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부역혐의 희생 사건 그날의 총성에 남한강도 숨을 죽였다

파사산성에서 바라본 남한강 전경

파사산성에서 바라본 남한강 전경 @여주박물관

“사람을 먼저 죽인 것은 이쪽이었어요”

 남한강변에 자리 잡은 여주, 양평은 일제강점기부터 몽양 여운형을 중심으로 농민동맹이 조직(1944년)되는 등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지역이었다. 이들은 “조선해방을 목적으로 한 투쟁을 광범위하게 전개시킬 것을 합의”했다고 한다(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1995, 93~94쪽). 전쟁 전 좌익활동 혐의를 받던 지역주민들은 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돼 억압과 감시를 받았다. 특히 좌익활동의 중심으로 알려진 여주 금사면 외평리는 보도연맹에 가입시키려는 경찰의 활동이 집중되었다.

여주 금사면에서 보도연맹이 조직될 때의 증언을 들어보면 경찰이 주민들에게 가입을 권유하며 도장을 받으러 다녔다고 한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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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박○용 진술녹취록. 2008. 1. 18.

“그때 경찰에서 (만든) 보도연맹이라고 있었어요. 그 보도연맹에서 ‘여기다 도장을 찍으면 앞으로 경찰에서 잡아가지도 않고 오라 가라 하지도 않는다’(고 했어요). 그때는 수사계에서 그 동네 누구도 (남로당에) 들었다는 고발이 들어가던가, 스스로 경찰이 조사를 한 후 도장을 받으러 다녔다 이거야. (중략) 동네 옆 사람들이 일하다가 도장을 찍으러 일터로 왔다 이거야. 이 사람이 ‘도장을 찍어라. 여기다 도장을 찍으면 앞으로 좋은 일이 있다. 앞으로 오라 가라 소리 안 하고 귀찮게 안 할 거다.’ 그러니까, 이 양반(박○득)이 알도 못 하고 그냥 찍었다는 거예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여주 각 면의 보도연맹원들이 연행돼 여주경찰서 임시유치장인 얼음창고에 갇혔다. 이들은 경찰과 헌병들에게 심사를 받은 후 1950년 7월 1일경 후퇴하던 경찰 또는 국군 제6사단 헌병대에 의해 여주읍 교리 건지미 골짜기(현 낙원주택 인근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총살 현장에서 생존자가 두 명이었다. 그들은 “사람을 먼저 죽인 것은 이쪽”이었다고 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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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이○형 진술녹취록. 2009. 1. 16.

“이런 얘기하긴 그렇지만 사변 터지면서 사람을 먼저 죽인 것은 이쪽이었어요. 경찰에서 철수하기 직전에 보도연맹이라고. (중략) 경찰에서 미리 소집을 하니까 이미 죄를 사했다고 생각한 보도연맹원들이 소집 장소에 갔을 거예요. 그중에 머리가 조금 깨인 자는 더러 도망가기도 했을 거고. 경찰이 철수할 때였어요. 지금 여주대학교 맞은편 모둘기 건지미 골짜기에서 죽였다고. 그때 많이 죽였어요.”


당시 여주경찰서 사찰계 김○○은 여주경찰서가 7월 1일 후퇴했고 국군이 여주지역 한강을 경계로 인민군과 교전하던 중 헌병들이 보도연맹원들을 조사해서 A급을 창고에 가뒀으며 얼마 후 모두 총살했다고 증언했다.

수복 후 시작된 부역혐의자 총살

 여주지역은 1950년 7월 4일 인민군에 점령당했다가 9월 23일경 유엔군에 의해 수복되었다. 이후 여주경찰도 복귀했다. 경찰들은 청사가 국군 수복 초기에 화재로 무너졌기 때문에 여주초등학교(지금의 초등학교) 강당을 청사로 사용했다. 국군이 수복하자 이포국민학교 마당에서 국군환영대회가 열렸다. 일부 주민들은 치안대를 조직하거나 이에 동원돼 경찰의 부족한 치안 활동을 보완했다. 부역혐의를 받고 연행된 주민들은 여주경찰서에 의해 A, B, C 세 등급으로 나뉘어 희생당했다. 이런 희생은 1․4후퇴 직전 시기와 재수복 시기에서도 발생했다.
건지미 골짜기 희생 추정지

건지미 골짜기 희생 추정지(왼쪽에 낙원주택이 있음).

여주 부역혐의 희생 사건 발생 주요 위치도

여주 부역혐의 희생 사건 발생 주요 위치도.

