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최북서부에 위치한 당진군은 북쪽으로는 서해와 아산만에 접하고, 동쪽으로는 삽교천이 경계를 짓는다. 지리적으로 군 전체 면의 3분의 2가 바다에 접하는 특징이 있다. 당진군은 장항선 철도 부설 권역에서 벗어나 오랫동안 교통의 오지였기 때문에 산업화가 늦어 전통적인 농업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실제로 진실규명 대상자들은 면장, 이장, 경찰, 군인 등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었지만 그들의 주요 소득원은 농업이었다.
1950년 7월 12일 인민군이 당진군을 점령했다. 점령 후 인민군은 정치보위국을 중심으로 당진군 내무서-면 분주소-리 자위대가 설치됐고, 정치·사회단체로는 인민위원회, 청년동맹, 농민동맹, 여성동맹 등이 조직됐다. 북한의 남한점령정책의 주요 사업 가운데 하나는 반혁명세력의 숙청이었다. ‘반동분자’ 색출은 정치보위국 산하 치안조직을 중심으로 이뤄졌으며 인민위원회, 농맹, 여맹 등 사회단체들이 이에 가세했다. 숙청의 주요 대상은 지주, 경찰, 공무원 등이었다. 이들에 대한 숙청은 북의 법령을 기준으로 한 면 단위 ‘인민재판’에 의해 주로 이뤄졌으나 ‘즉결처분’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1950년 9월 중순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자 인민군 전선사령부는 후퇴 명령을 내리며 UN군 진주 후 적 진영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활동할 자를 사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당진군에도 정치보위부, 내무서, 분주소를 통해 명령이 하달됐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1950년 9월 28일을 전후로 당진읍, 합덕읍, 우강면, 면천면, 석문면 등에서 희생 사건이 발생했다.
 당진읍에서는 읍내리 공동묘지와 시곡리 야산에서 희생 사건이 발생했다. 먼저 읍내리 공동묘지 사건을 살펴보자. 1950년 7월 26일 남○산은 합덕읍 운산리 자택에서 합덕분주소로 연행됐다가 다시 당진내무서로 이송돼 감금당한 후 1980년 8월 3일 새벽 당진내무서에서 약 1.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공동묘지 동쪽 방향 언덕(현 호서고등학교)으로 끌려가 총살되었다. 남○산의 가족들은 같은 날 사건 소식을 듣고 공동묘지에 가서 시신을 수습했다. 시신 수습 당시 공동묘지에 남○산의 시신이 신원을 알 수 없는 다른 6구의 시신과 함께 줄로 묶여 있었다고 한다.
약 2개월 후인 1950년 9월 27일 밤부터 28일 새벽, 당진내무서 유치장과 창고에 구금돼 있던 사람들은 당진내무서 마당에서 전깃줄로 두 손과 다리가 포박돼 두 명씩 묶여 당진내무서에서 약 1km 거리에 있는 공동묘지 서쪽 방향 계곡(現 목화아파트)으로 끌려갔다. 혼자 걸으면 10분 만에 가는 가까운 거리지만 둘이 묶여서 걸으니 도착하는 데 20분이 걸렸다. 사건이 발생한 공동묘지는 낮은 형태로 일명 밤절고개라고 불렸다. 공동묘지 계곡은 원래는 폭이 약 3m 정도로 물이 흐르는 곳이었으나 사건 발생 당시에는 콩밭이었다. 희생자들은 바로 이 콩밭으로 몰아 넣어져 총살되었다.
