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세 강했던 강원도, 그중 강릉과 삼척 두드러져
 강원도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38선 이북 지역에 속해 북한 통치 지역이던 고성과 양양의 대부분 지역을 제외한 강원 영동지역 이남에서 좌·우익 단체가 조직돼 활동했다. 인민위원회들은 미 군정이 수립된 후 1946년 들어서까지 유지됐다. 강원도는 좌익세력이 특히 강했다. 미 군정도 강원 10개 군 중 강릉, 삼척, 울진 3개 군에는 인민위원회 출신 군수들을 인준할 정도였다. 그중 강릉은 남한 전체에서도 좌익세력이 가장 강한 지역이었다. 삼척 역시 탄광 노동자들의 지지를 업고 인민위원회가 활동하는 등 좌익세가 강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의 시작 지점 중 하나인 강원 영동지역은 며칠간의 교전 끝에 7월 1일 삼척을 마지막으로 모든 지역이 인민군에 점령됐다. 인민군 점령기에 정치보위부가 중심이 되고 각 사회단체가 동원돼 우익계 요인 체포와 숙청이 벌어졌다. 체포된 사람은 일단 내무서에서 심사한 후 유치장이나 지하실 창고 등에 감금됐다. 이후 춘천형무소로 이송되거나 인민재판을 열고 그 자리에서 ‘즉결처형’되기도 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인민군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9월 20일경 퇴각 중인 인민군에게 수감자들을 북으로 후송하거나 후송이 곤란할 경우 현지에서 적당히 처단하라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러한 지시에 따라 각 지방에서는 이들을 산중에 끌고 가 대부분 집단학살했다.
강원 영동지역의 군별 진실규명 신청사건의 피해 장소.
한국전쟁 시작된 강릉… 52년까지 국지전 이어져
 강릉은 1950년 6월 25일 인민군이 정동진에 상륙하면서 한국전쟁이 시작된 곳이다. 이틀간의 교전 후 인민군에게 점령됐다가 10월 1일에야 국군에 의해 수복됐다. 그러나 남쪽 지역의 인민군 잔여 병력이 동해안 산악지대를 따라 북상하면서 경찰관서를 비롯한 관공서를 습격해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 1951년 1·4 후퇴로 주문진과 강릉에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주민들이 재차 피난을 떠났다. 강릉은 이남지역으로 향하는 피난민들이 거쳐 가거나 머무르는 곳이 됐다. 전쟁이 잦아든 1952년까지도 인민군 패잔병과 정찰대, 공비 등과 국지적인 전투가 빈번했다. 이 과정에서 군경을 비롯한 민간인들의 피해가 많이 발생했다.
숙직실서 끌려가 희생된 강릉광업소 경리과장
 강릉읍 홍제동에 살던 심〇섭(남, 36세)은 강릉광업소 경리과장으로 재직하는 한편 대한청년단 강릉군 총무부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강릉군 옥계면 산성우리 본동마을에 위치한 (주)대한흑연 무연탄광 강릉광업소 숙직실에서 인민군에게 끌려가 옥계면 낙풍리 밤재에서 총살당했다. 6월 26일 정동진 해안에 상륙한 인민군들은 인근 마을주민들을 강제동원해 수송선에서 탄약과 보급품을 하역시켰다. 이어 강릉광업소로 이동한 후 숙직실에서 자고 있던 심경섭을 비롯해 운수계장 최〇환, 권〇이 등 4명을 옥계면 밤재로 끌고 갔다. 당시 함께 끌려간 사람들은 희생되지 않았으나 심〇섭은 광업소 간부로 재직하며 대한청년단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희생당했다. 가족들은 생환한 최〇환의 연락을 받고 희생 사실을 알았고, 수복 후인 3개월 후 시신을 수습했다.
강릉내무서 구금 후 춘천형무소 이송 도중 희생
 강릉읍 송정리 농민 최〇집(38세)은 대한청년단원이었다. 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7~28일경 같은 마을사람인 지방좌익에게 송정 앞 솔밭과 자택에서 구타당했다. 그때 두 살배기 딸 최〇순이 지방좌익에게 밟혀 죽었다. 최〇집은 마을을 떠나 누나가 사는 강릉군 성덕면에서 숨어지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7월 초쯤에 발각돼 강릉내무서로 끌려갔다. 가족들이 몇 차례 면회하러 갔으나 내무서원이 거절해 면회하지 못하다가 최〇집이 며칠 후면 춘천으로 간다는 소식을 인편으로 전해 듣고 다시 면회하러 갔지만 역시 만나지 못했다. 이후 가족들은 함께 끌려갔다 살아 돌아온 사람에게서 최〇집이 강릉에서 춘천형무소로 이송되던 중 희생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러나 정확한 희생 장소를 알 수 없어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강릉군 옥계면 현내리에 살던 최〇섭(51세)은 여관을 운영하면서 이장과 의용소방대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1950년 7월 17일경 옥계분주소원에게 연행돼 한 달 이상 구금돼 있다가 1950년 8월 15일경 강릉내무서로 이송된 후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〇섭이 전쟁 발발 후 피난을 갔다가 7월 10일경 마을에 돌아온 지 일주일 정도 지나자 옥계분주소원이 새벽에 자택으로 찾아와 조사할 것이 있다며 그를 연행했다. 그는 약 한 달여간 옥계분주소에 구금돼 있다가 8월 15일경 강릉내무서로 이송됐다.
