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천안・연기・공주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1) 대전형무소에서 희생된 충남의 우익 인사들

금강의 모습

한국전쟁 당시 천연의 방어선이었던 금강의 모습. @공주시

 충청남도는 차령산맥이 도의 중앙을 북동-남서 방향으로 가르고 산줄기 사이로 금강이 흐른다. 같은 충남이라도 차령산맥을 기준으로 이북지역은 천안·서산권으로 나뉘고, 이남은 대전권에 포함된다. 대전은 충남도청 소재지로 교통의 요지였다. 인민군은 전쟁 발발 이전부터 1950년 7월 20일까지 대전을 점령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1950년 7월 21일, 충남의 요지 대전 함락

 전쟁 발발 이틀만인 1950년 6월 27일 정부가 대전으로 옮겨왔고, 16일 다시 대구로 옮겨갔다. 7월 18~21일 인민군 3사단과 4사단의 협공으로 7월 21일 대전이 함락되면서 충청남도 전 지역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 인민군 계획보다 단 하루 늦은 날짜였다.
옛 충남도청 (현 대전근현대사전시관)

현재 대전근현대사전시관인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32년부터 충남도청으로 사용됐고, 한국전쟁 발발 후에는 임시수도 대전의 정부청사 역할을 했다. @대전시

‘우익 인사(반동분자) 숙청’과 의용군 징집

 북한은 점령한 지역에서 당과 인민위원회를 조직했다. 모든 정책은 당에서 먼저 토의하고 계획했고, 이 정책들은 인민위원회에서 집행되었다. 군·면에는 인민위원회가 들어섰고, 군마다 정치보위부가 설치됐다. 경찰서는 내무서로, 파출소는 분주소로 바뀌었다.

인민위원회는 토지개혁 등을 시행했고, 정치보위부는 반혁명 세력으로 분류된 이른바 ‘민족반역자・반동분자’를 분류, 체포, 조사했다. 주로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협력했거나 좌익세력을 탄압하고 보도연맹원 사살에 협력했던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원과 지주・경찰・공무원 등이 ‘민족반역자・반동분자’로 분류되었다.

점령지 주민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정책은 점령 직후 ‘우익 인사(반동분자) 숙청’으로 1950년 7~9월 이들이 규정한 반동분자라는 이유로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충청남도 각 지역 우익 인사 중 일부는 해당 지역 분주소, 내무서 등을 거쳐 대전내무서(대전경찰서 건물)나 대전 정치보위부(프란치스코 수도원 건물)에서 취조받은 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희생 사건 전, 대전형무소에는 1,500명가량 수감돼 있었다고 한다.

인민군, 퇴각하면서 우익 인사 집단학살

 1950년 9월 중순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어려워지자 노동당은 인민군 전선사령부에 후퇴 명령을 내리고 각 지방당에 “유엔군 상륙 시 지주(支柱)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인민군 퇴각 시기 지역형무소와 내무서, 분주소 등에 감금돼 있던 많은 우익 인사가 집단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전지역에서는 충청남도 각 지역에서 끌려와 대전형무소, 프란치스코 수도원, 대전경찰서 등에 수감된 우익 인사 1,557명이 인민군 등 적대세력에 의해 희생되었다.
대전감옥소(대전형무소) 신설

1919년 대전 중구 중촌동에 신설된 ‘대전감옥소’는 1923년 대전형무소로 개칭됐고, 1984년까지 같은 자리에 있었다. @대전근현대사전시관 전시 패널

구 대전형무소 망루

구 대전형무소 망루. 망루(높이 7.85m)는 수형자를 감시하기 위해 형무소 담장 모서리에 세웠던 감시 초소이다. @강변구

천안시, 경상도·전라도로 이어지는 길목

 천안삼거리는 조선시대 때부터 경상도, 전라도와 서울을 잇는 삼남대로 주요 길목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 1950년 7월 7일 천안 경찰이 후퇴한 후 7월 8일 인민군에 의해 천안이 점령됐고, 유엔군이 1950년 9월 26일 저녁 7시 30분에 천안삼거리를 통과해 서울로 진주한 후 10월 4일 천안 경찰이 복귀했다.
대동여지도 천안지역

