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남부지역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톱질 전쟁’과 그 아래서 희생당한 강원 남부지역 주민들

1980년대 삼척시가지

1980년대 삼척시가지. @삼척시립박물관

 강원지역은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하는 높은 산들로 이뤄진 곳이라 한국전쟁 발발 이전부터 빨치산의 활동이 활발했다. 이들은 산줄기를 따라 이동하거나 깊은 산속에 터를 잡아 숨어들었다. 이런 이유로 군경의 공비토벌 작전이 잦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북으로 휴전선이 접한 강원도는 전쟁 발발 후 곧 인민군 점령 아래 들어갔다. 이때 주민들이 불가피하게 직간접적으로 인민군 측에 협력하기도 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강원도가 인민군 패잔병들의 후퇴로로 이용됐는데 이들이 관공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국군 수복 후에는 인민군 점령기 부역자와 부역혐의자에 대한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경기, 강원지역을 오르내리며 점령과 탈환이 반복되었다. 이러한 전쟁을 강원도민들은 ‘톱질 전쟁’이라고 불렀다.

한국전쟁 전후 시기 강원 남부지역인 삼척군, 영월군, 원주군, 횡성군 등 4개 군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의 가해주체는 공비토벌 작전에 투입된 군, 지역을 수복하던 군, 수복 후 인민군 점령기 부역혐의자를 색출해 처리한 경찰서와 관내지서 경찰 등이다. 피해자들은 공비토벌 과정, 인민군 점령기 부역혐의 등으로 불법적으로 희생당한 경우도 있고 가족이 입산자거나 국군의 부당한 지시 거부, 오인사격 등으로 희생당한 경우도 있다.
강원지역 행정구역도

강원지역 행정구역도. @강원특별자치도

태백산맥의 분수령, 삼척군

 해방 후 삼척군은 강릉, 울진과 더불어 좌익세가 강해 미군정도 강원 10개 군 중 이들 3개 지역 군수를 인민위원회 출신으로 임명할 정도였다. 모스크바 협정 이후에는 군수가 우익 인사들로 교체됐으나 인민위원회 활동은 여전히 강력했고 이후에도 봉기와 유격전 등이 발생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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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김○○ (2010. 4. 13.)

삼척군은 인민위원회 세력이 강해 정부에서 군수나 서장을 임명해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에 해방되던 해 경찰로 임명받은 이가 없었다.


삼척군은 이러한 정치적 특징과 함께 지리적으로 태백산맥의 분수령에 해당하는 청옥산(1,404m), 두타산(1,353m), 중봉산(1,284m), 백병산(1,259m) 등 높은 산이 많아 전쟁 이전부터 공비 출현이 잦았다. 군경의 공비토벌 작전 과정에서 입산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민간인들이 집단으로 희생되거나 빨치산에 의한 민간인 희생도 발생했다.
삼척시 두타산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미로면 고천리에 위치한 두타산. @삼척시

상장면 소금장수 박○○만에게 차려진 ‘사잣밥’

 상장면 혈리 당골(현 태백시 혈동)에 거주하던 박○○만(40~45세)은 소금장수였다. 그는 마을을 돌며 소금을 팔며 살았다. 1950년 3월(음력 2월)경이었다. 그날도 소금을 팔고 오던 길에 군인 차를 보고는 마을 청년들에게 알려줬다. 이를 듣고 빨치산에게 짐을 지어다 줬던 청년들이 겁을 먹었다. 군인들에게 빨치산의 짐을 지어다 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부역자로 몰려 피해를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마을을 벗어나 도망갔고, 또 어떤 이들은 몸을 숨겼다.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오고 나서 청년들이 죄다 몸을 피했다는 걸 알았다. 이 과정에서 박○○만이 군인 차량을 보고 청년들에게 알려줬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군인들은 박○○만을 천평국민학교로 끌고 가 마을주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총살했다. 국군의 작전을 방해했다는 이유였다. 가해 부대는 1949년 9월 28일 창설돼 1950년 3월 중순까지 빨치산 토벌 작전을 진행한 태백산지구전투사령부 소속 군인으로 판단된다.

