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전파관리소 관사 건설 시 발견된 유골들을 쌓아놓은 곳에 흙을 덮어 놓았던 것이 현재까지 봉분이 돼 남아 있다.
@더한문화유산연구원
전국에서 서울 다음으로 ‘부역혐의자’ 많았던 충남도
 한국전쟁 발발 후 대한민국 정부는 후퇴를 거듭했다. 1950년 6월 27일 정부를 대전으로 옮겼고, 7월 16일에는 다시 대구로 옮겼다. 7월 21일 대전이 함락되면서 충청남도 전 지역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 이후 충청남도는 1950년 9월 29일 대전이 수복될 때까지 인민군 점령 아래 있었다.
수복 이후 부역혐의자 검거가 시작되었다. 경찰에 의한 공식적인 검거 외에도 치안대와 사설 단체가 ‘즉결처분’한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부역혐의자의 재산을 빼앗는 일도 잦았다. 이에 계엄사령부 법무부장이 즉결처분 금지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1950년 11월 15일 내무부는 각 시도 경찰국이 부역혐의자 총 5만 5,909명을 검거했는데 충남지역에서는 총 1만 1,993명이 검거됐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충남지역 검거자 수는 전국에서 서울 다음으로 많았다. 내무부 발표 전인 11월 13일 충남도경찰국장 김호우는 “그간 부역혐의자 수는 약 2만 명으로 9,000여 명은 석방했고 그 외는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1951년 5월 23일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해체된 후에도 경찰은 계속 부역혐의자를 검거하고 처벌했다. 1950년 당시 충청남도에 14개 군이 있었고, 부역혐의자 검거와 처벌이 1957년까지 계속됐던 것을 감안하면 수복 후 충청남도의 부역혐의자 검거 수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진경찰은 1950년 7월 12일경 후퇴했다가 1950년 10월 5일경 각 경찰서로 복귀했다. 경찰 복귀 전 384명의 부역혐의자가 치안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복귀한 경찰은 치안대에 의해 연행·구금된 부역혐의자들을 인계받고 치안대와 우익단체의 협력을 바탕으로 ‘부역자 처리’를 진행했다.
넓은 평야에 켜켜이 쌓인 갈등, 전쟁으로 폭발하다
 당진군 우강면을 둘러싼 소들강문평야는 토질이 좋고 넓으며 삽교천을 따라 서해로 빠져나가는 포구를 갖춰 수확한 쌀을 운반하기 편리했다. 대부분 서울 지주들의 소유였고 마름을 통해 소작권을 갖고 소작인들을 관리했다. 자연히 지주와 마름, 소작인 간의 갈등이 깊었고 우강면은 남쪽의 합덕면과 함께 일제강점기 신간회부터 전쟁 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까지 사회운동이 활발한 곳이었다.
1927년 지도상의 삽교천과 소들강문평야. @국토정보플랫폼
 당진지역 민간인 집단희생의 첫 출발은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군경에 의한 국민보도연맹원 살해였다. 그후 인민군 점령기에 우익인사들이 살해되고, 수복 후에는 다시 경찰과 치안대가 ‘부역혐의자’들을 찾아내 살해했다. 이러한 폭력과 보복의 악순환이 가장 고점에서 폭발한 현장 가운데 한 곳이 바로 송산리 전파관리소 옆 구덩이였다. 유해와 함께 발견된 성인 팔뚝만 한 쇠칼은 당시의 잔혹함을 말해준다. 우강면은 9.28수복 직후 치안대가 구성됐다. 그 위세가 대단해서 희생자의 가족들은 면회도 못 했고, 희생지를 알 수 없어서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 우강면 치안대에 의해 연행된 사람들은 우강면 창고에 구금됐다가 살해 대상자로 분류됐고, 대부분 우강면 전파송신대로 끌려가 집단살해되었다.
송산리 전파관리소 옆 1차 유해발굴 모습. @더한문화유산연구원
 우강면 공포리는 100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고 남로당 당수였던 김〇〇이 살았다. 그를 연행할 당시 ‘우강면 남로당원 명부’가 발견돼 치안대가 그 명부를 활용한 탓에 다른 곳보다 희생자가 많았다.
1970년대 지도에 보이는 당진군 우강면과 사건 현장인 송산리 전파관리소 자리. @국토정보맵
 우강면에서는 수복 후 24명이 우강면 창고에 구금됐고 이 중 4명을 제외한 20명이 전파송신대에서 집단살해됐다고 한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 참고인 한○○의 선친은 공포리 1만 평의 논을 관리한 마름으로 일명 ‘반동분자’라서, 이를 의식해 인민군 점령기 민청부위원장을 맡아 활동했고 수복 후 선친이 “너도 부역을 했으니 들어가라”고 해서 구금됐다고 한다. 한○○ 증언에 따르면 공포리에는 김○○이라는 남로당 당수가 있어서 그 영향을 받은 마을 주민 20여 명이 수복 후 다 죽었다고 한다. 공포리의 24명을 포함해 우강면 주민들이 창고에 많이 구금됐는데 죽이려고 분류된 사람들은 낮에도 조사를 했고 저녁에 불러내어 밥을 먹인 후 89명을 전파송신대로 끌고 가서 집단살해했다. 한○○은 “우강치안대 감찰대원 장○○이 구식총으로 먼저 총을 쏘았는데 그 사람의 눈이 뒤집혀서 다른 치안대원이 총을 빼앗아 총살했다”라고 목격담을 증언했다. 그는 구금까지 됐다가 살아났고, 치안대원이었던 사람들에게 집단총살에 관해 들었다.