대동여지도 천안지역 부분. 천안삼거리(붉은 원)가 표시돼 있다. 천안은 예로부터 서울에서 경상도와 전라도로 이어지는 삼남대로의 분기점이었다. @국토정보맵

후퇴 중 가족 만나러 고향 갔다가 붙잡힌 경찰

 갈○민(1924년생, 경찰)은 1950년 9월 25~26일경 대전형무소에서 인민군에 의해 희생되었다. 그는 서울 종로구 사간동에서 가족들과 함께 거주하며 서대문경찰서에서 경찰관으로 재직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갈○민은 출근한 후 연락이 되지 않았고, 갈○민의 아내는 지방좌익에게 연행돼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갈○민의 아내는 유치장에서 도망 나와 그날 밤 자녀들을 데리고 갈○민의 가족이 거주하는 천안시 성환읍 매주리로 피란을 내려왔다. 그러나 천안도 인민군에게 점령돼 다시 경북 구미로 피란을 갔고 인민군이 천안에서 후퇴한 후 성환읍 매주리로 돌아왔다.

갈○민은 경찰과 함께 후퇴하던 중 가족들을 보기 위해 성환읍 매주리로 왔다가 지방좌익에게 고발당해 잡혀갔고, 이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갈○민과 함께 대전형무소에 구금된 성환읍 사람의 가족에게 희생 소식을 전해 듣곤 아버지와 아내가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대전형무소를 갔으나 찾지 못했다.

피난 온 포목상이라고 둘러대 보았지만….

 정○모(1899년생,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장)는 1950년 8월경 논산군 광석면에서 인민군 등에게 납치돼 실종되었다. 정○모는 한국전쟁이 발발할 당시 천안시 오룡동에 있는 법원 관사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고향인 공주시 계룡면으로 피란을 갔지만 오랜 기간 판사로 근무한 경력 때문에 이미 신분이 노출돼 논산시 광석면으로 다시 피란을 가게 되었다. 그 동네 사람들은 밤이면 회의하고, 아이들에게 김일성 노래를 가르치곤 했다.

1950년 8월 15일경 밤경 여느 때와 같이 회의를 마친 동네 사람들(내무서원)이 갑자기 정○모를 찾아와 조사할 것이 있다면서 찾아왔다. 외지 사람이 생활하고 있으니 수상하게 여긴 것이다. 그들은 정○모에게 “어디서 온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정○모가 “미군 폭격으로 가옥이 소실돼 대전에서 피난을 왔다. 포목상을 운영한다”라고 둘러댔지만, 함께 온 사람 중에 누군가 정○모가 판사임을 알아보았다. 내무서원들은 정○모를 포승줄에 묶어 연행했다. 그의 아들(정○홍, 1937년생)과 가족들이 뒤따라가 가니 뒤따라오지 말라고 위협했다.

아들 정○홍은 누군가에게 “미군이 성당은 폭격하지 않아서 끌고 간 사람들을 논산 성당에 수용했다”라는 말을 듣고, 어머니와 함께 그곳에 찾아가 아버지를 면회했다.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1950년 9월 27일경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사람들을 죽였다는 소식이 들렸다. 정○모의 조카 정○○가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수레를 끌고 대전형무소로 갔으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빈 수레로 돌아왔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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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정○모의 조카)

“대전형무소에는 시신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누군가는 우물에서 시체를 한 구씩 꺼내고 있었으며, 팔에 적십자 마크를 단 미군 군의관들이 시체를 쭉 정리하면서 나열하고 있었습니다. 하늘에는 L19 비행기가 대전형무소 상공을 돌며 DDT(살충제)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아마 시체가 부패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시체가 통통 부어서 인민군이 수용자들을 잘 먹인 줄 알았습니다.”

충청도 중앙에 위치한 연기군

 연기군(2012년 세종특별자치시에 편입)은 충청남북도의 중앙에 위치한다. 한국전쟁 발발 후 조치원 경찰이 1950년 7월 12일 금강을 건너 후퇴했고 같은 날 전의-조치원 전투 끝에 인민군 3・4사단에게 조치원이 점령되었다.