신청인 최○엽(2007. 4. 25)
약 50여 평 되는 금융조합 창고에 2~30명의 사람들을 구금해 놓았으며 창고 주변에는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다.
강릉내무서에서 생환한 현내리 주민 박○○에 따르면 내무서에 구금돼 있던 사람들은 30명씩 호명돼 차에 실려 춘천으로 이송됐는데 당시 최재섭이 호명되는 것을 들었고, 본인은 이틀 뒤 석방됐다고 한다. 또 박○○는 함께 구금돼 있던 내무서 수감자로부터 당시 호명된 사람들이 춘천으로 이송되던 길에 희생당했다는 말도 들었다고 한다.
약사동에 있던 옛 춘천형무소. 『강원화첩(1959)』 사진 발췌. @춘천디지털기록관
1954년 항공사진에 보이는 춘천형무소. @국토정보맵
전쟁 전 무장공비 잡아 인계한 강릉군 현북면 주민들
 농민 최○길(32세)은 강릉군 현북면 장리 배터마을에 살았는데 전쟁 전에 몇몇 이들과 함께 무장공비를 잡아 국군에게 인계한 적이 있었다. 미리 달아나 목숨을 보전한 이도 있었지만 최〇길은 전쟁이 나고 지방좌익에게 붙들려 현북면 어성전리 분주소로 끌려갔다가 이튿날 강릉내무서로 이송됐다. 그 후 1950년 9월 28일경 강릉읍 홍제동 저수지에서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최○길 이외에도 조사과정에서 인지된 마을주민 박달용도 함께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최○길과 함께 끌려간 마을주민들은 강릉내무서 인근의 저수지에서 총살당했다고 한다.
쌀 요구한 빨치산을 경찰에 신고했다며 총살당한 삼척 이장
 삼척은 1950년 7월 1일 인민군에게 점령됐다가 9월 30일 수복되었다. 그러나 북으로 후퇴하던 인민군들이 삼척의 지서 등 공공기관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삼척지역에서는 인민군 점령기에 3건의 희생 사건이 발생했다. 희생자는 4명으로 확인됐다.
삼척군 원덕면 용화리 어민 김〇태(44세)는 이장이자 대한청년단이었다. 그는 전쟁 발발 전 빨치산이 쌀을 요구하자, 며칠 후 주겠다고 한 뒤 경찰에 신고했다. 빨치산들은 약속한 날에 쌀을 가지러 왔고 잠복 중이던 경찰에게 붙잡혔다. 전쟁이 난 이후 1950년 7월 3일 용화리 앞산에서 내려온 빨치산이 김○태를 포승줄에 묶어 용화리 천변으로 끌고 가, 대한청년단 활동과 경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인민재판 직후 총살했다.
우〇문(60세) 역시 용화리 주민으로 중농이었고, 일제강점기에 구장을 지냈다. 1950년 8월 17일경 서너 명의 빨치산들이 우〇문의 자택으로 찾아와 당시 이장이었던 그의 아들 우〇홍의 행방을 찾았다. 행방을 가르쳐 주지 않자 빨치산들은 그 집 일꾼들을 시켜 우〇문을 구타했다. 결국 우〇문은 빨치산들에게 총살당했다. 그리고 집안 물건들을 모두 들어내 일꾼들에게 나눠 가지라고 했다.
1928년 삼척항의 모습. 디지털삼척문화대전에 실린 사진이다. @삼척시립박물관
지방좌익에게 연행돼 희생된 울진 행곡리 청년단장
 1950년 6월 29일 인민군이 울진군 시내를 점령했다. 그 직후 국군 3사단 23연대가 울진에 도착해 시내를 탈환하려 했지만 인민군에게 밀려 후퇴한 후 9월 30일 국군에 의해 수복됐다.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에 사는 농민 전〇성(42세)은 행곡1리 대한청년단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1950년 7월 말경 지방좌익들에게 울진내무서로 연행된 후 소식이 없었다. 이후 가족들은 8월경 울진내무서에 구금된 사람 30여 명이 인민재판을 받기 위해 춘천재판소로 이송되던 중 대관령 인근에서 총살당했다는 소문을 들었으나 시신은 수습하지 못했다.