조사결과 읍내리 공동묘지 사건의 희생자는 98명이며, 그중 신원이 확인되는 사람은 총 96명이었다. 이들의 직업은 공무원, 면장, 이장, 방위대원, 소방대원, 경찰, 군인, 면서기, 학생, 대한청년단원, 농업 등이었다. 구○영은 잡혀가는 아버지(구○화, 농업, 송악면 면장, 대한청년단장)을 몰래 따라가 당진내무서 창고에 감금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당시 당진내무서 유치장 내 3곳의 방이 잡아 온 사람으로 꽉 차서 부식창고에 감금하기도 했다.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당진내무서에 감금됐을까? 당진내무서 유치장은 45평 크기로 3개의 방이 있었다. 각 방에는 70~80여 명이 빽빽이 감금돼 있었고, 유치장 3개의 방이 모자라 최대 150여 명까지 수용 가능한 10평 규모의 창고 2곳에도 감금돼 있었다고 한다. 즉 유치장 3개의 방에 240여 명과 창고 2곳에 감금된 인원 300여 명을 더한 540여 명이 당진내무서 유치장과 창고에 감금될 수 있는 최대 인원이다. 그러나 540여 명이 모두 읍내리 공동묘지에서 희생됐다고 볼 수는 없다. 9월 27일 밤부터 28일 새벽 사이 한 번에 60~70여 명씩 3차례 총살이 있었다는 참고인들의 진술에 비춰볼 때 전체 희생 규모는 180여 명에서 최대 210여 명으로 추산된다. 희생자들은 모두 총살됐고, 총살 이후에 죽창으로 확인 살해해 총소리와 비명이 인근 지역에까지 들릴 만큼 컸다고 한다.
1950년 8월 3일 공동묘지 사건 희생자의 감금 장소와 희생 장소(동쪽 방향 언덕).
1950년 9월 27~28일 공동묘지 사건 희생자의 감금 장소와 희생 장소(서쪽 방향 계곡).
 9월 28일 새벽 공동묘지에서 집단 총살이 있고 난 뒤 시간이 지나 밤이 찾아왔다. 당진읍 시곡리 야산에서 또 하나의 희생 사건이 발생했다. 송악면 기지시리 송악분주소에 감금돼 있던 희생자들은 28일 밤, 양손을 등 뒤로 해서 철사에 묶인 상태로 송악면 기지시리 입구의 도로 건너편에 있는 당진읍 시곡리 야산 골짜기로 연행돼 그곳에서 희생되었다. 희생자의 가족들은 이튿날 29일 사건 발생 소식을 듣고 현장에 가서 시곡리 야산 골짜기 아랫부분의 구덩이에 쌓여 있는 희생자의 시신을 수습했다. 시신을 직접 수습하거나 목격한 신청인과 참고인의 증언에 따르면 시곡리 야산에 약 16~20구의 시신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희생 규모는 약 20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희생자들은 총살되거나 구타와 죽창·쇠창 등에 찔려 희생됐고, 이로 인해 당시 시신이 심하게 부어 있었다고 한다.
당진읍 시곡리 야산 사건 희생자의 감금 장소와 희생 장소.
 석문면에서도 희생 사건이 발생했다. 석문면 통정리 석문분주소와 양조장에 감금돼 있던 희생자들은 9월 28일 밤 두 손을 몸 뒤로 해서 줄에 묶인 채 다시 일렬로 다른 희생자들과 한 줄로 묶여 석문분주소와 양조장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노학산 방공호로 연행돼 그곳에서 희생되었다. 몇몇 생존자들은 가족으로부터 건네받은 칼로 줄을 끊고 바다로 도망쳤다.
희생자의 가족들은 9월 29일 소식을 듣고 노학산 끝자락에 파여 있는 방공호에서 흙으로 덮여 있는 희생자의 시신을 수습했다. 현장조사를 통해 확인한 방공호의 크기는 깊이 1m, 직경 50cm 정도의 교통호와 교통호 사이에 파여 있는, 깊이 1m 50cm, 직경 1m 정도였다. 증언에 따르면 희생자의 시신을 수습할 당시 노학산 방공호와 그 부근에 약 20구의 시신이 있었다고 한다. 희생자들은 모두 총살되거나 구타와 죽창·쇠창에 찔려 희생되었다.
석문면 동정리 노학산 사건 희생자의 감금 장소와 희생 장소.
