장을 하는 거지. 펄들을 몸에 다 묻히고 엎드려 있는 거야. 비행기에서 보면 사람들이 보이지 않으니까 기총소사를 몇 번 하고서는 이제 주로 부락에만 공습을 계속한 거지.”



폭격기는 월미도 상공을 선회하다 주민들이 보이면 급강하해서 기관총을 쏘고 다시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이〇기는 갯벌에 엎드려 있다가 폭격기가 거대한 새처럼 몸을 훑고 지나는 순간 살짝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그러자 폭격기의 조종석에 엄지손톱만 한 조종사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만큼 폭격기가 낮게 날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엎드린 사람들이 모두 죽은 줄 알았는지 폭격기는 돌아가서 다시 오지 않았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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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〇기 구술, 2012. 10. 11., 출처=강변구, 2017

“당연히 보였겠지. 개펄로 위장했지만 그거 안 보이겠어? 다 보이지. (…) 몇 번 기총소사 했으니 저놈들 다 죽었구나 싶었던 게지. 꼼짝 않고 쓰러져 있으니까 그냥 놔두고 가옥들만 폭격한 거야.”



주민들이 갯벌에 몸을 숨기고 있는 동안에도 폭격은 계속되었다. 폭격은 마을과 북쪽 해안가의 유원지 건물들까지 모두 잿더미가 된 후에야 멈추었다. 그때가 낮 12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월미도 마을 자리에 들어선 미군 부대

월미도 마을 자리에 들어선 미군 부대. 사진 중앙의 아치가 부대 입구다.
월미도 주민들은 폭격 당시 다리 왼쪽 갯벌을 통해 대피했다. @인천시립박물관

폭격 이후 사라진 마을, 바로 옆 미군 기지는 멀쩡해

폭격이 멈추고 나서도 저녁까지 갯벌에 숨어 있다가 주민들이 마을로 돌아와 보니 약 120가구에 600여 명이 살던 마을은 완전히 불에 타 버린 상태였다. 폭삭 주저앉은 초가집 속에도, 다 그을린 감자밭에도, 어제까지 물을 길어 먹던 우물가에도 불에 탄 시신이 널려 있었다. 생존한 주민들은 가족, 친지들의 시신을 찾아 가매장했다. 폭격 현장에 남은 시신들은 하나같이 불에 타 신원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유족 정〇은 주민은 모친으로부터 새까맣게 탄 시체가 많아서 아버지 시신을 찾기 어려웠는데, 입을 벌려 금이빨을 보고 아버지인 것을 알았다고 들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마을 사람들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밭에서 감자를 캐내 먹고서 밤을 지새웠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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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〇기 구술, 2012. 10. 11. 출처=강변구, 2017

“저녁에 물이 들어오니 다리 가새에 붙어 있다가 추워서 동네에 들어왔는데 아무것도 없는 거야. 모든 게 다 탔지. 돌아가신 분들도 있고. 다 타버려서 누가 누군지도 모르지. 가마때기 같은 걸 구해다가 깔아놓고 시신 수습을 했어.”



그러나 마을 바로 앞에 붙어 있던 미군 기지는 불똥 하나 튄 흔적 없이 멀쩡했다. 작전계획상 폭격 대상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월미도 섬 전체에 대한 무차별 폭격에도 주 폭격 대상지(마을) 바로 아래 미군 막사가 피해를 입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됐다는 점은 미군의 월미도 폭격이 철저한 계획 아래 수행됐는지를 보여준다.

