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신호 활동’ ‘보도연맹 사건’으로 주민 갈등 깊어져
 해제면은 무안 서북쪽에 위치한 반도 지형으로 현경면으로 이어지는 뭍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였고, 바다 쪽으로는 신안군 지도읍과 마주 본다. 해제면 천장리는 한국전쟁 당시 지도읍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양월리를 거쳐 오는 길목에 있었다. 천장리는 장동 70호, 백동 15호, 가실 7~8호 정도 규모로 90여 호 정도의 인구가 거주했다고 한다. 천장리 동쪽은 바다인데 긴 해안선을 따라 언덕이 이어진다. 이 언덕을 주민들은 ‘갯어등(개어등)’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 갯어등이 당시 사건 현장이다.
1970년대 지도에 나타난 천장리 장동, 백동, 가실. @국토정보맵
 한국전쟁 직전부터 해제면 마을주민들 사이에는 이념 갈등이 심했다. 증언에 따르면 대한독립촉성회원들은 전향한 좌익의 집에는 빨간 세모 표시를 하고, 전향하지 않고 달아난 자의 집에는 빨간 네모 표시를 해서 좌익의 체포와 처벌을 도왔다. 이를 ‘적신호 활동’이라고 했다. 천장리에도 이런 표시가 된 집이 한두 집 있었다고 한다. 또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이 해제면에 다수 있었다고 한다. ‘적신호 활동’에 의한 희생과 보도연맹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자 마을주민들 간에는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쌓였다.
인민군이 주둔한 후 1950년 8월 9일 해제면 중앙초등학교 교정에서 좌익 측과 그 유가족에 의한 인민재판이 열렸다. 이때 우익 측 인사 5명이 총과 칼로 살해되었다. 보도연맹사건 등의 유가족들이 소집됐고, 일부가 인민재판에 적극 가담했다.
홍○철, 2007. 5. 30.
“유가족들이 들고일어나서 몽둥이로 죄인들을 패 죽이고 죽여라 소리치고 그랬지. 그날 피를 봤어. 피를 본 뒤로 눈들이 뒤집혀버린 거예요.”
인민재판 이후 좌익 측 인사들과 그 유가족들은 걷잡을 수 없이 난폭해졌으며 어린아이, 여자, 노인들까지 모두 살해하는 천장리 집단학살 사건 발생의 배경이 되었다.
‘전남 목포・무안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 구금 장소와 희생 장소. @2023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932년 지도에 보이는 목포형무소. @국토정보맵
 “보름날 추석 쇠고 일주일만이었으니까 음력으로 8월 22일이야. 이 마을에 22가구가 그날 같이 제사를 지내. 그날 동네에 불이 다 켜져 있지. 당시 한 집에 15명 죽은 사람도 있고, 어떤 집은 손 자체가 아예 끊어졌어.”(김선주 해제면유족회장, 2025. 9. 21. 소식지 《진실화해》 인터뷰)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사건은 1950년 10월 3일(음력 8월 22일) 밤 10시부터 이튿날 새벽 1시 사이 약 3시간에 걸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사건 당일 마을 자위대가 마을 길을 폐쇄해 마을 사람들이 밖으로 못 나가게 한 뒤 살해 대상이 된 사람들의 집으로 찾아갔다. 자위대원들이 횃불을 들고 마당에 들어서서 “아제, 나갑시다. 다 모이라고 합니다”라고 하면 호롱불 켜고 한 방에 모여 있던 식구들이 별다른 저항도 못 하고 따라나섰다. 이들은 10~20명씩 새끼줄로 묶인 후 배를 타고 목포 수용소로 간다는 거짓말에 속아 1.5km 정도 떨어진 가실해안가로 끌려갔다. 그곳은 해안선을 따라 형성된 절벽인데, 지역 사투리로 “갯(개)어덩”이었다.
김선주, 2025. 9. 21. 소식지 《진실화해》 인터뷰
“거기가 옛날에는 굉장히 위험했던 데요. 높이가 한 15~20m 정도는 될걸. 죽창 찔려가지고 떨어지면은 꼼짝 못 하고 있다가, 148명이 엎치고 겹치고 한 거야. 그 골짜기 하나에.”
갯어덩에 사람들을 세운 다음 어른들은 칼과 곤봉, 죽창, 괭이, 삽 등으로 살해하면서 바다 쪽 절벽으로 밀어 떨어뜨렸다. 10세 이하 어린이들은 현장 옆 50m 거리에 있는 함바집 식수 우물에 빠트려 살해했다고 한다.
희생자들의 시신은 이듬해 3월경에야 수습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신이 엉켜 있고 부패해 신원 확인이 불가능했다. 반지를 꼈다든지, 몸에 특별한 흔적이 있다든지 알아볼 수 있는 실마리가 있으면 다행이었다. 이후 유가족들은 사건 현장에 합동 묘지를 조성했다.
