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봉화 · 영양 · 청송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희생된 산골 주민들

태백산

태백산. @태백시

 경상북도 봉화, 영양, 청송지역은 면적 대부분이 높은 산악 지형으로 이뤄져 있다. 경북 최북단에 위치한 봉화군은 산지임야 면적이 봉화군 전체 면적의 83%를 차지한다. 대표적인 산으로 북쪽으로 강원도 영월과 경계를 이루는 태백산이 있고, 서남쪽으로 청량산이 솟아 있다. 영양군은 경북에서 두 번째로 높은 일월산을 비롯해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청송군 역시 주왕산, 무구산 등 산지가 많은 곳이다.

1948년 11월부터 1949년 1월까지 3차에 걸쳐 발생한 ‘대구 6연대 사건’의 잔존 남로당 계열 군인들은 거사가 실패하면서 세력이 약화돼 경북 곳곳으로 탈출해 빨치산이 된다. 산악지대가 많이 분포한 이 지역은 그들의 근거지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췄고 거기에 더해 태백산과 문수산, 일월산 부근으로 남하하던 북한 유격대가 합류하면서 비로소 그들의 빨치산 활동이 시작됐다.

경찰은 경북 일대와 태백산, 일월산, 보현산 등지의 빨치산 토벌 작전을 전개했고, 국군도 호림부대와 태백산지구 전투사령부를 통해 토벌 작전을 벌였다. 또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이 지역은 약 2개월가량 인민군 점령기를 거쳤고, 수복 후에도 일월산에 남로당 경북도당이 위치할 정도로 지역 전체에서 빨치산 활동이 활발했다. 북진하던 국군 수도사단 1연대는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동시에 부역혐의자를 색출해 총살했다. 지역 경찰이 복귀한 후에도 빨치산 토벌 작전과 부역자 색출이 계속됐다.

이상과 같이 1948년 ‘대구 6연대 사건’ 이후부터 시작돼 수복 이후까지 이어진 군경의 빨치산 토벌 작전과 그 협력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민간인들은 빨치산과 군경 양쪽으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피해를 당하게 된다.

산 호랑이보다 무서운 토벌대가 나타났다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정목술 사건

 1948년 11월부터 1949년 1월 사이에 3차에 걸쳐 발생한 ‘대구 6연대 사건’이 진압되면서 잔존 세력은 팔공산으로 입산했다. 이들은 태백산과 문수산, 일월산 부근으로 남하하던 북한 유격대와 합류해 빨치산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의 토벌을 위해 봉화군에는 속칭 ‘산호(山虎)부대, 백골(白骨)부대, 녹귀(綠鬼)부대’라는 국군이 주둔했다. 이들 중 산호부대 일부 병력은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춘양국민학교에 주둔해 인근 지역의 빨치산을 토벌하고 그 협력자를 색출하고 살해했다.

1949년 4월 2일(음력 3월 4일) 저녁 양리 주민 정〇술(1912)의 집으로 춘양국민학교에 주둔하던 산호부대 군인 대여섯 명이 들이닥쳤다. 군인들은 구둣발로 방안으로 들어와서는 다짜고짜 정〇술에게 “가자”고 했다. 놀란 정〇술이 “왜 가야 되느냐”고 묻자 군인들은 “가보면 안다”면서 총부리를 겨누고 끌고 갔다. 증언
닫기
신청인 정〇호, 2010. 2. 22.

“그날 저녁 11시경 두 발의 총성이 울렸고, 두세 시간 후에 두 발의 총성이 또 울렸어요, 그래서 제가 누나하고 저희 집 밭쪽으로 가보았는데 아버지는 머리에 두 발, 가슴에 두 발을 맞아서 돌아가신 상태였고, 당시 눈을 감지 못하고 있어 저희 어머니가 눈을 감겨 드렸습니다.”


신청인 정〇호는 당시 춘양지역 대한청년단원 중 일부가 부친에게 감정이 있어 국군에게 빨치산으로 무고했고 그 때문에 희생됐다고 증언했다.

좌익으로 몰려 희생됐을 것으로 짐작할 뿐….

- 봉화군 재산면 권〇석·최〇이 사건

 권〇은(봉화군 재산면 현동리, 당시 10세)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1949년 음력 7월 20일 어머니와 아버지가 경찰에 끌려가 재산지서에 갇혀 있다가 어머니는 사흘 후에 돌아왔으나 아버지는 며칠 후 주민 권〇이와 함께 총살당한 사건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증언
닫기
신청인 권명길, 2008. 4. 23.