집단 희생된 가남면 여성들

- 가남면 가남지서 뒷산 사건

 국군 수복 직후 가남면에 치안대가 조직돼 부역자에 대한 색출과 연행 활동을 시작했다.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은 치안대원들에 의해 가남지서로 잡혀갔다. 주민들은 지서 앞에 있던 소방장비를 보관하던 5평 정도 크기의 소방서 창고에 갇혔다. 1950년 10월경 소방서 창고에 갇혀 있던 100여 명의 주민들은 주로 치안대에 의해 태평리 공동묘지와 가남지서 뒷산(현 태평터미널 뒤, 태평근린공원 입구) 폭탄 구덩이에서 총살당했다.

사건을 목격한 참고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총으로 무장한 치안대원들이 총살을 위해 주민들을 이송했다. 가남지서 앞 유치창고에서 20여 명이 치안대원들에 의해 끌려 나와 신작로를 따라 지금의 태평버스터미널 뒤로 올라간 후 총살당했다고 한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딸이 총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어느 어머니가 딸의 이름을 부르며 시퍼렇게 자지러졌다고 했다. 태평리 공동묘지에서는 태평리 인민위원장과 주민 8~9명이 치안대원들에게 총살당했다고 한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결과 가남지서 유치장에서 끌려간 주민 중 훈방되거나 풀려나온 주민은 없었고 모두 희생된 것으로 판단했다.
가남지서 뒷산 희생 추정지

가남지서 뒷산 희생 추정지(터미널 뒤 폭탄구덩이 터).

태평리 공동묘지 희생 추정지

태평리 공동묘지 희생 추정지.

좌익세 강했던 금사면… 주민 100여 명 집단총살

- 금사면 옹기정, 계신리 강변(흥천면) 사건

 전쟁 전부터 금사면에선 외평리가 좌익활동이 강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주민들은 농사를 지으면서도 좌익활동을 하던 집안사람들끼리만 품앗이를 했으며, 가담하지 않은 주민들은 품앗이를 해 주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외평리 주민들이 경찰의 감시를 집중적으로 받았고, 경찰서에 끌려가 보도연맹에 가입하라는 압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9․28수복 후 금사면에서 이포지서 산하에 치안대가 조직됐고, 이포지서 옆에 사무실을 두고 활동했다. 이들은 부역혐의를 받아 치안대에게 연행된 주민들을 면사무소 옆에 있던 임시 유치창고와 지서장 사택 지하에 감금했다. 당시 각 마을에서 한두 명씩 다 잡혀 와 있었다. 특히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많았던 외평리 주민들이 많이 잡혀 있었다고 한다. 1950년 10월 10일(음력 8월 29일, 박○득의 제사일) 외평리 박○득은 국군을 환영하러 나갔다가 연행당해 이포지서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금사면 치안대장 최○○는 당시 환영대회장에 있던 박○득에게 “빨갱이 동네에 살았으니까 분홍색 물이라도 들지 않았겠느냐”라며 끌고 갔다. 이포지서 유치장에 감금돼 있던 100여 명의 주민들은 옹기정 뒷산 공동묘지와 금사면에서 여주경찰서로 가는 길목인 흥천면 계신리 강변에서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총살당했다.
흥천면 계신리 강변 희생 추정지

흥천면 계신리 강변 희생 추정지.

금사면 옹기정 뒷산 희생 추정지

금사면 옹기정 뒷산 희생 추정지.

흙구덩이 속으로 사라진 마을 주민들

- 능서면 고령토 구덩이 등 사건

 능서면 매류리에는 일제강점기부터 고령토를 실어 나르기 위해 기차가 다녔고, 기차역 옆에 여주경찰서 매류출장소가 있었다. 국군이 여주지역을 수복하자 매류출장소 옆에 있던 창고가 임시유치장으로 쓰였고,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이 갇혀 있었다. 사건 당시 10살이었던 매류리 주민 고○학은 심부름을 하면서 감옥 모양의 창고에 갇혀 있던 마을주민들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수려선 매류역

여주와 수원을 오가던 수려선의 매류역. @여주시사

 1․4후퇴 직전인 1951년 1월 초순 새벽에 치안대 등이 유치창고에 갇혀 있던 주민들을 끌고 나가 고령토 구덩이에서 총살한 후 구덩이에 유기했다. 고○학은 매류역에서 근무하던 형으로부터 새벽 4~5시경 갇혀 있던 주민들이 모두 끌려가 총살됐다는 말을 들었다. 1960년경 고령토 구덩이가 다시 파였을 때 수십 구에 이르는 유골이 나왔다. 유골은 고령토 구덩이에서 10여m 떨어진 공동묘지에 수습되었다. 고령토 구덩이에서는 황 씨 집안사람들이 많이 희생됐다고 하나 구체적인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다. 능서면 용은리 이○호는 제2국민병 소집에서 돌아온 후 1·4후퇴 직전까지 잡혀 있던 주민들 대부분이 고령토 구덩이에서 죽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전쟁 후 마을로 돌아왔을 때 전쟁 전의 마을주민 상당수를 볼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매류리 고령토 구덩이 희생 추정지

매류리 고령토 구덩이 희생 추정지(지름이 2m 정도임).