1976년 항공 사진으로 본 장동마을과 사건 현장. 현재는 육지로 바뀌었으나 사건 당시에는 바다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국토정보맵
사건 현장인 가실해안. 당시에는 길게 이어진 언덕(갯어등) 아래까지 바다였다.
왼쪽 절벽이 희생 지점이며, 숲 뒤편이 묘역이다. @강변구
묘역에는 위령비 3기가 설치돼 있다. 오른쪽이 유가족이 세운 위령비이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자 인민군 전선사령부에서는 후퇴 명령을 내리는 한편 UN군이 진주 후 적 진영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활동할 자를 사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 같은 상황은 무안군에서도 정치보위부, 내무서, 분주소를 통해 면 지도부로 명령이 직접 하달됐을 것으로 보인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천장리 주민 집단희생 사건이 면 지도부의 명령을 받은 천장리 자위대가 인근 부락인 양월리 자위대 등의 도움을 받아 일으킨 사건으로 판단했다. 다만 해제면 분주소장 강××을 포함해 면 단위 인사들은 사건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았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는 가해주체를 규명하면서 1951년 유〇〇의 광주지법 《판결문》을 인용했다.
“ … 동일 오전 9시경 해제면 양월리 자위대원 30명 천장리 부락자위대원 18명 외 천장리 거주 유△△ 외 4명과 해제면 분주소원 1명 계 54명을 지휘하여 천정리 거주 유성진 외 135명을 체포하여 사낵기로 결박한 후 천장리 부락에서 약 1,500m 떨어진 동해안 소재 가실까지 인치한 후 금일 오후 11시경 그 중 유아 10명을 부근 소재 이현회사(二峴會社) 내 식수 세암에 투하 살해하고 그 외 126명은 그 근처에서 죽창, 곤봉으로 찌르거나 때려죽이고….”
하룻밤 사이에 노인부터 여성, 어린아이까지 가족 단위로 살해당했다. 살해 대상자는 노인부터, 여성, 어린아이까지 무차별적이었다. 어떤 집은 아예 손이 끊어지기도 했다. 어떻게 이런 사건이 일어났을까?
진실화해위원회는 사건의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규명했다.
첫째, 개인적 원한이다. 유봉〇은 좌익사상범으로 밀고 당해 목포형무소에 수감됐고, 후퇴하던 군에게 총살당했다. 그의 동생 유〇〇은 인민군 점령기가 되자 천장리 감찰대장이 되었다. 그리고 형을 밀고한 가족 김〇〇을 포함해 일가족 11명(10명 확인)을 몰살시켰다. 그 중에는 10대 4명과 10살 어린이, 4살 유아, 1949년생 갓난아기도 있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희생된 16가족 중 5가족이 유〇〇의 개인적 원한으로 살해 대상이 됐다고 보았다.
둘째, 우익단체 또는 이장 등 우익 가족이라는 이유에서다. 희생된 16가족 중 11가족은 가족 중 한 사람이 이장을 지내거나 우익에 우호적인 성향을 보여 희생되었다.
| 사건명 |
무안군 해제면 천장리 적대세력 사건 |
| 조사보고서 |
진실화해위원회 〈무안군 해제면 천장리 적대세력 사건〉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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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사보고서 |
진실화해위원회 <전남 목포・무안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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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 |
전남 무안군 해제면 천장리 |
| 사건 발생일 |
1950년 10월 3~4일 |
| 진실규명 신청인 |
이○무 외 3인과 가실유족회 |
| 진실규명 결정일 |
2008년 7월 1일 |
| 진실규명 대상자 |
이○기 등 86명(신원 확인), 김용오 등 10명(미신청인 중 희생자로 신원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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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주체 |
가해 지시는 해제면 당책임자 정○○, 해제면 인민위원장 나○○, 해제면 민청책임자 강○○, 해제면 분주소장 강XX이 상부 지령을 받아 내렸고, 살해 대상자 선정은 천장리 자위대 감찰대장 유○○, 천장리 세포 위원장 유XX 외 2명이 했음.
구체적 실행은 유○○, 유XX 지휘 아래 천장리 부락 자위대원 18명, 해제면 양월리 자위대원 30명, 천장리 거주 유△△ 외 4명, 해제면 분주소원 1명 등 총 54명이 가담해 이루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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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정사안 |
가실유족회와 이○무 등 4인이 한국전쟁기 초 전라남도 무안군 해제면 천장리에서 천장리 주민 140여 명이 후퇴하던 좌익에 의해 천장리 인근 해안가로 끌려가 희생됐다며 진실규명을 요청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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