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화해위원회는 2024년 9월 돌고개 현장에서 유해발굴을 실시했다. 그러나 돌고개 일부와 대뱅이재의 유해는 아직 발굴되지 못했다. 강영구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김천유족회장이 유해발굴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강변구
 1950년 7~8월 경북 김천과 구미지역에서 국민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연행·소집된 이들이 김천경찰서와 선산경찰서, 김천소년형무소 등에 구금됐다. 미국 자료에 의하면 김천경찰은 김천과 주변 지역에서 보도연맹원 1,200명을 체포해 구금했다. 당시 경찰과 형무관들은 구금된 보도연맹원과 좌익 관련 재소자들이 모두 학살됐다고 증언했다.
김천형무소 형무관의 새 운동화는 그날 피로 물들었다
- 구성면 송죽리 돌고개 사건
 1950년 7월 이른 중순경 어느 날이었다. 형무관 박○○이 호송하는 화물트럭 1대가 김천형무소에서 출발했다. 트럭 짐칸에는 보도연맹원 20여 명과 서너 명의 형무관이 타고 있었다. 김천 송죽리 돌고개를 넘어가는 도로에 차를 세우니 산 아래 밭에는 이미 실려온 보도연맹원들이 둘씩 묶인 채 가득히 앉아 있었고, 헌병들이 이들을 지키고 있었다. 산 아래에는 동네 주민들을 시켜 파놓은 구덩이들이 여러 개 있었다. 보도연맹원들은 그 구덩이 앞에 네댓씩 앉혀졌다. 헌병들이 총을 쏘자 서로 손을 묶인 사람들이 구덩이 안으로 떨어졌다. 박○○ 형무관은 헌병의 명령에 따라 미처 구덩이에 떨어지지 않은 사람들을 발로 밀어 넣었다. 그는 김천형무소에서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대구로 이감 가는 줄 알고 하얀 운동화를 새로 사서 신었다. 그날 운동화는 벌건 피에 물들었다.
참고인 박○○ 진술녹취, 2009. 7. 11.
“경찰이 잡아온 보도연맹원들은 형무소에 넘겨져서 우리 교도관들이 관리하고, 그거 할 때는 헌병들이 했지. 헌병들이 쐈지 … (보도연맹원들은) 오래 안 갔지. 며칠 있다가 차로, 가들은 어디 가는지 몰라요. 대구 이감 간다 그랬거든. 좁은 창고에 있다가, 좋아했거든. 천막 덮어 씌어가지고 그래 갔어 … 나는 좋은 데 간다고 하얀 운동화 사 신고 갔다고 … (중략) … 다하고 나서 형무소 와서 저녁 먹는데 돼지고기 국을 끓여주네. 안 그래도 난 비린내가 코에 콱 뱄는데, 돼지고기 국을 끓여줘요, 수고했다고, 하이고 … (중략) … 두 사람씩 묶어가지고. 똑 떨어지게 돼 있더라고. 그러면 하나는 떨어지고 하나는 안 떨어지고 걸려 가지고 있잖아. 그걸 발로 차서, 내 운동화가 빨간 운동화가 됐더라니까.”
1954년 항공 사진에 보이는 김천형무소. 1950년 7~8월 김천 등지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김천경찰서 유치장과 김천형무소에 수감됐다. @국토정보맵
 구덩이는 약 3m 길이에 어른 가슴 너머 깊이였다. 구덩이마다 각 열댓 명 정도가 매장됐다. 총살이 끝나자 산 너머 대기하고 있던 근처 마을 사람들이 삽을 들고 와서 덮었다. 그날 박○○ 형무관이 목격한 희생자는 약 100명 정도였고, 그 뒤로도 형무소에서는 며칠 동안 계속 보도연맹원들을 학살 장소로 실어날랐다.
구성면 상좌원동에 거주하던 곽○○은 동네 어른들이 “보도연맹원들 죽이는데 구덩이 파러 간다”면서 연장을 가지고 산으로 가는 것을 보고 호기심에 뒷산에 올랐다가 학살 현장을 목격했다. 뒷산 골짜기인 돌고개에는 큰 구덩이가 두 개 정도 있었고, 도로에는 트럭 2대가 주차돼 있었다. 끌려온 보도연맹원들은 5∼6명씩 묶인 채 구덩이 앞에 앉혀진 다음 헌병이 쏜 총에 맞아 구덩이 속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반복적으로 학살이 진행돼 각 구덩이에 50여 명, 총 100여 명이 학살되었다.