매류리 공동묘지 희생 추정지

매류리 공동묘지 희생 추정지(오른쪽이 고령토 구덩이).

 능서면 치안대원들은 조○환 일가족 6명을 총살한 사실이 알려진 후 체포돼 징역 2년 형을 받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1·4후퇴에서 재수복한 뒤 치안대원들이 1951년 2월 18일(음력 1월 31일) 오후 3시경 좌익분자라며 용은리에 피난하던 조○환 일가족 6명(부부와 네 명의 자녀)을 당시 CIC 대원들이 주둔하던 장소로 연행해 감금했다. 같은 날 오후 4시경 능서면 매류리 치안대 사무실로 옮겼고, 치안대원들이 회의를 열어 조○환 일가족을 총살하기로 모의했다. 이들은 조○환 일가족을 총살 장소인 매류리 공동묘지 부근으로 끌고 갔다. 희생자들을 옆으로 일렬로 세운 후 그 후방 약 7m 거리에서 카빈총과 M1 소총으로 희생자 6명에게 집중 사격해 살해했다. 치안대원들은 연행과 총살 과정에서 조○환이 가지고 있던 현금 3만 원과 의류 80만 원어치(구 화폐 단위)를 강탈하기까지 했다. 대법원은 이들의 행위에 대해 “한 명뿐 아니라 조○환 일가족을 일시에 살해한 피고인 등의 범행은 잔학무도한 범행이라 할 것”이라고 했으나 그들이 선고받은 형량은 고작 2년이었다.

항일독립운동가의 뜻이 깃든 대신면

- 대신면 보통리 강변·장풍리 골짜기 사건

 대신면 후포리에서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들은 치안대에 의해 대신면사무소 옆 창고에 감금되었다. 그 수가 남녀 몇백 명이었다고 한다. 1950년 9월 30일경부터 치안대에게 끌려간 주민들이 처형당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이 희생된 곳은 주로 보통리 강변 송장 웅덩이와 장풍리 골짜기였다. 사건 당시 치안대 활동에 동원된 보통리 주민 김○○는 국군 수복 후 부역혐의자들이 연행돼 총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김○○에 따르면 치안대 등이 연행한 주민들을 여주경찰서로 넘긴다고 하면서 끌고 나가 보통리 강변과 장풍리 골짜기에서 총살했다. 하루에 무려 22명까지 총살했다고 한다.
대신면사무소의 옛 모습

대신면사무소의 옛 모습. @여주시사

대신면 보통리 강변 희생 추정지

대신면 보통리 강변 희생 추정지.

대신면 장풍리 골짜기 희생 추정지

대신면 장풍리 골짜기 희생 추정지.

시신 더미에서 이름 적힌 고무신 찾아냈다

- 북내면 버시고개 사건

 국군 수복 후 북내면에서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들은 치안대에 의해 북내지서로 이송돼 조사받은 후 지서 앞 양곡창고에 감금되었다. 1950년 10월 29일경 북내지서 유치장에 갇혀 있던 주민들 중 대부분이 여주읍으로 가는 길목인 북내면 신남리 버시고개에서 희생되었다. 희생자들은 10여 명씩 묶여 버시고개를 넘어가던 중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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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인 차○○ 진술녹취록 2009. 2. 19.

“여기 버시고개라고 그 골짜기에서 다 죽인 걸 내 눈으로 봤어요. 시신들은 파묻은 것이 아니고 청솔가지로 그냥 덮어 놓고 오고 그랬어요. 그래서 거기서 부패해서 썩어가지고 장마가 지면 해골바가지가 신작로 옆 밭으로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그랬어요.”


버시고개 인근마을인 신남리는 총살당하는 주민들의 비명소리로 온 동네가 떠들썩했다고 한다. 버시고개에서 총살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은 연행자의 가족들은 희생 사실을 확인하고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골짜기를 뒤졌다. 골짜기에서 발견한 구덩이에는 시신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가족들은 신원 확인을 위해 시신을 하나씩 들춰내야 했다. 참고인 원○례는 당시 오빠의 시신을 찾다 끝내 못 찾은 사연을 증언했다.

“여주 나가는 데 버시고개라고 있었어요. 거기서 죽였다는 말만 들었지. (중략) 오빠가 외아들이니까 우리 아버지가 시체라도 찾는다고…. 가서 보니까 하도 많아서 못 찾겠더래요. 한 구덩이에다가 몰아넣어서 그걸 파헤치면서 찾는데 못 찾겠더래. 그랬는데 우리 올케가 오빠 고무신 바닥에다가 원○희라고 새긴 그 신짝이 거기 있었대. 그러니까 거기서 죽었다는 게 확실한 거지.”