“아버님이 연행되던 날 기억이 있습니다. 아버님은 당시 동네 반장이었어요. 연행되던 날 저녁에 동네 야간 경비를 위해 조를 짜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경찰관과 의경 6∼7명 정도가 총을 메고 와서 아버님과 어머님을 연행해 갔습니다. 재산지서에 구금돼 조사를 받고 고문을 받은 모양입니다. 그 때문인지 1∼2일 후에 같은 마을의 김〇진 씨와 권모 씨(권〇이)가 연행됐습니다. 근데 김〇진은 돈을 주고 풀려났고, 아버님과 권모 씨는 현동리 파방거리에서 총에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님은 연행되고 이틀 밤을 지서에서 지낸 뒤 집으로 오셨습니다.”


당일 경찰은 총살 현장에 주민들을 모두 불러내 처형 장면을 지켜보게 했다. 그런 장소에 나가지 않으면 오히려 좌익으로 몰렸기 때문에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희생자 권〇이의 아들 권○○(당시 17세)은 1949년 9월 20일 재산지서 경찰관이 주민들을 총살할 때 겁이 나서 현장에는 못 가고 지서 옆에 있는 집의 마루에 있었다. 총소리가 난 뒤 가보니 아버지의 코와 양쪽 눈 사이에 총알이 뚫고 나간 구멍이 나 있었다. 희생자들이 경찰에게 잡혀가 총살당하게 된 이유는 확인된 것이 없다. 다만 모두 그들이 억울하게 좌익으로 몰려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남편과 아내를 차례로 살해한 영양 석보지서 경찰들

- 석보면 홍계리 박〇호·장〇득 사건

 1949년 당시 영양군 석보면 홍계리 주민들은 빨치산과 경찰 양쪽으로부터 고초를 겪었다. 밤에는 좌익에서 식량을 털어가고, 다음날 경찰에 신고하면 또 경찰이 식량을 어떻게 털어갔느냐고 조사를 하곤 했다. 그 와중에 토벌대(소위 ‘백골부대’)도 주민들에게 적잖이 피해를 주었다고 한다. 증언
닫기
참고인 천○○, 2010. 3. 12.

“처음에 바가지 하이바 쓰고, 그것이 백골부대예요. 그때 와가지고 두드려 패가지고 가려내고 한 것하고, 그냥 끌려간 사람도 있고. 끌려갔다 왔다 한 사람도 많아요. 죽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서 죽었는지도 모르죠.”


빨치산의 약탈과 군경의 토벌이 반복되는 가운데 5월 2일 홍계리 주민 박〇호(1909년생)는 산에서 소나무를 베고 있었는데 도중에 군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연행돼 석보지서로 끌려갔다. 그들은 다짜고짜 두들겨 패면서 박〇호에게 빨치산이 숨은 곳을 대라고 했다. 이틀 후 박〇호는 5월 4일 구타와 물고문으로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바지게에 실려 약 7km 떨어진 요원동의 작은 재에서 총살당했다. 증언
닫기
참고인 임○○, 2010.3.31.

“박〇호 어른이 붙잡혀 가서는 모른다고 했는지 두들겨 패니까 헛소리도 하고 그랬던 모양입니다. 경찰관이 그 어른을 앞세우고 홍계, 요원 가는 쪽 산에 ‘빨갱이 아지트가 어디 있느냐’고 하니까, ‘여기다, 저기다’ 헛소리를 하다 결국에는 경찰관이 총을 쏴가지고 죽여버린 것으로 알고 있어요.”


박〇호가 희생되고 8개월여 만인 1950년 1월 15일 그의 아내 장〇득 역시 경찰에게 끌려가 총살당했다. 증언
닫기
참고인 임○○, 2010. 3. 31.

“박〇호가 죽고 나니까 그 아들들이 애들이라 농사를 짓기도 어렵고, 조부도 나이가 많아 가지고 농사를 못 짓고 있었어요. 경찰관이 박〇호의 처를 붙잡아 가가지고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 고구름 어디론가 데려가서 총을 쏴가지고 죽여버렸습니다.”


영양경찰서의 《대공인적위해자조사표·처형자명부》에는 ‘박○호와 장○득이 한국전쟁 전 남로당에 가입하고 좌익 활동을 하여 처형된 자’라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결과 그들이 좌익 활동과 무관한 사람들이었고, 석보지서 경찰들이 좌익 색출을 이유로 부부를 고문하고 살해한 것으로 판단했다.

엉뚱한 마을로 간 국군 토벌대

- 영양군 영양읍 대천동 오태원 사건

 1950년 9월 27일 국군은 일부 선발대를 영양군 영양읍 화천1동으로 보냈다. 인민군 점령기에 화천1동에 부역자가 많았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군은 엉뚱하게도 지형이 비슷한 대천1동으로 찾아와 주민들을 마을 하천가에 모이게 했다. 증언
닫기
참고인 장○○, 2010. 3. 31.