이튿날인 11일은 폭격이 없었다. 그리고 12일에 다시 폭격이 시작되자 주민들은 급히 마을을 떠났다. 주민들은 마을을 떠나면서도 전쟁이 끝나거나 이 지역에서 전투가 끝나고 조용해지면 당연히 다시 마을로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다. 누구도 그것이 고향 마을과의 마지막 이별인 줄 알지 못했다. 검게 그을린 집터를 뒤로하고 마을을 떠난 사람들은 그야말로 진흙투성이가 된 옷 한 벌밖에 가진 게 없었다. 그나마 자다가 뛰어나오느라 옷도 제대로 못 입은 분들도 많았다고 한다. 월미도 주민들은 1950년 9월 12일 그날부터 현재까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유일하게 남한에 고향을 둔 ‘실향민’이 된 것이다.
1948년경의 월미도

1948년경의 월미도. 주민들이 마지막으로 거주했던 해안마을과 마을 앞 미군 막사가 보인다. @NARA

그날, 월미도 폭격의 재구성

1950년 9월 10일은 한국의 전형적인 맑은 초가을 날씨여서 비행하기에 좋았다. 미 해병대 소속 콜셰르 폭격기 8대가 항공모함 시실리(SICILY)에서 이륙한 시각은 오전 6시였다. 같은 시각, 같은 기종의 폭격기 6대도 항공모함 바딩 스트레이트(Badoeng Strait)에서 이륙했다. 모두 14대로 이루어진 폭격기 편대는 이날 마을이 있는 ‘월미도 동쪽 지역의 집중 폭격 또는 전소’ 임무를 맡았다. 집중 폭격(Saturation Bombing)이란 ‘적이 있는 일정 지역을 목표로 설정해 집중적이고 무차별적으로 폭격하는 것’을 의미했다. 집중 폭격 시에는 엄청난 화력을 퍼부어 폭격 대상지를 빈틈없이 완전히 포탄으로 뒤덮어 버리는데 이를 비유적으로 ‘땅이 푹 젖게’ 만든다고 말한다. 집중 폭격 대상 지역으로 선정되면 그 안에 있는 모든 인명, 건물 등은 적 또는 적 시설물로 간주돼 공격 목표가 된다. 즉 폭격기 조종사들에게 월미도 내에 움직이는 모든 인명은 적 또는 적 게릴라로 간주되는 공격 대상이었고, 마을의 초가집과 창고는 적 병력이나 무기가 은닉된 시설이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보이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전 7시, 편대는 월미도를 한번 정찰한 후 4대씩 짝을 지어 북쪽으로 갔다가 영종도 상공에서 다시 남쪽으로 빙 돌아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월미도 위에서 급강하해 마을 위를 지날 때 각자 네이팜탄을 두 개씩 떨어뜨렸다. 길쭉한 무처럼 생긴 포탄이 마을에 떨어지며 이내 거대한 화염과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연기가 너무 자욱했기 때문에 폭격기들은 섬 주위를 선회하며 연기가 걷히기를 기다렸다가 시야가 확보되면 다시 저공비행 상태에서 불타지 않은 건물들에 로켓포와 기관총을 쏘았다.

7시 40분, 폭격기 15대가 1차 폭격에서 파괴되지 않은 창고 여섯 동을 골라서 공격했다. 폭격기 조종사들은 본부로부터 “편대는 해안선과 방파제를 따라 기총소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해안선이란 마을 사람들이 숨어 있는 갯벌이고, 방파제는 월미도 다리였다. 지휘관이 폭격기 조종사들에게 숨거나 달아나는 인명을 확인하고, 그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에 갯벌과 방파제(다리)에서 많은 주민이 기관총 사격에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2차 폭격이 멈추고 한두 시간 후 폭격기 8대가 날아와 1차와 2차 폭격에서 불타지 않은 ‘작은 건물들’ 즉, 아직 남아 있는 마을의 집들을 폭격했다. 이러한 3차례의 철저한 폭격으로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월미도 마을은 지도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인천상륙작전 지도

인천상륙작전 지도. 상륙은 세 군데로 나뉘어 실시되었다. 미군은 15일 오전 만조 때 월미도 북쪽 해안(그린비치)에 상륙해 섬을 장악한 후, 오후 만조 때 인천항 북쪽 해안(레드비치)과 남쪽 해안(블루비치)에 상륙했다.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월미도는 인천항 전체와 시가지까지 사정거리에 둘 수 있는 감제고지였다.