 돌고개서 희생된 사람들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이들이었다. 1950년 7월 초부터 그달 말 사이에 해당 지서를 거쳐 김천경찰서에 구금된 후 돌고개로 끌려갔다.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된 계기를 보면 직장 단위로 자기도 모르게 가입하거나 친구나 가족이 신변에 이롭다고 권유를 받은 경우, 대구10·1사건 등 좌익활동에 연루돼 형무소에서 복역하거나 경찰 조사를 받은 경력 때문에 가입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 외에도 경찰은 보도연맹원 명단을 작성하면서 평소 경찰에게 반감이 있다거나 지역 지식인층에 속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지례면 교리에서 살던 문○곤은 지례면사무소에서 일하다 정년퇴직 후 금융조합의 농협창고장으로 근무하던 중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1950년 7월 4일 김천경찰서에 구금됐다가 7월 12일 구성면 돌고개에서 살해됐다. 김천의 독립운동가 임종업은 대구10·1사건으로 광주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출소 후 김천보도연맹 간사장으로 임명됐다. 임종업은 1950년 7월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연행됐다가 1950년 7월 14일 돌고개에서 살해됐다. 당시 학살 장소에서 생존한 김천여중 학생(당시 18세) ○○○의 증언에 따르면 보도연맹원들은 경찰에 의해 체포·구금된 후 군에 인계됐다. 그는 학살 장소로 이송된 후 그곳에서 임종업을 목격했다. ○○○은 현장에서 헌병에 의해 재심사를 받은 다음 귀가처리됐지만 나머지 보도연맹원들은 살해되었다.
1950년 7월 28일 돌고개에서 총살이 벌어지던 중 광천2구의 ○씨는 시쳇더미 속을 헤치고 유일하게 살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개령면 양천동장 강○봉 등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희생 사실을 전했고, 가해자는 경찰이었다고 증언했다. ○씨는 일주일 후 숨을 거두었다. 전쟁이 끝난 후 강○봉의 아들 강영구(사건 당시 5세)는 보도연맹원을 모집했던 개령면장을 만나 당시의 진상을 물어보았다. 개령면장은 “그때는 나라의 지시로 한 것이고, 지나간 일”이라고 했다. 당시 유족들은 희생 장소를 알고 있어도 너무 두려워서 감히 시신 수습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유족 중 강영구만이 20년 전 학살 장소의 흙을 퍼다 부친의 가묘를 만들었다. 그 후 2013년 강영구는 김천지역 유족회를 결성해 진실규명 운동에 앞장섰다.
김천경찰서에서 트럭으로 실려가 학살된 주민들
- 구성면 광명리 대뱅이재 사건
 1950년 7월 10일 아침이었다. 농소면 신촌리에 살던 한〇섭은 논에 물을 대고 집에 가던 중에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경찰 2명에게 연행됐다. 그를 보도연맹에 가입시킨 조직책 윤〇〇은 그때 이미 몸을 피한 뒤였다. 한〇섭의 어머니는 김천경찰서로 아들을 면회하러 갔지만 만날 수 없었다. 다만 경찰서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트럭에 가득 실려 나가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어머니는 아들이 그때 그렇게 희생됐을 것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윤○○의 집안과는 원수처럼 지내게 되었다.
김천경찰서에 출발한 트럭은 대뱅이재로 갔다. 1950년 7월 중순경(음력 5월 말) 구성면 광명리에 살던 송〇익은 친구들과 동네 소 20여 마리를 대뱅이재 왼쪽(구성면에서 김천시내 방향) 골짜기에 풀어놓고 산 정상에서 놀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골짜기 반대편의 학살을 목격했다. 먼저 구덩이 파는 일꾼 10여 명이 작업을 해놓고 현장을 벗어나 길가에 대기했다. 곧 푸른 덮개를 씌운 4톤 트럭 1대에 줄줄이 묶인 사람들과 총을 든 호송자 10여 명이 도착했다. 구덩이 속에 사람들을 여섯 줄로 겹겹이 세운 채 등 뒤에서 총격을 가했다. 한 줄에 한 명씩 맡아 연발로 학살했으며, 나머지는 주변 경계를 섰다. 총을 쏜 사람들은 완장도 없고 아무 부착물도 없는 군복 차림에 챙이 달린 전투모를 쓰고 칼빈총을 들고 있었다. 복장과 무기로 판단하면 가해자들은 의용경찰이었다. 총살 직후에는 길가에 대기하고 있던 일꾼들이 현장에 들어가서 구덩이를 덮었다.
이 같은 학살은 하루에 3번 일어났는데, 트럭 1대가 오가면서 희생자들을 계속 날랐다. 송〇익은 다음 날 반대편 골짜기에서 소를 방목했다가 전날 소를 풀어놓았던 골짜기에서 총살 광경을 또다시 목격했다. 그날은 방목해 놓은 소가 경계를 보던 경찰에게 발각돼 송〇익과 친구들은 현장 주변에서 쫓겨났고 다음 날부터 그 일대에 통행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그 후에도 총소리는 여전히 들렸다. 송〇익이 학살을 목격한 이틀 동안 총 트럭 6대 분량, 200여 명의 희생자가 실려 왔다. 이후에도 대뱅이재 골짜기에서 계속 학살이 일어났다.