남로당 당수 김〇〇에게서 나온 우강면 남로당원 명부
 한○○는 치안대가 선친에게 준 당진군 우강면 남로당원 명부를 진실화해위원회에 제출했다. 남로당원 명부는 수복 직후 우강면 남로당 당위원장이었던 김○○을 연행할 당시 그의 몸에서 나온 것이다. 우강면 남로당원 명부는 “各 里 黨員名簿”라는 제목으로 우강면의 12개 법정리별 274명의 당원 명단이 기재돼 있다. 또 명단 앞에 검은색 동그라미(●)가 표시된 95명은 전쟁 전부터 남로당원으로 활동한 사람들이고, 그 외 다른 이들은 전쟁 발발 이후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위원회와 민청 등 각종 단체에 가입해 당원으로 활동한 사람들로 추정된다.
우강면 남로당원 명부. @2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정〇순(1924년생, 농업)은 우강면 공포리 3개 마을 중 공개원 마을의 이장으로 리인민위원장이었다. 그는 1950년 음력 9월 6일(양력 10월 16일) 우강면 송산리 통신대 근처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같은 마을 정○봉(1917년생, 농업)도 공포리 마을 유지로 마을 일에 앞장섰다. 그는 1950년 10월경 좌익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몇몇 마을 사람들과 함께 제복을 입은 사람들에게 연행돼 경찰서에 구금됐다가 우강면 송산리 통신대 인근에서 총살되었다. 정○봉의 배우자는 남편의 시신을 보았지만 손댈 수가 없어서 수습하지 못하고 통신대 자리에 시신들을 모아서 흙만 덮어서 무덤을 만들어 매년 벌초를 했다고 한다.
공포리 공개원마을의 황〇산과 그의 아들 셋도 희생되었다. 아들 중 하나는 결혼해 딸을 두었고, 둘은 미혼이었다. 1950년 10월경 집으로 경찰들이 찾아와 황〇산과 아들들을 연행했다. 경찰들이 들이닥치자 황〇산의 아내가 아들들을 집 안 여기저기에 숨겼고, 경찰들이 들어와 찾아내는 과정에서 황〇산의 딸들이 울어댔다. 아버지와 세 아들은 우강지서에 구금됐다가 곧장 송산리 공동묘지에서 경찰에게 총살당했다. 참고인 임○○(1946년생, 이웃)이 어른들에게서 듣기로 공포리에는 황씨 형제들이 좌익 쪽 대장 역할을 해서 그 영향을 받아 좌익 성향 사람들이 많았고, 인근 부장리까지 좌익 성향 사람들이 많아서 우강면에 집단희생자가 많았다. 마을에서는 어른들이 조심스러워서 말을 아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을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고 한다.
인민군 구타에 못 이겨 “입당”했다가 총살당해
 박○신(1917년생)은 우강면 부장리 남원포마을에서 농사를 지었다. 박○신은 대필을 할 정도로 한문에 명필이었고 매우 똑똑했다. 한국전쟁 시기 인민군이 마을로 들어와 주민들을 괴롭혔다. 인민군은 박○신이 구장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무엇인가를 시키려 했지만 이를 거부하다 구타를 많이 당했다. 결국 박○신은 어딘가에 서명하고 “입당”했다.
1950년 음력 9월 5일(양력 10월 15일)경 저녁, 우강지서 경찰들이 집으로 찾아와 박○신을 연행했다. 박○신의 아내가 “인민군에게 협조하지 않으려고 하다 구타까지 당한 사람을 왜 데려가느냐”라고 항의하자, 경찰은 “조사만 하고 보내겠다”라며 박○신을 데리고 갔다. 그때 마을사람 여럿도 함께 연행되었다. 박○신은 집에서 6km 정도 떨어진 우강지서로 끌려가서 며칠간 구금됐다가 여러 사람과 함께 송산리 공동묘지 통신대 골짜기에서 총살되었다. 박○신처럼 서명한 사람들은 모두 죽었고, 우강면 사람들뿐 아니라 합덕면 사람들까지 수백 명이 그곳에서 희생되었다. 시신을 수습하러 가면 죽는다는 소문이 돌아, 시신을 수습하러 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인민군 점령기 명절에 연극과 마을 모임 참가로 희생
 강○식(1920년생)은 예산농업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전까지 논산군청에서 근무했다. 해방 후에는 고향인 우강면 부장리 남원포마을에서 농사를 지었다. 강○식은 인민군 점령기 명절에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연극과 마을 모임에 참석했다. 강○식은 이를 이유로 아들이 돌 되기 전인 음력 1950년 9월 4일(양력 10월 14일)에 우강지서 경찰에게 연행되었다. 당시 부장리 주민 10여 명이 함께 연행되었다.