월미도에 상륙한 미 해병대원

월미도에 상륙한 미 해병대원이 월미도 주민으로 추정되는 한국 노인에게 지리를 물어보고 있다. @인천시립박물관

월미도 다리 봉쇄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당일 월미도 점령 직후 미군 병사들이 월미도와 인천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인 도로(다리)를 봉쇄하고 있다. @인천시립박물관

왜 하필 마을을 폭격했을까?

인민군 방어 병력 대부분은 월미산 서쪽 진지에서 바다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9월 10일의 목표 지역은 군사시설과는 그야말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월미산 동쪽 지역의 민간인 집단 거주 지역이었다. 월미도 동쪽에는 마을 외에 장교 몇 명이 거주하는 인민군 본부와 취사장이 있을 뿐이다. 그것도 마을과 직선거리로 100여m 떨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미군이 민간인 마을의 존재를 몰랐던 걸까? 오히려 아주 정확히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해방 직후 마을 바로 앞에 미군이 들어와 근무했기 때문이다. 미군은 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인천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군인들을 불러 활용했다. 이 과정에서 월미도 민간인 마을의 존재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민 이〇기는 “미군은 월미도의 민간인 주거지와 마을의 존재를 손바닥 보듯이 알고 있었다”라고 증언했다. 실제로 미군은 마을을 포함해 월미도 구석구석이 자세히 나오는 항공 사진을 분석하고, 인천 지역에 첩보부대를 파견해 월미도의 인민군 방어 실태를 파악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결과 미군이 월미도에 민간인 마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

월미도 폭격 계획을 세우는 데 인천에 파견된 정보장교 클라크 대위와 한국 해군 첩보대가 알아낸 정보가 목표 선정에 중요하게 활용되었다. 클라크 대위는 월미도에 “인민군이 1,000명 정도 있다”고 보고했다. 그런데 한국 첩보대가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월미도에 주둔한 인민군은 400명 정도였다. 상륙작전이 끝나고 인민군 포로를 심문해 보니 인민군의 숫자는 400명이 맞았다. 그렇다면 나머지 600명은 누구였을까? 1950년 9월 당시 월미도에는 120가구 6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따라서 클라크 대위의 보고서에 나오는 1,000명은 인민군만이 아니라 월미도에 거주하는 주민에 타지에서 들어온 인부들까지 모두 포함한 숫자였다. 클라크 대위는 보고서에서 이들 1,000명 모두를 인민군, 즉 적으로 보고한 것이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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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〇시 구술, 2012. 9. 13.

“(…) 첩보에 나온 것이 약 1,000명이다. 그냥 인민군이고 뭐고 약 1,000명이다. (민간인) 600명, (인민군) 400명이면 1,000명 아냐? 월미도 인구가 약 1,000명이다 이거에요. 그래서 인민군이고 뭐고 다 공격하라는 허가를 받았나봐. 제일 처음에는 마을 주민들이 약 600명이고, 산 반대편 너머에 인민군 400명이 산중턱에 방공호를 파고 있다. 이건 완전히 세밀하게 내준 거란 말이야. 그런데 얼마 있다가 약 1,000명이다. 이건 주민을 다 인민군으로 몰아버린 거란 말이에요.”



월미도는 인천항을 내려다보는 ‘감제고지’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매우 중요한 점령 대상이었다. 상륙군이 인천항에 발을 디딜 때 배후의 월미산에서 공격을 가한다면 매우 큰 병력 손실과 더불어 작전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맥아더는 월미도 점령을 가장 중요한 선결 과제로 꼽았다.