참고인 정○○은 군인이 처형 전에 ‘사잣밥’을 차려오라고 해 강냉이밥을 해갔으나 학교 마당에 있던 박○○만이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밥을 먹지 못하는 것을 지켜보다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군인들은 참고인을 비롯한 마을주민들을 불러내 박○○만의 총살 장면을 목격하게 했다. 박○○만은 상체와 하체에 총을 각 1발씩 맞고 희생당했다. 시신은 마을주민들이 수습해 묘를 써 주었다고 한다.
혈리 당골과 천평국민학교

1970년대 지도에서 본 혈리 당골과 희생 현장인 천평국민학교. @국토정보맵

원덕면 풍곡리 덕풍마을 ‘산사람’ 가족 몰살 사건

 원덕면 풍곡리 덕풍마을은 삼척과 울진의 경계를 이루는 응봉산(999m)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이다. 응봉산은 육백산, 사금산 일대와 더불어 삼척에서 무장공비의 출몰이 잦았던 지역으로 전쟁 이전부터 공비들이 마을에 내려와 주민들에게 식량을 가져가고 입산을 권유하기도 했다. 덕풍마을 주민 중에서도 입산자가 있었다. 이중 한○○은 ‘산사람’ 중 ‘높은 사람’으로, 그의 가족들은 지서에 불려가 한○○의 행방에 대한 조사를 받았고 그 과정에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1950년 9월경 한○○의 제수를 비롯한 풍곡리 덕풍마을 주민 7명이 덕풍마을 앞산 구덩이에서 3사단 선발대원으로 추정되는 군인들에 의해 입산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마을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집단으로 총살당했다. 당시 한○○의 제수는 임신한 상태였다. 또 당시 몸이 불편해 집에 머물던 엄○상(61세)의 집에 불을 질러 엄○상이 불에 타 죽게 했다. 한맹철의 부인 김○○(34세)는 동서를 비롯한 마을주민들이 희생당하는 상황에서 군인이 쫓아가자 이를 피해 도망가다가 물에 빠져 익사했다. 희생당한 이들 대부분의 시신은 수습됐다. 전쟁이 끝난 후 입산자들이 마을에 내려와 본인 가족의 묘를 썼다고 한다.
풍곡리와 덕풍마을 지도

1970년대 지도에서 본 풍곡리와 덕풍마을.

강원 남부지역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 나온 영월군

 영월군의 한국전쟁 시기 희생자 수는 226명으로 강원 남부지역 중 가장 많다. 수복 당시 영월군 내에는 주천지서를 비롯해 9개의 지서가 있었다. 각 지서는 부역혐의자들을 연행해 직접 살해하거나 영월경찰서(서장 이○인)로 압송했다.
영월군 상동읍 천평리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상동읍 천평리. @한국학중앙연구원

“군인들이 우리 빨갱이라 그래서 다 죽인단다”

 1949년 2월(음력 1월)경 춘양면 천평리 각희골(각기골)과 고무라골에 거주하던 진실규명대상자 정○일(53세), 김○굴(50세)이 공비토벌대에게 좌익혐의로 희생당하고, 진실규명대상자 정○식(20세)과 마을주민 다수도 당시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건 발생 한 달 전, 빨치산들이 덕구리 2구 이장 황○석과 임○태의 종조부를 총살하고 집에 불을 지른 적이 있는데 고무라골 거주자들과 관련된 것으로 의심되자 고무라골에 거주하던 정씨 일가도 ‘빨갱이(간첩)’로 몰렸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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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정○

진실규명대상자 정홍일의 딸인 참고인 정○은 사건 발생 전날 “니 하고 만섭이하고 어쩌냐, 군인들이 우리 다 쓸어가서 죽인단다. 빨갱이라 그래서 다 죽인단다”라는 말을 아버지에게 들었다.


사건 당일 오전, 많은 수의 군인들이 골로 들어오자 정○이 바위 밑에 숨어 있다가 잠이 들어 깨어보니 동네가 다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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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권○○ (2010. 2. 24.)

“덕구 재 넘으면 바로 금정인데 거기서 빨치산들이 와가지고 덕구리 2구 이장 황○석이랑 임○태네 종조부네 불을 놓고 다 쐈어. 빨치산 사람들이 그리고 가면서 정신이 없으니까 서류를 빠뜨리고 갔는데 거기 고무라골 사람들이 전부 다 보도연맹인가 뭔가 암턴 도장이 찍혀 있었대. 그래서 거기 사람들을 다 소탕했다고 그러더라고, 전부 빨갱이라 그래서. 고무라골에 그리고 사람들이 다 없어졌다고.”