“군인들이 큰 다리 마을에 부역자들이 많다는 첩보를 듣고 토벌하러 가던 중에 우리 동네 입구에 있는 작은 다리를 보고 착각해서 우리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총살을 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신청인 오〇영의 진술에 따르면 토벌대는 이 동네에 부역자가 많다면서 가려내던 중 동네에 김〇융이라는 사람이 주민들을 지목했다. 군인들은 도랑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양쪽에서 둘러싸고 총을 쏘았다. 증언에 따르면 국군은 사건 이후 마을을 잘못 찾아와 실수했다며 주민들에게 사과했으나 희생자들에 대해서는 장례를 잘 부탁한다는 말만 남기고 돌아갔다고 한다.
영양군 영양읍 대천동과 화천동

1970년대 영양군 영양읍 대천동과 화천동의 위치. @국토정보맵

대천동 주민 총살 현장

국군은 영양군 영양읍 대천동과 화천동을 혼동해 대천동 주민 오태원 등 20여 명을 부역혐의자로 마을 앞 하천에서 집단 총살했다. 주민 오○○가 사건 현장을 가리키고 있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니 살려줬다”

- 청송군 현서면 갈천리 김동옥 등 사건

 1950년 8월 19일(음력 7월 6일) 소속 미상의 국군부대가 갈천리 주민 여럿을 청송군 현서면과 영천군의 경계가 되는 보현산의 속칭 ‘칠미기’라는 곳으로 끌고 갔다. 갈천리마을은 산밑 마을이라 10여 호밖에 거주하지 않았고, 보현산 칠미기는 갈천리마을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이었다. 군인들은 인민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무차별 총살했다. 그중에는 여성은 물론 두 살배기 아이도, 오십 넘은 노인도 있었다고 한다. 이날 15명이 총살당했다. 한 명은 총상을 당했지만 다행히 살아남았다.

당시 정○○(당시 23세)도 동네사람 전부 다 모이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나갔다. 그는 포항에서 중학교를 다녔기에 머리를 바짝 깎은 상태였고, 군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인민군으로 알고 물에 빠트려 목을 밟으며 바른대로 실토하라고 다그쳤다. 총소리가 나고 여러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정○○은 그때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 그 덕분인지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갈천리 주민 총살 현장

국군은 인민군에게 협조했다는 혐의로 청송군 현서면 갈천리 주민 15~16명을 마을 인근 보현산 칠미기에서 총살했다. 주민 김〇기가 사건 현장을 가리키고 있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그들이 산골 마을에 살지 않았더라면….

 경북 봉화·영양·청송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희생자 40명 중 여성은 10명뿐이었고 나머지 30명은 모두 남성이었다. 그중 26명이 20∼40대 청·장년이었고 19세 미만은 2명, 50세 이상은 5명이었다.

가해자는 한국전쟁 발발 이전의 경우 호림부대의 일부 병력으로 추정되는 소위 백골부대, 산호부대, 국군 16연대,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는 육군본부 직할의 1유격대대와 국군 수도사단 1연대, 각 지역 경찰서 소속의 경찰관과 경찰의 지휘·감독 아래 있던 토벌대였다.

희생자 중에는 좌익과 전혀 관련 없는 ‘무고한 민간인’도 있었고, 일부는 좌익 활동에 가담한 가족을 둔 사람도 있었다. 설령 좌익 활동을 했고, 당시 상황에서 적에게 어쩔 수 없이 도움을 줬다 하더라도 사건 당시에는 이미 관련 법에 따라 법원에서 재판을 거쳐 형벌이 집행되도록 하는 규정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규정이 적용되기는커녕 군과 경찰이 민간인을 무차별로 살해했을 따름이다.
사건명 경북 봉화·영양·청송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경북 봉화·영양·청송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1기)
관련 조사보고서 [경정결정] 경북 봉화·영양·청송지역 민간인 희생사건(직다-3385)
지역 경북 봉화군, 영양군, 청송군
사건 발생일 1949년 4월부터 1951년 4월 사이
진실규명 신청인 박〇오 외 25명
진실규명 결정일 2010년 6월 15일
진실규명 대상자 정〇술 등 43명
가해주체 국군 16연대ㆍ호림부대ㆍ육본직할 1유격대대ㆍ수도사단 제1연대, 지역 경찰서 소속 경찰관과 경찰의 지휘ㆍ감독을 받은 지역 토벌대
결정사안 한국전쟁 전후인 1949년 4월부터 1951년 4월 사이에 경북 봉화ㆍ영양ㆍ청송지역에서 발생한 군ㆍ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조사결과 진실규명대상자 42명 중 40명이 희생당한 사실을 확인ㆍ추정해 진실규명으로 결정하고, 나머지 2명은 진실규명이 불가능해 진실규명불능으로 결정한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