강○식은 공포리 창고에 구금됐다가 우강지서로 끌려갔다. 큰딸은 신작로에서 우강지서로 끌려가는 아버지를 목격했다. 앞에 3명, 뒤에 4~5명으로 나뉘어 흰색 끈으로 묶여 있었는데, 강○식은 뒷줄 가운데쯤 있었다고 한다. 그 후 며칠간 여동생과 함께 식사를 날랐는데, 문 앞을 지키던 사복 입은 사람이 식사를 받아 강○식에게 전달해 주었다. 강○식의 아내가 마을 사람에게 “옷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나중에 부탁받은 사람이 그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강○식은 1950년 음력 9월 7일(양력 10월 17일) 송산리 공동묘지 골짜기에서 경찰에게 총살됐고, 시신은 수습하지 못했다.
 전○남(1920년생)은 우강면 신촌리 정계말에서 농사를 지었다. 신촌리와 공포리는 길 하나로 나뉘어 한 마을이나 다름없었다. 전○남은 초등학교 재학 시 매번 1등을 할 정도로 똑똑했고, 어떤 시험에 합격해서 공주로 가려고 했으나 한국전쟁 발발로 무산되었다. 전○남은 한국전쟁 발발 전 대한청년단 단장이었다. 같은 마을 심 씨가 한국전쟁 발발 후 높은 직책을 맡았는데 가족들은 전○남이 그를 도와줬던 것 때문에 희생되었다고 생각했다.
전○남은 같은 마을 정○옥, 장○종 등과 함께 누군가에게 연행돼 집에서 4km 정도 떨어진 우강면사무소 창고에 감금되었다. 아들(전○성)이 식사를 전달하러 창고에 한 번 갔었다. 창고 앞에 서 있던 어른이 “나한테 주고 가라”고 해서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식사만 전달했다. 창고 근처에서 ‘아이고’ 하는 매 맞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전○남은 창고에 3~4일 정도 감금돼 있다가 1950년 음력 9월 6일(양력 10월 16일)에 송산리 당산 골짜기에서 총살되었다. 당시 분위기가 삼엄해서 시신을 찾으러 갈 수 없었고, 전쟁이 끝난 후 마을 사람들 10여 명이 각자 가묘로 봉분을 만들었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어. 금방 갔다 올 거야”
 이○봉(1919년생)은 우강면 소반리 반둔말에서 농사를 지었다. 이○봉은 글씨를 잘 써서 대필 같은 일도 했다. 1950년 양력 10월 12일(음력 9월 2일) 경찰이 집으로 찾아와 이○봉을 연행했다. 이○봉은 아내에게 “나는 아무 잘못이 없어. 금방 갔다 올 거야”라고 말했다. 소반리에서는 이○봉만 연행됐고, 옆 마을인 강문리에서는 약 20명이 연행되었다. 이○봉은 10월 13일 또는 14일경 송산리 공동묘지와 통신대 사이 골짜기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사망했고, 시신은 수습하지 못했다. 동생이 들은 바에 따르면 이○봉은 어딘가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수복 이후 경찰에게 연행돼 희생되었다. 이○봉은 7형제로 아무도 그런 일에 연루되지 않았는데 이○봉만 누군가에게 모함을 당해 사망했다고 한다.
2차 발굴 당시 유해와 함께 발견된 신발과 탄피(붉은 원). @강변구
| 사건명 |
충남 당진 우강면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1) |
| 조사보고서 |
진실화해위원회 〈충남 당진 우강면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1)〉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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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사보고서 |
진실화해위원회 〈충남지역(1) 부역혐의 민간인 희생 사건〉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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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 |
충남 당진 우강면 |
| 사건 발생일 |
1950년 10월경 |
| 진실규명 신청인 |
정○복 등 15명 |
| 진실규명 결정일 |
2024년 10월 22일 |
| 진실규명 대상자 |
정○순 등 1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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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주체 |
당진경찰서 소속 우강지서 경찰과 경찰의 지휘 아래 있는 치안대 |
| 결정사안 |
9.28수복 이후인 1950년 10월경 충남 당진 우강면에서 정○순 등 18명이 부역혐의를 이유로 해당 지역 경찰 등에 의해 우강면 송산리 전파관리소 인근 등에서 집단으로 희생된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을 결정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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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심규상, “좁은 구덩이에 유해 가득… 눈 뜨고 보기 어려운 현장”, 오마이뉴스(25.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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