월미도 점령에 앞서 바다쪽 인민군 진지는 함포사격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함포 사격이 닿지 않는 월미산 너머 동쪽 지역이었다. 마을과 유원지 건물들을 그대로 둘 경우 미군이 월미도에 상륙할 때 그곳에 숨어 있던 적에게 공격당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미군은 인천상륙작전이 너무도 불확실한 조건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한 불확실성을 완벽히 제거하려 했다. 그것이 비록 민간인 마을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한국전쟁의 흐름을 바꾼 인천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0일 아침 7시 월미도의 동쪽 민간인 마을에 떨어진 네이팜탄에서 첫 포성을 울렸다. 이날의 작전은 월미도의 민가와 주민들을 모두 적의 시설과 병력으로 간주하고서 이루어졌다. 초가집과 창고들을 불태우기 위해 네이팜탄을 무려 95발이나 투하하고, 폭격을 피해 다리로 갯벌로 뛰어가는 민간인들에게 기총소사를 한 것은 오로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려는 미군의 계획이었다.

9월 10일 월미도 폭격으로 희생된 주민들의 수는 원주민들의 증언과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결과 100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 밖에 참호 공사를 위해 월미도에 와 있던 인천 지역 주민들(노무자)도 상당수 희생되었다.

미군이 나가면 살게 해주마…

1952년 3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시기에 월미도 주민들은 인천시장에게 처음으로 진정서를 냈다. 당시 표양문 인천시장을 만난 자리에서 주민 대표 다섯 명은 마을에서 쫓겨나 변변한 식량도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지내는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자 시장이 주민들의 등을 두드려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미군이 저렇게 들어와 있으니 어쩌겠나. 걱정하지 마라. 미군이 나가면 다시 들어가 살게 해주겠다.”

세월이 흘러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발표한 주한미군 감축 정책에 따라 기적처럼 1971년 7월 20 월미도에서 미군이 철수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한국 해군(해군 2함대 사령부)가 주둔했다. 또다시 2001년 해군이 월미도에서 평택으로 기지를 옮기면서 주민들은 고향 땅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지만 마을은 인천시로 소유권이 넘어갔고 이후 공원으로 변했다.
1952년 진정서

1952년 인천시장 면담 당시 제출했던 진정서. @월미도귀향대책위원회

진실규명과 귀향 운동

2005년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회 한인덕 위원장이 취임한 후 2006년 1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을 하고, 2008년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졌다. 2025년 현재까지 귀향대책위원회는 인천시와 국방부에 귀향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월미도 미군 폭격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

2007년 9월 13일 공원으로 변한 마을 자리에서 월미도 유가족들과 주민들의 주최로 ‘월미도 미군폭격 희생자 위령제’가 처음으로 모셔졌다. 사진은 64주기 월미도 미군 폭격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2014년 9월 15일)이다. @강변구

월미도원주민희생자위령비 제막식

2021년 11월 2일 열린 월미도원주민희생자위령비 제막식.
한복을 입은 이가 한인덕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회 위원장이다.

귀향대책위원회 농성장

월미공원 입구에 설치된 귀향대책위원회 농성장(2024년 9월 11일).

사건명 월미도 미군폭격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월미도 미군폭격 사건〉 (1기)
지역 인천 월미도
사건 발생일 1950년 9월 10일
진실규명 신청인 한○덕 외 36명
진실규명 결정일 2008년 3월 13일
진실규명 대상자 정○구 등 10명
가해주체 리차드 루블 제독의 해병대항공단 15항모전단
결정사안 한국전쟁 중인 1950년 9월 10일(음력 1950년 7월 28일) 미 해병대 소속 항공기들의 인천 월미도에 대한 집중폭격으로 월미도 거주 민간인들이 집단희생된 사건에 대해 진실이 규명된 사례
참고자료 [KTV 영상기록 진실 그리고 화해 시즌2] 전쟁의 그림자 - 월미도 미군폭격 사건
《월미도, 기억 너머의 기억》(인천시립박물관 특별전시도록, 2014)
《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작은 섬 월미도가 겪은 큰 전쟁들》(강변구,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