 김〇근(58세)은 양양군 강현면 방축리 이장이었다. 1951년 1월 4일 이후 마을에 군인이 들어오자 마을 세포위원장과 인민위원장은 이들이 국군일 것으로 짐작하고 김〇근의 집으로 몸을 피했다. 그런데 인민군이 들어온 것임을 알고 돌아갔다. 며칠 후 장총을 든 인민군 또는 지방좌익이 김〇근의 자택으로 찾아와 그를 강현면 용호리로 끌고 갔다.
김○○(2009. 8. 13. 피해자의 아들)
김〇근이 인편을 통해 옷고름과 단추가 달리지 않은 옷을 해오라고 전해와 그의 누나가 이불로 옷을 지어 용호리로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동사(회관)에서 김〇근의 인민재판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이 가보니 군복을 입은 정치보위부 군관과 세포위원장, 인민위원장이 재판을 진행하고 있었다.
김○○(2009. 8. 13. 피해자의 아들)
당시 김〇근의 집에서 세 살고 있던 여맹위원장에게 인민재판 소식을 전해 듣고 마을동사로 갔으며, 그녀에게서 군복 입은 사람이 정치보위부 군관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김수근의 죄목이 나열되자 동사에 있던 자들이 “죽여라” 하고 외치며 구타했다. 며칠 후 그를 포함한 여러 명이 묶여 강현면 상복리 쪽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마을 치안대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희생된 고성 농민
 38도선 이북에 위치한 고성은 해방 이후, 양양의 일부지역과 함께 북한에 의해 통치됐다. 한국전쟁 개전 초기에는 전투가 활발하지 않았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도 북진 또는 남하를 위한 통과지역 내지 후방 병참기지 역할을 했다.
함〇신(43세)은 고성군 간성읍 금수리에 거주하며 농사를 지었고, 국군이 입성한 후 치안대로 활동했다. 그는 1950년 10월 24일 고성군 간성읍 금수리 자택에서 나가, 간성읍 간촌리 지역에서 치안대 활동을 하던 중 퇴각하던 인민군이 간성읍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치안대 활동을 함께 하던 김○○와 간촌리에 거주하던 김○○의 여동생 집 방공호에 숨어 있다가 그의 여동생의 밀고로 인민군에게 끌려간 후 쑥고개에서 희생당했다. 가족들은 쑥고개에서 많은 사람들이 인민군에게 희생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입고 있던 옷 등을 확인해 그의 시신을 수습해 왔으나 정확한 사망 일자를 알지 못해 그가 집에서 나간 음력 9월 14일에 제사를 지낸다.
희생자는 우익 활동가, 이장, 마을치안대 주민들이었다
 희생 사건은 인민군, 내무서원, 지방좌익, 빨치산 등에 의해 발생했다. 강원 영동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인민군에 의한 희생 사건이 많았다. 인민군 점령기에는 마을에서 대한청년단 활동 등 우익 활동을 하던 자들에 대한 선별적 가해가 많았다. 인민군 퇴각기와 그 이후에는 인민군이 지역주민을 짐꾼으로 차출해 가거나 마을치안대 활동을 하던 주민들이 총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희생 사건은 주로 인민군 점령기에 발생했다. 빨치산과 정치보위부원에 의해 재판을 거친 후 희생당한 자도 있으나 대부분 1차적으로 지방좌익에게 끌려간 후 분주소와 내무서 등지에 구금돼 있다가 내무서원, 인민군에 의해 춘천형무소 등지로 압송되던 길에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다수이다.
피해자들은 주로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 활동가와 이장, 국군 수복 후 마을치안대 등의 우익 활동을 하던 20~40대 남성이었다. 다른 지역에 비해 가족 단위보다는 개별적인 피해가 컸다.
| 사건명 |
강원 영동지역 적대세력 사건 |
| 조사보고서 |
진실화해위원회 〈강원 영동지역 적대세력 사건〉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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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 |
강원 영동지역(강릉군, 삼척군, 울진군, 양양군, 고성군) |
| 사건 발생일 |
1950년 6월부터 1952년 12월까지 |
| 진실규명 신청인 |
심○기 등 21명 |
| 진실규명 결정일 |
2009년 12월 15일 |
| 진실규명대상자 |
희생 확인 심○섭 등 14명, 희생 추정 김○호 등 7명, 강제연행 확인 김○암 1명, 조사과정에서 인지된 희생 확인 최○순 등 5명과 희생 추정 최○규 등 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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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주체 |
인민군, 내무서원, 지방좌익, 빨치산 등 |
| 결정사안 |
1. 1950년 6월부터 1952년 12월까지 한국전쟁 당시 강원 영동지역인 강릉군, 삼척군, 울진군, 양양군, 고성군 등 5개 군에서 진실규명대상자와 신청사건 조사과정에서 인지된 자 31명이 희생당하고, 진실규명대상자 1명이 강제연행당했음을 참고인 진술과 문헌자료를 통해 확인 또는 추정해 진실규명으로 결정한 사례
2. 진실규명대상자 길맹순이 인민군에게 의용군으로 강제징집된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어 진실규명불능으로 결정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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