다락방에 숨어 지낸 대한청년단원

 진실규명대상자 사○석(1903년생)은 여관업을 하면서 대한청년단으로 활동했다. 이 때문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거주하던 조치원읍 원동에서 연기군 연동면 내판리에 있는 형의 집으로 피란을 갔다. 신청인 사○만(1954년생, 손자)이 들은 바에 따르면 사○석은 형의 집 다락방에 숨어서 생활했는데 지방좌익의 밀고로 은신처가 발각돼 인민군에게 연행됐다고 한다. 사○석은 가족들에게 “금방 나오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갔다. 9・28 수복 이후 누군가에게 사○석의 희생 소식을 듣고 아내가 대전형무소를 찾아갔으나 시신이 훼손돼 찾지 못했다.

며느리 박○○(1934년생)에 따르면 사○석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평소 키우던 개를 데리고 피난을 갔다. 어느 날 인민군이 사○석이 키우던 개를 데리고 가는 바람에 이복형이 찾으러 갔다. 인민군이 누구의 개인지 물어봐 이복형이 사○석의 개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렇지 않아도 사○석을 찾고 있었다”고 말하며 이복형을 앞장세워 찾아왔다. 사○석은 이복형이 걱정돼 오는 길목에 마중 나왔다가 인민군, 지방좌익과 마주쳐 그 자리에서 연행됐다고 한다. 이후 대전형무소로 이송됐고, 가족들은 누군가에게 희생 소식을 들었다. 아내와 아들이 대전형무소로 갔으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공주시, 천연의 방어선 금강이 뚫리다

 공주는 지리적으로 수도권과 충청지역・호남지역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고 천연의 방어선인 금강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전쟁 당시 공주방어전이 벌어졌던 중요한 전선이었다. 인민군은 미군과 국군의 금강 방어선을 뚫고 7월 16일 공주 전역을 장악했다.

아들이 ‘국군 환영 만세’에 나갔다는 이유로

 방○공(족보명 방○욱, 1900년생, 농업)과 방○옥(족보명 방○백, 1913년생, 농업) 형제는 1950년 9월 30일경 유구면 녹천리 인근 수촌다리에서 인민군과 지방좌익에게 희생되었다. 손자 방○만(1959년생)이 들은 바에 따르면, 방○옥은 형 방○인・방○공과 함께 유구면 신달리에 거주했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방○옥은 영민하고, 하얀 두루마리 독립군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인민군 점령기에는 동네 주민들을 숨겨주기도 했다.

1950년 음력 8월 18일(양력 9월 29일)경 지방좌익(또는 인민군)이 집으로 찾아와 방○옥을 끌고 가려는데 반항하자, 그를 대창으로 찌르고 데리고 갔다. 조카 방○석(1937년생)에 따르면 1950년 음력 8월 19일 방○공의 아들 방▽▽이 ‘국군 환영 만세’에 참석했다. 이 때문에 그날 자정 무렵 누군가 집으로 찾아와 잠을 자던 방○공을 연행했고, 옆방에서 잠을 자던 신청인이 그 소리를 들었다. 방○공의 동생 방○옥, 정△△의 아버지(정□□, 1기 희생 확인자) 등 같은 날 25명가량 연행되었다. 방○공・방○옥 등 사람들은 유구읍 신설동 뚝방으로 끌려갔고, 그날 바로 총살을 당했다. 끌려간 사람들의 희생 소식을 들은 가족들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가 시신을 수습했다.

고등학생의 카메라에 담긴 학살 현장

 충남 공주군 반포면 공암리 출신 이〇영(당시 17세)의 부친 이〇하는 1950년 9월 대전형무소에서 희생된 우익 인사들 중 한 명이었다. 부친은 당시 공암리에 하나밖에 없는 보춘당한의원을 운영했다. 덕분에 집안 살림은 풍족했다. 한편으로 대동청년단장을 맡아 북에서 내려온 우익 사람들을 지도하는 역할도 맡았다고 한다. 전쟁이 난 뒤 피난을 가야 한다는 말에 “내가 의사로서 환자들을 살렸는데 무슨 죄가 있어서 피난을 가느냐”하며 가지 않았다.

국군이 후퇴하고 인민군 점령기가 되자 이〇하와 같이 부유층이거나 우익 활동자, 공무원 등이 검거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부친이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않자 아들은 동네에 수소문을 했고 누군가로부터 “너희 아버지 종민이 창고에 갇혔대”라는 말을 들었다. 그곳은 친구네 양조장 창고였다.