 합덕읍에서 발생한 사건은 2건으로 진실규명대상자 장○영과 이○명이 희생되었다. 1950년 9월 중순경 합덕읍 성동리 성동산 성동절터에서 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거주하던 장○영(면서기, 대한청년단 예산지부 감찰부장)이 죽창에 찔려 희생되었다. 당시 시신의 목이 끈에 졸려 있고, 구타당하고 창에 찔린 상처가 많았으며, 시신이 부패해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가 입었던 적삼 한복을 보고 겨우 알아봤다고 한다.
이○명(대한청년단 단원)은 1950년 9월 20일경 송악면 봉교리 자택에서 지방좌익에게 연행돼 당진내무서에 감금됐다가 합덕읍 구양교로 끌려가 바다 아래에 수장됐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이○명의 희생일과 장소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시신도 수습되지 않았다. 가족들도 희생일을 정확히 알지 못해 제사도 임의로 정한 날짜에 지낸다.
 신평면 신송리에 거주하던 진실규명대상자 유○준(신송리 이장)은 거산리 야산에서 희생되었다. 유○준은 자택에서 좌익세력에 의한 연행을 피하려 인근 논으로 피신했다가 이후 열흘이 지난 1950년 10월 2일경 신평면 거산리에 있는 야산에서 온몸에 타박상을 입고, 혁띠로 목이 매여진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신평면 거산리 야산은 신송리에서 남원천을 가로질러 4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곳으로, 유○준의 자택에서는 걸어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다. 유○준의 시신을 수습할 당시 사건 발생 현장에 다른 시신은 없었다고 한다.
정치보위부원과 지방좌익이 학살 주도
 당진군에서 벌어진 학살의 가해자는 누구일까? 여러 증언에 따르면 인민군은 관여하지 았았다고 한다. 희생자들은 자택에 찾아온 지방좌익에게 붙들려 당진내무서 혹은 각 읍·면 분주소로 연행되었다. 희생 사건에는 정치보위부원이 관여한 점이 발견된다. 읍내리 공동묘지 사건의 희생자들은 모두 총살됐다. 당시 총기 지급이 제한적이었던 지방좌익과 달리 정치보위부원은 총을 휴대했으며, 희생 장소에 미리 도열해 있던 사람들의 복장에서도 정치보위부원이 공동묘지 희생 사건에 가담했음을 알 수 있다. 참고인 증언에 따르면 가해자들이 인민군 군복이 아닌 정치보위부원이 입는 빨간색 줄무늬가 있는 바지를 착용했다고 진술했다. 총기는 지방좌익 간부에게만 권총을 선별적으로 지급한다고 진술했다.
희생자들은 그들의 경제적 지위와 우익활동 경력 등으로 인해 희생되었다. 희생자들은 모두 남자였고, 나이는 20~50대였다. 이들은 주로 농업이나 어업에 종사했다. 그 외에 공무원, 군인, 경찰, 향토방위대원, 소방대원 등이었다. 그 밖에 면장, 이장, 대한청년단원 등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편에 속하는 지역유지급 인사였다.
| 사건명 |
당진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 |
| 조사보고서 |
진실화해위원회 〈당진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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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사보고서 |
충남 당진・보령・청양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1) (2024년 4월 16일)
충남 당진・보령・청양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2) (2024년 5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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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 |
충남 당진 |
| 사건 발생일 |
1950년 8월부터 9월까지 |
| 진실규명 신청인 |
구○용 외 24명 |
| 진실규명 결정일 |
2008년 6월 23일 |
| 진실규명 대상자 |
희생 규모는 최소 98명에서 최대 210명이며 진실규명 대상자 중 이 사건 희생자로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구○화 등 14명, 미신청인 중 신원 확인된 사람은 강○영 등 84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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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주체 |
인민군 정치보위부원, 지방좌익 |
| 결정사안 |
1950년 8~9월 충남 당진군 읍내리 공동묘지와 읍내리 시곡리 야산, 석문면 통정리 노학산, 합덕읍 성동리 성동산과 구양교, 신평면 거산리 야산 등에서 적대세력에 의해 구○화 등 25인이 희생당했다며 진실규명을 요청한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으로 결정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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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진실 그리고 화해 시즌4 _19회] 오랜 침묵에 가려진 학살의 역사 - 당진 민간인 희생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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