김천소년형무소 형무관과 김천경찰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트럭 한 대에 사람을 20∼30여 명씩 실을 수 있었다. 그런데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이 학살 장소로 이송되는 사진에서 같은 트럭으로 50명까지 이송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송〇익이 목격한 희생자는 최소 200여 명에서 최대 300여 명에까지 이를 것으로 보인다. 이후 희생자까지 고려한다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김천지역 유족인 이○○은 진실화해위원회 현지 조사(2007년) 후 대뱅이재 주변 3곳의 골짜기에서 학살된 희생자는 최대 700명이라고 주장했다.
대뱅이재 양쪽 골짜기. @2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시신 수습했다가 보도연맹에 가입된 두 친구
 구미면 송정동에 살던 정○옥은 1950년 7월 27일 아침 논을 매러 나갔다가 오는 도중 보도연맹에 가입됐다는 이유로 선산경찰서에 연행돼 1950년 7월 29일 살해됐다. 정○옥은 1946년 대구10·1사건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 박상희가 경찰에게 사살됐을 때 최○돌 등과 함께 시신 수습을 했다고 대구교도소에서 6개월 복역했다. 출소 후 신분을 보장해주겠다던 선산경찰에 의해 보도연맹에 가입됐다. 한국전쟁 직후 선산경찰서에 구금됐을 때 당시 선산경찰이었던 육촌 자형이 7월 29일 새벽 정규옥이 나간다고 알려줘 가족들은 시신을 수습할 흰옷과 천을 가지고 나갔지만 결국 어디로 간지 몰라서 수습하지 못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결과 그와 함께 박상희의 시신을 수습한 친구 유〇복이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형곡동 뒷산 남티고개에서 총살된 사실로 미뤄 보아 정〇옥도 역시 같은 장소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했다.
억지로 찍은 도장 때문에
죽은 청년들
금오산 반티모리(구미 고아읍 봉환골짜기) 사건
 도개면 신곡리에 살던 김○철은 농사꾼이었다. 그에게 주변 보도연맹원들이 자꾸만 보도연맹에 가입하라고 하는 바람에 말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마을 청년들 대부분이 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됐다. 1950년 7월 초였다. 도개지서 순경이 “지서 주임이 놀러오란다”며 김〇철을 데려가서는 선산경찰서에 구금시켰다. 외사촌 누님이 면회하려고 매일 경찰서 정문에서 기다렸는데 며칠 후 경찰들이 사람들과 김〇철을 트럭에 태워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도개면 신곡리 주민들은 한국전쟁 전부터 선산경찰서 수사계 형사 이○○이 주민들을 감시, 협박하는 등 괴롭히면서 김〇철 등 죄 없는 사람들을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전쟁 직후 인민군이 내려오기 전 보도연맹 회의라며 사람들을 소집해서는 경찰서로 연행해 갔다고 했다. 연행된 사람들은 고아읍 봉환동에서 희생됐는데 유족들과 주민들이 현장을 찾아갔다가 시신들을 알아보기 힘들어 옷 조각으로 신원을 구별하기도 했다.
풀어줘서 고맙다고 수박까지 싣고 갔는데….
금오산 순사양지(구미시 남통동 - 칠곡군 북삼읍) 사건
 산동면 성수리 황○규는 농업에 종사하던 중 처가 종손 진○○이 대구10·1사건에 연루돼 보도연맹에 가입됐다가 1950년 7월 말 선산경찰서에 구금되자 구명하기 위해 경찰서에 찾아갔다. 약 일주일 후 진○○이 풀려나자 황○규는 사례를 하기 위해 수박을 소달구지에 싣고 선산경찰서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선산경찰 이○○는 1950년 7월 말, 후퇴하기 하루 전 선산경찰서 유치장에서 보도연맹원 4∼5명과 구금된 황○규를 만났다. 산동지서 근무 시절 알고 지냈던 사이여서 담배를 권하며 대화를 나눴지만 그날 저녁 유치장에 있던 사람들은 사찰계 형사들에 의해 금오산(남통동)에서 북삼읍으로 넘어가는 ‘순사양지’에서 총살당했다.
| 사건명 |
김천·구미 국민보도연맹 사건 |
| 조사보고서 |
진실화해위원회 〈김천·구미 국민보도연맹 사건〉 (1기)
|
| 관련 조사보고서 |
〈경북 김천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 《2023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경북 김천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2)〉, 《2024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
| 지역 |
경북 김천시 구성면, 구미시 금오산 등지 |
| 사건 발생일 |
1950년 7월 중순부터 8월 초까지 |
| 진실규명 신청인 |
정○재 등 17명 |
| 진실규명 결정일 |
2009년 11월 10일 |
| 진실규명 대상자 |
희생확인자: 정○옥 등 24명
희생추정자: 김○묵 등 13명
|
| 가해주체 |
김천·구미 경찰과 의용경찰, 김천지구 파견대 헌병, CIC |
| 결정사안 |
1950년 7월 초부터 김천·구미지역에서 예비검속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이 1950년 7월 중순부터 1950년 8월 초까지 군·경에 의해 김천시 구성면, 구미시 금오산 등지에서 집단 살해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