인근 주민들에 따르면 버시고개에서 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이 일어난 후 많은 유골이 계곡 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렸다고 한다.
북내면 버시고개 골짜기 희생 추정지

북내면 버시고개 골짜기 희생 추정지(고개 왼쪽).

북내면 대왕사 골짜기 희생 추정지

북내면 대왕사 골짜기 희생 추정지.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발견한 아버지

- 여주읍 향교 뒷동산, 하리 강변 사건

 여주읍에 복귀한 여주경찰서는 청사가 소실돼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을 여주국민학교 강당으로 연행하고 조사했다. 부역자 명단은 여주경찰서 사찰계에서 작성했고, 색출과 연행은 대한청년단 출신 치안대의 협력을 받았다. 여주군 각 지서에 갇혀 있던 주민들 일부가 여주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이들이 임시경찰서로 쓰인 여주국민학교 강당과 얼음창고에 갇혀 있는 동안 여주경찰서 사찰계 형사들이 이들을 심사하고 A, B, C 3등급으로 구분했다. 신청인 박○환은 당시 여주국민학교 운동장에 20~30명 정도 되는 주민들이 죄수들처럼 쪼그리고 앉아 있는 사이에서 아버지를 발견했다. 그 둘레에는 10여 명의 치안대가 보초를 서고 있었다.

여주경찰서가 총살을 시작한 것은 1950년 10월 11일부터였다. 그날 총성을 듣고 동생을 찾아 나선 임○규는 수소문 끝에 여주향교 뒷동산 골짜기 방공호에서 머리에 한 발, 가슴에 두 발의 총을 맞은 동생의 시신을 발견했다. 당시 방공호에는 총살당한 20여 구의 시신이 함께 있었다. 교리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전쟁 후에도 향교 뒷동산 성황당 부근에서 흐트러진 유골이 발견됐다고 한다.

하리 강변에서도 총살이 있었다. 참고인 강○옥은 1·4후퇴 직전 여주읍 하리 강변 총살 현장에서 살아 나온 시동생으로부터 당시 상황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능(영릉) 쪽에서 나와 강변 낭떠러지에서 총살이 있었대요. 시동생은 10명씩 묶여 강변 낭떠러지에서 총살을 당해 떨어졌는데 총에 맞지 않아 팔에 묶인 끈을 풀고 도망쳤대요. 맨발로 얼음을 건너서 땅콩밭에 숨어 있다가 집으로 왔다고 합니다.”
여주향교 뒷동산 희생 장소

참고인 박○준이 목격한 여주향교 뒷동산 희생 장소.

여주읍 하리 고려병원 뒤 강변 희생 추정지

여주읍 하리 고려병원 뒤 강변 희생 추정지(양섬, 영릉 입구).

1970년대 지도로 본 여주읍

1970년대 지도로 본 여주읍과 인근 지역. @국토정보맵

부역혐의 받은 사람의 가족까지 희생

 희생자들은 인민군 점령기 면·리 인민위원회 간부이거나 이들에게 협조적이라고 의심을 받은 주민과 그 가족이었다. 이들에게는 전쟁 발발 후 피난 갈 형편이 되지 못했거나 피난 갔다가 돌아와서 인민군 점령기에 어쩔 수 없이 직책을 맡게 된 경우가 많았던 사정이 있었다. 특히 전쟁 전부터 마을에서 면장, 구장, 교사 등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은 인민군이 점령한 후에도 인민군의 압력 아래 하던 일을 계속하게 되어 희생된 경우도 많았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이 사건에 대해 조사한 결과 희생자로 확인·추정된 주민들은 98명이다. 희생 규모와 관련해 치안대원 등 참고인들은 가남면에서 100여 명, 금사면에서 100여 명, 대신면에서 100여 명, 북내면에서 100여 명(내룡리 30여 명 포함), 여주읍에서 200여 명의 주민들이 희생됐다고 진술했다. 희생자의 수가 98명 이상임은 분명하나 구체적인 희생자 수는 확인할 수 없었다.
사건명 여주 부역혐의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여주 부역혐의 희생 사건〉 (1기)
지역 경기도 여주군
사건 발생일 1950년 9월 말부터 1951년 2월까지
진실규명 신청인 박○용 외 2명
진실규명 결정일 2009년 5월 18일
진실규명 대상자 확인된 희생자 김○창 등 68명, 희생추정자 간○운 등 13명
가해주체 국군과 여주경찰서 소속 경찰관과 이들의 지휘를 받은 치안대
결정사안 한국전쟁 당시 1950년 9월 말부터 1951년 2월까지 박○득 외 67명을 포함한 98명 이상의 여주군 주민들이 부역혐의자이거나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국군·여주경찰서와 그 지휘를 받은 치안대에 의해 가남지서 뒷산 등에서 집단희생된 사실에 대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