밥을 가지고 간 어느 날 창고가 다 비었고 보초도 없었다. 누군가 반포면 좌익세력 수장인 김〇직이 아버지를 데리고 공주로 간다고 말했다. 이〇영은 동생과 함께 미리 앞질러 가서 공주 가는 길목을 지켰다. 그러던 중 길에서 김〇직이 아버지를 포승줄에 채워 데리고 가는 모습을 보았다. 이〇영과 동생이 뒤를 따라가니 김〇직이 총을 겨누며 “가라, 왜 따라오냐, 계속 따라오면 죽인다”고 해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공주까지 묶인 채로 자갈길 사오십 리를 걷고 금강을 건너 공주형무소로 갔다.

공주형무소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대전형무소로 끌려가 희생됐다는 소문을 듣고 이〇영과 모친이 함께 시신을 수습하러 갔다. 형무소 문을 통해 들어가니 내부 참상은 말도 못 할 정도였다. 긴 건물을 따라 100m 정도 길이의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는데 뒤편 구멍으로 시체들이 구덩이 물속에 둥둥 떠 있는 게 보였다. 형무소 앞 얕은 산에도 시체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찾기 위해 솜으로 코를 막고 하나씩 뒤집었는데 시신이 부패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켜켜이 쌓인 시체들은 들어 젖힐 때마다 살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시신들은 팔을 뒤로 한 채 하늘색 광목천에 묶여 있었다. 그 천 조각은 형무소 사무실에 달린 커튼을 찢어 만든 것이었다. 다른 편에 가 보니, 형무소 담장 아래 200m 정도 되는 길다란 밭고랑에 사람들이 무릎을 펴고 앉은 상태로 겹겹이 포개어져 있었다. 몸통은 흙에 묻힌 채로 목만 내놓고 있었는데 그 얼굴들마저 칼에 훼손돼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형무소 운동장 가운데 우물에는 시신을 던져 넣고 시멘트 토관을 부수어 메워놓았다. 그 옆에는 우물 벽을 부술 때 쓰인 ‘오함마’까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〇영은 당시 귀한 물건인 카메라를 갖고 갔다. 그는 증거를 남겨야 한다는 마음으로 학살 현장 사진을 찍어두었다. 2024년 5월 14일 이〇영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실에서 진술 조사에 임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〇영의 증언과 사진, 기타 기록을 증거로 인정해 같은 해 10월 부친이 대전형무소에서 희생됐음을 진실규명 결정했다.
대전형무소 학살 현장

인민군 후퇴 이후 대전형무소 모습. 이〇영은 부친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대전형무소에 갔다가 당시 모습을 직접 촬영했고, 2023년 자서전을 발간하면서 사진을 수록했다. @2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대전형무소 영내 구조도

이〇영이 당시 현장을 회상해 그린 ‘대전형무소 영내 구조도(추상도)’. 건물 화장실 배수구, 우물, 담장 아래 구덩이 등 희생자의 시신 발견 당시 위치가 재현되었다. @이은영

사건명 충남 천안・연기・공주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1)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충남 천안・연기・공주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1)〉 (2기)
관련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대전지역 적대세력 사건〉 (1기)
진실화해위원회 〈충남지역 적대세력 사건〉 (1기)
지역 충남 천안・연기(현 세종특별자치시)・공주지역
사건 발생일 1950년 7~9월
진실규명 신청인 갈○흥 등 28명
진실규명 결정일 2024년 10월 22일
진실규명 대상자 갈○민 등 13명
가해주체 정치보위부 지시를 받은 인민군과 지방좌익, 내무서원(분주소원) 등 적대세력
결정사안 1950년 7월부터 1950년 9월까지 충남 천안・연기(현 세종특별자치시)・공주지역에 거주하던 진실규명대상자 갈○민 등 13명이 청년단, 소방대 등 우익단체원으로 우익 활동을 했거나 공무원・이장 등 우익 인사였다는 이유 등으로 대전형무소, 공주시 유구읍 분주소와 녹천리 인근 수촌다리 등에서 지방좌익과 인민군 등 적대세력에 의해 희생된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을 결정한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