각희골에서 끌려간 진실규명대상자 정○일이 춘양면 금정골에서 희생당했다는 말을 전해들은 큰아들 정○암은 금정골 구덩이에서 허리끈을 보고 시신을 찾아와 수습해왔다. 김○굴은 덕구리로 끌려가 마을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성명 미상의 40대 남성과 함께 군인 5명에게 총살당한 후 마을주민에 의해 시신이 수습되었다. 참고인 정○은 오빠 정○식도 당시 희생당했으나 그 장소는 알지 못한다고 진술했다. 한편 당시 고무라골에 10가구 정도가 살고 있었으며 마을주민들이 희생당하고 가옥이 불탔다는 증언에 비춰 보면 정씨일가 3명 외에도 피해를 당한 주민들이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원주읍 단계동 손○봉 부자 희생 사건

 1950년 12월 말경 원주읍 단계동 백간마을에 거주하던 손○봉(43세)과 손○룡(18세), 미신청자 손○천(미상)이 인민군 점령기 부역혐의로 미상의 장소에서 희생당했다. 진실규명대상자 손○봉은 봉산동에 거주하다 단계동 백간마을로 이주해 농사를 짓던 중 인민군 점령기에 동생의 부탁으로 세포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수복 후(추수가 끝난 후 쌀쌀한 시기) 처벌이 두려워 처가로 피신했으나 지정면에 있는 지서로 연행돼 심하게 구타를 당했다. 이튿날 손○봉은 자신의 부역혐의와 관련된 신고를 한다며 역전지서로 자진출석하며 “죄진 것도 없는데 별일 있겠냐”는 말을 남겼으나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손○봉의 큰아들 손○룡도 부역혐의로 경찰서에 잡혀가 돌아오지 못했다.

좌익세 강했던 횡성군, 민청과 서북청년단원들 대립

 해방 후 횡성군은 민청에 가입된 이들이 8할일 정도로 좌익세가 강했다. 민청원들이 서북청년단원과 대립하면서 그 와중에 살해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횡성군에는 국민보도연맹원 수도 많았다. 전쟁 발발 직후 청일지서의 경우 보도연맹원들을 청일국민학교 인근 골짜기로 끌고 가 살해했다. 지서뿐만 아니라 횡성경찰서도 보도연맹원들을 살해했다. 1950년 7월 1일 경북지역으로 철수하면서 이들이 인민군에 협조할 것을 우려해 주요 인물 20명 정도를 차에 태워 영천까지 데리고 간 후 집단희생시켰다고 한다.

서원면 옥계리 임○옥 희생 사건

 1950년 11월 초경 서원면 옥계리 옥지기 마을에 거주하던 진실규명대상자 임○옥(31세)이 인민군 점령기에 마을반장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의용경찰에게 끌려간 후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대산리에 거주했던 성명 미상자 1명과 옥계리 거주자 임○식도 끌려갔으나 임○식은 심하게 구타당한 후 살아서 돌아왔다. 임○옥은 농사를 지었는데 인민군 점령기에 마을사람의 권유로 반장을 맡았다. 1950년 11월 초경 점심 무렵 인근마을 주민 박△△이 조를 털고 있던 임○옥을 찾아와 “자네, 누가 찾아왔네”라며 데리고 갔다. 며칠 후 마을주민 임○춘이 그가 충북 음성(원주 경유) 방향으로 연행되는 것을 목격했다. 당시 원주법원으로 부역자들을 넘기면 죽는다고 했다는 증언에 비춰볼 때 진실화해위원회는 임○옥이 원주법원으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또는 이송당한 후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했다.
사건명 강원 남부지역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강원 남부지역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 삼척군·영월군·원주군·횡성군 –〉 (1기)
지역 강원 삼척군, 영월군, 원주군, 횡성군
사건 발생일 1949년 2월경~1951년 3월경
진실규명 신청인 유○연 등 24명
진실규명 결정일 2010년 6월 8일
진실규명 대상자 희생사실 확인 28명, 희생사실 추정 8명
(조사과정 인지 미신청자 2명 희생 확인, 19명 희생 추정)
가해주체 공비 토벌 작전에 투입된 군, 지역을 수복하던 군, 수복 후 인민군 점령기 부역혐의자를 색출해 처리한 경찰서 및 관내지서 경찰 등
결정사안 1. 1949년 2월경~1951년 3월경 강원 남부지역 4개 군(삼척군·영월군·원주군·횡성군)에서 군경에 의해 발생한 불법적인 민간인 희생 사건으로 진실규명대상자 36명과 조사과정에서 인지된 미신청자 21명이 희생된 사실을 확인 또는 추정해 진실규명으로 결정한 사례
2. 진실규명대상자 4명의 희생 사실은 확인할 수 없어 진실규명불능으로 결정한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